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piercer>
- The Eternal Track

- 2023년 9월 8일
- 10분 분량

The Eternal Track
<Snowpiercer>
by Bong Joon-ho
Distopia / UK / 2013 / 125min / 15+
▶ Station. Ekaterina Bridge
“세실리아, 대단한걸.” 그는 전투 인원을 세실리아라고 불렀고,
“야, 뒤로 빠져있어.” 세실리아는 그를 ‘야’라고 불렀다.
묵직한 손도끼가 날아와 무장한 남자의 머리에 박혔다. 쩌적. 그는 알고 세실리아는 모르는 수박 갈라지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일격에 사람의 머리를 쪼갠 건 충동적이거나 무모한 행동이 아니었다. 신중하고 과감한 몸짓이었다. 이쪽으로 겨누어진 건 잘 다듬어진 총이었고, 상대에게 날릴 수 있는 건 도끼나 잭나이프 따위의 투박한 무기가 전부지만 판이 어디로 기울어졌는지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꼬리 칸에서 일어난 항쟁은 선두 그룹이 대승하여 남은 잔당들을 겨우 남겨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식이 느리거나 전의를 상실한 패잔병 정도나 몇몇 남아있었다. 처리는 간단했다. 그건 세실리아가 우수한 전투 인원이기도 했고, 아티스가 머리칸의 고급인력이라는 걸 적군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손을 비비며 생명을 구걸하는 병사들의 목을 세 개 정도 수확하자 기차 칸은 금방 고요해졌다. 통제할 수 없다면 외면한다. 머리는 꼬리를 잘라내며 나아간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멈추지 않는 것……. 열차는 그런 식으로 박동하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는 사실.
데굴데굴, 세실리아의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물론 진짜 머리가 바닥을 구르고 있기도 했다. 다행히 세실리아는 바보가 아니었다. 아티스는 개의치 않고 가운 소맷자락에 튄 핏방울을 마구 문질렀다. 더러워졌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널 두고 갈지 말지 고민을 좀 해야겠어.” 세실리아가 적에게 뽑은 나이프를 닦으며 대꾸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아티스가 펄쩍 뛰었다. 세실리아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전진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아티스가 냅다 그의 등에 매달렸다. 이거 놔라. 쇠파리라도 달라붙은 양손을 휘저었지만, 굳이 잡아떼진 않았다. 세실리아의 투박한 손바닥이 아티스의 팔을 잡아당기면 하얀 옷에 피며 검댕이며 온갖 더러운 것이 묻어났다. 더러운 자취에 역으로 인상 쓰게 되는 건 세실리아였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지.”
“아까는 더럽다며?”
“가운이 더러워지는 게 싫은 거지, 네가 싫은 게 아냐.”
“…….”
새하얀 가운을 걸친 아티스가 감옥 칸 맨 아래에서 발견됐을 때, 모두가 시한폭탄을 발견한 듯 떠넘기기 바빴다. 온갖 악취를 풍기는 꼬리 칸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확실히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졌다. 가슴팍에 달린 연구원 명찰이 명징했다. 세실리아의 의견도 꼬리 칸의 동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위험인물 감시라는 핑계가 붙었다. 일대일로 아티스를 담당해 달란 지시가 떨어졌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곧바로 죽여라, 말에 숨은 의미는 간단했다.
그게 고작 다섯 시간 전의 일이다. 입을 열면 말꼬리를 잡기 바빴고, 입을 다물면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냐 추궁하기 시작했다. 세실리아가 아티스를 협박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데에는 5분, 적당한 말로 구슬리는 것이 초등학생보다 쉽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40분이 걸렸다.
머리와 꼬리. 태생부터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니, 어차피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아티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평행선도 조금만 기울어져도 언젠간 만나는데, 너랑 내가 만났잖아? 그렇게 아티스는 조금씩 몸을 기울였다. 접점이 생겨나자 뻗어나가긴 금방이었다.
“지금 감동했지?”
“조금?”
“…왜 이렇게 순순히 대답하지?”
