공란에 대한 검색 결과
Rhoze by Wes Ball SF, Action / UK / 2021 / 145min / 12+ 인간의 머릿속보다 복잡한 미로는 없다. 제우스 ■■ ■■■■는 글레이드에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러너가 되었고, (겁에 질린 러너들이 미로 안으로 진입하는 걸 거부했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그는 언제가 되었든 결국 본인이 미로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확신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결국 맥락은 같다. 그리버의 독으로 사경을 헤매며 뉴런과 시냅스를 건너고 뛰어넘고 탐사하는 행위. 그는 현실의 수백 배에 달하는 속도로 지도를 그려나간다. 녹빛 핏줄이 돋아난 자신에게 해독제를 놓고 기다릴 로단테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으나, 고지식한 면이 있는 그로서는 목숨을 거는 행동을 쉽게 납득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수색해야 할 기억이 있다며 시간을 들여 설득하는 것보다는 저지르고 달래는 게 낫다. 밤이 되어도 미로는 닫히지 않았다. 머뭇거린다면 모두가 뱃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 “어서 뛰어!” 또?! 직전의 기억이었다. 제우스와 로단테는 죽은 그리버의 몸에서 찾아낸 의미 모를 기계를 들고 미로 안쪽으로 향했다. 길을 찾았다는 환희와 의심도 잠시, 붉은 선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미로가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턴으로 움직여 두 사람을 가두려는 벽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정신없이 빠져나간다. “달려! 계속!” 러너팀의 베테랑인 로단테는 제우스보다 훨씬 민첩했다. 본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로단테를 보고 신체적 능력이라면 뒤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러너라는 이름을 달고 매일같이 달리고 달리던 사람과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었나 보다.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인다. 기적처럼 벽이 막히기 직전 뛰어들어 몸을 굴렸다. 땅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면 옆으로 다가온 로단테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 구멍 뭐였을까?” “흠, 그리버가 새끼 치는 둥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그래. ……그게 바로 나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 가능성밖에 없다.” “평생 여기서 살게 둘 건 아니란 건가.” “그래서 나를 보냈겠지?” “수상하게 말하는 것 좀 그만해. 진짜 기억나는 과거 있는 거 아냐?” “애석하게도, 없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숨을 돌리고, 제우스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키득거린 로단테가 팔을 뻗어 스트레칭한다. “슬슬 돌아가자. 애들에게 알려줄 소식이 생겼네.” “이봐, 믿지 않는 놈들이 있다면 어쩔 거지? 이 미로 안의 생활에 익숙해진 녀석들 말이야.” 출발하기 전 물병을 끝까지 비운 로단테가 입을 다물었다. 글레이드를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의견이 세를 불린 건 그 역시 알았다. 신참인 제우스가 몰고 온 바람과 변화를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설득해서라도 함께 가야지.” “안 될걸.” “조용히 해.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잖아. 두고 갈 수는 없어. 이곳은 집이 아니야.” 고집스러운 입매가 일자로 다물린다. 로단테는 꼭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이곳은 집이 될 수 없어.” 더 과거로. … “자, 이게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미로야. 모든 곳을 수색했고 구석구석을 전부 알고 있어. 출구 같은 건 없었어.” 하얀 천을 걷어내면 보이는, 출입금지 구역에 만들어놓은 장대한 모형. 제우스는 작은 미로의 위용에 휘파람을 불었다. 문제를 주어놓고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니. 비참한 현실을 소수만 알고 있는 채로 숨긴 건 훌륭한 결론이라고 여겼다. 멋진 리더들이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그래, 덕분에 그리버를 하나 죽였으니까.” “네 덕분이지. 어디가 움직이고 닫히는지 난 몰랐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같이 한 거라고 해.” “고집은.” “다음에도 같이 들어가려면…… 자, 이제 공부할 시간이야. 제우스.” 최근 일련의 사태로 풀어질 날이 없었던 앳된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린다. 비로소 그 나이로 보이는 로단테는 즐거워 보였다. 본인이 몇 살이었는지 기억하는 자는 글레이드에 없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자. “머리 좋다던데? 30분 줄게.” “하.” 제우스가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마주한 로단테와 닮은 웃음이었다. “30분까지 안 필요해.” 과거의 기억으로, 더 깊숙하게 파고든다. … “미쳤어?! 왜 네가 여길 들어와!” “하나보다는 둘이 더 잘 살아남지 않겠나?” “잘하는 짓이다. 둘이 아니라 셋이 죽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살아남을 생각이잖아. 제우스는 덩굴을 얽어 쓰러진 러너의 몸을 묶으며 중얼거린다. 이를 악문 로단테는 손을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없어. 그리버들이 곧 올 거야. “나도 죽을 생각은 없다.” “자살 시도랑 다를 게 없거든?” “왜 그렇게 화를 내지? 우리 만난 지 며칠 안 됐다.” “왜 따라 들어왔어? 우리 만난 지 며칠 안 됐는데.” “한 방 먹었군.” 맥없이 흔들리는 몸을 허공에 매달아둔 두 사람은 줄의 끝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했다. 벌레의 다리가 움직이는 소리, 끈적한 초록 액체가 (아마 침이겠지. 제우스는 저 괴생명체의 창조주는 미친 취향의 소유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주륵 떨어지고 뭉개지는 소리, 로단테의 외침. “달려!” “왼쪽!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제우스는 혀를 움직여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움직였다. 강하게 땅을 박차고 내디딜 때마다 서늘한 밤의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가뜩이나 시야가 어두웠는데, 회색 빌딩 숲과 복잡하게 꼬인 골목을 지나는 것처럼 혼잡했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그리버가 끔찍하게 갈린 입을 열고 숨을 내뱉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내리누르며 미친 듯이 미로를 뚫고 나간다. 동이 트기 전까지는 얼마나 긴 시간이 남았지? 목에 와 닿는 숨결에 죽음의 공포가 벌레처럼 기어올라와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럼에도 죽지 않을 각오가 바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법 즐거웠다. 웃기는 일이지. “그래서 너 진짜 왜 들어왔는데!?” “몰라.” 어차피 미로 안에 들어가려 했으니까, 네 신뢰를 얻기 위해서, 러너가 되기 위한 스텝의 일종으로, 위기는 곧 기회와 마찬가지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몇 가지 이유가 연이어 뇌리를 스쳤으나 솔직하게 대답해주진 않을 생각이다. “너한테 반하기라도 했나 보지.” “…… 아! 진짜 헛소리하네!” … 이른 새벽,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단단히 틀어올려 묶은 러너팀 팀장이 제우스를 불렀다. 쉿, 검지를 코앞에 대고 주의를 준 로단테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눈짓한다. 벽에 이름을 새기는 절차를 밟기 위해서다. 아찔하게 높은 미로 바깥쪽 벽은 수십 명의 이름이 적히고 지워진 흔적이 가득했다. 제우스는 꾹 눌려 일자로 패인 이름에 대해 소리 내어 묻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았다. 이름을 쓴 이와 이름을 지운 이는 각기 다른 사람이었을 거란 사실을. 제우스는 작은 칼을 들어 무른 돌을 파기 시작했다. 몇 번의 직선을 긋자 형태는 수월하게 만들어진다. 유피테르가 아니라 제우스라서 참 다행이지? 이런 지식은 어디에서 쌓아서 남아있는 걸까. 과거에 대해서라면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데도. 아, 알파벳 네 자 빼고. “Rhodanthe라니 이름을 적을 때 꽤나 고생했겠어.” “Zeus는 짧아서 새기기 쉽겠네. 벌써 다 했잖아?” “지우기도 쉬울 테지.” “그런 말 할래?” “아하하.” 대수롭게 않게 웃은 제우스는 칼을 돌려주지 않고 주머니에 넣는다. 로단테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본래 넘겨줄 마음이었는지. 미로 안에서 생활하려면 적당한 도구 정도야 있어야겠지. 제우스는 그렇게 여기면서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지?” “3년. 꽤 초창기에 왔어. 맨 처음은 다른 사람이지만.” “그렇다면 최초의 글레이더는 한 달 동안 혼자 버틴 건가?” “그래. 대단하지?” 제우스는 차분하게 눈을 깜빡인다. 첫 번째 소년의 대단함보다 다른 진실을 먼저 인식한다. “골라냈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무슨 말이야?” “우리를 여기 넣은 자들이, 스너프를 보며 ─오, 난 이 용어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군.─ 인간의 죽음을 관찰하고 관음하는 변태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이곳을 조금 더 둘러볼 심산이었다. 텅 비어 먼지 찌끄레기만 남은 뇌를 차곡차곡 채워넣고 싶었다. 로단테는 끝맺지 못한 대화에 흥미를 느꼈는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제우스를 뒤따랐다. “첫 번째…… 로 박스에 올려보낼 자는 정성을 다해 골랐을 거다.” “합리적인 가설이지만, 미로를 헤매는 걸 보고 뭘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거야 알아내야지. 뭐, 나라면 그랬을 거란 뜻이야.” “너는 뭐랄까, 관찰하는 쪽에 더 익숙해 보이네.” “그래 보여?” “기억을 잃기 전에는 뭘 했을지 궁금해져.” “음, 관찰.” 이것도 아냐. … 떠들썩한 분위기, 글레이더 전원이 한자리에 모인 축제다. 한 달에 한 번 박스가 올라오면 새로운 보급품을 털어 신입을 환영하는 행위였다.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의 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년은 키가 크고 뼈대가 탄탄했으며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두뇌를 가졌다. 그는 겁에 질린 척 박스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접근한 아이를 휘어잡고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글레이드에 적응하고 나자 능청스러운 화술로 반감을 누르고 어깨동무를 하는 탁월한 사교성까지 보였으니 능력이 두루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농사를 잘할 것 같은데. 치료 기구도 잘 만질 것 같지 않아? 팔뚝을 봐, 딱 건축팀 체질이라고. 너넨 머리를 안 쓰잖아.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토론을 막아 세우는 것처럼, 또렷한 음성이 공터를 울렸다. 기쁨에 찬 기색을 숨기지 않는 밝은 목소리. “제우스, 기억났어. 내 이름은 제우스다!” “거창하잖아? 신참.” 러너는 어때? 로단테, 네 생각은?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이지. 그 이전, 이전으로. 어서… 박스를 타고 오르기 전으로. 과연 나는 누구였는가. 무엇을 했는가.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인가. 제우스는 미로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 “나는 그들의 일원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제우스가 중얼거렸다. 로단테가 물잔을 건넸다. 붉어진 눈동자를 보니 제대로 잠을 자지 않은 모양이다. 글레이드가 그리버로 온통 엉망이 되었으니 원인이라 지목해 구덩이에라도 가둬놓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평판이 예상보다 더 괜찮았거나, 환자를 가둔다니 제정신이냐고 로단테가 항의라도 한 게 분명했다. “……무슨 뜻이야?” “알고 있잖아.” 나는 너희들을 이곳에 보낸 자와 함께 일했다. 오랫동안 너를 관찰하고 있었어. 아니, 한 달에 한 명씩 사라지는 모든 아이들을……. 계속해서 지켜봤어. 시련을 주고, 시험하고, 실험하면서. 네 반대편에 서서. 제우스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각난 말들은 오직 필요한 정보만 담아 로단테의 앞에 흩어졌다. “미로에 오기 전의 우리는 모두 지워졌어. 네 과거도 마찬가지야. 그건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어.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지.” 어쩌면 제우스 칼리스타는 로단테가 그렇게 말해주는 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과거는 상관없다고, 같이 미로를 빠져나가자고. 그가 추측한 로단테의 성정이라면,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테니까. 로단테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와 마주한다. “그 모든 게 너 때문인 거라면, 지금 네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하잖아.” “……알고 있어.” 그러고 나면 로단테는 조금 다른 게 궁금해진다. “우리는 함께 있었어? 원래부터, 과거에 말이야.”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도 함께 있을 거야? 지금부터, 미래에.” 두 번째 대답을 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
The Eternal Track by Bong Joon-ho Distopia / UK / 2013 / 125min / 15+ ▶ Station. Ekaterina Bridge “세실리아, 대단한걸.” 그는 전투 인원을 세실리아라고 불렀고, “야, 뒤로 빠져있어.” 세실리아는 그를 ‘야’라고 불렀다. 묵직한 손도끼가 날아와 무장한 남자의 머리에 박혔다. 쩌적. 그는 알고 세실리아는 모르는 수박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일격에 사람의 머리를 쪼갠 건 충동적이거나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다. 신중하고 과감한 몸짓이었다. 이쪽으로 겨누어진 건 잘 다듬어진 총이었고, 상대에게 날릴 수 있는 건 도끼나 잭나이프 따위의 투박한 무기가 전부지만 판이 어디로 기울어졌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꼬리 칸에서 일어난 항쟁은 선두 그룹이 대승하여 남은 잔당들을 겨우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느리거나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정도나 몇몇 남아있었다. 처리는 간단했다. 그건 세실리아가 우수한 전투 인원이기도 했고, 아티스가 머리칸의 고급인력이라는 걸 적군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손을 비비며 생명을 구걸하는 병사들의 목을 세 개 정도 수확하자 기차 칸은 금방 고요해졌다. 통제할 수 없다면 외면한다. 머리는 꼬리를 잘라내며 나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 열차는 그런 식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사실. 데굴데굴, 세실리아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물론 진짜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기도 했다. 다행히 세실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티스는 개의치 않고 가운 소맷자락에 튄 핏방울을 마구 문질렀다. 더러워졌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널 두고 갈지 말지 고민을 좀 해야겠어.” 세실리아가 적에게 뽑은 나이프를 닦으며 대꾸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아티스가 펄쩍 뛰었다. 세실리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전진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아티스가 냅다 그의 등에 매달렸다. 이거 놔라. 쇠파리라도 달라붙은 양손을 휘저었지만, 굳이 잡아떼진 않았다. 세실리아의 투박한 손바닥이 아티스의 팔을 잡아당기면 하얀 옷에 피며 검댕이며 온갖 더러운 것이 묻어났다. 더러운 자취에 역으로 인상 쓰게 되는 건 세실리아였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아까는 더럽다며?” “가운이 더러워지는 게 싫은 거지, 네가 싫은 게 아냐.” “…….” 새하얀 가운을 걸친 아티스가 감옥 칸 맨 아래에서 발견됐을 때, 모두가 시한폭탄을 발견한 듯 떠넘기기 바빴다. 온갖 악취를 풍기는 꼬리 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가슴팍에 달린 연구원 명찰이 명징했다. 세실리아의 의견도 꼬리 칸의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위험인물 감시라는 핑계가 붙었다. 일대일로 아티스를 담당해 달란 지시가 떨어졌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죽여라, 말에 숨은 의미는 간단했다. 그게 고작 다섯 시간 전의 일이다. 입을 열면 말꼬리를 잡기 바빴고, 입을 다물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 추궁하기 시작했다. 세실리아가 아티스를 협박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에는 5분, 적당한 말로 구슬리는 것이 초등학생보다 쉽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40분이 걸렸다. 머리와 꼬리. 태생부터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니, 어차피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티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평행선도 조금만 기울어져도 언젠간 만나는데, 너랑 내가 만났잖아? 그렇게 아티스는 조금씩 몸을 기울였다. 접점이 생겨나자 뻗어나가긴 금방이었다. “지금 감동했지?” “조금?” “…왜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지?” 태생에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성질머리, 미친놈, 꼬리 칸의 단합과 결속을 깨는 골칫덩이, 좀벌레, 그를 부르는 별칭은 많았지만, 성질은 무쇠와 같아 본인의 부당한 일에도 동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감옥 칸에 격리당한 아티스는 머리의 불순물임이 분명했다. 꼬리의 불순물, 세실리아는 이제 와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면 그 쇳덩이 같은 마음도 따라 기울게 된다. 아티스는 조금은 꼬리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바닥과 꼭대기의 삶을 살던 둘이 여기까지 동행한 건 어떤 인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거라고. 부외자가 부외자를 바라본다. 세실리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어보기로 한다. 사람과 사이의 연쇄를. “있잖아.” “……뭔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다음-다음-다음 칸까지 동행해 주라.” “거기가 어딘데?”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뭔진 비밀이야! 팔을 감은 채로 몸을 들썩이며 그가 웃었다. 동시에 세실리아도 작게 웃었다. 본 적 없는 온실의 푸름에 눈이 부셨다. 선명한 흰 빛이 안구를 쿡쿡 찔렀다. 이게 수박이야, 아티스는 태연하게 말하며 온실 구석에서 둥근 야채를 굴려 가져 왔다. 이어 허리춤에 매달린 세실리아의 손도끼를 낚아채 반으로 쪼갰는데, 그 자세가 허술하기 그지없어 결국 세실리아의 일거리가 됐다. 새빨간 과즙이 사방으로 튀고, 달큰한 향이 물기를 머금은 흙내와 뒤섞였다. 잘 익은 수박은 꼬리 칸에서 태어나 나고 자란 세실리아의 입에는 너무 달았다. 한 번 먹어본 걸로 족해, 세실리아가 시큰둥하게 읊었다. 질세라 앞으로 너 줄 일은 없을 거야, 하고 아티스가 대꾸했다. 세실리아는 토라진 아티스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평균적으로 열차 두 량을 지나면 알아서 화가 풀렸기 때문이다. 단정한 원목으로 쭉 늘어진 스시바는 텅 비어있었다. 아저씨가 어디로 가셨지? 안 보이네. 원래 스시는 일 년에 딱 두 번만 먹을 수 있는데, 난 수석 연구원이기 때문에 만들어달라고 하면 다 만들어주셔. 이 앞의 아쿠아리움에 있는 물고기 중에서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건 없거든……. 아티스의 설명이 방대했다. 다락방에 아껴놓은 장난감을 꺼내어 친구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열차에 다락은 없었고, 세실리아의 감상은 간단했다. 너 되게 태평하네. “이게 다야?” “꼬리 칸에서 나고 자랐다면서?” “그런데.” “좀 더 놀라거나 호들갑 떨 줄 알았지. 목각 인형처럼 반응이 그게 뭐야?” 이때다 싶어 아티스가 마구 핀잔을 줬지만, 세실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은 노골적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이 되려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년의 표정 같았다. 처음 접하는 신문물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 천성이 못 된 거다. 아니면 꼬리 칸의 구석에서 지내느라 감수성이 메말라 버렸거나. 빙글빙글, 바닥에 박힌 채로 회전하는 의자에 앉아있던 아티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네, 늦겠어. 곧바로 몸을 굽히더니 다음 칸으로 시계 토끼처럼 튀어 나갔다. 그새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소년이 뒤따라갔다. 앞서 말한 다음-다음-다음 칸의 벽에는 작은 철문이 딸려있었다. 아티스는 제 방인 양 철문으로 쏙 들어갔다. 세실리아도 그 뒤를 따랐다.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방에 난 작은 창문 너머로 하얀 해파리가 유영하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꼬리만 보고 있자니 차차 현실과 유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태평한 풍경인 건 마찬가지였다. 