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ze Runner>
- Rhoze

- 2023년 9월 8일
- 5분 분량

Rhoze
<Maze Runner>
by Wes Ball
SF, Action / UK / 2021 / 145min / 12+
인간의 머릿속보다 복잡한 미로는 없다. 제우스 ■■ ■■■■는 글레이드에 들어온 지 며칠 만에 러너가 되었고, (겁에 질린 러너들이 미로 안으로 진입하는 걸 거부했다는 이점이 있었으나 그는 언제가 되었든 결국 본인이 미로 안으로 들어갔으리라 확신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도 결국 맥락은 같다.
그리버의 독으로 사경을 헤매며 뉴런과 시냅스를 건너고 뛰어넘고 탐사하는 행위. 그는 현실의 수백 배에 달하는 속도로 지도를 그려나간다. 녹빛 핏줄이 돋아난 자신에게 해독제를 놓고 기다릴 로단테에게는 미안한 일이겠으나, 고지식한 면이 있는 그로서는 목숨을 거는 행동을 쉽게 납득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수색해야 할 기억이 있다며 시간을 들여 설득하는 것보다는 저지르고 달래는 게 낫다. 밤이 되어도 미로는 닫히지 않았다. 머뭇거린다면 모두가 뱃속으로 들어갈 뿐이다.
…
“어서 뛰어!”
또?!
직전의 기억이었다. 제우스와 로단테는 죽은 그리버의 몸에서 찾아낸 의미 모를 기계를 들고 미로 안쪽으로 향했다. 길을 찾았다는 환희와 의심도 잠시, 붉은 선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미로가 급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패턴으로 움직여 두 사람을 가두려는 벽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정신없이 빠져나간다.
“달려! 계속!”
러너팀의 베테랑인 로단테는 제우스보다 훨씬 민첩했다. 본인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로단테를 보고 신체적 능력이라면 뒤떨어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러너라는 이름을 달고 매일같이 달리고 달리던 사람과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었나 보다.
끝이 보이지 않았으나 포기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인다. 기적처럼 벽이 막히기 직전 뛰어들어 몸을 굴렸다. 땅에 쓰러져 숨을 헐떡이면 옆으로 다가온 로단테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그 구멍 뭐였을까?”
“흠, 그리버가 새끼 치는 둥지?”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잖아.”
“그래. ……그게 바로 나가는 길이었을지도 모르지. 아니, 지금으로서는 그 가능성밖에 없다.”
“평생 여기서 살게 둘 건 아니란 건가.”
“그래서 나를 보냈겠지?”
“수상하게 말하는 것 좀 그만해. 진짜 기억나는 과거 있는 거 아냐?”
“애석하게도, 없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숨을 돌리고, 제우스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키득거린 로단테가 팔을 뻗어 스트레칭한다.
“슬슬 돌아가자. 애들에게 알려줄 소식이 생겼네.”
“이봐, 믿지 않는 놈들이 있다면 어쩔 거지? 이 미로 안의 생활에 익숙해진 녀석들 말이야.”
출발하기 전 물병을 끝까지 비운 로단테가 입을 다물었다. 글레이드를 나가고 싶어하지 않는 의견이 세를 불린 건 그 역시 알았다. 신참인 제우스가 몰고 온 바람과 변화를 모두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어떻게 설득해서라도 함께 가야지.”
“안 될걸.”
“조용히 해. 데리고 나갈 수밖에 없잖아. 두고 갈 수는 없어. 이곳은 집이 아니야.”
고집스러운 입매가 일자로 다물린다. 로단테는 꼭 자신에게 되뇌듯 말했다.
“이곳은 집이 될 수 없어.”
더 과거로.
…
“자, 이게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낸 미로야. 모든 곳을 수색했고 구석구석을 전부 알고 있어. 출구 같은 건 없었어.”
하얀 천을 걷어내면 보이는, 출입금지 구역에 만들어놓은 장대한 모형. 제우스는 작은 미로의 위용에 휘파람을 불었다. 문제를 주어놓고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니. 비참한 현실을 소수만 알고 있는 채로 숨긴 건 훌륭한 결론이라고 여겼다. 멋진 리더들이군.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그래, 덕분에 그리버를 하나 죽였으니까.”
“네 덕분이지. 어디가 움직이고 닫히는지 난 몰랐으니까.”
“그러면 우리가 같이 한 거라고 해.”
“고집은.”
“다음에도 같이 들어가려면…… 자, 이제 공부할 시간이야. 제우스.”
최근 일련의 사태로 풀어질 날이 없었던 앳된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어린다. 비로소 그 나이로 보이는 로단테는 즐거워 보였다. 본인이 몇 살이었는지 기억하는 자는 글레이드에 없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도록 하자.