태생에 분노를 제어하지 못하는 성질머리, 미친놈, 꼬리 칸의 단합과 결속을 깨는 골칫덩이, 좀벌레, 그를 부르는 별칭은 많았지만, 성질은 무쇠와 같아 본인의 부당한 일에도 동하는 일이 없었다. 어떤 이유에선지 감옥 칸에 격리당한 아티스는 머리의 불순물임이 분명했다. 꼬리의 불순물, 세실리아는 이제 와 그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때면 그 쇳덩이 같은 마음도 따라 기울게 된다. 아티스는 조금은 꼬리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일지 모른다고. 바닥과 꼭대기의 삶을 살던 둘이 여기까지 동행한 건 어떤 인력이 작용했기 때문일 거라고. 부외자가 부외자를 바라본다. 세실리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어보기로 한다. 사람과 사이의 연쇄를.
“있잖아.”
“……뭔데?”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다음-다음-다음 칸까지 동행해 주라.”
“거기가 어딘데?”
“너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뭔진 비밀이야! 팔을 감은 채로 몸을 들썩이며 그가 웃었다. 동시에 세실리아도 작게 웃었다.
본 적 없는 온실의 푸름에 눈이 부셨다. 선명한 흰 빛이 안구를 쿡쿡 찔렀다. 이게 수박이야, 아티스는 태연하게 말하며 온실 구석에서 둥근 야채를 굴려 가져 왔다. 이어 허리춤에 매달린 세실리아의 손도끼를 낚아채 반으로 쪼갰는데, 그 자세가 허술하기 그지없어 결국 세실리아의 일거리가 됐다. 새빨간 과즙이 사방으로 튀고, 달큰한 향이 물기를 머금은 흙내와 뒤섞였다. 잘 익은 수박은 꼬리 칸에서 태어나 나고 자란 세실리아의 입에는 너무 달았다. 한 번 먹어본 걸로 족해, 세실리아가 시큰둥하게 읊었다. 질세라 앞으로 너 줄 일은 없을 거야, 하고 아티스가 대꾸했다.
세실리아는 토라진 아티스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평균적으로 열차 두 량을 지나면 알아서 화가 풀렸기 때문이다. 단정한 원목으로 쭉 늘어진 스시바는 텅 비어있었다. 아저씨가 어디로 가셨지? 안 보이네. 원래 스시는 일 년에 딱 두 번만 먹을 수 있는데, 난 수석 연구원이기 때문에 만들어달라고 하면 다 만들어주셔. 이 앞의 아쿠아리움에 있는 물고기 중에서 내 손을 거치지 않은 건 없거든……. 아티스의 설명이 방대했다. 다락방에 아껴놓은 장난감을 꺼내어 친구에게 자랑하는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였다. 유감스럽게도 이 열차에 다락은 없었고, 세실리아의 감상은 간단했다. 너 되게 태평하네.
“이게 다야?”
“꼬리 칸에서 나고 자랐다면서?”
“그런데.”
“좀 더 놀라거나 호들갑 떨 줄 알았지. 목각 인형처럼 반응이 그게 뭐야?”
이때다 싶어 아티스가 마구 핀잔을 줬지만, 세실리아의 얼굴에 떠오른 실망은 노골적이었다. 심드렁한 표정이 되려 그 나이대에 맞는 소년의 표정 같았다. 처음 접하는 신문물을 보고 눈을 반짝이며 좋아할 천성이 못 된 거다. 아니면 꼬리 칸의 구석에서 지내느라 감수성이 메말라 버렸거나. 빙글빙글, 바닥에 박힌 채로 회전하는 의자에 앉아있던 아티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럴 때가 아니네, 늦겠어. 곧바로 몸을 굽히더니 다음 칸으로 시계 토끼처럼 튀어 나갔다. 그새 질린다는 표정을 지은 소년이 뒤따라갔다.
앞서 말한 다음-다음-다음 칸의 벽에는 작은 철문이 딸려있었다. 아티스는 제 방인 양 철문으로 쏙 들어갔다. 세실리아도 그 뒤를 따랐다.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방에 난 작은 창문 너머로 하얀 해파리가 유영하고 있었다. 호선을 그리는 꼬리만 보고 있자니 차차 현실과 유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태평한 풍경인 건 마찬가지였다. 세실리아는 뒤늦게, 수족관은 뒷전으로 하고서 아티스를 바라봤다. 요구는 뻔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여긴 뭔데?”