세실리아는 뒤늦게, 수족관은 뒷전으로 하고서 아티스를 바라봤다. 요구는 뻔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여긴 뭔데?” “방공호라고 해야 하나.” 구석에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아티스가 허리를 폈다. 탕. 곧바로 금색 라이터의 고개를 꺾고 벽에 튀어나온 도화선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실리아가 다급하게 아티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화약에 절은 도화선의 불을 끄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 방금 뭘 한 거야?” “불을 붙였어.” “……불?” “이 칸 너머 폭탄에!” 아니 그게, 요즘 따라 수족관 수위가 미묘하게 낮아지고 있는 거 있지?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살펴보니까, 그게 말이지! 수족관 뒤편, 이렇게 비밀 벙커가 있더라. 여기서 수족관의 물을 야금야금 빼내어 암암리에 팔고 있었던 거야. 실은 얼마 전부터 기차의 정수 장치에 이상이 생겼거든. 한정된 자원 때문에 생기는 불안한 심리를 이용한 장사질이라고 할까. 정말 고귀한 윗분들 자식은 얼음이 녹아 눈이 된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도 모르더라니까. 응? 당연하잖아. 머리에서도 서열이 있어. 자산이나 힘이 없는 녀석은 자연스럽게 얕보이게 되니까……. …알 게 뭐야. 결국 중요한 건, 여기서도 사람을 죽이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거야. 틈만 나면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안달이지. 앞선 동료들을 봐. 널 조금도 찾지 않잖아. 동질감이고 뭐고 이제 질린 거야. 진정 인간답게 살려면 이 세계를 벗어나야 해. 낙오자, 쓰레기, 남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은 다 거꾸러져 죽어버리라지. 평생 머리 칸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거란 오만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말인데, 이 공간을 발견하고 나니까 곧바로 연쇄와 굴레를 끊는 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때, 멋지지? 그제서야 크로놀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건 명백히 칭찬을 바라는 눈치였다. “어때? 이건 좀 놀랄만 해?” “너…….” “아깝다, 널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뜸 들일 필요도 없었는데.” 두 개의 평행선이 겹치면 세계가 전복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세실리아가 접한 세계는 한없이 좁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아티스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시도하는 실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학자의 표정이었다. 얼기설기 종이로 꼬아 만든 도화선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불티는 수족관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일초가 억겁의 시간 같았다. 세실리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아티스를 바라봤다. 아티스는 그 얼굴을 놀리는 대신 부드럽게 어루만지길 택했다. “해피 뉴 이어.” 굉음의 축포와 함께 새해가 밝는다. 기차가 발을 구른다.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 Station. Fucking Long Tunnel S#1 아딜은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 이야기는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에도 쓰지 않을 식상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원인이 배곯음인지 배앓이인지 모를,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긴 울음이 그날따라 송곳처럼 집요하게 관자놀이를 쑤셔댔다. 제 몫의 단백질 블록을 옆칸 침대로 밀어 넣은 아딜은 “고마워.” 사만다의 낡고 지친 감사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꼬리칸에서는 누구나 삶이 버거웠다. 산모는 먹은 것이 없어 나오지 않는 젖을 쥐어짜야 했고, 갓 태어난 아이 또한 먹은 것이 없어 나오지 않는 울음을 쥐어짜야 했다. 트레인 베이비, 그것도 하필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의 운명은 나면서부터 불행하기로 결정된 종류의 것이었다. 아기 울음을 피해 일어섰지만, 꼬리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기차 내부는 살얼음이 낄 만큼 추웠고, 낡은 옷가지를 껴입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악취를 풍기며 퀭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아딜은 우울한 얼굴로 얼어붙은 차창에 비친 제 그림자를 살폈다. 이제 겨우 열일곱, 덜 자란 몸은 제대로 먹지 못해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졌고, 햇볕을 받지 못한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설국열차와 동갑내기로 태어나 불행이 낙인찍힌 꼴이었다. 그러나 아딜은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우울할 줄도 몰랐다. 그가 본 모든 사람은 -가끔 찾아오는 메디슨 총리나 완전 무장한 군인을 제외하고- 다 이렇게 생겼으니까. 눈가에 묻은 우울은 피곤하고 배가 고픈 탓이었지, 외모를 향한 비관 때문은 아니었다. “안녕.”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딜은 차창을 통해 눈이 마주친 남자를 믿을 수 없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나 몇 번이고 시야를 고쳐봐도 그는 사라지긴커녕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낡았지만 단정한 차림새, 모양새가 잘 잡힌 뼈대와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큰 키. 꼬리칸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길리엄의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라 아딜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귓가가 욱신거릴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을 처음 본 탓인지……. 혼란에 빠진 아딜이 수선스럽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런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지만- 보다 못한 길리엄이 하나 남은 손으로 아딜을 불러들였다. “이리 와라, 아딜. 여기는 나디아야. 이 꼬리칸에는 무척 드물게도 ‘새로운’ 사람이지.” “어떻게……?”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았다. 스위던의 기차가 17바퀴를 달리는 동안 기차 바깥의 인류가 꽁꽁 얼어 죽어 멸종했다는 것은 세 살배기도 아는 사실이었다. 바깥 사람이 아니라면 앞칸 사람이라는 이야기겠지만, 이 기차 안에서는 그게 더 이상했다. 앞칸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감옥칸에 수감된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꼬리칸으로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꼬리칸은 감옥 따위가 아니라 쓰레기장에 가까웠으니까. ……하물며 꼬리칸에 떨어졌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다. 눈물 흔적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쉿, 목소리를 낮추렴. 그래. 바로 ‘머리칸’에서 온 손님이야. 17주년을 맞아 꼬리칸의 인구 조사를 위해 들렀다는구나. 시간이 남는다면 네 위 침대로 데려다 주렴. 머무는 동안 안내를 도와주면 더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자꾸나. 알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길리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딜에게 당부했다. 늙은 주름이 팬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딜은 노인의 신호를 잘 알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인구 조사라니, 미스터 스위던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좋지 않은 징조였다. 꼬리칸의 혁명가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준비한 것’을 들켰다간 4년간의 계획이 수포가 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가를 비롯한 꼬리칸 전원의 목숨이 위태롭겠지. 길리엄이 아딜을 고른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타고나기를 선한 녀석이니 꼬리칸을 위험하게 만들 바에는 제가 죽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인이 의도한 바를 이해한 아딜은 미적거리면서도 나디아의 앞으로 나섰다. “나디아……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릴이라고 불러.” “네?” “난 딜이라고 불러도 되지?” “어……. 네, 넵.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거리감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앞서 걸으면서도 긴장을 놓지 못해 움직이는 팔다리가 뻣뻣했다. 나디아가 머리칸의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더러운 침대로 안내하면서, 아딜은 난생 처음 꼬리칸의 모든 풍경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았다. S#2 (더러운 침대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언제부터 꼬리칸에 있었어?” “태어났을 때부터요. 트레인 베이비거든요.” “나랑 동갑인 건가.” “……정말요?” “왜, 안 믿겨?” “그, 그렇다기보다는……. 아직 어린데도 대단하시다 싶어서요.” “하하, 별 거 아닌데. 꼬리칸에서 사는 건 힘들지 않아? 별로 자라지를 못했네.”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행인걸요. 그럼 나디아 씨도, 아니, 릴도 기차에서 태어난 건가요?” “태어나긴 바깥에서. 걸어 다니기도 전에 기차에 탔다던가……. 뭐, 그런 느낌.” S#3 (아딜, 배식이 끝나고, 빈손으로 서 있다.) “또 안 먹었어?” “아, 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사만다였나. 꽤 친절하게 구네. 좋아하기라도 해?” “켁, 켁…….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맛대가리가 없긴 하지만, 굶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사만다는 아이가 있잖아요. 두 명분을 먹어야 하니까……. 허기는 익숙해서 참을 만해요.” “그러니까 말랐지.” “별로……. 여기는 다 그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S#4 (나디아와 아딜, 보폭을 맞춰 꼬리칸을 걷고 있다.) “갑자기 인구 조사는 왜 하는 걸까요?” “글쎄. 꼬리칸의 처우를 이제라도 개선할 마음이 들었나.” “미스터 스위던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확신하는 투네. 왜?” “불필요하니까요.” “사람이 모든 일을 필요에 의해 하는 건 아니지.” “지난 17년간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음.” “거봐요, 릴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뭐, 가끔 머리칸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있기는 하잖아. 비관적이긴.” “그건 특출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일단 전 아니에요.” “나는 어때.” “네?” “나랑 만난 것도 인연이고, 어찌 보면 네가 잡은 기회 아닌가.” “그게 무슨…….”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보는 건 어때.” “어떻게 그래요. 곤란해지실 게 뻔한데요.” “아직 거절하지도 않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왜?”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겁이 많아.” “아하하,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S#4 (설국열차, 예카테리나 다리를 지난다. 곧 터널이 시작된다.) “슬슬 이별할 시간이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아쉬워?” “네…….” “흠.” “어쩌면, 그러니까 아주 운이 좋으면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안 된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모든 사람과 헤어질 때 이렇게 구는 건 아니지?” “네?” “농담이야.” S#5 열차가 순식간에 터널로 뛰어들었다. 1년이 꼬박 지나도록 달리 먹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 뱃속은 온통 캄캄했다. 게다가 빌어먹게도 길어서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해피 뉴이어!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린 어둠 속에서 꼬리칸의 사람들도 우울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디아가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얼굴과 얼굴이 퍽 가까워졌다. 코끝이 스칠 것처럼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아딜은 긴장으로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술을 깨물었다. 숨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봤어.” “……릴?” “너는 나를……. 항상 ‘그런 눈’으로 보니까.”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요. 너무 시끄러워서…….” “그때도, 지금도. 취향이 한결 같네.” “바깥으로 나갈까요?” “여전히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는 못 먹는 모양이고.” “제 목소리 안 들려요?” “손해 보고, 우울하고, 얌전하게…….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쯤 되자 아딜은 더 이상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물어봐야겠다. 쉽게 결론을 내리고 귀를 기울이는 대신 뒤를 돌아봤다. 시궁창 같은 인생인 주제에, 꼬리칸 사람들도 새해를 축하하느라 성화였다. 덕분에 침실 칸은 오히려 비어있었다. 곁눈질로 빈 공간을 확인한 아딜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나디아는 발을 떼지 않았다. 끌려가는 척 다가가 지저분한 뺨에 입술을 눌렀을 뿐이다. 놀란 몸이 소스라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리죽여 웃은 나디아가 그대로 귓가로 옮겨갔다. 아주, 아주 가까이에서, 틈 없이 속삭이자 사각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내 이름은 나디아 ‘스위던’이야.”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고백의 형태로. 이 기차 안에 그 이름-스위던이여, 영원하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밖을 모르는 아딜 올-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든 날은 스위던의 이름 아래에서 존재했으니까. 겨울 하늘을 닮은, 탁한 빛깔의 파란 눈이 홉 뜨였다. 시선을 맞춘 나디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눈가를 접고 입꼬리 반듯하게 올리는……. 그린 듯이 완벽한 미소. 그제야 아딜은 그 미소를 세 번째 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버지, 얘는 돌려보내요. 비실비실한 게 금방 죽을 것 같아요.” “새로운 아이를 고르려면 번거롭잖아요.” 다섯 살의 어느 날, 건강 검진, 흰 접시, 머리칸, 핏물이 흐르던 고기, 꼬리칸의 아이들, 미스터 스위던, 그의 아들, 예상치 못한 호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돌아온 아이들, 어떤 선택……. 그리고 첫사랑. 아딜은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저, 저도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여기서 뭘 할 줄 알고?” “그건 모르겠지만…….” “가는 게 나아. 너도 나중에는 나에게 고마워할걸.” “같이 있고 싶은데.” “흠, ‘여기’가 아니라 ‘같이’?” “같이…….” “넌 내가 그렇게 좋아?” “네.” “…….” “안 된다는 거 저도 알아요. 떼쓰지 않을게요.” “……기회가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 “꼬리칸에서 나올 기회가 두 번이나 있을 리…….” “너한테 말고, 나한테.” “…….” “내가 어른이 된 후에도 널 기억한다면 데리러 갈게.” “정말?” “그래, 그러니까 기도나 하든지.” 그리고 나디아는 아딜을 첫눈에 알아봤다. 12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 훌륭한 청년이 된 머리칸의 스위던 씨와 다르게 꼬리칸의 트레인 베이비는 여전히 우울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아딜은 자신과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없어서 그런가……. 나디아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아주 짧게 고려하곤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됐어, 머리칸에 데려다놓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그러다 보면 뭐 하나 나아지는 구석이 있겠지. 꼭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고. 어차피 저 눈이 좋았던 거니까. 추억 속 어린애는 낡은 옷으로 둘둘 싸여 먼지와 세월을 잔뜩 탄 주제에도 여전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처럼 깨끗한, 오직 나디아를 볼 때만 칙칙한 우울이 걷히는, 그래,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눈을. “……누구세요?” 그런 눈을 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조금 괘씸했지만, “해피 뉴이어, 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딜은 언제 어디서든 나디아를 ‘사랑할 운명’이다. 뭐 그런 거. “데리러 왔어.” 시선을 내리자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어떤 대답도, 허락도 없었지만 나디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맞췄다. 어차피 12년 전에 이미 받은 목숨이다. 그날 이후로 아딜은 늘 나디아의 것이었다. 아니, 따져 보자면 이 열차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그 목숨은 스위던의 사유 재산이었을 테니 단 한 시도 가지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딜이 대답을 삼키기 전에 떨어진 나디아가 눈길로 종용했다. 기뻐해. 기억해내. 함께 있고 싶다고 매달려. 한 가지도 알아듣지 못한 아딜은 작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뭐?” “……저보다는 사만다가 더 급해요. 그 애의 아이도…….” “딜.” “저 혼자는 못 가요.” 그 순간, 기차가 폭발했다. 궤도를 돌던 별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2014년의 어느 날처럼 예고 없이! 뒤집어지는 기체와 연달아 터지는 창문으로 머리칸부터 꼬리칸까지 들썩거렸고, 차량과 차량을 연결한 고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나디아가 인생 처음 거절과 위기를 동시에 경험한 순간, 불씨를 놓은 미친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널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뜸 들일 필요 없었을 텐데!”