“머리 좋다던데? 30분 줄게.”
“하.”
제우스가 삐뚜름히 입꼬리를 올렸다. 마주한 로단테와 닮은 웃음이었다.
“30분까지 안 필요해.”
과거의 기억으로, 더 깊숙하게 파고든다.
…
“미쳤어?! 왜 네가 여길 들어와!”
“하나보다는 둘이 더 잘 살아남지 않겠나?”
“잘하는 짓이다. 둘이 아니라 셋이 죽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살아남을 생각이잖아. 제우스는 덩굴을 얽어 쓰러진 러너의 몸을 묶으며 중얼거린다. 이를 악문 로단테는 손을 더욱 신속하게 움직였다. 시간이 없어. 그리버들이 곧 올 거야.
“나도 죽을 생각은 없다.”
“자살 시도랑 다를 게 없거든?”
“왜 그렇게 화를 내지? 우리 만난 지 며칠 안 됐다.”
“왜 따라 들어왔어? 우리 만난 지 며칠 안 됐는데.”
“한 방 먹었군.”
맥없이 흔들리는 몸을 허공에 매달아둔 두 사람은 줄의 끝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했다. 벌레의 다리가 움직이는 소리, 끈적한 초록 액체가 (아마 침이겠지. 제우스는 저 괴생명체의 창조주는 미친 취향의 소유자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바닥에 주륵 떨어지고 뭉개지는 소리, 로단테의 외침. “달려!”
“왼쪽! 그리고 오른쪽으로 꺾어!”
제우스는 혀를 움직여 대답하는 대신 다리를 움직였다. 강하게 땅을 박차고 내디딜 때마다 서늘한 밤의 풍경이 휙휙 지나간다. 가뜩이나 시야가 어두웠는데, 회색 빌딩 숲과 복잡하게 꼬인 골목을 지나는 것처럼 혼잡했다. 끈질기게 따라붙은 그리버가 끔찍하게 갈린 입을 열고 숨을 내뱉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내리누르며 미친 듯이 미로를 뚫고 나간다. 동이 트기 전까지는 얼마나 긴 시간이 남았지? 목에 와 닿는 숨결에 죽음의 공포가 벌레처럼 기어올라와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럼에도 죽지 않을 각오가 바래지 않는다는 사실이 제법 즐거웠다. 웃기는 일이지.
“그래서 너 진짜 왜 들어왔는데!?”
“몰라.”
어차피 미로 안에 들어가려 했으니까, 네 신뢰를 얻기 위해서, 러너가 되기 위한 스텝의 일종으로, 위기는 곧 기회와 마찬가지라,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 몇 가지 이유가 연이어 뇌리를 스쳤으나 솔직하게 대답해주진 않을 생각이다.
“너한테 반하기라도 했나 보지.”
“…… 아! 진짜 헛소리하네!”
…
이른 새벽, 연한 분홍색 머리카락을 단단히 틀어올려 묶은 러너팀 팀장이 제우스를 불렀다. 쉿, 검지를 코앞에 대고 주의를 준 로단테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라고 눈짓한다. 벽에 이름을 새기는 절차를 밟기 위해서다. 아찔하게 높은 미로 바깥쪽 벽은 수십 명의 이름이 적히고 지워진 흔적이 가득했다. 제우스는 꾹 눌려 일자로 패인 이름에 대해 소리 내어 묻지 않았다.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듣지 않아도 알았다. 이름을 쓴 이와 이름을 지운 이는 각기 다른 사람이었을 거란 사실을.
제우스는 작은 칼을 들어 무른 돌을 파기 시작했다. 몇 번의 직선을 긋자 형태는 수월하게 만들어진다. 유피테르가 아니라 제우스라서 참 다행이지? 이런 지식은 어디에서 쌓아서 남아있는 걸까. 과거에 대해서라면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데도. 아, 알파벳 네 자 빼고.
“Rhodanthe라니 이름을 적을 때 꽤나 고생했겠어.”
“Zeus는 짧아서 새기기 쉽겠네. 벌써 다 했잖아?”
“지우기도 쉬울 테지.”
“그런 말 할래?”
“아하하.”
대수롭게 않게 웃은 제우스는 칼을 돌려주지 않고 주머니에 넣는다. 로단테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지만 행동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본래 넘겨줄 마음이었는지. 미로 안에서 생활하려면 적당한 도구 정도야 있어야겠지. 제우스는 그렇게 여기면서도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다.
“너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지?”
“3년. 꽤 초창기에 왔어. 맨 처음은 다른 사람이지만.”