“방공호라고 해야 하나.”
구석에서 한참을 꼼지락거리던 아티스가 허리를 폈다. 탕. 곧바로 금색 라이터의 고개를 꺾고 벽에 튀어나온 도화선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찰나의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실리아가 다급하게 아티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화약에 절은 도화선의 불을 끄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 방금 뭘 한 거야?”
“불을 붙였어.”
“……불?”
“이 칸 너머 폭탄에!”
아니 그게, 요즘 따라 수족관 수위가 미묘하게 낮아지고 있는 거 있지? 그래서 뭐가 문제인지 살펴보니까, 그게 말이지! 수족관 뒤편, 이렇게 비밀 벙커가 있더라. 여기서 수족관의 물을 야금야금 빼내어 암암리에 팔고 있었던 거야. 실은 얼마 전부터 기차의 정수 장치에 이상이 생겼거든. 한정된 자원 때문에 생기는 불안한 심리를 이용한 장사질이라고 할까. 정말 고귀한 윗분들 자식은 얼음이 녹아 눈이 된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도 모르더라니까. 응? 당연하잖아. 머리에서도 서열이 있어. 자산이나 힘이 없는 녀석은 자연스럽게 얕보이게 되니까…….
…알 게 뭐야. 결국 중요한 건, 여기서도 사람을 죽이는 건 결국 사람이라는 거야. 틈만 나면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려고 안달이지. 앞선 동료들을 봐. 널 조금도 찾지 않잖아. 동질감이고 뭐고 이제 질린 거야. 진정 인간답게 살려면 이 세계를 벗어나야 해. 낙오자, 쓰레기, 남을 밟고 올라가야만 살아갈 수 있는 인간들은 다 거꾸러져 죽어버리라지. 평생 머리 칸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갈 거란 오만이 마음에 안 들어. 그래서 말인데, 이 공간을 발견하고 나니까 곧바로 연쇄와 굴레를 끊는 건 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직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어때, 멋지지?
그제서야 크로놀의 악취가 진동했다. 그건 명백히 칭찬을 바라는 눈치였다.
“어때? 이건 좀 놀랄만 해?”
“너…….”
“아깝다, 널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뜸 들일 필요도 없었는데.”
두 개의 평행선이 겹치면 세계가 전복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세실리아가 접한 세계는 한없이 좁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 아티스의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시도하는 실험의 결과를 기다리는 학자의 표정이었다. 얼기설기 종이로 꼬아 만든 도화선이 빠르게 타들어 갔다. 불티는 수족관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일초가 억겁의 시간 같았다. 세실리아는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아티스를 바라봤다. 아티스는 그 얼굴을 놀리는 대신 부드럽게 어루만지길 택했다.
“해피 뉴 이어.”
굉음의 축포와 함께 새해가 밝는다. 기차가 발을 구른다. 비로소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다.
▶ Station. Fucking Long Tunnel
S#1
아딜은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 이야기는 그저 그런 로맨스 소설에도 쓰지 않을 식상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원인이 배곯음인지 배앓이인지 모를, 이제는 관성이 되어버린 긴 울음이 그날따라 송곳처럼 집요하게 관자놀이를 쑤셔댔다. 제 몫의 단백질 블록을 옆칸 침대로 밀어 넣은 아딜은 “고마워.” 사만다의 낡고 지친 감사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모든 것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꼬리칸에서는 누구나 삶이 버거웠다. 산모는 먹은 것이 없어 나오지 않는 젖을 쥐어짜야 했고, 갓 태어난 아이 또한 먹은 것이 없어 나오지 않는 울음을 쥐어짜야 했다. 트레인 베이비, 그것도 하필 꼬리칸에서 태어난 아이의 운명은 나면서부터 불행하기로 결정된 종류의 것이었다.
아기 울음을 피해 일어섰지만, 꼬리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기차 내부는 살얼음이 낄 만큼 추웠고, 낡은 옷가지를 껴입은 사람들은 케케묵은 악취를 풍기며 퀭한 얼굴로 늘어져 있었다. 아딜은 우울한 얼굴로 얼어붙은 차창에 비친 제 그림자를 살폈다. 이제 겨우 열일곱, 덜 자란 몸은 제대로 먹지 못해 볼품없이 말라비틀어졌고, 햇볕을 받지 못한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설국열차와 동갑내기로 태어나 불행이 낙인찍힌 꼴이었다.