Buzzer Beater by George Lucas SF / Korea / 2023 / 133min / PG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에… 전쟁, 시스 군주의 공격에 의해 공화국이 무너지고 있다. 악은 어디에나 존재하기에 영웅이 필요하다. 마침 제다이 사원에는 두 명의 아이가 들어온다. 선택받은 자The Chosen One와, 미래를 보는 자Visionary One. 우주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또 그 꿈이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고요한 사원의 침실에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들어왔다. 나는 욱신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이미 여러번 봤던 꿈. 되짚어봐도 달라진 점은 없었다. 그러나 이마의 보석에서 느껴지는 홧홧한 열기가 그 꿈이 예지몽임을 선명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딱 10분 뒤에 일어나자.’ 예지몽에 동반되는 두통은 익숙했다. 미래를 보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미래를 봤던 건 내가 태어났을 때였다. 불타는 건물과 파괴된 고향별의 풍경. 입을 열고 본 것에 대해 말했더니 미래를 보는 자Visionary One의 유산이라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던 것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나, 마이트레야 족은 종족 중 단 한 사람만이 미래를 볼 수 있으며, 그 능력은 죽음으로써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 전대에 또다른 미래를 보는 자가 있었고, 그가 죽고 내가 태어나 능력을 물려받았다는 의미다. 그러한 기원 때문인지 마이트레야 족은 몰살 위기까지 갔었다. 우리는 전쟁을 부르는 무리라며 박해받았고, 살아남기 위해선 제다이의 본거지인 코러산트에 몸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코러산트에 발을 디뎠던 시절, 그 시절 은하에는 불행만 가득했다. 자연스럽게 내가 보는 것들 역시 음울한 것들 뿐이었다. 멸망, 파괴, 몰락과 암흑. 예지는 전부 들어맞았고 마치 나는 예언자가 아니라 저주의 말을 읊는 주술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던 때에 나는 김라현을 만났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전기가 튀는 감각. 수십만가지의 미래가 이마의 보석을 통해 내 머리로 흘러들어왔다. 격렬한 싸움과 폭발음, 라이트 세이버의 공명음, 피비린내 하나 나지 않는 참혹한 전쟁터. 치열하게 끓는 것은 마주한 영웅의 감정인지 시스의 기세인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블랙홀같은 미래에 나는 강렬하게 매료되었다. 온 우주에서 시스를 절멸할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김라현일 거라고, 나는 만나자마자 확신했다. 나는 드디어 저주가 아니라 희망을 보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게 벌써 10여년 전의 일이다. 김라현은 영링 치곤 꽤 늦은 나이인 8살에 사원에 들어왔으니까. 그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스승을 만나고, 파다완의 과정을 거쳐, 제다이가 되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전쟁은 끊임없이 벌어졌지만 김라현이 직접 시스와 대적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제다이 사원 측에선 김라현이 시스와 접촉하는 일을 꺼려하는 듯했다. 아직은 치기어린 놈이라, 실력이 부족해서, 평정심을 잃고 날뛸 지도 몰라서. 짚이는 지점은 많았지만 나는 확신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다. 선택받은 자, 시스의 대적자, 우주의 영웅. 온갖 프로파간다적 타이틀은 전부 붙여줬으면서 김라현을 믿지 않는다는 건 모순이지 않는가? 게다가 김라현을 의심한다는 건 곧 나 스스로를 의심한다는 일이다. 나는 나를 믿었고, 김라현을 믿었다. 또한 제다이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 “…….” 눈을 감고 차분하게 과거를 복기하다 보면 곧 머리를 옥죄던 두통도 차츰 가라앉았다. 꿈을 통해서든, 텔레파시든, 직접 눈에 보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를 전달받을 땐 늘 두통을 동반했다. 가라앉는 시간은 그날 컨디션에 따라 달랐지만 길어도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돌아갔다. 나는 약간의 평온함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시야의 초점이 맞춰지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씻고, 머리를 묶고, 매무새를 다듬는 일련의 과정이 매끄러웠다. * * * 몸가짐을 정비한 나는 아침 수행을 위해 공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김라현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 “좀 늦었네. ” “5분. ” “꿈 꿨냐. ” “어. 어떻게 알았는데. ” “니가 두통 말고 수행 늦을 일이 뭐가 있냐. ” “그래. ” “근데 나도 꿈 꿨어. ” “무슨 꿈?” 내가 되물었지만 김라현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평소의 수행 루틴대로 눈을 감고 포스의 흐름을 느꼈다. 조금 집중하자 어마어마한 양의 포스가 김라현의 주변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평소와는 다른 기세라 나는 재차 되물었다. “무슨 꿈. ” 대답 대신 가벼운 농담이 돌아왔다. “니 옆에서 지내다보니 예지몽이 옮았나. ” 나는 그 태도에 오히려 신경이 과민해졌다. 김라현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상세하게는 아니어도 대략적으로나마 설명해주는 게 내가 아는 김라현이었다. 오늘처럼 아예 말을 돌리는 건 극히 드물었다. 나는 좀더 집요한 투로 말했다. “뭔데. ” “그냥. ” ‘그럴거면 말이나 꺼내질 말지. ’ 나는 생각하며 명상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내가 꾼 꿈 얘기해줄까. ” 그러자 김라현 역시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은 고요한 수행실 바닥에 앉았다. 털퍽, 하고 천이 공기를 감싸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차가운 대리석의 공기가 피부를 식혔다. “맨날 꾸던 그 내용 아니냐. ” 김라현은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다른데. ” “어떻게. ” “이번엔 확실히 봤거든. 네 라이트세이버가 어둠을 베는 걸.” “…….” 김라현의 포스가 점차 고요해졌다. 얼핏 짐작하기론 평정을 찾는 듯했지만, 그를 오래 본 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고요한 수면같은 흐름 아래에는 여전히 휘몰아치는 감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나는 좀더 강한 어조로 확신했다. “내 예언은 안 틀린다는 거 알지. ” “알지. ” “내가 본 것도 믿지. ” “믿는데. ” “그런데. ” “나는 언제쯤 제다이 마스터로 인정 받을 수 있는 건데?” ……여기에 대해선 나도 대답할 수 없었다. 김라현이 언제 정식 제다이로 승격하는지. 언제 영웅이 되고 언제 인정받는지. 시기와 관련된 예지는 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상념이 너무 많아. 너는 너무 감정적이야. 그게 제다이 김라현을 해칠 거다. 그래서 승격은…… 보류. 이 얘길 언제까지 들어야 해?” “…….” “석가영. 너는 알잖아. 그 상념이, 감정이 나를 더 높은 곳까지 도달하게 만든다는 걸.” “알아.” “나는 더 강해지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내 이름을 떨치고 싶다. ” “그래.” “그게 나쁜가? 내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누굴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되는 거 아냐?” “…….” “나는 제다이의 편이야. ” “알지. 너는 제다이의 기사다. ” “그런데 그런 제다이들이 나를 믿지 않아.” “……. ” “그들이 믿는 건 내가 아니라 네 예언이라고. ” 서늘한 목소리에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라현의 말대로, 그 마음이 김라현의 포스를 강하게 만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쫓았다. 김라현은 수행실의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는 자신의 고향, 시더우드 행성을 쫓는 중이었다. 오래 억눌러온 감정과 욕망. 그것을 터트린 계기가 시더우드에 있을 테다……. “김라현.” 나는 그를 불렀다. 그는 대답 대신 물었다. “나를 믿어?” 나 역시도 고민 없이 답했다. “믿는다. 내 예지가 아니라 너를. ” 그를 믿었다. 그가 내 예언을 실현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이 세상에 단 하나 특별한 사람이 있다면 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마주치면 전기가 튀는 감각. 그걸 가져다준 사람은 김라현 하나 뿐이었으므로. “시더우드로 갈 거다.” 김라현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말한다는 건 제다이를 구속하는 절차나 제약 따위는 고려하지 않았단 의미겠지. 가는 길이 험할 텐데. 돌아오면 환영 대신 징계가 널 맞이할 거다. 그런 말보다 먼저 떠오른 건……. “언제 돌아올 건데.” 계시받지 못한 것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미래는 대답해주지 않지만 김라현은 대답해주므로. 나는 거리낌없이 그에게 질문할 수 있었다. “금방. 확인만 하고 올게. ” “무슨 확인. ” “꿈 꿨다고 했잖아. 시더우드에 관한 나쁜 꿈이거든. 그게 정말 꿈인지, 아니면 예지몽인지 살펴보고 싶어. ” 그와 동시에 스치는 섬찟한 기분. 머리로 밀려들어오는 고통이 아니라 피부가 서늘해지는 감각. 이건 예지가 아니라 예감이다. 김라현이 금방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가, 멀쩡하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던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단 가능성. 나는 이것에 대해 털어놓고자 입을 열었지만, 금방 다물 수밖에 없었다. 김라현의 말 때문이었다. “믿는다면, 말리지 마. 나를 그냥 보내줘.” * * * 수행실에서의 이 대화를 끝으로, 김라현은 종적을 감췄다. 내가 들은 소식은 시더우드가 붕괴되었으며, 그건 제다이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단 얘기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김라현이 죽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나는 아직도 김라현이 시스를 몰락으로 이끄는 미래를 예지하므로.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에… 전쟁, 한창 공화국과 시스 제국의 전쟁이 진행되던 때에, 사라졌던 선택받은 자The Chosen One가 제다이 사원으로 귀환한다. 그러나 그는 변절하여 칼끝을 제다이에게로 돌리고, 곧 제다이 사원은 멸망하게 된다. 미래를 보는 자Visionary One는 그저 지켜볼 뿐. 은하의 가장자리. 티라우 행성은 1분 1초도 쉬지 않고 끓어오르는 용암의 땅이었다. 발 디딜 곳보다 벌겋게 달아오른 액체가 더 많이 분포하는 행성. 이 무간지옥에서 석가영과 그의 스승은 제다이였던 자, 김라현과 조우했다. 끈질긴 추적의 성과였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용암을 사이에 둔 채, 두 남자와 한 남자는 3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김라현이 타고 온 우주선은 이미 망가진 지 오래였다. 생명이 살아갈 수 없는 죽음의 대지. 하나의 우주선. 두 명의 기사와 기사였던 자. 우주에 끝이 있다면 오늘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팽팽한 긴장감이 세 사람을 감쌌다. “나를 믿지 않은건 제다이들이잖아.” 김라현이 라이트세이버를 고쳐쥐며 말했다. “김라현.” 석가영은 침착하게 그의 이름을 호명했지만, 사실 반쯤은 직감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붉은 빛이 비친 순간부터, 그는 이미 제다이이길 그만뒀다고. “대답해봐. 석가영. 제다이들이 나를 믿었었나?” “나는 너를 믿었지. 나는 여전히 제다이이고. ” “말장난. ” “그렇지만 사실이다. ” “…….” 김라현은 침묵했다. 아마 그 스스로도 석가영이 김라현을 믿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을 테다. 하지만 그 정도의 믿음으로 사그라들 분노였다면 그가 변절할 일 역시 진작 없었을 것이다. 석가영의 믿음은 과거의 유물. 혹은 미련. 이제는 고작 그 정도의 무게일 뿐. 김라현은 솟구치는 불꽃처럼 뜨거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래. 그렇지. 그렇다면 저 자는?” 김라현의 시선은 석가영의 옆에 서 있는 스승에게로 꽂혔다. 스승은 대답 대신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석가영은 알고 있었다. 스승이 김라현을 믿지 않은 건 아니라고. 스승은 김라현에게 많이 기대했고, 또 기대를 충족시켜주길 누구보다 원했다. 다만 오만함에 잠식되지 않길 바랐을 뿐이다. 조금만 짚어주면 김라현도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김라현도 스승도 그걸 원친 않았다. 두 사람은 대화 대신 라이트세이버를 꺼내고 서로를 겨누길 택했다. “……!” 석가영이 말릴 새도 없이, 둘은 합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서로를 향해 뛰어올랐다. 빛의 입자가 허공을 가르며 윙, 윙, 진동했다. 강력한 포스가 석가영의 육신을 짓눌렀다. 일반인이었다면 숨도 못 쉬고 그대로 기절해버렸을 압박감. 어마어마한 양의 포스가 그야말로 해일처럼 휘몰아쳤다. “내가 최고의 제다이라고 말 해!” “…….” 김라현은 포효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 목소리가 석가영의 피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그러나 스승은 눈 하나 깜빡 않고 김라현을 마주보았다. 검을 고쳐잡은 김라현은 다시 팔을 물렸다가 스승을 완전히 절단할 기세로 도약했다. 공중에서 한바퀴 돌며 가속을 붙인 검식을 스승이 간신히 막아냈다. “……!” “말 해.” “…….”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보지.” “그렇겐 말 못 해. 넌 최고의 제다이가 아니니까.” 스승은 낮게 대꾸했다. 석가영은 그 도발적인 말의 속뜻을 알고 있었다. 그건 일종의 충고이자 걱정이다. 네가 하는 행동은 전혀 제다이답지 않단 충고. 그러니 고쳐놓겠다는 뜻의 걱정. 물론 김라현의 귀에는 하잘것없는 벌레 소리처럼 들렸을 테지만. 김라현이 귀담아들을 성정이었거나 스승이 곱게 차근차근 얘기할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파탄나지도 않았을 관계다. 지잉, 지잉. 두 사람이 태우는 플라즈마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럴 때마다 강렬한 파열음 대신 발 밑이 낮게 진동했다. 기세는 점차 김라현 쪽에게로 기울어지는 중이었다. 그의 빠른 검식이, 그를 잡아먹은 분노가,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한 점에 모여 거대한 기세를 만들어내는 중이었다. 그 포스가 너무 강렬해서 스승의 몸은 점차 절벽 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석가영은 자신의 포스로 스스로를 감싸 지키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둘의 싸움에 개입한다는 건 석가영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이나 스승을 몰아붙이던 김라현은 어느 순간 자조하듯 말했다. “그래. 더 이상 상관 없어.” 그와 동시에, 석가영의 이마가 달아올랐다. 화끈한 열기와 함께 아지랑이가 낀 것처럼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것은 예지인가……. “…….” 스승은 침묵한다. “제다이도, 예언도. 이긴다. 내가 아니라 예언을 믿은 자들한테, 틀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김라현은 결의를 다진다. 석가영의 시야는 점차 선명해진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핏빛으로 물든 눈동자. 붉은 눈동자는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형형해지더니 곧 파충류의 것처럼 번뜩인다. 김라현이 자신의 라이트세이버로 스승의 무기를 짓누른다. 스승의 몸은 금방이라도 용암 속으로 고꾸라질 것처럼 꺾인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김라현은 그대로 다시 한 번 도약한다. 목표가 되던 스승은 순식간에 균형점을 옮긴다. 가뿐하게 휘둘러지는 라이트세이버, 잘린 것은 스승의 팔이 아닌 김라현의 다리. 석가영은 소리 없이 비명을 내지른다. 공중에서 중심을 잃은 사지가 아슬아슬하게 절벽에 걸쳐진다. 김라현의 팔이 억척스럽게 절벽 가장자리에 매달린다. 스승은 뒤돌아보지 않고 석가영에게로 걸어온다. 흐릿해지는 시야. 절벽의 끝에서 손가락은 점차 한 점으로 작아지고, 용암은 소리 없이 선택받은 자의 몸을 집어삼킨다. 부정의 순간.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포스의 힘이 사라지고 나서야, 석가영은 깨닫는다. 이것은 예지가 아니다. 이건 내가 봤던 그 어떤 예지보다도 끔찍한, 현실.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에… 제다이의 전설은 퇴색했고 우주는 법도를 잊었다. 그러나 미래는 잊혀지지 않는다. 황야, 쓰레기 더미로 제국군의 비행선이 착륙했다. 붙잡히지 않기 위해 소년은 달렸다. 시간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라. 격언은 제다이에게 시답잖은 농담으로 통용됐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눈에 띌수록 소문도 박차를 가해 퍼졌다. 시스 병사들은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따라 소년을 좇았다. 사라진 제다이는 사이비, 협잡꾼, 지나간 한 겹 꿈을 놓지 못하고 나비를 쫓는 광인이라 일컬어졌으나 제국을 비롯해 이름깨나 알린 행성의 지배자들이라면 단 한 사람의 가치는 톡톡히 알았다. 마이트레야의 미래를 보는 자. 그가 제국의 미래를, 우주의 흐름을, 다음 세기의 주인을 안다고 했다. 믿음이 자리한다면 거짓이 생명을 얻기 한순간이라. 진실보다는 유일이 중요했고 가장 먼저 석가영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겠단 욕망이 은하계를 넘나들어 흘러넘치는 한 그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사막. 금속 쓰레기에서 흐르는 중금속과 멋대로 기계 팔을 휘두르는 폐품 산을 벗어나 여기까지 자신을 따라온 병사는 총 셋이었다. “황제가 나를 찾나.” 언제고 답은 침묵뿐이다. 황제가 아니라면, 이어질 목소리가 의문보다 확신에 가깝더라도 금방 끊겼다. 그 대신 자주빛 검을 치켜든다. 이 검이 모래사장을 그을리며 궤적을 남길수록 제 행방을 알리는 꼴이었으나, 이미 제다이의 생존을 아는 이들에게 숨겨서 무엇하랴. 목을 베면 고발할 혀도 잃는다. 그리고 광선검의 진동보다는 크게 땅이 울었다. 석가영은 개미귀신이 병사들을 물고 사라진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를 내다 보았다. 살생을 멀리한다는 마음가짐은 흐려져 이미 몇 번이고 제 손으로 타인의 목숨을 끊었으나 운이 좋다면 이렇게 우회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한 아이를 구했을 때 천진한 목소리가 물었다. 미래를 본 거예요? 이마에 박힌 돌이 가진 의미를 모르는 만큼 진실했다. 그러므로 오래간만에 그는 불변의 언어를 입에 올렸다. 명백한 사실. 미래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이야기. 사막의 밤은 별이 총총 빛난다는데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두 눈엔 끝이 보이지 않는 흑야가 덮쳤다. 나는 미래 따위 볼 수 없단다. 마야트레야의 소년은 오만으로 사신을 저버렸으니 대가를 짊어졌다. 양 눈을 뽑아 용암에 녹이려는 순간, 붕대를 벗고 홍색 눈이 다시금 햇빛을 맞이하고 석 달이 흘렀는데도 눈이 부시기만 할 뿐. 종달새 대신 아침을 깨우던 두통이 사라져 새벽녘이면 샘물처럼 정신이 맑았다. 미래를 보지 않아도 삶은 계속되었다. 익혔던 자연의 법칙은 아까처럼 그의 목숨을 지속시켰다. 포스가 젊은 영혼의 육신을 영원한 여름에 가두었으므로 망각의 여신이 그에게 입맞춤하는 일도 없었다. 이제 꿈은 언제고 주인을 작열하는 지옥 열기로 떠밀었다. 고치지 못한 과거를 되풀이하면 마침내 꿈은 주마등처럼 과거로 과거로 거슬러 어린 날의 요람으로 향했다. 본 적 없는 노파는 눈두덩이까지 주름져 두 눈을 감은 채로 제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는 보는 자 Visionary One. 막아설 수 있겠지만 알아두렴. 우리는 예외가 아냐. 누구든 자유 의지를 증명한다지만 모두가 멈출 때조차 모래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고 물은 흐르며 해와 달이 기운단다. 그들이 행동할 수 없기에 너도 행동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라. 공평하지. 관측은 결국 시각차란다. 아주 약간 앞당길 뿐. 망막에 담으려면 한 걸음 물러서야 하고 당연히 그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하나 우리가 본 풍경은 분명 이루어진다. 잠이 깨면 대개 동이 트기 전 어둠에 감쌌다. 행여 들킬세라 초를 켜지 않으니 어두컴컴했다. 그리하여 내내 불투명한 미래, 눈이 부시지 않는 밤 속에서 석가영은 가끔 영혼의 평온을 얻었다. 어느 새벽엔 진실로 영원히 잠들길 바랐다. 그럴 때마다 소년은 몸을 일으키고 동쪽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초점 사이로 산등성이 사이 작은 해가 명료하게 보일 즈음이면 모래알, 잎사귀, 바다의 암초나 절벽의 이끼 사이로 포스의 흐름이 찾아들었다. 마이트레야는 백사장 가까이 터를 잡았으므로 해수면 위에 땀에 젖은 몸을 뉘어 씻기고 넘실거리는 파도를 넘나들며 공중의 달을 올려다보는 기분을 느꼈다. 소금물로 온몸을 적시면 곧 먹구름이 둥근 달을 가리고 폭풍이 쏟아진다. 다음으로 번개. 눈이 마주치자마자 전기가 튀는 감각. 생애 첫 예언으로 세상의 첫 산소를 내어준 별의 멸망을 담았으나 미래를 보는 자에게 과연 탄생만이 유일한 시작일까? 무수히 교차하는 세계와 몇만 개의 미래 사이로 가장 먼저 본 희망이 기어코 숨통을 트이게 했다. 그때 나는 드디어 저주가 아니라 희망을 보는 사람이 되었으니 삶이 보석처럼 선명한 방점을 찍었다. 물고기가 당연히 아가미를 뻐끔거리고 식물이 햇빛을 따라 줄기를 뻗듯, 선택받은 자를 마주해 나 역시 그를 선택한 순간에 내 생명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믿음. 영원한 믿음이다. 영원한 승리도, 패배도 없다면 영원한 믿음은 있을까? 제다이들이 선택된 어린 자가 바라마지 않던 자리를 감춘 뒤 사원은 무너졌고 승리의 매듭은 녹슬어 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듯이 당연하게 석가영은 김라현을 믿었다. 그리고 황야를 걸었다. 우주를 날았다. 어린 자에게 포스의 흐름을 가르쳤고 제국을 역추적했다. 황제의 목적을 가늠하며 혁명군과 접촉해 정보를 교환했다. 비밀스러운 잠입 임무로 생존한 옛 전우를 만나면 종종 그들은 그의 맹목을 걱정했다. 아직도 달콤한 과거에 머무르냐며 무모한 꿈에서 깨어나라 말했다. 석가영은 그 말에 거짓 변명 대신 침묵을 택했다. 진실로는, 그들이… 멋모르고 기만한다 느꼈다. 선택된 자라도 나를 휘두를 순 없다. 내가 그를 믿기는 온전한 내 선택이다. 김라현은 미래를 보는 자가 아닌 석가영에게 선택받았다. 당신들은 내가 그를 보조하는 줄 알지만 광휘에 휘둘린 건 누구지. 나는 적합한 자리에 섰을 뿐 그림자의 가치는 빛에 뒤지지 않고 어둠은 내 무릎을 굽히지 못해. 그래서 소년에 해박한 이들은 단지 필요할 정보와 장비를 건네며 뒷배가 되어 주었다. 최소한의 장기말로 끌어당긴 정보에 몇 가지 확신을 덧댄 결론. 제국군은 자신을 습격할 때 일언반구하지 않는다. 도발은커녕 자백제 투여를 우려했는지 포로로 삼을라치면 재빨리 목숨을 끊었다. 살아남은 제다이에게 정보를 감춘다기엔 결벽적이어서. 석가영은 미묘한 기대를 걸었다. 지난 몇 년간 단 한 번도 저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친우가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순간이 필시 각별하기에 여태껏 미루었다면. 여기까지 상상이 뻗으면 불합리한 망상으로 변질하기 전에 곧바로 숨을 골랐지만, 그래도 석가영이 김라현을 다시 만났을 때 할 말은 이별한 순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제 나는 미래를 볼 수 없다. 너처럼 현재만을 본다. 그런 우리가 같은 풍경을 본다고 확신하는 데에 두 눈은 과분하다. 이 모든 마음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기다렸다.” 내 처음이자 마지막 예지는 김라현이 시스를 몰락으로 이끄는 미래. 그게 기뻤던 이유는 단지 내가 보았기 때문이다. 관측은 그 순간을 눈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서 똑똑히 손에 쥐었단 의미니까.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희망도 커져갔다. 너는 분명히 증명한다. 너는 필시 보답한다. 네가 오래 살아 나의 믿음은 영원해진다. 그렇지 않더라도 너를 믿는다. 증명도, 선택도, 중요치 않다. 네가 단지 너이기에. 너를 믿어. 붉은 섬광이 황제를 가른다. 어두운 밤이 끝나고 태양보다 붉은 아침이 찾아왔다. 오래 전 멀고 먼 은하계에… 반란 연합이 시스 제국의 칼날을 베어 낸다. 미래를 보는 자Visionary One가 오래된 과거로 돌아간다. 그 끝에는 언제나 선택된 자The Chosen One가 머무른다 검이 부딪힌 후로도 끝나지 않는다. 시간은 무심하리만치 조용히 흐른다. “미안하다는 말은 듣기 싫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김라현.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 “나 믿지.” 겨우 뱉는다. 사실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뭐라 말할지 뻔히 알아서, 기대는 사치스러워서…… 오로지 나안으로 너를 담을 순간을 기다렸다.