“그렇다면 최초의 글레이더는 한 달 동안 혼자 버틴 건가?”
“그래. 대단하지?”
제우스는 차분하게 눈을 깜빡인다. 첫 번째 소년의 대단함보다 다른 진실을 먼저 인식한다.
“골라냈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무슨 말이야?”
“우리를 여기 넣은 자들이, 스너프를 보며 ─오, 난 이 용어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지고 있군.─ 인간의 죽음을 관찰하고 관음하는 변태가 아니라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해가 완전히 뜨기 전 이곳을 조금 더 둘러볼 심산이었다. 텅 비어 먼지 찌끄레기만 남은 뇌를 차곡차곡 채워넣고 싶었다. 로단테는 끝맺지 못한 대화에 흥미를 느꼈는지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고 제우스를 뒤따랐다.
“첫 번째…… 로 박스에 올려보낼 자는 정성을 다해 골랐을 거다.”
“합리적인 가설이지만, 미로를 헤매는 걸 보고 뭘 얻을 수 있단 말이야?”
“그거야 알아내야지. 뭐, 나라면 그랬을 거란 뜻이야.”
“너는 뭐랄까, 관찰하는 쪽에 더 익숙해 보이네.”
“그래 보여?”
“기억을 잃기 전에는 뭘 했을지 궁금해져.”
“음, 관찰.”
이것도 아냐.
…
떠들썩한 분위기, 글레이더 전원이 한자리에 모인 축제다. 한 달에 한 번 박스가 올라오면 새로운 보급품을 털어 신입을 환영하는 행위였다. 타오르는 캠프파이어의 빛을 받아 붉게 반짝이는 금발을 가진 소년은 키가 크고 뼈대가 탄탄했으며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두뇌를 가졌다. 그는 겁에 질린 척 박스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접근한 아이를 휘어잡고 협박을 하기까지 했다! 글레이드에 적응하고 나자 능청스러운 화술로 반감을 누르고 어깨동무를 하는 탁월한 사교성까지 보였으니 능력이 두루 증명된 거나 다름없었다.
농사를 잘할 것 같은데.
치료 기구도 잘 만질 것 같지 않아?
팔뚝을 봐, 딱 건축팀 체질이라고.
너넨 머리를 안 쓰잖아. 내가 보기에 저 녀석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토론을 막아 세우는 것처럼, 또렷한 음성이 공터를 울렸다. 기쁨에 찬 기색을 숨기지 않는 밝은 목소리.
“제우스, 기억났어. 내 이름은 제우스다!”
“거창하잖아? 신참.”
러너는 어때? 로단테, 네 생각은?
글쎄. 그건…… 지켜봐야 알 일이지.
그 이전, 이전으로. 어서… 박스를 타고 오르기 전으로.
과연 나는 누구였는가. 무엇을 했는가. 왜 이곳에 오게 된 것인가.
제우스는 미로의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
“나는 그들의 일원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제우스가 중얼거렸다. 로단테가 물잔을 건넸다. 붉어진 눈동자를 보니 제대로 잠을 자지 않은 모양이다. 글레이드가 그리버로 온통 엉망이 되었으니 원인이라 지목해 구덩이에라도 가둬놓을 줄 알았는데. 자신의 평판이 예상보다 더 괜찮았거나, 환자를 가둔다니 제정신이냐고 로단테가 항의라도 한 게 분명했다.
“……무슨 뜻이야?”
“알고 있잖아.”
나는 너희들을 이곳에 보낸 자와 함께 일했다. 오랫동안 너를 관찰하고 있었어. 아니, 한 달에 한 명씩 사라지는 모든 아이들을……. 계속해서 지켜봤어. 시련을 주고, 시험하고, 실험하면서. 네 반대편에 서서.
제우스는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각난 말들은 오직 필요한 정보만 담아 로단테의 앞에 흩어졌다.
“미로에 오기 전의 우리는 모두 지워졌어. 네 과거도 마찬가지야. 그건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되었어. 중요한 건,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지.”
어쩌면 제우스 칼리스타는 로단테가 그렇게 말해주는 걸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과거는 상관없다고, 같이 미로를 빠져나가자고. 그가 추측한 로단테의 성정이라면, 자신에게 손을 내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테니까. 로단테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와 마주한다.
“그 모든 게 너 때문인 거라면, 지금 네가 여기에 있는 게 이상하잖아.”
“……알고 있어.”
그러고 나면 로단테는 조금 다른 게 궁금해진다.
“우리는 함께 있었어? 원래부터, 과거에 말이야.”
제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도 함께 있을 거야? 지금부터, 미래에.”
두 번째 대답을 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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