그러나 아딜은 차창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우울할 줄도 몰랐다. 그가 본 모든 사람은 -가끔 찾아오는 메디슨 총리나 완전 무장한 군인을 제외하고- 다 이렇게 생겼으니까. 눈가에 묻은 우울은 피곤하고 배가 고픈 탓이었지, 외모를 향한 비관 때문은 아니었다.
“안녕.”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아딜은 차창을 통해 눈이 마주친 남자를 믿을 수 없어서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나 몇 번이고 시야를 고쳐봐도 그는 사라지긴커녕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낡았지만 단정한 차림새, 모양새가 잘 잡힌 뼈대와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큰 키. 꼬리칸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길리엄의 옆에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죄인이 된 기분이라 아딜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귓가가 욱신거릴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쿵쾅거렸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을 처음 본 탓인지……. 혼란에 빠진 아딜이 수선스럽게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런다고 나아질 것은 없었지만- 보다 못한 길리엄이 하나 남은 손으로 아딜을 불러들였다.
“이리 와라, 아딜. 여기는 나디아야. 이 꼬리칸에는 무척 드물게도 ‘새로운’ 사람이지.”
“어떻게……?”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았다. 스위던의 기차가 17바퀴를 달리는 동안 기차 바깥의 인류가 꽁꽁 얼어 죽어 멸종했다는 것은 세 살배기도 아는 사실이었다. 바깥 사람이 아니라면 앞칸 사람이라는 이야기겠지만, 이 기차 안에서는 그게 더 이상했다. 앞칸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감옥칸에 수감된다. 살인을 저질렀어도 꼬리칸으로 떨어지는 법은 없었다. 꼬리칸은 감옥 따위가 아니라 쓰레기장에 가까웠으니까. ……하물며 꼬리칸에 떨어졌다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해 보였다. 눈물 흔적은 한 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쉿, 목소리를 낮추렴. 그래. 바로 ‘머리칸’에서 온 손님이야. 17주년을 맞아 꼬리칸의 인구 조사를 위해 들렀다는구나. 시간이 남는다면 네 위 침대로 데려다 주렴. 머무는 동안 안내를 도와주면 더 좋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자꾸나. 알려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길리엄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아딜에게 당부했다. 늙은 주름이 팬 눈가가 희미하게 떨렸다. 아딜은 노인의 신호를 잘 알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 인구 조사라니, 미스터 스위던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지만 좋지 않은 징조였다. 꼬리칸의 혁명가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타이밍에 ‘준비한 것’을 들켰다간 4년간의 계획이 수포가 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혁명가를 비롯한 꼬리칸 전원의 목숨이 위태롭겠지. 길리엄이 아딜을 고른 건 적절한 선택이었다. 타고나기를 선한 녀석이니 꼬리칸을 위험하게 만들 바에는 제가 죽고 말 것이다. 무엇보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이기도 했다. 노인이 의도한 바를 이해한 아딜은 미적거리면서도 나디아의 앞으로 나섰다.
“나디아…… 씨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릴이라고 불러.”
“네?”
“난 딜이라고 불러도 되지?”
“어……. 네, 넵.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거리감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앞서 걸으면서도 긴장을 놓지 못해 움직이는 팔다리가 뻣뻣했다. 나디아가 머리칸의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를 더러운 침대로 안내하면서, 아딜은 난생 처음 꼬리칸의 모든 풍경을 부끄럽게 여기고 말았다.
S#2
(더러운 침대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언제부터 꼬리칸에 있었어?”
“태어났을 때부터요. 트레인 베이비거든요.”
“나랑 동갑인 건가.”
“……정말요?”
“왜, 안 믿겨?”
“그, 그렇다기보다는……. 아직 어린데도 대단하시다 싶어서요.”
“하하, 별 거 아닌데. 꼬리칸에서 사는 건 힘들지 않아? 별로 자라지를 못했네.”
“살아있는 것만으로 다행인걸요. 그럼 나디아 씨도, 아니, 릴도 기차에서 태어난 건가요?”