Kreidele by Céline Sciamma Romance / UK / 1998 / 99min / 18+ The K Side 여자는 흠뻑 젖은 몸으로 모래사장에 발을 디뎠다. 축축하게 젖은 드레스 자락은 걸음을 뗄 때 마다 몸에 묵직하게 감겨 왔다. 바다의 비린 내가 났다. 유쾌하지 않은 내음이었다. 마부 하나가 그녀를 마중 나와 달구지에 짐과 여자를 실었다. 덜컹이는 달구지에 앉아 앞을 내다보자면 저 멀리 커다란 저택이 보였다. 애크로이드 저택이었다. 저택은 외롭고 우울해 보였다. 크리스틴 리우의 임무는 이 음울한 저택의 ‘아가씨’ 를 그리는 것이었다. 이름난 화가인 그녀에게 ‘아가씨’ 의 아버지이자 저택의 주인인 잭 애크로이드 백작이 제 딸의 결혼에 필요한 초상화를 의뢰한 탓이었다. ‘아가씨’ 인 아델 에우리디케 애크로이드는 올해로 스물이 되어 혼기가 찼는데, 저택에 온 화가들을 내 쫓아가며 초상화를 그리길 거부해 결혼이 미뤄지고 있단 것이 애크로이드 백작의 고민이었다. 크리스틴이 이곳에 오기까지 세 명의 화가가 아델의 초상화를 그리길 포기했다고 했다. 결혼을 하지 않고자 하는 그녀의 완고한 고집 때문이었다. 때문에 애크로이드 백작은 크리스틴이 자신이 화가라는 사실을 숨기고 제 딸에게 접근해 초상화를 그려 주기를 바랐다. 백작은 제 딸에게 거짓말을 했다. 저택에 손님이 올 것이라고, 그가 네 말동무이자 산책 친구가 되어 줄 것이라고. 저택에 화가가 온다는 사실은 철저한 비밀이 되어야 했다. 첫 사흘은 아델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처음 아델을 만난 것은 비가 갠 후의 바닷가였다. 아델은 하녀 리지와 함께였는데, 말 없이 크리스틴의 곁에서 바닷가를 걷던 그녀가 갑자기 모래사장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낭떠러지로부터 딱 세 걸음 앞, 아델이 멈췄다. 금빛 머리칼이 휘날리는 가운데 그녀가 뒤돌아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을 꿈꿔 왔어요!” 아델이 웃었다. “죽음을요?” 뒤따라 달려온 크리스틴이 물었다. “달리기요.” 아델이 대답했다. 숨이 찼다. 크리스틴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택으로 돌아간 크리스틴은 초상화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모델은 눈 앞에 없었지만 그녀 정도의 실력이 되는 화가에게 그 사실은 그다지 걸림돌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델의 녹색 드레스를 직접 걸치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 드레스를 입는 것을 상상했다. 크리스틴의 그림은 정물화가 아닌 상상화였다. 작업은 순조로웠다. 크리스틴과 아델은 매일을 함께하였으며 그녀는 가까이서 아델을 관찰했다. 그녀의 숨결, 뺨의 솜털, 속눈썹의 길이, 부르튼 입술 같은 것들을 전부. 그러던 그녀가 아델에게 자신이 화가임을 고백한 것은 충동이었을 것이다. 그녀 앞에서 진실되고자 하는 충동. “나는 화가고 부탁을 받아 당신을 그리러 왔어요.” 크리스틴이 고백했다. “나랑 이 초상화는 비슷하지 않아요. 당신을 닮지도 않아 슬프네요.” 그림을 본 아델이 말했다. 차라리 그녀가 불같이 화를 냈다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는 대신 크리스틴을 가만 응시했을 따름이었고, 크리스틴은 역으로 제가 기이한 분노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날 밤 그녀는 완성한 초상화에 물감을 덧칠해 지웠다. The A Side 아델이 아는 사람들 중 결혼하여 행복한 여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웃는 얼굴로 결혼한 여자와 슬픈 얼굴로 결혼한 여자들 사이에서조차 차이가 발견되지 않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누구든 결혼을 기피하기 마련이리라. 즉 아델 에우리디케는 죽음을 맞이할지언정 그 빌어먹을 그림의 모델이 될 생각일랑 추호도 없었다. 꼼짝조차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아델은 시체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또한 거북스럽기 그지없었다. 기록물이 되어 남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면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나는 화가고 부탁을 받아 당신을 그리러 왔어요.” 크리스틴이 처음 그렇게 고백할 적 아델은 놀라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 없다는 것쯤은 이미 진즉부터 알고 있어서였다. 이토록 완벽한 타이밍에 나타난 구원자라면 필시 이 정도의 의도는 품고 있었으리라. 도리어 배신이 빠르게 이루어져 다행이었다. 십 년쯤 후에 본색을 드러냈다면 늘상 최악을 대비하는 성정이라도 동요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신은 아델에게 마지막 한 방을 먹였다. 그 이상 저항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원인은 불분명하다. 마침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고,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거절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양쪽 중 무엇이 되었든 결과는 하나밖에 없었다. 결코 입을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녹색 드레스를 입고서 그의 앞에 앉았다. 그럼에도 이를 희생이라고 칭할 수는 없을 테다. 캔버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넓다. 이 커다란 면 안에 온통 자신만이 들어찬다고 생각하니 아델은 기가 막혔다. “나 혼자서만 사용하기에 여긴 지나치게 넓어.” 사실 내가 원하는 건 조금 더 다른 그림이라고, 내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엿보고 싶어 모델이 되길 허락한 거라고, 그런데 이 그림은 너무나 상투적이라고…. 수많은 말들이 그 한 문장에 함축된다. 나머지 말들은 전부 눈동자에 넣어 전했다. 크리스틴은 화가니, 분명히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언어를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아델이 자신의 그림에 대한 혹평을 늘어놓았음에도 크리스틴은 기꺼이 아델을 위한 더 ‘개인적인' 그림을 하나 더 그려 주었다. 옷 속에 갇혀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과 달리 그 그림에서 아델은 웃고 있었다. 이 웃음에 담긴 것이 온전한 기쁨은 아니었다. 아델 에우리디케는 그 정도로 상냥한 인간이 되지는 못한다. 아델은 오로지 그 미소로 크리스틴에게 기억되길 원헀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다면 응당 그와 비슷한 몫을 돌려주어야 옳으니까. 나는 당신만 아는 얼굴을 보인 다음에 사라질 것이다. 불타오를 것이다. 이윽고 재가 되어 아무런 물질이 남지 않을지언정, 그 손과 눈에는 이 얼굴과 웃음이 남아 영영 기억과 꿈속을 떠돌아다니길 원했다. 크리스틴 리우는 바로 그 손으로 아델 에우리디케를 단두대로 보낸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Scarlet Heart by Charlie Kaufman Drama / USA / 2020 / 134min / 18+ “때로는 생각이 행동보다 진실과 현실에 가까워.” “말과 행동은 속여도 생각은 그럴 수 없거든.”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주변은 고요하고 적막하다 예상보다 그렇다 볼 건 많지만 사람은 적고 빌딩과 주택도 별로 없다. 하늘, 나무, 들판, 울타리, 도로와 자갈 갓길……. * *원작 인용 넷이서 둘러앉은 식탁에는 모자라거나 위태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조금도. 가장자리에 자수 레이스가 달린 식탁보. 반듯하게 접힌 네 모서리. 수수한 양식의 화병과 새 작약. 세 개의 앞접시 위에는 원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음식들이 올랐다. 버터에 절인 감자. 미트 로프. 딜 향이 많이 나는 피클. …… 속에 아직은 분홍색이 도는 미트로프에서 서서히 붉은 즙이 퍼진다. …… 서서히. …… 밀려오는 파도 내지는 한순간에 금그을 깊이를 잃은 호수의 형상으로. 나이프의 반짝임이 부드러운 살점 위로 선을 긋는다. 지금으로부터 몇 만년, 아니 몇 억년 전 하나의 대륙으로부터 잘려나간 땅들은 섬이 되어 산다지. 그러면 우리는? 우리는 어떻게 될까. 관계의 단면들, 어쩌면 상흔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는 밤. 창 밖으로는 눈보라가 심하다. 이런 날이 몇 번이고 있었던 것처럼. 아주 태연스럽게. 오래되어 보이는, 잘 관리된 커틀러리는 두 명에게 적당했다. 한 명쯤은 만족했을 테다. “아버지는 나고 자란 고장의 기후처럼 부드러운 분이셨지.” 이런 한두 문장으로 생애를 정의하자면 공백은 극복할 수 없이 필연적이다. 그 탓이려나? 양순해 보이는 인상 속으로 배치된 이목구비가 제각각의 특징을 채 갖지 못하고 어렴풋하다. 형태의 세부는 흐릿하되 틀 속에 간직된 채였으니 어쩌면 충분하다. 장면 장면이 남기는 인상들. 희끗하니 일어난 필름 같은 왜곡. 진실이란 관념은 본디 순간의 압점에나 가깝다. 반면에 시간이란 막대한 연속이지. 한낱 인류의 지혜 따위론 그 유리된 틈을 영영 극복할 수 없을 거야. 우리, 젊은가? 늙어가고 있나? 나아가나? 맴돌고 있나? 이 순간 발자국으로부터 궤적의 본질을 가려낼 수 있겠니? 설령 어느 날 고된 증명을 거듭한 끝에 진주 같은 진실을 캐내게 된들, 이미 모든 단서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거야. 낡은 비늘로 떨어져 흔적일 뿐 더는 무엇도 담보하지 못하겠지. 오늘날에 조개껍질로 무엇을 사들일 수 없는 이치로. 아, 언제나 바닷가였어. 소금기 머금은 바람에 모든 건 쉬이 삭아갔지. 이것만은 잃어버리지 말자. 우리 세월 속 건져낸 가장 유력한 지문이다. ……. 어쩌면 우리라는 말을 너무 남용하지 않았나 싶기도. 닳지 않도록 해야 했는데. 강아지를 키웠던가 고양이를 키웠던가. 털 색은 어땠더라. 그런 것보다도 어느 성탄절에 밝혀 봉헌한 초가 노랗고 파란 색이었다던지. 밤늦게 들렀던 제과점의 풍경 따위가 지금은 선명하다. 집안의 환경은 언제나 잘 정리되어 있었어. 모든 옷은 반듯하게 풀을 먹여 다려진 채 내게 왔지. 무거운 기대 따위가 내걸린 순간이라고는 기억나지 않아. 나의 일들은 그럴 수밖에.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건과 단 한 번도 차갑지 않았던 실내화. 집안 어딘가에는 반드시 지치는 일 없이 조명이 켜져 있었음을 기억해. 평화와 안녕이 깃들어 마땅한 집이라기보단 일종의 전쟁터 같기도 했어. 온전히 다른 누군가를 위해 분투하는 삶에 대해선 여전히 이해할 수 없네. 그들은 늘 병정처럼 서서 내 곁을 지켰는데……. 이제는 진술하기에 머뭇거리는구나. 내가 오늘 죽고 네가 우리의 모든 걸 사전으로 남기려 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복원할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는 않는다. 암녹색 벽지 정도는 변하지 않았던 거 같기도 하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제는 받는 것도 잊어버린 빚 같아, 전부. 서글프니? 네 선택이. 어렵니? 이 어긋남이. 그만둘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을까. 우리의 그날 짝 지어 춤추지 않았거나 내게 사다 줄 보석 구두 한 켤레가 모자랐더라면. 서로의 인력으로부터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궤도 즈음을 맴돌다 말았을까. 이제는 먼 일이야. 물에 푼 잉크를 돌려받을 수는 없지. 하여간 나는 여전히, 생각하고 있어. 끝나는 것들에 대해서. 끝낼까 해서. 네 끝에 대해서. 눈이 아주 내리는구나, 우리 위로…….
Eternity by Wong Kar-wai Romance / Hong Kong / 1997 / 178min / 18+ 반복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시간이 돌아간다거나 하는 터무니없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 날 떠오르는 해, 밤이면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빛을 내는 달, 내리는 비와 돌아오는 계절 따위의 반복. 지긋지긋하다는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종류의 관계. 웨이톄린은 감히 생각한다. 마음이란 것은 언제나 돌아오기 마련이니 잠시 떠나는 것 정도야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므로 숨처럼 가볍게, 습관과 같은 말을 쏟아낸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그 말이 콴윙얀에게 어떻게 들리는 줄도 모르고서, 달려들면 그 또한 좋은 것이로구나 생각하며 약기운이 날아간 또렷한 눈으로 웃었다. 허락이 쉽다. 어려운 것은 삶뿐이다. 시간은 너무 빠르게 삶을 스친다. 어린 날은 돌아오지 않고, 이제 청춘마저 쇠락의 길을 걷는다. 웨이톄린은 죽음이 두렵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 보지 않았으나, 영원불멸한 세계에서 홀로 떨어져나와 먼지가 되어 사그라진다는 사실은 때때로 제 몸을 송곳니로 꿰뚫기 위해 침을 질질 흘리는 광견병에 걸린 개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언젠가 암전될 극을 위하여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능한 많이, 깊이 즐겨 봐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런 후회 없는 생을 맞이할 수 있으려면 그래야만 했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뱉고 싶은 말을 뱉고, 사랑하고픈 것을 사랑하고. 웨이톄린은 뻔뻔하고도 기쁜 얼굴로 ‘다시’를 요구한다. 콴윙얀은 쉬이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는다. 웨이톄린은 오래도록 방랑하면서 동시에 오래도록 정착하고 싶었다. 그러므로 웨이톄린은 콴윙얀을 정착지로 삼고 오래도록 방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지긋지긋한 홍콩을 떠났다. 그곳의 시끌벅적한 시장과 퀘퀘한 곰팡이 냄새 따위를 사랑한 동시에 지겨워진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 그들을 도로로 내몰았다.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가지 않을래요? 헐벗은 몸으로 누운 톄린이 윙얀의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속삭였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콴윙얀이 벗어난 과거의 냄새가 미미하게 흘러나왔다. 또 아편을 피웠습니까? 다정히 입술을 맞출 때가 언제였냐는 듯이 싸늘한 목소리가 흐르면 곧 답이 돌아온다. 이번 주는 피우지 않았어요. 그 골방에는 양 벽면에 침대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골방이 골방이라 불리는 데에는 모두 이유가 있는 법이라, 웨이톄린이 맨몸을 이끌어 반대쪽 침대에 가 누워도 팔을 뻗으면 콴윙얀의 손끝이 그의 어깨에 가 닿을 정도였다. 도대체 언제 끊을 생각입니까? 제 배에 얇은 이불을 대충 덮은 톄린이 어깨에 닿은 손가락을 치워낸다. “이과수 폭포가 보고 싶어요.” 콴윙얀은 거절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그럼에도 싸구려 중고 차를 뽑은 웨이톄린의 옆에 앉아 지도를 펼쳐 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 애정은 언제나 사람을 유약하게, 혹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굴도록 만든다. 며칠을 헤맸다. 오래도록 함께하는 것은 그토록 피곤한 일이다. 타인은 타인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으므로 영원할 몰이해와 지난한 합의는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아르헨티나의 도로 위에 두 사람분의 담배 연기와 애정 따위가 흩뿌려졌다. 너무 먼 곳까지 나와서 그럴 것이다. 압도적인 경관을 보면,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거대한 폭포 아래에서 서로에게 가장 아름다운 말을 꺼낸다면 다시 홍콩으로 돌아가 도로 위의 말다툼 따위는 종이에 잘 뱉어내어 하수구 안쪽으로 버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실패가 성공을 안겨주듯이 절망이 희망을 몰고 오듯이, 기대는 언제고 실망에게 목줄을 채워 우리의 앞으로 질질 끌고 온다. 길을 잃었다. 웨이톄린은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었으므로 다시금 짧은 재회를 기약하기로 했다. 그는 모든 헤어짐을 똑똑히 기억한다. 갓길에 서서 오래도록 담배를 피웠다. 문득 바라본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콴윙얀의 피곤한 얼굴이 때마침 눈에 들어왔다. 그는 지쳐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윙얀이 자신과 함께 있으면 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 뿐이다. 차라리 멀리로 헤어졌다가 다시 시작하면 그는 도로 다정한 알렉스 콴이 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여기서 헤어질까요. 항상 이별을 속살거릴 때에는 그의 얼굴을 바로 쳐다보았는데,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으므로 그가 평소와 같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했는지, 놀란 표정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만나면 다시 시작해요. 우리는 오래도록 같이 있기에 적합하지 않으니까. 지갑과 옷가지를 챙겨 차에서 내린 웨이톄린은 한참 뒤에 제 옆을 지나가는 싸구려 중고 차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걸었다. 언제든 자신을 반겨 줄 집에게 싸구려 자동차 정도를 넘겨주는 건 별일도 아니었으므로. 잠깐은 바이아블랑카에서 지냈다. 그곳의 해군들은 동양인 남성을 폄하하거나 제 장난감으로 삼고 싶어했으므로 기꺼이 그렇게 하고 어울리다 지긋지긋해졌다. 그들이 제 몸을 만지건 말건, 제 약에 취하건 말건. 바다를 보며 떠올린 것은 폭포다. 바다가 땅끝에서 추락하면 그 또한 폭포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떠나겠노라 마음먹었다. 해군 하나의 차를 훔쳐 약 704km를 달려 도착한 곳은 라플라타였다. 오래 헤맸다 생각했건만 결국 다시 아르헨티나다. 모로 가도 아르헨티나라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가자. 그리하여 웨이톄린은 그곳에서 즐길 것들을 모조리 즐겼다. 며칠 뒤에는 혼자서 이과수 폭포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탱고바에서 콴윙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술에 거나하게 취해 아무와 입을 맞추고 배를 맞댔다. 그건 방랑이었고 콴윙얀에게 입을 맞춘 것은 정착이었다. 그가 화를 낸다. 웨이톄린은 그토록 제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콴윙얀을 처음 보았다. 그는 가라면 가고 함께 있어 달라면 있어 주는 사람이었다. 통렬한 거부가 웨이톄린을 할퀴고 지나갔다. 왜? 외국에서도 자신은 변하지 않았는데 콴윙얀은 변했나? 의문이 속을 가득 채웠다. 타국의 땅을 오래 밟고 선 사람들이 변해가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책에서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그들은 언제나 좋은 쪽으로 변한다. 그러면 콴윙얀은 좋은 쪽으로 변했기에 웨이톄린을 부정하는가? 그 가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숙이고 들어가야만 했다. 난 그냥 당신이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이에요. 혀가 자꾸만 그를 원망한다. 약을 사 가던 인간의 지인이란 사람이 찾아온 날엔 죽기 전까지 맞았다. 우리 다시 시작해요. 웨이톄린은 엄살이 심한 사람이므로 아마 죽기 직전이라는 말은 과장된 감상이겠지만 그 꼴을 본 콴윙얀은 결국 제 거처의 문을 열면서도 이전처럼 다시 시작하지 않는다. ‘다시’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임에도 그는 웨이톄린을 가장 처음 사랑하던 때와 다르다. 콴윙얀이 오래도록 누워 있었을 싸구려 철제 침대 위에 올라 앉아 낯선 나라에서 제조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웨이톄린은 이 타국의 담배가 홍콩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며 불을 붙였다. 그는 오래 일했다. 일찍 나가 늦게 들어왔다. 웨이톄린이 바라는 ‘함께’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기억하고 있던 정착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였다. 웨이톄린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싸구려 약을 빨거나 혹은 파는 것 따위였다. 웨이톄린은 가만 누워서 이과수 폭포가 그려진 스탠드에 시선을 던졌다. 그는 변했는데 저것만은 여전했다. 아니다, 자신 또한 여전하다. 바뀐 것은 그뿐이다. 콴윙얀이 밤 늦게 여관 방에 돌아오면 웨이톄린은 소파 구석에서 자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밤이면 그는 가만히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 웨이톄린의 붕대 감긴 손을 쳐다보곤 했다. 사실은 그가 그렇게 아프고 상처입고 병들었단 것이 좋았다. 웨이톄린이라는 남자가 콴윙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기묘한 쾌감과 만족감을 가져다 줬다. 손에 붕대를 감은 웨이톄린이 밥을 떠 먹여 달라며 투정을 부리거나 담배에 불을 붙여 달라 조를 때면 기분이 좋았다. 이건 비밀인데, 난 당신이 아주 영원히 아팠으면 하고 바랍니다…… 하루는 여관 방에 돌아왔을 때 웨이톄린이 없었다. 콴윙얀은 공황 상태에 빠져 그를 찾았다. 낡은 건물을 샅샅이 뒤지고 여관 주인과 실랑이를 할 때 즈음 저 멀리서 터덜터덜 걸어오는 마른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웨이톄린이었다. 콴윙얀은 헐레벌떡 달려가 그의 붕대 감긴 손을 잡았다. 눈물이 조금 났던 것 같기도 했다. 어딜 갔었냐는 질문에 웨이톄린은 담배를 사러 갔다고 했고 그 말에 콴윙얀은 불같이 화를 냈다. 내가 있는데 왜 멋대로 나간 거죠? 그리고 그는 그 길로 가게에 가 담배 다섯 보루를 사 와 소파에 웅크린 웨이톄린의 위에 쏟아 부었다. 다시는 멋대로 나가지 말아요. 웨이톄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밤 콴윙얀은 웨이톄린의 여권을 훔쳤다. 그가 무언가를 훔쳐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훔친 여권은 여관 마루 틈새에 숨겼다. 