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mikaze Girls>
- NickyHidi

- 2023년 9월 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NickyHidi
<Kamikaze Girls>
by Nakashima Tetsuya
Romance / USA / 2020 / 103min / 15+
산다는 건 텅 빈 어항 속에서 숨을 쉬는 것과도 아주 비슷헀다.
언제까지고 쓸 수 있을 법한 무언가라도 되는 듯 돌보지 않았더니 어느 날 몸 상태가 단번에 틀어졌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로부터 전문 용어를 섞은 설명이 이어졌지만 완전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알기 쉬운 문장만 어찌저찌 주워 담아보니 결론은 이미 나있었다. 당분간은 스트레스 요소들과 멀어져야 해요,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다면 다른 수단이라도 빌리는 게 좋겠네요, 등등.
그 다음의 수순 또한 빠르게 지나갔다. 뉴욕! 그 꽉 찬 팝콘통 같은 도시에서 벗어나 조부가 계신 톨레도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정해졌다. 다양한 사람의 목소리, 표현으로 염려의 말들이 쏟아졌지만 특별히 머리에 남는 건 없었다. 조각을 공부하던 손에서 망치와 조각끌을 빼놓으니 영 허전했다. '다녀오면 훨씬 나아져 있을거야.'
일이 바쁜 부모님은 마음으로 딸을 가여워 해주시며, 쇼윈도 안쪽 마네킹에게 입혀두었을 법한 옷들을 한 겹 한 겹 정성껏 입혀주었다. 장미 코사쥬, 새하얀 프릴의 옷을 걸치면 설탕 코팅을 걸친 케이크 못지 않은 꼴이 되면 주변의 풍경과 도무지 어우러질 것 같지 않았지만, 어차피 부모님의 얼굴만 펴질 수 있으면 상관없었다. 때아닌 작별이었다. 어쩌면 해방일까?
…뭐, 이런저런 전혀 쿨하지 못한 사정으로.
하이디 포플러는 톨레도의 길거리에서 종종 보는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되었다. 사람에 따라 약간 특이하게 비칠 수도 있는 정도의.
그러니까, 하이디 포플러는 꽤 오랫동안 상자 속에 갇힌 것 마냥 살았다. 그것이 편했고, 불이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새로운 곳에 떠밀린 듯 살게 되어도 크게 지장 가는 일이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붙어 다녔지만, 원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대로 왔던 것처럼 떠날 수도 있을까, 싶었는데.
“어쩐지 한눈에 여기 사람이 아닐 것 같았어.”
“……?”
“아, 네가 어색해 보였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음.”
멋들어진 바이크를 세워둔 제 또래의 아이가 연거푸 말을 잇다가 실수라도 한 것 마냥 머쓱하게 제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는 걸, 하이디 포플러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랑은 벌써 몇 번째 만나는 거더라. 딱히 할 일 없이 팔랑팔랑 다니다보니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그가 근처까지 와선 연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사람 같아서,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하이디……?”
짧게 자른 머리는 어쩐지 들쭉날쭉하고, 짙고 새까맣다. 유독 흰 피부 위에 점이 몇 개씩이나 박혀 있었다. 자세는 약간 비뚜룸하게 서는 습관이 있는 듯 했고, 거의 늘 바이크를 타고 있었으므로 다같이 맞췄다던 스카잔을 걸치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길에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이 아이와 저, 무슨 사이 같아요? 하고 물으면 누구나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나 혹시 뭐 실수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다행이지만.”
“그냥…, 궁금한 게 생겨서.”
“뭔데? 알려줄 수 있는 거라면 가르쳐줄 수 있어.”
그는 어쩌면 여기에 와서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상냥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쓰는 말투가 입안의 혀처럼 부드럽거나 하진 않아도 적어도 눈을 마주쳐준다는 점에서. 처음에는 퉁명스럽고 조금 무섭다고도 생각했는데 희한한 일이다.
“……음.”
“그냥 말 안 할래…….”
너는 그늘처럼 가까워지곤 했어서, 내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것만 같았다. 그것이 낯설다.
ㅡ
가벼운 마음으로 디뎠다가는 '어떤 숨 쉬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두 셋 정도는 거뜬히 걷어찰 수 있을 만치 북적이는 거리에 살았어도, 누군가를 한 눈에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좋아하지도 않게 되니 마음이 도무지 들뜨지 않는다.
그러니까 들뜨지 않는…….
부릉, 부르르릉.
순간 귀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그 소리들이 터져 나오는 줄만 알았다.