“태어나긴 바깥에서. 걸어 다니기도 전에 기차에 탔다던가……. 뭐, 그런 느낌.”
S#3
(아딜, 배식이 끝나고, 빈손으로 서 있다.)
“또 안 먹었어?”
“아, 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사만다였나. 꽤 친절하게 구네. 좋아하기라도 해?”
“켁, 켁…….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맛대가리가 없긴 하지만, 굶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사만다는 아이가 있잖아요. 두 명분을 먹어야 하니까……. 허기는 익숙해서 참을 만해요.”
“그러니까 말랐지.”
“별로……. 여기는 다 그래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S#4
(나디아와 아딜, 보폭을 맞춰 꼬리칸을 걷고 있다.)
“갑자기 인구 조사는 왜 하는 걸까요?”
“글쎄. 꼬리칸의 처우를 이제라도 개선할 마음이 들었나.”
“미스터 스위던은 그러지 않을 거예요.”
“확신하는 투네. 왜?”
“불필요하니까요.”
“사람이 모든 일을 필요에 의해 하는 건 아니지.”
“지난 17년간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왜요?”
“음.”
“거봐요, 릴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뭐, 가끔 머리칸으로 넘어오는 사람이 있기는 하잖아. 비관적이긴.”
“그건 특출난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 일단 전 아니에요.”
“나는 어때.”
“네?”
“나랑 만난 것도 인연이고, 어찌 보면 네가 잡은 기회 아닌가.”
“그게 무슨…….”
“데려가 달라고 부탁해보는 건 어때.”
“어떻게 그래요. 곤란해지실 게 뻔한데요.”
“아직 거절하지도 않았는데.”
“그러지 마세요.”
“왜?”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까.”
“겁이 많아.”
“아하하,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S#4
(설국열차, 예카테리나 다리를 지난다. 곧 터널이 시작된다.)
“슬슬 이별할 시간이네.”
“……벌써 그렇게 됐나요.”
“아쉬워?”
“네…….”
“흠.”
“어쩌면, 그러니까 아주 운이 좋으면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글쎄.”
“안 된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그냥 해본 말이에요…….”
“모든 사람과 헤어질 때 이렇게 구는 건 아니지?”
“네?”
“농담이야.”
S#5
열차가 순식간에 터널로 뛰어들었다. 1년이 꼬박 지나도록 달리 먹은 것이 없었으므로 그 뱃속은 온통 캄캄했다. 게다가 빌어먹게도 길어서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해피 뉴이어!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린 어둠 속에서 꼬리칸의 사람들도 우울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디아가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얼굴과 얼굴이 퍽 가까워졌다. 코끝이 스칠 것처럼 아슬아슬한 간격이었다. 아딜은 긴장으로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입술을 깨물었다. 숨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아서.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봤어.”
“……릴?”
“너는 나를……. 항상 ‘그런 눈’으로 보니까.”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려요. 너무 시끄러워서…….”
“그때도, 지금도. 취향이 한결 같네.”
“바깥으로 나갈까요?”
“여전히 핏기가 가시지 않은 고기는 못 먹는 모양이고.”
“제 목소리 안 들려요?”
“손해 보고, 우울하고, 얌전하게…….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쯤 되자 아딜은 더 이상 말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다시 물어봐야겠다. 쉽게 결론을 내리고 귀를 기울이는 대신 뒤를 돌아봤다. 시궁창 같은 인생인 주제에, 꼬리칸 사람들도 새해를 축하하느라 성화였다. 덕분에 침실 칸은 오히려 비어있었다. 곁눈질로 빈 공간을 확인한 아딜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무슨 의미인지 알면서도 나디아는 발을 떼지 않았다. 끌려가는 척 다가가 지저분한 뺨에 입술을 눌렀을 뿐이다. 놀란 몸이 소스라치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소리죽여 웃은 나디아가 그대로 귓가로 옮겨갔다. 아주, 아주 가까이에서, 틈 없이 속삭이자 사각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낮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내 이름은 나디아 ‘스위던’이야.”