낡은 마룻바닥은 이미 상처 투성이여서 나무 한 조각 쯤 들춰 냈다 다시 끼워 넣어도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이것이 잘못된 ‘함께’ 의 형태란 것은 그 역시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어떠한 방식이 되었든 웨이톄린이 자신의 곁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램프 안의 파란 이과수 폭포를 보며 콴윙얀은 생각했다. 여관의 좁은 주방에서 어느 날은 계란 볶음밥을 했고 어느 날은 서로를 끌어안고 탱고를 췄다. 붕대를 감은 웨이톄린의 손은 콴윙얀의 손을 온전히 그러쥘 수 없었으나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오히려 좋았다. 춤을 출 때 만큼은 이 순간이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결국 다시 헤어졌다. 이런 ‘함께’ 가 영원할 수 없다는 건 쌍방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혼자가 된 콴윙얀은 일에 집중했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목표는 이과수 폭포에 들렀다 홍콩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낮에는 식당에서 일을 했고 밤에는 도축장에서 일을 했다. 소의 배를 가르고 피를 씻어낼 때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쪽이 편했다. 외로울 때면 웨이톄린을 떠올리는 대신 사내들이 모이는 공중 화장실을 찾아 아무나와 배를 맞대고 입술을 부볐다. 아르헨티나의 사내들은 대체로 키가 크고 억셌으며 체모와 피부색이 짙어서, 희고 마르고 예민하던 누군가와는 아주 달랐다. 그 점이 마음에 드는 동시에 가끔은 참을 수 없이 슬프기도 했다. 목표한 돈을 거의 다 모았던 주말이었다. 콴윙얀은 언제나 들르던 공중 화장실에서 익숙한 인영을 발견했다. 그였다. 희고 마르고 예민한, 붕대 감긴 손으로 투정을 부리고 때로는 짜증을 내던 그 남자…… 두 사내의 시선이 교차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서로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우리가 아주 다르다고 생각해 왔는데, 사람이란 고독해지면 전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콴윙얀이 웨이톄린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는 몇 달을 모은 돈을 들고 이과수 폭포로 향했다. 이과수 폭포에 도착하니 웨이톄린의 생각이 났다. 슬펐다. 언제나 폭포 아래에 둘이 있는 장면만을 생각해 왔기 때문이었다. ‘진짜’ 이과수 폭포는 아주 거대했고 습한 냄새가 났다. 물방울이 튀어 홀로 선 사내의 건조한 뺨을 간지럽혔다. 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폭포 근처를 지나가는 배의 갑판에 납작 엎드려 물소리를 들었다. 거대한 폭포의 소리는 꼭 사람이 흐느끼는 소리 같아서 그걸 듣고 있다 보면 조금 덜 외로운 것 같기도 했다. 이과수 폭포에서 하루를 보낸 다음 콴윙얀은 홍콩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홍콩과 부에노스 아이레스. 정 반대에 위치한 두 도시. 거꾸로 보는 홍콩은 어떤 모습일까? 비행기의 창에 뺨을 기댄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안녕, 부에노스 아이레스. 나를 이방인으로 만들던 도시여, 안녕. 한 해 만에 돌아온 홍콩의 밤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여전히 밝았다. 떠날 때는 둘이었으나 돌아올 때는 하나였다. 공항의 무빙 워크는 지나치게 길어서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여길 벗어나면 담배를 피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콴윙얀은 여권을 손에 쥐고 홍콩 국제 공항의 로비를 가로질러 걸었다. 운이 좋다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그는 깨닫는다. 웨이톄린에게 사랑한단 말을 해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가 그 남자를 아주 사랑했단 사실을……
NickyHidi by Nakashima Tetsuya Romance / USA / 2020 / 103min / 15+ 산다는 건 텅 빈 어항 속에서 숨을 쉬는 것과도 아주 비슷헀다. 언제까지고 쓸 수 있을 법한 무언가라도 되는 듯 돌보지 않았더니 어느 날 몸 상태가 단번에 틀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로부터 전문 용어를 섞은 설명이 이어졌지만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알기 쉬운 문장만 어찌저찌 주워 담아보니 결론은 이미 나있었다. 당분간은 스트레스 요소들과 멀어져야 해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면 다른 수단이라도 빌리는 게 좋겠네요, 등등. 그 다음의 수순 또한 빠르게 지나갔다. 뉴욕! 그 꽉 찬 팝콘통 같은 도시에서 벗어나 조부가 계신 톨레도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정해졌다.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 표현으로 염려의 말들이 쏟아졌지만 특별히 머리에 남는 건 없었다. 조각을 공부하던 손에서 망치와 조각끌을 빼놓으니 영 허전했다. '다녀오면 훨씬 나아져 있을거야.' 일이 바쁜 부모님은 마음으로 딸을 가여워 해주시며, 쇼윈도 안쪽 마네킹에게 입혀두었을 법한 옷들을 한 겹 한 겹 정성껏 입혀주었다. 장미 코사쥬, 새하얀 프릴의 옷을 걸치면 설탕 코팅을 걸친 케이크 못지 않은 꼴이 되면 주변의 풍경과 도무지 어우러질 것 같지 않았지만, 어차피 부모님의 얼굴만 펴질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때아닌 작별이었다. 어쩌면 해방일까? …뭐, 이런저런 전혀 쿨하지 못한 사정으로. 하이디 포플러는 톨레도의 길거리에서 종종 보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되었다. 사람에 따라 약간 특이하게 비칠 수도 있는 정도의. 그러니까, 하이디 포플러는 꽤 오랫동안 상자 속에 갇힌 것 마냥 살았다. 그것이 편했고, 불이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로운 곳에 떠밀린 듯 살게 되어도 크게 지장 가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붙어 다녔지만, 원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대로 왔던 것처럼 떠날 수도 있을까, 싶었는데. “어쩐지 한눈에 여기 사람이 아닐 것 같았어.” “……?” “아, 네가 어색해 보였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음.” 멋들어진 바이크를 세워둔 제 또래의 아이가 연거푸 말을 잇다가 실수라도 한 것 마냥 머쓱하게 제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걸, 하이디 포플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랑은 벌써 몇 번째 만나는 거더라. 딱히 할 일 없이 팔랑팔랑 다니다보니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그가 근처까지 와선 연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사람 같아서,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이디……?” 짧게 자른 머리는 어쩐지 들쭉날쭉하고, 짙고 새까맣다. 유독 흰 피부 위에 점이 몇 개씩이나 박혀 있었다. 자세는 약간 비뚜룸하게 서는 습관이 있는 듯 했고, 거의 늘 바이크를 타고 있었으므로 다같이 맞췄다던 스카잔을 걸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길에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 아이와 저, 무슨 사이 같아요? 하고 물으면 누구나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나 혹시 뭐 실수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다행이지만.”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 “뭔데? 알려줄 수 있는 거라면 가르쳐줄 수 있어.” 그는 어쩌면 여기에 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쓰는 말투가 입안의 혀처럼 부드럽거나 하진 않아도 적어도 눈을 마주쳐준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조금 무섭다고도 생각했는데 희한한 일이다. “……음.” “그냥 말 안 할래…….” 너는 그늘처럼 가까워지곤 했어서,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낯설다. ㅡ 가벼운 마음으로 디뎠다가는 '어떤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두 셋 정도는 거뜬히 걷어찰 수 있을 만치 북적이는 거리에 살았어도, 누군가를 한 눈에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지도 않게 되니 마음이 도무지 들뜨지 않는다. 그러니까 들뜨지 않는……. 부릉, 부르르릉. 순간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 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줄만 알았다. 느릿느릿 길을 가던 하이디는 그들 무리가 줄줄이 쏟아지듯 스친 다음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맞춰 입은 듯한 옷에, 비스무리해 보이는 장식들이 눈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속도까지는 아니라해도 헤아려 보기에는 또 빨랐다. 무수한 차량의 앞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재주 곡예를 하는 것보다야 저렇게 마냥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차라리 안전할까 싶긴 했다. 빳빳하게 잘 포장해둔 도로가 아니어도 달리는 데엔 상관없나보구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작은 뒷통수를 보며 그런 생각이나마 짧게 했던 것 같다. 급한 일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 없어 어쩐지 힘이 빠졌다. 하이디는 얼빠진 여자 아이처럼 그대로 길가에 서서 귀의 먹먹함이 가실 때까지, 도로의 저편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볕에 정수리가 따끔따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한참을,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꼭, 바이크를 탄 제 또래의 애가 나타나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등 뒤에 태워줄 것 마냥……. "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생각 없이 아무 길이나 가다보니 낯선 풍경만이 쭉 이어졌다. 오늘도 포슬거리는 금붕어 지느러미 같은 옷을 입고 있던 하이디는 빈손을 쥐었다 폈다. 양산까지 가지고 나오지 않은 건 드문 일이었는데. 아마 처음에는 그저 가까운 곳만 산책 삼아 돌 생각이어서 그랬다. 「난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음, 아니……, …조금 특이한 게, 좋으려나…….」 특별한 것 같잖아, 라는 말은 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니까, '렉시.' 나는, …… …… 정처없이 걷다보니 외진 역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떠나가는 사람들, 표를 뽑으려 하는 사람들, 작별 인사, 혹은 환영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빈 의자를 찾아 앉고는 퉁퉁 부어버린 것 같은 다리를 쭉 뻗었다. 둥근 메리제인의 구두코가 아무리 반질반질해 보여도 그뿐이었다. 이 구두는 아무리 예뻐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지도 않으니까. 갈 곳 없는 우울함이 몸속에서 조용히 부풀었다. 하이디는 어느 밤, 나름 배려한다고 줄여주었던 속도에도 익숙치 않아 허리를 꽉 붙들고 등에 뺨을 대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나부끼는 머리카락, 그리고 꽉 씌워진 헬멧. (그때 니키 휴스턴은 헬멧을 썼던가? 어쨌던가?) 배기음은 시끄러웠고 가슴은 계속 쿵쾅거렸다. '어디 가고 싶어?' 그렇게 물어왔을 때, 그 아이는 어디든 다 데려다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호흡을 해본 기분이 들었다. “…혹시……, 바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 이런 말…… 처음 해보는 것 같아.” 보그르르. 텅 빈 어항에 물이 차오르고 나는 그 속에 푹 잠겨 입모양으로만 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수화기 너머의 니키 휴스턴을 상상한다. 어떤 표정일지, 어떤 기분일지. 네 옆엔 언제나처럼 그 멋진 바이크가 있는지. 하이디 포플러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어쩌면, 그 바이크를 타고 달리면 투명한 유리벽조차 다 부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상상해버린다. 알렉산드라 니콜라스 휴스턴. 출석부에 적힌 이름은 장황하고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구닥다리라 흔히 두 음절로 줄었다. 왜 굳이 알렉스를 니키라고 부르는지는 물어볼 필요 없었다. 본인이 그렇게 원했고 태양 아래 스카잔의 금실 자수를 번뜩이며 요란하게 바이크를 모는 운전수에게 별칭은 썩 잘 어울렸다. 호명은 주로 학교 복도보다는 차도 가장자리 들판에서다. 어이, 니키. 어디 가냐? 포플러 공장. 어떨 땐 공중을 날 듯이 발판을 밟아 땅에 달라붙은 사람의 목소리는 바퀴 자국에서 퍼져나오는 흙먼지를 뚫지 못하고 허공만을 메아리쳤다. 대령의 딸이자 경찰의 조카는 폭주족의 끄나풀이자 톨레도를 가로지르는 배달부였다. 오늘은 포플러 공장에 반짇고리 한 박스를 실었다. 트럭에서 굴러 떨어져 한날한시 만들어진 형제들에게서 추락한 낙오자를 싣고 개조 오토바이는 요란히 경적을 울렸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혹은 먼저 말을 걸고 싶다면, 나는 여기 있노라고.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주홍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데. 니키는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노르웨이의 숲 -기억력의 한계로 상호명이 틀린 줄도 몰랐다.-에서 판다는 딸기 몽블랑을 닮은 원피스는 둥근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아래로는 풍성한 실루엣의 비결인 프릴이 겹겹이 쌓여 나풀거렸다. 치마 아래 받쳐 입는 의류는 프릴이 아니라 페티코트라 부르는지는 몰라도 남을 뚫어져라 쳐다보기가 예의가 아닌 줄은 알았기에 니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꼭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마치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되는 새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튼 얘가 공장의 관리인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야 뒤로 보이는 건물은 나무판자를 켜켜이 쌓아 아기자기하게 파스텔 톤 페인트를 칠한 이층집이니, 공장보단 별장이 적절했다. “미안. 네비게이션이 실수했나 봐. 네가 포플러 씨네 외동딸이지?” “…하이디 포플러야.” “그래. 너희 공장에 이걸 전해야 하거든.” “나한테 전해도 괜찮아.” “정말?” “응.” 반짇고리 한 상자. 마침 하이디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부모님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고마워. 음, 너도 바느질 하나 봐. 어색함을 피하려는 회화. 목적성이 다분하되 내용은 의도적으로 가벼웠다. 그러니까 긍정의 한 글자로 끝내도 족했는데, 진심어린 대답은 우울에서 비롯한 변덕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사소하다. “원래는 아냐. 그런데 요즘은 시간이 남거든.” “몸 움직이기 좋아하나 봐.” “집 안에서는. 바깥은….” 상자 바깥은 황폐하지만 어수선해. 숨이 막힐 만큼 어지럽지만 내가 찾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어. 만난다면 기꺼이 내 안으로 초대할 텐데 도저히 발견하지 못했어. 하이디 포플러는 알았다. 실패에 이유를 붙인다면 출발하지 않아서다. 창문 밖으로 내다볼 뿐 현관에서 뒷걸음질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도 마냥 도망쳤다고 힐난하거나 사랑스럽되 나약한 사지를 무턱대고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해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기미가 희미해 숨이 막혔다. 아마 평생 이런 기분이겠지. 질문에 답하려면 대뜸 이렇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넌 이 땅에서 숨 쉬기 편안해? 난 말야. 뉴욕이든 톨레도든 큰 차이를 모르겠어. 흙과 먼지와 포플러 나무는 몸과 부모님은 만족시킬지라도 틀어 막힌 아가미를 바다로 데려다 주지는 않아. 똑같은 결론과 빈곤한 호흡은 사상의 진도를 막아 세웠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도 남에게 지혜를 구하기도 영 내키지 않고 오로지 한없이 가라앉고 싶었다. 입 밖으로 뱉은 질문도 듣는 사람으로선 불안정했다. 발화를 대신한 호흡이 가빴다. “무거워.” 중력이 아닌 산소가 날 짓눌러. 땅은 오히려 나를 멀리 떠나보내려는 것 같아. 그러나 부유감은 곧 무색해진다. 이제 공상은 지난 시간만큼 무게를 지니지 않았다. 페달에 닿았던 왼발을 젖혀 바이크를 세우는 몸짓 하나하나가 태연했다. 이어지는 대답도 깔끔하게 진심을 대변했다. 멋쩍음, 아쉬움, 입김을 내쉬면 다시 타오를 성냥 끄트머리의 미약한 기대. 불씨가 이토록 가볍게 닿는 이유는 매일매일 솔직해서였다. 불은 카나리아다. 여기 적정량의 산소가 있으니 살기 안전하다는 증거다. 네 곁에서라면 호흡할 수 있겠고 새장 안에 가두면 영원히 숨 쉬겠지. “그러면 혹시 뒤에 탈래?” “뒤?” “여기 뒷좌석. 아, 헬멧 씌워줄게. 천천히 달릴 거고. 그래도 사람 다리보다는 빠르니까. 가볍고 시원할걸. 여기서 쭉 달리면 해안도로인데, 가족들이랑 가 봤으려나.” “안 가 봤어. ……네가 데려다 줄래?” 하지만 왜인지 상자 속 세상을 넓힐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너이니 나를 어디로든지 데려가 줄 것이다. 하이디 포플러는 욕심 많고 영리한 여자 아이였다. 어기적거리며 발을 내딛다 고개를 돌렸다. 막 빠져나온 경찰서 유리 문 너머로 어머니란 여자는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샐쭉하고 뚱하게 입술을 비죽이려다 얌전하고 선선한 태도로 목례하기를 택했다. 저 사람 건드려서 좋은 것 하나 없음은 본능을 따라 체득했으니, 아직 거슬러본 적도 없었다. 니키 휴스턴의 동물적 직감은 정확했으므로 정답을 고른 자는 아무런 방해 없이 주차장 구석 바이크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백미러에서 건물 대신 선인장과 커다란 동물 뼈만 나올 즘에야 계기판의 바늘이 최대 각도로 벌어졌다. 달리는 동안 생각을 버리고 속도에 몸을 맡기기가 취미였으나 오늘은 남달랐다. 목적지를 두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자유로이 엔진을 울린다는 사실만 같았다. 아제 그는 완전히 혼자고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몇 주 전 몸담은 조직의 탈퇴를 선언했다. 조직이라 봤자 그네들끼리 꾸며낸 수식어지 실상은 불량 서클이다. 마음대로 달린다는 규칙이 권력 싸움에 힘입어 가타부타 꼬리가 길어지자 저부터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혼자라면 배덕의 그늘 아래 몸을 숨겨서 어머니의 명성을 깎아내릴 철부지 딸, 기대가 사라진 만큼 존재감도 희미해지길 꾀했겠다. 자유가 불가침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있는 듯 없는 듯 마는 낮은 자리 인생이 장래희망이었다. 건방진 배반을 막으려 조직에서 훼방이 시작됐다. 햄버거 소스 맛이 고약해서 발길 끊은 지 한참 된 패스트 푸드점에서 요리 도구가 사라졌는데 -도둑질이라니. 드럭 스토어도 아니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하물며 뒤집개를?- cctv에 자기가 찍혔단다. 저가 그 가게 맛을 욕했던 아이들을 증언대에 올릴까 고민하며 서에 들어가자마자 입 안이 썼다. 어쩐지 쉽게도 불러냈더라. 슬슬 아이의 일탈을 끊어내려던 어머니가 한 패를 먹었다. 수사망은 촘촘했고 유도 신문은 교묘했으며, 사회봉사의 마수가 목에 박힌 세 개의 점을 옭아매려던 순간이었다. 옆 자리 순경이 전화로 네, 네. 몇 마디 읊조리더니 어머니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알렉산드라, 왜 말하지 않았니? 그때 친구랑 같이 있었다고.” 포플러 댁의 따님이라면 확실하지. 그만 가 봐도 좋단다. 두 번째 떠밀림. 언제나처럼 여자는 자기 편할 대로 딸의 행보를 정했다. 그날은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으므로 니키는 같은 반 아이들과 떠들며 햄버거 가게를 욕했다. 하지만 만나지도 않았던 하이디 포플러의 증언이 경찰 삼촌과 군인 어머니의 마음을 샀다. 익숙한 부조리에 딴죽 걸 시간도 아까워 변덕을 부리기 전 곧바로 줄행랑쳤으나 다른 방향으로 의문이 차올랐다. 하이디 포플러는 왜 저를 위해 거짓말했을까. 그 애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눈치 챘다. 그런데 왜 대가 없는 호의를? 물론 니키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책략가였지만 판단은 야성의 감에 기반 했다. 반사적 과정은 대개 합리적이었으며 의심의 여지를 완벽히 구분해내 불필요한 순간에는 깨끗하게 물러나 멀끔한 손바닥을 보이곤 했다. 하이디 포플러에겐 반문이 필요 없다. 저로선 받아들이면 족했다. 그는 대가없는 호의로 소녀를 등 뒤에 태우고 바다까지 달렸기에 저를 구한 전화 역시 간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한 통의 사이렌. “…혹시……, 바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 이런 말…… 처음 해 보는 것 같아.” 우리는 너무도 달랐다. 니키 휴스턴은 보고 싶다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싶다면 나도 너처럼 조심스레 다이얼을 돌려 달칵이는 송신음을 기다릴 것이다. 천천히 어루만지기만을 허락 받은 유리 인형을 대하듯이. 하지만 니키 휴스턴은 어디까지고 달리는 사람. 뒤돌지 않고 전진하는 자. 자유롭기에 하이디 포플러의 부름을 받고, 영원히 자유만을 추구하기에 소녀에게 고개 숙인 동안에도 날개를 꺾지 않았다. 네가 부른다면 난 어디로든지 갈 거야. “지금 어디야?” “갈게, 어디라도.” “그리고 같이 가자. 이번엔 어디가 좋아?” 대신 함께 가야 해. “슬슬 바다가 질린 참이거든.”