느릿느릿 길을 가던 하이디는 그들 무리가 줄줄이 쏟아지듯 스친 다음에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맞춰 입은 듯한 옷에, 비스무리해 보이는 장식들이 눈앞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속도까지는 아니라해도 헤아려 보기에는 또 빨랐다. 무수한 차량의 앞에서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재주 곡예를 하는 것보다야 저렇게 마냥 일직선으로 달리는 게 차라리 안전할까 싶긴 했다. 빳빳하게 잘 포장해둔 도로가 아니어도 달리는 데엔 상관없나보구나.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작은 뒷통수를 보며 그런 생각이나마 짧게 했던 것 같다.
급한 일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하나 없어 어쩐지 힘이 빠졌다. 하이디는 얼빠진 여자 아이처럼 그대로 길가에 서서 귀의 먹먹함이 가실 때까지, 도로의 저편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내리쬐는 햇볕에 정수리가 따끔따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한참을,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꼭, 바이크를 탄 제 또래의 애가 나타나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등 뒤에 태워줄 것 마냥…….
"아."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생각 없이 아무 길이나 가다보니 낯선 풍경만이 쭉 이어졌다. 오늘도 포슬거리는 금붕어 지느러미 같은 옷을 입고 있던 하이디는 빈손을 쥐었다 폈다. 양산까지 가지고 나오지 않은 건 드문 일이었는데. 아마 처음에는 그저 가까운 곳만 산책 삼아 돌 생각이어서 그랬다.
「난 널, 뭐라고 부르면 될까…?」
「음, 아니……, …조금 특이한 게, 좋으려나…….」
특별한 것 같잖아, 라는 말은 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그러니까, '렉시.' 나는,
……
……
정처없이 걷다보니 외진 역까지 와버린 모양이었다. 떠나가는 사람들, 표를 뽑으려 하는 사람들, 작별 인사, 혹은 환영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다. 빈 의자를 찾아 앉고는 퉁퉁 부어버린 것 같은 다리를 쭉 뻗었다. 둥근 메리제인의 구두코가 아무리 반질반질해 보여도 그뿐이었다. 이 구두는 아무리 예뻐도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지도 않으니까. 갈 곳 없는 우울함이 몸속에서 조용히 부풀었다.
하이디는 어느 밤, 나름 배려한다고 줄여주었던 속도에도 익숙치 않아 허리를 꽉 붙들고 등에 뺨을 대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정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와 나부끼는 머리카락, 그리고 꽉 씌워진 헬멧. (그때 니키 휴스턴은 헬멧을 썼던가? 어쨌던가?) 배기음은 시끄러웠고 가슴은 계속 쿵쾅거렸다. '어디 가고 싶어?' 그렇게 물어왔을 때, 그 아이는 어디든 다 데려다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호흡을 해본 기분이 들었다.
“…혹시……, 바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 이런 말…… 처음 해보는 것 같아.”
보그르르.
텅 빈 어항에 물이 차오르고 나는 그 속에 푹 잠겨 입모양으로만 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수화기 너머의 니키 휴스턴을 상상한다. 어떤 표정일지, 어떤 기분일지. 네 옆엔 언제나처럼 그 멋진 바이크가 있는지.
하이디 포플러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어쩌면, 그 바이크를 타고 달리면 투명한 유리벽조차 다 부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고, 자기도 모르게 상상해버린다.
알렉산드라 니콜라스 휴스턴. 출석부에 적힌 이름은 장황하고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구닥다리라 흔히 두 음절로 줄었다. 왜 굳이 알렉스를 니키라고 부르는지는 물어볼 필요 없었다. 본인이 그렇게 원했고 태양 아래 스카잔의 금실 자수를 번뜩이며 요란하게 바이크를 모는 운전수에게 별칭은 썩 잘 어울렸다. 호명은 주로 학교 복도보다는 차도 가장자리 들판에서다. 어이, 니키. 어디 가냐? 포플러 공장. 어떨 땐 공중을 날 듯이 발판을 밟아 땅에 달라붙은 사람의 목소리는 바퀴 자국에서 퍼져나오는 흙먼지를 뚫지 못하고 허공만을 메아리쳤다. 대령의 딸이자 경찰의 조카는 폭주족의 끄나풀이자 톨레도를 가로지르는 배달부였다. 오늘은 포플러 공장에 반짇고리 한 박스를 실었다. 트럭에서 굴러 떨어져 한날한시 만들어진 형제들에게서 추락한 낙오자를 싣고 개조 오토바이는 요란히 경적을 울렸다. 이름이 불릴 때마다. 혹은 먼저 말을 걸고 싶다면, 나는 여기 있노라고.