세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고백의 형태로. 이 기차 안에 그 이름-스위던이여, 영원하라!-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기차 밖을 모르는 아딜 올-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모든 날은 스위던의 이름 아래에서 존재했으니까. 겨울 하늘을 닮은, 탁한 빛깔의 파란 눈이 홉 뜨였다. 시선을 맞춘 나디아는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눈가를 접고 입꼬리 반듯하게 올리는……. 그린 듯이 완벽한 미소. 그제야 아딜은 그 미소를 세 번째 본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아버지, 얘는 돌려보내요. 비실비실한 게 금방 죽을 것 같아요.”
“새로운 아이를 고르려면 번거롭잖아요.”
다섯 살의 어느 날, 건강 검진, 흰 접시, 머리칸, 핏물이 흐르던 고기, 꼬리칸의 아이들, 미스터 스위던, 그의 아들, 예상치 못한 호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과 돌아온 아이들, 어떤 선택……. 그리고 첫사랑. 아딜은 나디아에게 첫눈에 반했다.
“저, 저도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여기서 뭘 할 줄 알고?”
“그건 모르겠지만…….”
“가는 게 나아. 너도 나중에는 나에게 고마워할걸.”
“같이 있고 싶은데.”
“흠, ‘여기’가 아니라 ‘같이’?”
“같이…….”
“넌 내가 그렇게 좋아?”
“네.”
“…….”
“안 된다는 거 저도 알아요. 떼쓰지 않을게요.”
“……기회가 있으면 또 만날 수 있겠지.”
“꼬리칸에서 나올 기회가 두 번이나 있을 리…….”
“너한테 말고, 나한테.”
“…….”
“내가 어른이 된 후에도 널 기억한다면 데리러 갈게.”
“정말?”
“그래, 그러니까 기도나 하든지.”
그리고 나디아는 아딜을 첫눈에 알아봤다. 12년 동안 무럭무럭 자라 훌륭한 청년이 된 머리칸의 스위던 씨와 다르게 꼬리칸의 트레인 베이비는 여전히 우울한 티를 벗지 못한 소년으로 박제되어 있었다. 아딜은 자신과 같은 세월을 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달라진 구석이 ‘전혀’ 없었다. 영양이 부족해서 그런가, 햇빛을 못 봐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없어서 그런가……. 나디아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아주 짧게 고려하곤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됐어, 머리칸에 데려다놓고 잘 먹이고 잘 재우고 그러다 보면 뭐 하나 나아지는 구석이 있겠지. 꼭 나아지지 않아도 괜찮고. 어차피 저 눈이 좋았던 거니까. 추억 속 어린애는 낡은 옷으로 둘둘 싸여 먼지와 세월을 잔뜩 탄 주제에도 여전히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눈처럼 깨끗한, 오직 나디아를 볼 때만 칙칙한 우울이 걷히는, 그래, 완벽하게 사랑에 빠진 눈을. “……누구세요?” 그런 눈을 하고도 알아보지 못하다니 조금 괘씸했지만,
“해피 뉴이어, 딜.”
생각해 보니 오히려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딜은 언제 어디서든 나디아를 ‘사랑할 운명’이다. 뭐 그런 거.
“데리러 왔어.”
시선을 내리자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어떤 대답도, 허락도 없었지만 나디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입을 맞췄다. 어차피 12년 전에 이미 받은 목숨이다. 그날 이후로 아딜은 늘 나디아의 것이었다. 아니, 따져 보자면 이 열차에서 태어난 순간부터 그 목숨은 스위던의 사유 재산이었을 테니 단 한 시도 가지지 못했던 적이 없었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아딜이 대답을 삼키기 전에 떨어진 나디아가 눈길로 종용했다. 기뻐해. 기억해내. 함께 있고 싶다고 매달려. 한 가지도 알아듣지 못한 아딜은 작게 되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뭐?”
“……저보다는 사만다가 더 급해요. 그 애의 아이도…….”
“딜.”
“저 혼자는 못 가요.”
그 순간, 기차가 폭발했다. 궤도를 돌던 별이 순식간에 얼어붙은 2014년의 어느 날처럼 예고 없이! 뒤집어지는 기체와 연달아 터지는 창문으로 머리칸부터 꼬리칸까지 들썩거렸고, 차량과 차량을 연결한 고리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나디아가 인생 처음 거절과 위기를 동시에 경험한 순간, 불씨를 놓은 미친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널 조금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뜸 들일 필요 없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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