Goldenwel by David Frankel Drama, Comedy / UK / 2022 / 101min / 12+ 지각이다, 지각! 세스 크라우벨은 녹색 로고가 박힌 커피잔들을 묘기처럼 아슬아슬하게 들고 직원 카드를 찍었다. 팔에는 새벽부터 공장에 가서 받아온 샘플이 가득 든 쇼핑백이 걸린 채다. (인공 감미료의 비율을 새롭게 조정했다는데 솔직히 말하면 설명의 반의반도 못 알아들었다.) 띠리링-. “아, 또! 가고 있다니까!” 골든구스의 CEO 사무실은 가장 위층, 비서실은 그 아래.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을 손이 없으니 빛처럼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탄다. 로비를 육상선수처럼 가로지른 세스가 닫히기 직전의 문을 간신히 잡아타자 안쪽 직원들이 알 만하다는 시선을 서로 주고받았다. 황금 날개의 그림자는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반짝이는 자리였던 까닭이다. 이 자리를 탐내는 예비 골든구스 비서가 백만 명이나 있다고? 말도 안 돼! 세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헉, 흐악. 좋은 아침, 감사합니다. 29층 좀 눌러주시겠어요?” 커피 다섯 잔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비서실의 왼쪽 책상에 앉아있던 선배가 펜을 내려놓고 일어나 본인 몫의 카페라테를 챙겨간다. 얄밉게 톡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덤이다. “3분 55초 늦었어. 어서 올라가 봐!” 골든구스 씨를 기다리게 하다니! 젠장, 그쪽이 새벽 5시 반에 전화해서 공장에 다녀오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거든요? 코트만 간신히 벗어놓은 세스는 묵직한 서류 더미와 커피잔, 그리고 샘플 상자를 양손에 든 채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번에는 CEO실로 직행하는 다른 엘리베이터다. 띵~, 몇 초 뒤 문이 열린다. “흠, 크흠, 안녕하세요. 골든구스 씨.” 얇은 은테 안경을 걸친 채로 다리를 꼰 브라이언 골든구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신랑감이다. 올해 32세, 젊은 시절에는 제법 난봉꾼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본격적으로 승계 과정을 밟으며 싹 정리했다더라. 쭉 뻗은 다리와 허리선이 돋보일 수 있도록 재단된 검은 정장은 100%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진 브리오니. 반짝이는 구두는 프라다. 클래식한 안경줄은 까르띠에. 하지만 명품 브랜드에 문외한인 세스는 그저 ‘코디가 열일하네.’ 정도의 감상만 남겼을 뿐이다. 브라이언은 엘리베이터의 종소리, 세스의 소심한 인사와 책상에 놓인 스타벅스 커피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서류를 한 장 넘긴다. 이제 가봐도 된다는 뜻인가? 개당 6천 파운드짜리 조명 한 번, 거울로 써도 될 만큼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 한 번 쳐다본 세스가 발을 떼기 직전,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느리고 고풍스럽고 우아한 포쉬 악센트. 미국인 부친에 독일계 영국인인 어머니를 둔 세스와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발음이다. “크라우벨, 내가 왜 업계에 대해서라고는 일자무식인 데다가, 이력서에 경력 한 줄 없는 초짜인 자네를 채용한 줄 아나?” 그야 전 경호원으로 채용된 거니까요. 대꾸하기 전에 브라이언이 재빠르게 타이밍을 잡아채며 말을 이었다. 세스는 자연히 억울해졌다.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밖에 모르는 고루하신 분들의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야. 그런데 넌 실망만 시키고 있군.” 그야 전 경호원으로 채용된 거니까요.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반박하려 했으나 브라이언은 틈을 주지 않고 한숨을 가볍게 쉰다.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마저 틀에 박힌 듯 세련된 포즈였다. 푸른 시선은 종이 위 빼곡한 활자 외에 다른 걸 담을 틈이 없다는 것마냥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려지는 축객령. “That’s all.” 아~!!! 보디가드로 채용해 놓고 비서 업무를 시키는 미친놈이 다 있네! 이번에야말로 때려치운다! 세스는 씩씩거리며 본인의 자리로 돌아와 분노의 마우스질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부상을 당하는 일만 없었어도 프로 복싱 선수로 잘만 활동하고 있을 텐데. 전 구단에서 러브콜을 보내던 유망주 시절이 바로 그의 전성기였다. 은퇴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란 경력이 되지 못하더라.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띠리링-. “크라우벨, 메일 다 보냈으면 이퀴녹스 사에 연락해. 로렌스한테 기간 체크해서 연구 자료 올리라고 전해. 캐스 블랙과 모델 컨택하기 전 마지막 컨펌도 잊지 말고. 프랑스 거래처와 미팅 시간 조율은 마쳤나? 저녁 7시에는 그리니치 예약. 내일은 6시 48분에 집 앞으로 데리러 와.” 줄줄이 읊는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적고 (참고로 반복은 안 해준다.) 이쯤이면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기겠구나 하던 시점, 브라이언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 캣타워도 청소해.” 그리고 뚝. “으악!!!!!” “시끄러워, 세스.” 두고 봐라. 1년만 버티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직하고 말 테니까. 사실 정말로 취직하고 싶었던 곳은 스포츠 업계란 말이다. 애초에 이곳도 보디가드를 구한다고 해서 온 건데! 열이 오른 상태에서도 착착 업무를 진행하는 세스는 이미 회사의 노예가 된 지 오래다. 도저히 못 버티겠으면 어느 날부터인가 품 안에 넣고 다닌 사직서를 얼굴에 던져줄 생각이었는데, 브라이언은 사람을 구슬리는 데에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분명히 알고 하는 짓인 게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쁘지 않았네.” 몇 주간 진행된 대형 프로젝트를 마친 후 ─그는 2주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뻗어 있는 세스에게 웃으며 그런 말을 던진다거나, 비서실에 보너스를 투척하는 걸 잊지 않는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돈이란 성과에 대한 무엇보다 확고한 증명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굽힐 바에는 부러지는 성정의 소유자 세스 크라우벨이 돈으로 굴복할 리 없지 않은가! 동트는 새벽에 출근해 야경을 벗 삼아 일하는 브라이언을 보고 소소한 핀잔을 건넸던 게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가 일찍 죽는다고요. 귓등으로도 안 들은 상사는 잔말 말고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나 해오라고 했다. 그보다는 고상하게 돌려 말했을 테지만 세스가 듣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골든구스가 손 뻗고 있는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 전부 다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니, 완전 컨트롤프릭 아냐? 이상한 건 세스가 브라이언에게 틱틱거리는 일이 늘어날수록 골든구스 씨에게 그렇게 굴다니 제정신이야?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죠! 브라이언이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중얼거리면 황금 거위를 신봉하는 선배는 옆에서 눈썹을 휙 치켜올리고는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스는 브라이언에게 ‘책’을 전달하는 위치까지 순조롭게 도달했다. Brian’s Ongoing Office worK, 통칭 BOOK은 그가 자택에서 처리하는 결재 서류 모음의 총칭을 뜻하는데, 그 두께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서재의 문을 노크하려던 세스는 문득 문이 조금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이언, 넌 아직 어려.” “저한테 와서 이러지 마시고 회장님께 그렇게 주장해보시는 게 어때요.” “아버지는 이미 늙었어.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겠니? 기회가 있을 때 잘 생각해보렴.” 거칠게 문이 열리는 순간 세스는 뒤로 물러났다. 부딪힐 뻔했잖아! 반짝이는 금발을 한 중년의 남자는 문 앞에 선 비서(25세, 185cm, 전직 운동선수.)를 보고 어깨를 움찔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골든구스 저택을 빠져나갔다. 안에는 흐트러진 셔츠를 걸친 브라이언이 앉아있었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한 꺼풀 벗어던진 그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피로가 가득했다. “그거 이리 주고 이만 가봐, 크라우벨.” 고요한 목소리가 얼음장으로 감싼 듯 냉랭하다. 세스는 직감한다. 아, 망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받는 대신, 세스의 다음 몇 주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비서 선배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날부터 브라이언의 옆자리는 세스가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배의 태도가 유난히 쌀쌀맞아진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더욱 곤란했다. 혹시 못된 상사가 이걸 노린 걸까? “크라우벨. 이퀴녹스 건은 어떻게 됐지?” 갑니다, 가요. 입 속으로만 하는 대답도 이제는 도가 텄다. 세스의 손은 벌써 키보드를 두드리며 필요한 자료를 띄운다. 브라이언이 다음 비서로 문어를 채용하더라도 세스가 일을 더 잘할 거다. 오징어 비서라면 쪼끔은 밀릴 수도 있겠다. 커피 10잔 한번에 들기 같은 분야에서. 그날도 한바탕 커피잔 묘기를 성공해 냈는데, 묘하게 회사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브라이언의 부재를 틈타 세스는 선배와 접촉을 시도한다.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만 어쨌든 대답은 받을 수 있었다. “거위들의 내분이야.” 그제야 세스는 그가 엿보았던 정보의 앞뒤를 이해한다. 흔한 재벌들의 집안싸움 이야기였다. 골든구스 회장이 손자인 브라이언을 총애한다는 사실은 이미 단물 빠진 가십거리였다. 회장의 아들 로버트 골든구스, 그러니까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젊을 때 방탕하게 놀아난 탓에 회장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헌데 ‘이미 늙은’ 회장이 부쩍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로버트는 반격을 결심한다. 거대한 황금알 앞에서는 아버지고 아들이고 없었다. 사업의 성공으로 말하자면야 그 누구도 브라이언을 넘어서지 못하겠으나, 편집증적인 통제 탓에 ‘뒷돈 나올 구석’은 전무했다.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이 알음알음 다른 편에 서버린 거다.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세스는 좀 입맛이 쓰다. 왜 그런지는 본인도 모르겠, 아니 알겠다. 컨트롤프릭 골든구스 씨가 아침부터 새벽까지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무장한 그 사람이 집에서는 놀랄 만큼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도 알아서 그랬다. 그의 고용주는 프라다를 입는 악마다. 그러나 그걸 벗어던졌을 때의 브라이언은……. 내가 왜 걱정하고 있는 거야? 이번만큼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골든구스 씨, 제 말 좀 들어보라고요. 당신 아버지가…….” “늦었어. 크라우벨. 그 입 닫고 당장 들어가도록. 자료는?” “여기 있, 아니, 이대로는 골든구스 씨가 실각한다고요!” 브라이언의 얇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복도 저편에서 찬란한 금발이 나타났다. 로버트 골든구스. 황금을 몸에 휘감은 남자. 돈을 물처럼 쓰고 술을 숨처럼 마시는 골든구스 지사의 사장은 브라이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라이언.” “안녕하세요, 아버지. 들어가시죠.” 로버트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브라이언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선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들을 노골적으로 경쟁자로 여기는 태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세스는 남자에게서 승리의 확신을 감지한다. 그해의 사업 결과와 내년의 사업 계획이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과연 브라이언은 실전에 강한 사람이었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은 로버트와 브라이언 사이를 흘끔거렸고 로버트는 허리를 쭉 편 채 의자에 기대앉는다. 지금이라도 한 대 갈기고 끌어내야 하나? 투자자들의 마음이 로버트로 기운 탓에, 로버트가 ‘브라이언 CEO를 해고시켜야만 하는 이유 7가지’의 운을 떼자마자 전폭적인 지지가 쏟아질 게 뻔했다. 젠장, 라이언. (세스는 답답한 나머지 상사의 애칭을 읊조린다.) 그렇게 태연하게 안경을 고쳐 쓸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당신 아버지가 “로버트 골든구스 씨 본인 되십니까? 경찰입니다. 헤로인 사용 및 공급 혐의로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경찰에 체포…… 엥? “헤로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함정이야, 함정이라고!” 이사회는 엉망이 되었고, 이제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은 끌려가는 로버트에게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세스는 단상에 선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PPT가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진다. 젊은 골든구스는 안경을 벗어 정장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마치 런웨이를 걷듯 여유롭게 걸어, 세스의 곁에 앉는다. “당신 설마…….” “다음 일정 준비해.” 로버트 골든구스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72시간 정도 화제가 되었다가, 유명 연예인의 불륜 소식에 사그라졌다. 그 72시간 동안 브라이언은 내내 일을 하고 있었다. 하긴 브라이언은 지금까지도 일만 했다만. 세스는 BOOK을 들고 서재 문을 두드린다. 오늘은 책을 내려놓는 것 외에도 할 말이 있었다. “알고 있었어요?” 오늘의 브라이언은 ‘지난번’보다는 나은 꼴이었다. 혼자서 와인을 즐기고 있었는지 책상 위엔 치즈 플래터가 있다. 함정에 걸린 쥐. 문이 닫힐 때까지 핏발이 선 눈으로 브라이언을 향해 삿대질하던 로버트 골든구스가 겹쳤다. 꼴꼴꼴 고급 와인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한 잔 들지.” “까딱하면 골든구스 씨도 위험할 수 있다고요…….” 세스는 여전히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말이 터져 나왔다. 공이 울리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세스는 여전히 프로 복싱 선수였다. 그리고 골든구스의 비서였고. “아버지는 내가,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생각하더군.” 결국 브라이언 혼자 잔을 비웠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제 발에 제가 걸린 셈이니 동정할 것 없어. 크라우벨. 내가 걱정되나?” “네.” 놀랍게도 여전히 그랬다. 브라이언은 다시 잔을 채운다. “네 선배는 겉면밖에 몰라. 내 정장 한 벌에 몇 파운드가 쓰였는지, 구두의 가죽이 얼마나 고급인지. 그것만 보고 숭상하지. 그런 애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해. ……내 곁을 줄 수도 없고.” 바로 머금는 대신 천천히 잔을 돌려 기울인다. 붉은 액체가 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너는 감이 좋아. 꽤나 똑똑하고…… 그래, 크라우벨. 나를 닮고 싶다면.” “한 계단 아래. 내가 네게 허락한 위치야. 마음에 들었을까?” “나는 내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면서까지 꼭대기에 서 있진 않을 거예요.” “삶은 어차피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아. 너도 이미 네 선배한테 같은 일을 하지 않았나. 이런 삶을 바란다면 그런 어려운 선택도 해야 하는 법이지.” 쾅. 책상이 흔들리고 와인이 쏟아졌다. 서재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융단이 흉하게 젖어 들었다. 살인사건이라도 난 것처럼. 정작 브라이언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난 당신 같은 삶을 바란 적 없어요.” 쏘아낸 목소리는 뜻했던 것보다 딱딱하다. 세스는 하나의 피사체 같은 브라이언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들여다 본다. 시선으로 잠긴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기라도 할 것처럼. 설원을 닮은 색을 하고 있으면서 담고 있는 온도는 뜨겁다. 브라이언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세스는 브라이언을 걱정한다. 브라이언에게 끌리고, 브라이언을 생각하고, 때로는 브라이언을 원한다. 그러나 결코 골든구스마저 포함하지는 못했다. 한 계단 아래? 세스는 황금의 위광에 눈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브리오니, 프라다, 까르띠에. 발음하다 혀가 꼬일 법한 무수한 브랜드의 이름을 외우고 싶지도 않았다. 세스가 사랑한 것은 흐트러진 셔츠. 한 꺼풀 벗어던진 얼굴. 숨기지 못한 피로. 비인간적인 CEO에게 때때로 드러나는 인간적인 모습들. 황금 거위의 동상은 끌어안고 싶지 않아. 차갑고, 딱딱하고, 살아 있지 않으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서재를 나간다. 브라이언은 붙잡지 않았고, 세스는 골든구스와 관련된 모든 번호를 차단했다. 끝내주게 요란한 퇴사였다. 골든구스의 연말 파티가 뉴스 한 꼭지에 등장했다. 구석진 테이블에서 세스는 적당히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연말의 술집은 북적거렸고 문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임에도 바텐더는 캐롤을 크게 틀었다. 세스는 콜캐논을 추가로 주문한다. 대중 친화적인 인테리어와 가격은 작은 화면 속 파티와는 천지 차이였다. “다른 세계 사람들이라니까! 쟤네들은 우리가 뭐 먹고 사는지도 모를걸.” 취객 하나가 툴툴거렸다. 문이 열리고 우르르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바텐더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만석이에요.” 대꾸한다. 다시 문이 열렸다 닫혔는데도 한 사람의 손님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만석이라니까요, 손님. 손님?” 그 손님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 세스의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세스는 위에서부터 들리는 아주 익숙하고 오만한 목소리를 인식한다. “이거, 나를 가장 실망시킨 비서 아닌가.” “이제 당신 비서 아니에요.” 맞은편 의자가 잡아당겨졌다. 이런 술집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브라이언이 앉았다.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눈을 들어 올린 건 세스 쪽이다. 보라색에 가까운 푸른 눈은 의외로 차분했다. “알아.” “그래, 이제 아니지.” 이제 상사와 부하가 아닌 두 사람은 떠들썩한 술집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술만 들이켰다. 브라이언의 입맛에 이런 맥주는 안 맞을 텐데도 군소리 없이 삼켜낸다. 건배도 없이 빈 술잔만 하나둘 쌓여갈 무렵, 브라이언이 취기를 빌려 중얼거린다. “내 비서가 가끔 네 이야기를 해. 그래도 크라우벨이 일은 잘했지, 하고. 후임을 뽑아야 하는데 마땅치 않은가 봐.” “그것 참 애틋하게 들리네요. 그립기까지 할 정도예요.” “네 자리는 아직 비어있어.” “정말요?” “그래.” 침묵이 이어진다. 세스는 포기한 어떤 가능성을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상상 속에서 그는 언제나 브라이언의 곁에 있었다. 때로는 비서로, 때로는 경호원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실, 면접을 봤어요.” 트레이너 쪽 일이에요. 재활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제 이름을 알더라고요. 분위기가 좋았어요. 아마 잘될 것 같아요. 브라이언의 대답이 늦게 돌아왔다. 당신도 가끔 상상을 했나요? 그 상상엔 내가 있었어요? “그거, 축하할 일이군……. 오늘 술은 내가 사지.” 브라이언은 다시금 잔을 든다. 그리고 세스는, 그리고 세스는 재킷 끝에서 튀어나온, 구겨진 흰 셔츠 소매를 발견한다. 순간 부글거리는 맥주의 거품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와도 돼요.” 불현듯 세스가 내뱉었다. “뭐?” “골든구스 씨, 운동은 조금도 안 하고 야근만 철야로 해대니까 나이 들면 몸 망가지는 거 금방이라고요. 당신 할아버지가 장수한다고 안일하게 굴지 말고요. 저, 잘하니까. 종잇장 같은 체력의 사회인도 자신 있어요.” “뭣 하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놈의 계단도 준비해 둘게요. 천국의 계단이라고 있거든요. 인기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크라우벨.” 겨우 맥주였다. 그래도 브라이언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 있었다. 독한 술을 단번에 들이마신 것처럼. “이게 다 무슨…….” “언제든 와도 된다고요.” 세스가 서툴게 덧붙였다. “That’s all.” 아무래도 브라이언의 포쉬 악센트를 완벽하게 재현하진 못했다. 입을 살짝 벌린 브라이언의 얼굴이 얼마나 멍청했던지, 세스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웃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긴장했다는 걸 알았다. 종이 울리고 환성이 퍼졌다. 사람들은 축하하며 폭죽을 터트린다. Happy New Year! 새로운 날. 새로운 시작. 새로운 고백. 그들은 위스키를 주문했다. 멋진 새해였다.