하지만 이 아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주홍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는데. 니키는 한 번도 들어간 적 없는 노르웨이의 숲 -기억력의 한계로 상호명이 틀린 줄도 몰랐다.-에서 판다는 딸기 몽블랑을 닮은 원피스는 둥근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아래로는 풍성한 실루엣의 비결인 프릴이 겹겹이 쌓여 나풀거렸다. 치마 아래 받쳐 입는 의류는 프릴이 아니라 페티코트라 부르는지는 몰라도 남을 뚫어져라 쳐다보기가 예의가 아닌 줄은 알았기에 니키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꼭 죄를 지은 기분이었다. 마치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되는 새장 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무튼 얘가 공장의 관리인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야 뒤로 보이는 건물은 나무판자를 켜켜이 쌓아 아기자기하게 파스텔 톤 페인트를 칠한 이층집이니, 공장보단 별장이 적절했다.
“미안. 네비게이션이 실수했나 봐. 네가 포플러 씨네 외동딸이지?”
“…하이디 포플러야.”
“그래. 너희 공장에 이걸 전해야 하거든.”
“나한테 전해도 괜찮아.”
“정말?”
“응.”
반짇고리 한 상자. 마침 하이디에게 필요한 물건이었다. 부모님한테는 내가 설명할게. 고마워. 음, 너도 바느질 하나 봐. 어색함을 피하려는 회화. 목적성이 다분하되 내용은 의도적으로 가벼웠다. 그러니까 긍정의 한 글자로 끝내도 족했는데, 진심어린 대답은 우울에서 비롯한 변덕이었을까. 지금으로서는 사소하다.
“원래는 아냐. 그런데 요즘은 시간이 남거든.”
“몸 움직이기 좋아하나 봐.”
“집 안에서는. 바깥은….”
상자 바깥은 황폐하지만 어수선해. 숨이 막힐 만큼 어지럽지만 내가 찾는 것은 어디에도 없었어. 만난다면 기꺼이 내 안으로 초대할 텐데 도저히 발견하지 못했어. 하이디 포플러는 알았다. 실패에 이유를 붙인다면 출발하지 않아서다. 창문 밖으로 내다볼 뿐 현관에서 뒷걸음질한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래도 마냥 도망쳤다고 힐난하거나 사랑스럽되 나약한 사지를 무턱대고 걱정하지는 않았으면 해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질 기미가 희미해 숨이 막혔다. 아마 평생 이런 기분이겠지. 질문에 답하려면 대뜸 이렇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넌 이 땅에서 숨 쉬기 편안해? 난 말야. 뉴욕이든 톨레도든 큰 차이를 모르겠어. 흙과 먼지와 포플러 나무는 몸과 부모님은 만족시킬지라도 틀어 막힌 아가미를 바다로 데려다 주지는 않아. 똑같은 결론과 빈곤한 호흡은 사상의 진도를 막아 세웠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도 남에게 지혜를 구하기도 영 내키지 않고 오로지 한없이 가라앉고 싶었다. 입 밖으로 뱉은 질문도 듣는 사람으로선 불안정했다. 발화를 대신한 호흡이 가빴다.
“무거워.” 중력이 아닌 산소가 날 짓눌러. 땅은 오히려 나를 멀리 떠나보내려는 것 같아.
그러나 부유감은 곧 무색해진다.
이제 공상은 지난 시간만큼 무게를 지니지 않았다. 페달에 닿았던 왼발을 젖혀 바이크를 세우는 몸짓 하나하나가 태연했다. 이어지는 대답도 깔끔하게 진심을 대변했다. 멋쩍음, 아쉬움, 입김을 내쉬면 다시 타오를 성냥 끄트머리의 미약한 기대. 불씨가 이토록 가볍게 닿는 이유는 매일매일 솔직해서였다. 불은 카나리아다. 여기 적정량의 산소가 있으니 살기 안전하다는 증거다. 네 곁에서라면 호흡할 수 있겠고 새장 안에 가두면 영원히 숨 쉬겠지.
“그러면 혹시 뒤에 탈래?”
“뒤?”
“여기 뒷좌석. 아, 헬멧 씌워줄게. 천천히 달릴 거고. 그래도 사람 다리보다는 빠르니까. 가볍고 시원할걸. 여기서 쭉 달리면 해안도로인데, 가족들이랑 가 봤으려나.”
“안 가 봤어. ……네가 데려다 줄래?”
하지만 왜인지 상자 속 세상을 넓힐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깥세상에서 살아가는 너이니 나를 어디로든지 데려가 줄 것이다. 하이디 포플러는 욕심 많고 영리한 여자 아이였다.
어기적거리며 발을 내딛다 고개를 돌렸다. 막 빠져나온 경찰서 유리 문 너머로 어머니란 여자는 아직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샐쭉하고 뚱하게 입술을 비죽이려다 얌전하고 선선한 태도로 목례하기를 택했다. 저 사람 건드려서 좋은 것 하나 없음은 본능을 따라 체득했으니, 아직 거슬러본 적도 없었다. 니키 휴스턴의 동물적 직감은 정확했으므로 정답을 고른 자는 아무런 방해 없이 주차장 구석 바이크에 올라 페달을 밟았다. 백미러에서 건물 대신 선인장과 커다란 동물 뼈만 나올 즘에야 계기판의 바늘이 최대 각도로 벌어졌다. 달리는 동안 생각을 버리고 속도에 몸을 맡기기가 취미였으나 오늘은 남달랐다. 목적지를 두지 않고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자유로이 엔진을 울린다는 사실만 같았다. 아제 그는 완전히 혼자고 완벽하게 자유로웠다.
몇 주 전 몸담은 조직의 탈퇴를 선언했다. 조직이라 봤자 그네들끼리 꾸며낸 수식어지 실상은 불량 서클이다. 마음대로 달린다는 규칙이 권력 싸움에 힘입어 가타부타 꼬리가 길어지자 저부터 끊어내기로 결심했다. 혼자라면 배덕의 그늘 아래 몸을 숨겨서 어머니의 명성을 깎아내릴 철부지 딸, 기대가 사라진 만큼 존재감도 희미해지길 꾀했겠다. 자유가 불가침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있는 듯 없는 듯 마는 낮은 자리 인생이 장래희망이었다. 건방진 배반을 막으려 조직에서 훼방이 시작됐다. 햄버거 소스 맛이 고약해서 발길 끊은 지 한참 된 패스트 푸드점에서 요리 도구가 사라졌는데 -도둑질이라니. 드럭 스토어도 아니고 패스트 푸드점에서, 하물며 뒤집개를?- cctv에 자기가 찍혔단다. 저가 그 가게 맛을 욕했던 아이들을 증언대에 올릴까 고민하며 서에 들어가자마자 입 안이 썼다. 어쩐지 쉽게도 불러냈더라. 슬슬 아이의 일탈을 끊어내려던 어머니가 한 패를 먹었다. 수사망은 촘촘했고 유도 신문은 교묘했으며, 사회봉사의 마수가 목에 박힌 세 개의 점을 옭아매려던 순간이었다. 옆 자리 순경이 전화로 네, 네. 몇 마디 읊조리더니 어머니에게 수화기를 내밀었다.
“알렉산드라, 왜 말하지 않았니? 그때 친구랑 같이 있었다고.”
포플러 댁의 따님이라면 확실하지. 그만 가 봐도 좋단다. 두 번째 떠밀림. 언제나처럼 여자는 자기 편할 대로 딸의 행보를 정했다. 그날은 오래간만에 학교에 갔으므로 니키는 같은 반 아이들과 떠들며 햄버거 가게를 욕했다. 하지만 만나지도 않았던 하이디 포플러의 증언이 경찰 삼촌과 군인 어머니의 마음을 샀다. 익숙한 부조리에 딴죽 걸 시간도 아까워 변덕을 부리기 전 곧바로 줄행랑쳤으나 다른 방향으로 의문이 차올랐다. 하이디 포플러는 왜 저를 위해 거짓말했을까. 그 애에게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눈치 챘다. 그런데 왜 대가 없는 호의를? 물론 니키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타고난 책략가였지만 판단은 야성의 감에 기반 했다. 반사적 과정은 대개 합리적이었으며 의심의 여지를 완벽히 구분해내 불필요한 순간에는 깨끗하게 물러나 멀끔한 손바닥을 보이곤 했다. 하이디 포플러에겐 반문이 필요 없다. 저로선 받아들이면 족했다. 그는 대가없는 호의로 소녀를 등 뒤에 태우고 바다까지 달렸기에 저를 구한 전화 역시 간결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또 한 통의 사이렌.
“…혹시……, 바빠?”
“그냥, 네가…… 보고 싶어서.”
“나, 이런 말…… 처음 해 보는 것 같아.”
우리는 너무도 달랐다. 니키 휴스턴은 보고 싶다면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를 만나고 싶다면 나도 너처럼 조심스레 다이얼을 돌려 달칵이는 송신음을 기다릴 것이다. 천천히 어루만지기만을 허락 받은 유리 인형을 대하듯이. 하지만 니키 휴스턴은 어디까지고 달리는 사람. 뒤돌지 않고 전진하는 자. 자유롭기에 하이디 포플러의 부름을 받고, 영원히 자유만을 추구하기에 소녀에게 고개 숙인 동안에도 날개를 꺾지 않았다. 네가 부른다면 난 어디로든지 갈 거야.
“지금 어디야?”
“갈게, 어디라도.”
“그리고 같이 가자. 이번엔 어디가 좋아?”
대신 함께 가야 해.
“슬슬 바다가 질린 참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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