Moon River by Wong Kar-wai Melodrama / Hong Kong / 1995 / 105min / 15+ 3년이나 함께 일한 그녀를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만났다. 서로의 감정을 믿을 수 없어서 거리를 유지해 온 것이다. 좋은 팀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야 한다. -타락천사 中 No.1 사샤 나는 고독이 두렵다. 그러나 누군가를 곁에 두는 건 더 두려운 일이다. No.2 시 나는 고독을 모른다. 획이 많은 글자와는 친하지 않다. #01 일이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에 드는 일만 하면서 살지는 않는다. 나도 그렇다. 내 일은 킬러가 의뢰받은 타깃의 정보를 캐오는 것이다. 살인은 무섭지만 내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사전 정보를 조사하는 데서 그친다. 살인은 그 사람의 몫. 나는 그에게 정보를 팔 뿐. 이렇게 생각하면 절대 못 할 일도 아니다. 이것 말고는 딱히 돈을 벌 방법도 없다. 서핑 대회 상금만 높았어도 곧 죽을 사람 집을 드나드는 대신 파도를 탔을 텐데. 정말이지 야박한 세상이다. 킬러를 돕는 일을 한다고 매번 뒷골목에서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면서 사는 건 아니다. 내게도 가족이 있다. 애초에 가족이 없었으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신 가족에게는 비밀이다. 낮에는 거리를 걸으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한다. 아침은 생략하고 조깅을 하는 게 매일의 루틴이다. 타깃의 행동반경에 따라 가야 하는 곳이 매번 달라지지만, 운 좋게 바다 근처가 걸리면 그때는 아침 바다를 보면서 달릴 수 있다. 이런 평범한 하루하루를 영위해나가고 있었는데, 요즘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기분이 든다. 내가 조사한 사람은 이미 전부 다 죽었는데 말이다. 당신 누구야? #02 내가 하는 일은 간단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수단을 가리지 않지만 원한다면 리퀘스트도 받는다. 물론 요구를 들어준다는 말이 반드시 그 말을 따르겠다는 뜻은 아니다.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게 어렵지 않다. 나에게 의뢰를 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나에게 의뢰를 하고 배신을 한다. 그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그때쯤엔 알게 됐겠지. 오늘도 호텔 객실에 들어와서 사람을 죽였다. 이 호텔의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CCTV가 어디에 달려있는지 같은 귀찮은 것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내게는 협력자가 있다. 성가신 것들은 전부 그 남자가 도맡고 있다. 남자의 이름은 테디다. 나는 타깃의 심장에 칼을 박으면서 그가 이 객실을 어떤 순서로 훑었을지 상상한다. 발코니를 열고 바깥을 내다본 다음 창문을 닫았겠지? 침대 위에는 누워봤을까? 나는 시체 옆에 남은 빈자리에 몸을 구기고 누워보았다. 그는 나보다 키가 클 것이다. 몸을 펴고 누우려니 죽은 사람이 방해되었다. 나는 눈을 감고 죽은 시청자 대신 텔레비전의 동물 다큐멘터리 나레이션을 들었다. 「어떤 동물들은 살기 위해 서로 협력합니다. 서로가 이 관계에서 이익을 얻는 경우를 상리공생이라고 부릅니다.」 「흰동가리는 말미잘 촉수 사이를 자유롭게 오갈 뿐 아니라, 이곳을 포식자의 공격을 막아내는 보금자리로 삼습니다.」 「말미잘은 흰동가리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먹이 사냥에 도움을 받죠. 만만하게 보이는 흰동가리에게 따라붙은 포식자는 말미잘의 자포에 당하고 맙니다.」 「말미잘의 촉수에 있는 자포는….」 "상리공생." 마음에 드는 말이다. 그런데 말미잘은 왜 흰동가리를 잡아먹지 않는 걸까? 자신에게 도움이 돼서? 어떤 말미잘은 흰동가리를 먹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흰동가리는 말미잘의 독에 면역이 있다. 말미잘이 흰동가리를 죽이려고 하면 흰동가리는 유유히 헤엄쳐 떠나버릴 것이다. "말미잘도 지느러미가 있으면 좋을 텐데." 나는 팔을 휘저었다. 유영하듯이. 나는 말미잘이다. 나에게는 다리가 있다. #01 C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와 만나겠다는 전화였다. 필요해? 얼굴을 보고 싶어요. 곤란한데~. 왜요? C의 목소리는 낮고 투명하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나 아이처럼 말한다. 나는 사연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슬슬 이 일을 그만두려고 해. 그러니까 왜요? 질려서. 더 어려운 일이 하고 싶었어요? 그런 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번 의뢰만 끝나면 일을 관둘 거야. 네게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얼굴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아. 화내려나? 화내는 사람은 무섭다. 화를 내는 사람들은 불과 같이 주변의 모든 걸 태워버린다. 하지만 불이 붙는다는 건 땔감과 연료가 있다는 뜻이다. 그건 그렇게 나쁘지 않다. 수화기 너머의 C는 화내지 않았다. 그 사실이 크게 허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관계의 무게를 되새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약속 장소에 사서함 열쇠를 두고 일찍 떠났다. I tried to telephone They said you were not home That's a lie 비틀즈의 No reply가 C에게 대답이 되어줄 것이다. 나에게 다른 연인이 생겼다고 착각해도 좋다. 이 일은 싫다. 범죄자도 싫다. C가 있어서 지금까지 이 일을 해올 수 있었지만, 155주면 충분히 오래 함께 지냈다.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건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3년을 보낼 수 있었고, 그런데도 3년이 무거울 뿐이다. 이제는 헤어질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최근 붙은 스토커를 C에게 부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유도해봤자 C는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이건 차악의 가정이다. #01 "리니, 삼촌한테 인사해." 이런 나에게도 가족이 있다. 내 동생은 나와 똑같이 생겼지만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모든 일에 정면으로 맞서고 어디든 용감하게 달려가는 사람. 나는 아니다. 나는 모든 일에 뒤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돌아가더라도 안전하기만 하다면 얼마든지 샛길로 빠져 뱅뱅 돌아도 좋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아왔다. 동생의 아이는 작고 예쁘다. 아기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쥐어온다. 어른이든 아이든 타인은 사랑할 수 없다. 그 정도의 거리는 나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같다. 넘을 수 없는 선처럼 모두가 밖에 있다. 하지만 가족을 사랑한다. 가족의 가족이라면 나에게도 가족이다. 나는 동생의 이름을 절반 딴 아기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아기가 방실방실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만두는 게 맞아. 나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요즘은 어떻게 지냈어?" "일하느라 바빴지~ 직장이 날 가만 둬주질 않네." "조사 업무라고 했었지? 고생하네." "그래도 곧 관둘 거야. 그 준비 때문에 한동안은 바쁠 것 같아." 사실 바쁘지 않다. 그래도 포석을 깔아둬야 한다. 동생의 가족이 얽히는 건 바라지 않는다. 최근 들어 뒤를 밟히는 일이 늘었다. 몇 번 잡아보려고도 해봤지만 전부 실패했다. 이 위협이 내 가족에게까지 손을 뻗는다면 매우 큰일이 된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 한동안은 이 집에 오지 않을 것이다.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동생은 도와주겠다고 발 벗고 나설 게 분명하다. 내 특기는 거짓말이다. 하얀 거짓말은 양심의 모서리를 닳게 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 다음번에 만날 때에는 아기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을 것이다. 쨍그랑! "뭐지?" "내가 가볼게." 나는 동생을 제지하고 밖으로 나섰다. 동생은 아내와 함께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다. 단독 임무가 훨씬 마음이 놓인 나는 이 상황에 불안해하는 대신 안심하기를 우선했다. 애초에 오지 않고 전화로 말하는 게 나았을까. 창문 밑을 살피자, 어디서 굴러나온 건지 모를 도자기가 깨져 있었다. 그 옆으로 아이가 한 명 서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도자기 던지기 경주가 열렸냐고 물어보려고 했다. 그러기도 전에 아이는 내 옆의 벽을 짚었다. 작았다. 나는 아이의 소꿉장난에 어울려주는 심정으로 이 대화에 임해야 할 것이다. 그럼 살려주세요,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고 비명을 질러야 할까? "테디. 맞죠?" 아아…. 소꿉놀이는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다. "이거 계약 위반이야." "저희가 어떤 계약을 했었는데요?" "어떤 경우에도 서로의 일을 착실하게 돕고 상호보완할 것." "그 조항의 어디에 얼굴을 보면 안 된다는 말이 적혀 있나요?" "이건 일에 방해되지.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잖아." 3년이나 함께 일한 그를 오늘에서야 처음으로 만났다. 서로의 감정을 믿을 수 없어서 거리를 유지해온 것이다. 좋은 팀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없어야 한다. C의 말대로, 구두로 나누었던 계약 조항 그 어디에도 얼굴을 맞대면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당연하잖아. 얼굴도 모르는 상태로 3년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렇게 네 생각을 하게 되는데, 얼굴까지 보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 방심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 어차피 C는 유능한 킬러이니 구하려면 얼마든지 다른 협력자를 새로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꼭 나일 필요는 없다. "다시 정하면 되죠. 저와 교제해요." "그렇게 쉽게… 으, 응?" 의사를 완전히 무시당한 나는 그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노래를 들었잖아. C는 아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키가 작았다. 커다란 눈망울은 순수해보이기까지 했다. C는 그 반짝이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노래가 어쨌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C는 이별 노래를 들려준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를 못한 거다. "생각해봐, C. 우리는 서로의 이름조차 몰라." "이름이라면 지금도 불러주고 있어요." "무슨 말이야?" "시. 그게 제 이름이예요." "…시가 이름이야?" 무슨 이런 이름이 다 있어. 사샤는 시(C)가 당연히 코드네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는 처음부터 대놓고 이름을 까고 이 관계를 시작했던 거다. 혼란스럽다. 어디에 무게를 두고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뭐를?" "암컷 사마귀는 짝짓기를 위해 접근하는 수컷의 60% 이상을 잡아먹는대요." "그래? 무섭네~" "마지막 의뢰를 받아준댔죠. 그럼 제가 의뢰할게요." "어차피 죽이는 건 시면서. 시가 의뢰하는 거야?" "네. 다음 타깃은 사샤예요." "……." "이제 저에게 사샤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세요." 죽고 싶지 않아. 도망칠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거절할 방법을 모색하는데 옷깃이 확 당겨졌다. 입술에 말캉한 게 닿았다. 키스보다도 입막음에 가까웠다. 나는 우리의 거리가 그동안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던 걸까? 나는 소리 없이 그를 떼어놓느라 조금 고생했다. 토기가 올라왔다. 이대로 주저앉아 구역질이라도 할 것 같았지만 벽 너머에 동생의 가족이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아냈다. 시는 여전히 내 팔을 잡고 있었다. "거절하면 죽일게요." 그동안의 위협의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퇴로는 없었다. 나는 수긍이 빠른 편이다. 벗어날 수 없는 일에 발버둥쳐봤자 힘만 빠지기 때문이다. 지금은 도망칠 수 없다. 기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놀랐다. 시도 내가 누웠던 침대에서 내 생각을 했을까? "그래…." 내 대답에 만족한 듯, 다시 그의 입술이 내게로 다가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사냥을 당하는 기분이다. 내 몸에 꽂힐 작살이 날아오는 걸 보면서도 피할 수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00 Then, she kiXXed him.
Camilro by Andrew Lau, Alan Mak Film Noir / Italy / 2023 / 151min / 18+ 네로 도스탈리티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악을 무찌르는 정의 같은 건 어린애의 치기 어린 환상에 가까울지라도, 세상에 좋은 일을 행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었다. 그는 돌아갈 자리가 없다. 서로를 패밀리라고 부르며 으쓱이는 무뢰배들이 망가트리고 부순 그의 고향은 이미 번쩍거리는 환락가와 카지노가 점령한지 오래였다. 두 번째 고향을 지워낸 건 자의로 저지른 일이었다. 규율을 어기는 자는 퇴교다. 저런 낙오자가 되고 싶은가! 엄밀히 따진다면 고작 경찰 학교의 신입생이었던 그는 거부할 수 없는 상부의 지령을 따른 것뿐이지만, 완고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남자는 한사코 결정에 들어간 자신의 지분을 회피하는 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겼다. 어쩌면 그게 바로 그의 생존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족도 연고도 없는 간편한 희생양을 골라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무고한 자에게 총을 겨누고 깡패들 사이에 섞여 주먹을 휘두르면서, 입안에 고인 피를 뱉고 하얀 가루를 구분하고 팔아넘기고 맛보고, 프락치를 잡아 시멘트에 담그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살아남는 비결 말이다. “다들 널 부러워해. 보스가 이렇게 신임하는 자는 10년 만에 처음이라나. 비결이라도 있어? 혼자 쓰지 말고 좀 알려줘.” “돈께서 날 신뢰하는 만큼 그에 보답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쟝.” 네로는 뒷골목과는 어울리지 않는 우직한 답변을 하며 거래 장소로 들어선다. 3년간 함께해온 동료가 옆에서 몸수색을 받으며 투덜거린다. “그건 뻔한 이야기잖아. 치사하게 굴기는.” 가져다바친 여자 혹은 정보와 같은 요령. 쟝은 그런 종류의 잡기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네로 도스탈리티라는 남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물며 네로 자신마저 어쩌다가 본인이 여기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 살인을 경험하고 핼쑥해진 낯이나 민간인에게 가해지는 서투른 협박을 본 조직원들은 모두 ‘저 녀석 얼마나 버틸까?’ 내기 카테고리에 네로를 첫 순번으로 넣고는 했다. 헛구역질을 하는 20살의 청년을 보면 영 뒷세계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였으니. 이제 와서야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그 하나로, 완전히 노련해졌지만. 오늘은 멕시코 마약상과 거래를 트는 날이다. 그리고 이 판을 떠날 찬스다. 파스칼 국장은 1년만 더, 1년만 더를 늘어놓으며 순진하던 네로의 청춘을 한세월이나 쓰레기통에 처박았지만, 이번만큼은 고집을 부려서라도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그의 진정한 신분을 알고 있던 또 다른 사람인 교장이 한 달 전 타계하며 심경의 변화라도 온 것일까? 네로는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은퇴하고 싶어졌다. 강한 책임감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국장도 부정할 수 없을 성과를 내놓는다면 이번에는 마침내 끝을 볼 수 있으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싶었으나 그의 내면은 그럴 일은 없다며 조소했다. 취미가 요리라며? 그 말과 함께 와인 오프너를 선물한 국장이 쉽게 네로를 놓아줄 리 없다고. “네로, 이쪽으로.” “알겠습니다, 돈.” 서툰 이탈리아어로 Ciao를 연신 뱉어내던 마약상들이 껄껄 웃으며 돌돌 말린 담뱃잎을 건넨다. 친분을 나누는 돈 부온델몬티와 멕시코인들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 구석 테이블에 앉은 네로는 포장을 찢어 하얀 가루를 털어낸 후 곱게 빻았다. 후각으로 마약의 품질을 구분하는 재능이 있는 경찰이라니, 몇 년 전 그 사실을 알게 된 네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더랬다. 그 능력이 신임을 쌓는 데에 어떤 큰 역할을 했더라도 그런 자질은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다, 여전히. “……최상품입니다.” 네로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인자하게 주름이 진 얼굴로 너털웃음을 터트린 3대 부온델몬티가 새로운 거래처의 어깨를 두드렸다. 신호를 보내면 남은 물량을 받기 위해 조직원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경찰은 그걸 쫓으면 될 것이다. 묵묵하게 목례를 건넨 다음 “저 친구는 원래 좀 과묵해. 입이 무거운 게 장점이지.” 뒤로 물러나 창가에 선다. 바깥의 동태를 확인하는 척 유리창을 두드린다. 톡, 톡톡, 톡. 네로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서 자동차가 떠난다. 국장은 그의 몫을 할 테니 네로 도스탈리티 역시 자신이 수행해야 할 의무를 다하기로 한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입에 추를 다는지 선후관계가 반대인지는 모를 일이나 정보를 캐내려면 바닥으로 향하는 게 더 낫다. 중요치 않은 데이터의 함량이 늘어나는 건 단점이지만 거래가 거의 성립된 지금, 졸개들은 긴장이 풀려 있을 것이다. 네로는 떼를 지어 스페인어로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떠들어대는 무리를 발견하고 그 옆에 녹아들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척 고개를 갸웃하고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열면, 희미한 기름 냄새와 함께 주홍색 불꽃이 솟는다. 조용히 담배를 태우는 조직원이 스페인 출신인 줄은 상상도 못한 멕시코인들은 와르르 몰려들어 골목을 온갖 말로 채우기 시작한다. 담뱃재를 날리며 흰 연기를 뿜어내고 있자면 귀에 선명하게 꽂히는 소리가 있다. “이번 거래 끝나면 우리한테도 뭐 좀 떨어지겠지?” “그러면 좋겠다. 항구 간 녀석들만 배불리는 거 아냐?” “그 자식들도 바닷바람 맞으면서 존나 대기하겠지. 옆에 저 녀석 있으니까 입 조심해.” “뭐 어때,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네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타들어간 토막을 떨어트려 발뒤꿈치로 비벼 끈다. 신중하게 불씨를 꺼트리고 끄응, 하는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켠다. 다시 건물 안으로 향하는 등 뒤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흩어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로 돌아가 유리를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응시한다. 흐려지는 창밖이 네온사인으로 반짝였다. 톡톡, 톡. P-O-R-T 자신에게도 들리지 않는 희미한 두드림이었으나 악당을 잡아 일망타진하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파스칼 국장은 선명히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정확한 항구의 위치를 간결하게 전한다. 이제 전부 해결된 걸까? 긴장을 놓지 않은 채 은근히 실내의 기색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젠장, 당장 그만두라고 해!” 진노한 돈 부온델몬티가 책상을 쿵 친다. 지팡이를 내리찍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내부가 소란해진다. 삐삑, 삑. 흉터가 가득한 손에서 작은 휴대폰이 울린다. 그 안에 있는 게 어떤 내용이길래? 네로는 본능적으로 답을 내렸다. 스파이인 자신이 조직의 혈관에 침투해 있는 것처럼, 경찰청 어딘가에도 부온델몬티의 손이 뻗어있으리라고. 그리고 마약 검거 작전에 참여해 자신을 엿먹였을 것이다. 핵심 프로젝트의 일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뢰를 쌓아가면서, 누구도 믿지 못하고 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외줄타기를 이어가면서. 그 살얼음판에서 용케 미끄러지지 않고 고독한 길을 걸었을 테다. 젠장, 텄다. 바다에 쏟아진 마약은 모조리 녹아내릴 테고 쳐들어 올 경찰은 결국 소득 없이 이 사회를 좀먹는 마피아를 방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모든 게 망쳐졌음에도 분노도 허탈함도 아닌 이질적인 동질감에 전율하는 네로에게 구둣발이 다가온다. 모두가 묵언한다. 살벌한 긴장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 뇌수를 얼린다. 그는 바로 앞까지 도달한 의혹의 눈길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대응한다. 쾅! “크읍.” “……실례했네. 쥐새끼 우는 소리에 내가 과민했던 모양이야.” 조직의 유일한 이방인이 ─정통 이탈리아노가 아니라는 측면에서 그렇다.─ 오른팔에 감은 깁스를 내리친 돈은 뱀처럼 차가운 시선으로 외부 소통의 흔적을 찾았으나 부서진 석고 안에는 여즉 상처가 가시지 않은 맨살밖에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이해하겠지? 그 뜻을 담아 어깨를 두드린다. 네로는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감히 이곳까지 기어들어왔단 말이군. 나의 집과 대들보를 갉아먹으며 배를 불리는 쥐 따위가. 잘도.” 낡은 건물을 포위한 경찰차에서 연신 사이렌이 울리고, 수갑이 차이기 직전임에도 부온델몬티의 장은 10평 남짓한 공간을 느긋한 걸음으로 한 바퀴 돈다. 속내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매서운 눈이 모든 자의 낯을 핥듯이 관찰한다. 입에 문 시가를 여유롭게 질겅인다. 에스프레소에 올려진 크림마냥 부드러운 경고는 실로 위협적이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기어오르는 개새끼들의 목을 쳐왔고, 몸을 숨긴 쥐새끼를 노리는 포식자였다. 공들여 닦아주는 총신이 나이가 들었다고 녹슬 리 없다. “다들 알다시피 나는 거짓말을 좋아하지 않아. 맹세하지. 부온델몬티는 믿음을 배반한 개자식을 편하게 보내주지 않는다. 그 녀석은 오늘부터 덜덜 떨며 조금이나마 빨리 뒤지기를 바라야 할 거야. 차라리 제 머릿속에 총알을 박아넣는 게 나을 거다.” “…….” “뭔가? 다들 웃게. 실로 재미있는 이야기지 않나.” 하, 하! 경찰들이 총을 잡고 들이닥쳤을 때는 모두가 박수를 치며 웃고 있었다. 기이한 장면이었다. - 말이 없고, 다소 딱딱하고, 요령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리만치 성실한 사람. 살바토레는 그를 처음 본 순간 여러모로 자신과는 반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네로 도스탈리티. 이 거리를 장악한 부온델몬티의 간부 중 하나. 성은 아버지의 것이랬는데,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그 진의는 아무도 몰랐다. 드문 일이다. 부온델몬티의 보스가 타지의 인간을 신용하는 것은. “그러니까 저 인간이 보기 보다 머리가 좋다고 말하는 거야.” “흐음.” 오후의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동료가 말했다. 같은 특수상황부에 배속된 남자였다.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해서 남들보다 배는 고생을 해야 했을 테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잖아. 천성이지. 성실함이 수수한 재능인 것 같아도 오히려 정답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는 경우도 많거든.” 살바토레는 초콜릿이 든 크루아상의 부스러기를 입가에서 떼내며 심문실의 특수 유리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는 것은 붉은 머리의 남자, 도스탈리티. 부온델몬티의 일처리는 솜씨가 참 깔끔했다. 증거가 될 것 같다면 남겨두지 않았다. 그것이 물건이든, 사람이든. 그리하여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죽음과 재만 남았다. 신뢰하는 패밀리를 제외하면 그랬다. 쉽게 예를 들자면, 눈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는 값어치가 있는 증인이라는 소리다. 부온델몬티가 저지른 수많은 범죄에 대해 입을 열게 할 수만 있다면, 청장은 정말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안 되지.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부드럽게 닦아내며 살바토레는 생각했다. 저 남자가 지금 잡혀들어가서야 부온델몬티에는 필시 굉장한 곤욕이다. 무슨 생각 해? 곁에 있던 동료가 자신의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같지 않자 물어왔지만 살바토레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투명한 심문실 유리 너머의 도스탈리티는 수갑을 찬 채로, 아무 말 없이 탁자를 보며 앉아 있었다. 거친 심문으로 얼굴이 반쯤 뭉개져 있었는데도. 그 모습조차도 지독히 요령이 없고 성실해 보인다고, 살바토레는 생각한다. “우선은 이송할 건가 봐. 간만에 잡은 거물의 꼬리니까, 윗선에서도 소중하게 취급하고 싶은 모양이지.” “어디로?” “특수상황부 심문실보다는 미더운 곳이겠지. 어쩌면 본부로 갈지도 모르고…” “겁쟁이들. 언제 이송한대?” “이르면 내일 아침.” 동료와의 잔업 같은 대답이 짤막하게 이어지고, 살바토레는 잔을 들고 일어난다. “어쩌려고?” “입을 안 열잖아.” “수 있어?” “저런 사람일수록 고전적인 방법이 먹히는 법이지. 레코드 꺼줘. 내가 설득해서 뭐라도 정보를 얻어올 테니까.” “뭐? 네가 변호사도 아니고… 일처리 그렇게는 안 되는 거 알잖아.” “그러니까 그 부분을 어떻게든 해달라는 거야. 이대로라면 특수상황부의 자존심이 어떻게 되겠어?” 동료는 투덜대면서도 그 사실에 순응한 듯 순순히 폐쇄회로를 중지시킨다. 살바토레는 바닥에 검은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도록 내려놓는다. 특수상황부의 자존심, 이라니 웃기고 있네. 무엇보다도 저 남자가 뭔가 불어버리면, ‘아버님’도 곤란하실 테고. 무언가를 털어놓을 것 같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직에 쥐새끼가 숨어든 것 같다는 얘기로 부온델몬티의 분위기가 안 좋던 참이었다. 그 와중에 중요한 간부까지 잡혀들어가면 아버님의 위신이 어찌 되겠는가. 살바토레는 심문실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보통 문의 배로 묵직한 철문이 닫히자 방 안의 압력이 높아지고, 심문실 안의 공기도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네로 도스탈리티.”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상처가 가득했다. 그러나 왼뺨에 난 상처만은 꽤 오래전에 난 듯했다. 칼로 베인 것처럼 예리한 상처였으나, 벤 사람이 주저했는지 깊게 파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 사건에 배속된 살바토레라고 해. 잘 부탁하지.” “….”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살바토레가 악수를 청하듯이 손을 내밀었지만, 그 손을 붙잡는 일도 없었다. 꼭 고양이 같은 남자, 라고 살바토레는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살바토레는 미소 지었다. 과연, 부온델몬티의 간부쯤 되면 쉽사리 승복의 뜻을 보이지 않으리라. 살바토레는 왼손 검지에 끼고 다니던 반지를 슬쩍 벗었다. 서 안에서는 절대로 벗지 않는 반지였다. 혹자는 그 반지의 의미를 궁금해하긴 했지만, 단순한 악세사리라고 설명하면 다들 대체로 호기심이 사그라들곤 했지. 드러난 손가락 아래에는 반지의 안쪽에 눌려 부온델몬티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도스탈리티의 눈이 커다래지고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살바토레는 놓치지 않았다. “당신…” “쉿.” 살바토레는 당황해 황급히 입을 열려는 도스탈리티를 향해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워 보인다. 떨리던 눈동자가 몇 번 구르더니 다시 침착해지고, 무엇을 원하냐는 듯 다시 이쪽을 바라본다. “괜찮아. 지금 폐쇄회로 꺼졌어. 보이지?” 살바토레는 심문실 구석에서 붉은빛을 깜빡이며 상황을 녹화하던 카메라를 가리킨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듯 카메라는 어떤 빛도 내지 않고 고요하다. “그래도 밖에서 특수상황부 동료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침착하고 수상하지 않게 움직여.”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잇새로 미끄러지듯이 말을 건넨다. 도스탈리티는 무언가 납득했다는 양 이쪽을 노려본다. 노려본다기보다는, 협력하겠다는 뜻에 가까운 눈빛이었지만 그 사실은 살바토레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하리라. 살바토레가 프로필이 적힌 서류로 시선을 떨구며 느릿하게 웃는다. “네로 도스탈리티. 이름이 멋지군 그래.” “필요한 대화만 하지.” 도스탈리티는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는지 매서운 눈이었다. 물론 살바토레는 그런 날카로운 반응에 기가 죽을 치가 아니기는 했다. “요즘 서나 조직이나 흉흉하더군. 쥐새끼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아나?” “모르는 바는 아니지.” 도스탈리티는 무엇인가를 반추하듯 시선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대답을 들으며 살바토레는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의 쥐새끼는 모르지만 적어도 특수상황부의 쥐새끼는 실존해. 이런 형태로. 내가 서에서 유능한 취급을 받으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조직 내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를 교묘하게 이용했기 때문이거든. 그러니까… 명석한 당신이라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풀려나고 싶으면 뭐라도 물어다 바치라는 위협으로 들리는데.” “위협이 아니라 상생이야.” 살바토레는 꼬집듯이 그 말을 정정했다. “난 부온델몬티에 치명적인 정보를 바라는 게 아니니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당신도 간부라면. 3대께서도 그 일을 바라실 테고.” 도스탈리티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버석이는 입술을 열었다. 조금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알았어.” - 심문실에서의 불편한 만남 이후, 도스탈리티는 사법 거래로 풀려났다. 살바토레의 열띤 설득이 효과가 있었다는 보기 좋은 명분과 함께. 도스탈리티가 내놓은 정보로 특수상황부는 소소한 성과를 올렸고, 청장도 만족스러운 표정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 정도 성과로 참아주기로 한 모양인지 조용했다. “당신 무모해.” “내가?” 신문을 한 손에 들고 선글라스를 낀 채로, 살바토레가 대꾸한다. 카페의 차양 아래 일자로 놓인 의자 옆 칸에는 네로 도스탈리티가 앉아 있었다. 특수상황부에서는 도스탈리티를 미끼로 쓰기로 작정한 듯, 살바토레에게 도스탈리티의 감시를 명했다. 무언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바로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하필 하고 많은 부원들 중 자신이 감시를 맡게 된 우연을 살바토레는 유쾌하게 웃어넘겼다. 그리하여 기묘한 공존이 이어졌다. 살바토레는 그를 감시한다는 명목하에 하루 종일 공원이나 카페에서 단둘이 죽치고 앉아있곤 했다. “부온델몬티 안에도 스파이가 있다는 사실 알고 있었잖아. 내가 그 스파이면 어쩌려고 그 반지를 벗었지?” 대답을 고민하듯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아니, 살바토레에게는 대답이 결정되어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 얘기할지를 고민한 것뿐이지. “당신이 솔직해 보여서.” 살바토레는 손 깍지를 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도스탈리티를 바라본다. 입가에는 예의 여유로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당신은 왠지 남을 속이는 일 같은 것 못할 거 같아.” “그렇다면 성공했네.” 도스탈리티도 지지 않고 장난스럽게 맞받아친다. 요 몇 달간 감시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감시를 이어가며 두 사람에게는 유대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난 사실 부온델몬티를 무너뜨리기 위해 경찰 쪽에서 보낸 첩자거든.” “오.” 짧은 휘파람. 살바토레의 키득거림이 이어진다. “그럼 위장경찰과 스파이가 지금 대낮에 카페에서 이러고 앉아있는 거야?” “그렇게 된 셈이지.” “코미디 같네.” “시청률은 잘 안 나올걸.” “능글맞은 구석이 있어, 당신.” 살바토레는 그렇게 대꾸하며 에스프레소 잔 바닥의 설탕을 할짝였다. “그럼 장르 바꾸자.” “뭘로?” “로맨스 스릴러.” 도스탈리티의 멱살이 잡히고, 살바토레가 설탕이 묻은 입술을 기울인다. 입술과 입술, 혀와 혀. 도스탈리티의 예상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정중하고 유치한 키스에서는 달콤한 설탕의 맛이 났다. 뭐, 뭣. 도스탈리티의 입술 사이로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살바토레는 놓치지 않았다. 도스탈리티의 당황 따위는 살바토레의 키득이는 웃음소리 사이에 전부 묻혀 사라진다. 내기 할래? 치기 어린 목소리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먼저 반하는 쪽이 지는 걸로 하는 거 어때? 먼저 상대를 사랑하게 되어서 배신할 수 없게 되면, 스파이로서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는 거잖아.” 입술이 떨어지고, 어이없이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마른 세수만 벅벅이던 도스탈리티가 내놓은 대답은 한마디뿐이었다. “……당신 무모해.” “하하!” 살바토레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하오의 햇살 아래 부서진다. - 이른 아침부터 까마귀들이 떼 지어 태양 가까이 날아올랐다. 내리쬐는 나폴리의 여름 햇살을 받은 파도의 포말이 잘게 빛났다. 네로와 살바토레는 근처 가게에서 포장한 라자냐를 가운데 두고 인적 없는 부둣가에 앉았다. 조직의 눈을 피한 만남이었기에 일부러 사람의 접근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로 골랐다. 맥주 캔을 따면 청량한 소리가 거품과 함께 올라온다. 시원한 맥주를 몇 모금 삼킨 살바토레는 호탕하게 캔을 내려놓았다. “평소보다 음식이 짜다니까.” “주방장이 소금과 설탕을 착각하기라도 한 모양이지. 그냥 먹지 그래, 미식가.” “누가 안 먹는대? 짭짤한 게 안주로 삼기에는 딱이로군.” 라구 소스를 듬뿍 묻힌 면을 입에 쏙 넣은 살바토레가 볼을 우물거린다. 네로의 혀가 포크의 납작한 면을 핥았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는 모습에 그를 응시하던 살바토레가 입꼬리를 올린다. 잔잔한 대화가 이어진다. “잘 모르겠는데.” “당신은 성격만큼 미각도 둔하네.” “예전에는 아니었어. 나 요리도 제법 하는데.” “그런데 지금은 왜?” “알고 싶어?” “오…, 내가 화제를 잘못 꺼낸 모양이군. 우리 다른 이야기 할까?” 키득거리며 블랙 조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공기에 섞인 짠 내음을 들이마신다. 경찰과 조직원, 혹은 조직원과 조직원, 그것도 아니면 경찰과 경찰 조합인 비밀스러운 회담은 해가 하늘의 중앙에 오르기 전에 끝이 날 것이다. 시간을 가늠하던 살바토레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네로와의 만남은 왜 이토록 순식간에 지나버리는 걸까? “있잖아, 당신은 어쩌다가 조직에 들어왔어?” “역시 경찰 스파이라는 말 하나도 안 믿은 거지?” “하하.” 알 만하다는 얼굴로 픽 웃은 네로는 더 말을 얹는 대신 질문의 대답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기야 경찰의 첩자가 맞는 주제에 본인이 스파이라고 여러 근거를 들어 주장하는 게 더 웃긴 일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 라는 게 가장 명확하려나.” 그는 언제나 자신의 길에 책임을 지고자 노력했지만 이리저리 떠밀린 네로 도스탈리티의 인생에 떨어진 무수한 재난들이 전부 그의 선택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고향을 떠나고, 경찰에 스파이까지. 그 과정에서 당한 배신은 셀 수 없었고 네로의 우직함은 홀로 선 그에게 무수한 흉터를 남겼다. 그는 벌겋게 벼려낸 쇳덩어리와 비슷한 자질의 소유자였으나, 부러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 입지 않는 건 아니다. 살바토레가 중얼거린다. 당신 지쳤어. 그리고 혼잣말처럼 속삭인다. “어쩌면 나 역시 그럴지도 몰라…….” 네로는 그날에 머무르고 싶었다. 경찰도 조직도, 정의도 악도, 생각할 거라고는 무엇도 없는 평화로운 시간에서 영원한 쳇바퀴를 돌리고 싶었다. 토토. 그 짧고 귀여운 애칭이 어울리지 않는 작은 남자에게 패배하고 말았으므로. 햇볕을 머금은 밀색 머리카락, 한쪽 색이 바랜 눈동자, 콧잔등의 귀여운 주근깨.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와 조금 도톰한 입술, 오만한 악당 같은 웃음과 상기된 뺨, 깊은 이해를 담고 자신을 담는 그 눈. 당신은 왜 가끔 울 것 같은 표정을 할까? 나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포기하지 말라고 하고 싶어져. 그에게 무엇을 포기하지 말라 요구하는지도 모른 채 막연한 소망을 한다. 비밀을 감추고 있는 나의 작은 겁쟁이. 난 어떻게 해도 당신을 싫어할 수 없어. 3대 부온델몬티는 죽었다. 부온델몬티의 손속에 지독하게 고문당한 국장의 시체가 벼락처럼 택시 위로 떨어지는 순간 깨닫는다. 이제 살바토레의 정체를 아는 유일한 자는 세상에 자신뿐임을. “당신은 내 최악이고, 난 당신을 사랑해.” 네로는 웃었다. 시체도 온전히 남기지 못하는 방식으로 언제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해온 삶이었는데, 기어코 미련 하나를 세상에 남기고 말았다. 사랑하는 나의 토토. 만약 당신도 나와 같다면 우리 서로를 향해 겨눈 총구를 내리자. 증오하는 대신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자. 우리에게 남은 게 손잡이가 허술한 냄비, 싸구려 에스프레스와 좁은 아파트와 플라스틱 테이블, 낡은 부엌으로 이루어진 인생일지라도. 함께 새로운 출발선에 서서, 서로가 서로의 돌아올 곳이 되자. 네로 도스탈리티는 화약도, 비린내도 섞이지 않은 그 바람을 자유라 명명한다. 어쩌면 나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아.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처음 만난 순간부터. 살바토레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으나 네로는 진실로 확신했다. “있잖아. 나는 항상 당신 편이야.” 살바토레는 떨리는 눈으로 네로를 관망했다. 겨눠진 총구가 그리는 자취를 더듬었다. 무너지는 토사를 입에 넣은 것처럼 숨이 막혔다. 가까스로 지탱해온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의 모든 행로는 섬세하고 신중하게 이루어져야만 했다. 사람과 상황을 기민하게 살펴가며 살아왔다. 그런데 지금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있었다. 그동안 봐온 모든 얼굴 중 가장 편안한 안색을 한 네로의 입이 열리면, “그러니 자유롭게…….” 탕! 총성이 네로를 경찰로 남겨두었다. - “세상에, 보스가 10년 전 후계자를 잠입시켰다는 건 과거의 허황된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퉷, 더러운 배신자 같으니. 위험한 상황이셨군요. 이제 안심하십쇼!” 모든 미래가 저무는 건 이마에 박힌 총알 하나면 충분했다. 단 하나의 탄환이 죽음과 생을 갈라놓았다. 살바토레는 공을 세웠다는 사실에 들뜬 기색으로 재잘거리는 낯을 보고 나서야 작금의 현실을 인정했다. 네로를 미행한 게 분명하다. 수상해 보였겠지. 10년을 의심받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아까까지만 해도 굳어있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변수는 하나, 살바토레다. 네로가 무엇을 말하고 싶었든, 이젠 없다. 너무 늦어버렸다. “……자네, 쟝이라고 했나?”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돌아오실 거죠? 그 세월을 잠입해 계셨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다른 녀석들도 알게 되면 혀를 내두를 거라고요.” “그래, 너 말고는 모르는 일이고…….” “옙, 하지만 걱정 마요. 우리는 패밀리 아닙니까. 제가 도와줄게요. 보스는 절 푸대접했지만 저도 꽤 쓸만합니다.” “그래, 잘 부탁하지.”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간다. 여섯 발의 총성이 더 울렸다. 그는 리볼버의 탄창을 모조리 비웠다. - 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 동양의 불교에서 묘사하는 지옥이라고 했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몇 번이나 그 문장을 읊조렸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부온델몬티의 간부가 아니라 경찰로서 죽기를 택한 것이다. 장례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10여 년에 가깝도록 위험한 잠복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낼 수 있었던 건 네로 도스탈리티 뿐이라고들 했다. 보드카를 몇 잔이나 넘겼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뒤틀리는 속. 아니, 어쩌면 뒤틀리고 있는 것은 내장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살바토레는 빗방울이 미끄러져 선을 그리는 창 밖을 내다본다. 흐릿하고 어두운 하늘 때문에 유리창에는 자신이 비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어떻지? 이어지는 자문. 살바토레는 한 번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 본 적이 없다. 오빠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밟았던 부온델몬티 저택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오빠의 기묘한 죽음 이후 이어졌던, ‘살바토레가 되어 경찰에 잠입하라'는 명령. 그리고 그 명령을 내린 3대조차 죽어버린 지금, 살바토레는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아니, 길이라면 있었지. 살바토레는 목눌하고 무뚝뚝하던 네로의 옆얼굴을 떠올렸다. 왠지 그 고지식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살바토레는 전혀 다른 자신을 상상하게 되곤 했다. 가족 같은 건 폐어촌에 버리고 왔노라며, 이제 가족이랄 것도 없다고 고백하는 그의 손을 붙잡고 말하고 싶었다. 그만두자고. 당신도 웃기는 건달 흉내 그만두고, 나는 부온델몬티의 인간이길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쳐버리자고. 이탈리아나 스페인은 위험하니까 조금 먼 곳으로. 아무도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곳으로. 예를 들어 있잖아, 뉴욕이라든지, 오타와라든지… 아니면 상해나 북경도 좋아. 그것도 아니면 세련된 도시 같은 곳이 아니어도 좋다. 흙먼지가 날리는, 새로운 소식이라고는 하루에 두 번 정류장에 섰다가 떠나는 버스뿐인 곳,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철저한 이방인으로 살자. 그러나 간사한 마음은 한 번도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가 어떤 인간인지 알면서도 그랬다. 그렇게 말했더라면,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건 네로 도스탈리티를 믿지 못한 건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 건지는 이제 와서는 알 수 없었다. 시체하고 악수하는 사람도 있나? 3대, 그러니까 아버님께서 싸늘한 목소리로 국장을 부르고 경찰청을 나설 때 그 곁을 호위하던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기억한다. 부서진 깁스가 그날 거래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케 했다. 당신은 칼날 위를 걸어가는 것처럼 몹시도 지친 얼굴. 그리고 이쪽을 한번 흘긋, 쳐다보았었지. 살바토레와 마주친 눈에는 질척한 피로가 담겨 있었다. 그걸 보고 살바토레는 당장에라도 그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럴 걸 그랬어.” 혼잣말이다. 외창을 여전히 거센 빗발이 두드리고 있었다. 대답은 아무에게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네로 도스탈리티가 살아 있었다면 고개를 끄덕이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어깨를 으쓱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구석에서는 묘하게 능글맞을 때가 있었던 남자니까. 그렇지만 이곳은 무간도. 지옥에서도 제일 낮고 비천한 곳. 아무리 바라도 떠난 이에게서 대답은 돌아올 리 없었다. 보드카의 병은 비어가고 밤은 길어진다. 살바토레는 어쩌면 당신을 떠나보낸 오늘 밤이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리하여 영원히 후회하도록. 어쩐지 그 감각이 슬프다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바토레는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당신의 온기가 아직 현재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그 고통이 잠시 유예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싸우는 와중에는 눈이 파여도, 뼈가 부러져도 이상할 정도로 고통스럽지 않은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래, 네로 도스탈리티. 당신이 나의 지옥이야. 내일이 되면 팔이 꺾이고 다리가 날아가는 듯한 괴로움이 틀림없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당신의 온기가 묻어 있는 오늘은 더 이상 없을 테니까. 네로 도스탈리티는 마지막까지 누구에게도 살바토레가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참으로 굳은 함구였다. 네로의 입장에서는 살바토레에게 활로를 열어준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살바토레의 생각은 달랐다. 차라리 스파이인 게 알려져서 당신과 함께 죽었더라면 이 밤이 영원히 이어지는 일도 없고, 당신의 온기가 영원히 사라질 일도 없고, 당신이 뜻했는지 아닌지조차 불확실한 유지를 이어나가야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우리의 영혼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 둥지를 틀고 영원히 자유로운 도망자로 살았을 텐데. 비어버린 보드카 술잔 위로 후두둑, 비가 떨어진다. 한 쪽밖에 없는 눈에서도 빗방울은 쉽게 넘쳐 흘렀다. 보드카 1.5온스에 눈물을 1대시. 감상과 애도로 혼탁해진 보드카가 잔 밑바닥에 고였다. “정말 싫어, 당신 같은 남자…” 눈물이 먼저, 그리고 그것을 뒤따르듯이 그제야 연약한 훌쩍임이 흘러나온다. 깊은 애정에는 네로 도스탈리티라는 이름이 붙었다. 살바토레의 영혼이 간신히 자리 잡은 최초이자 최후의 장소. 무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