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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vil Wears Prada>

  • 작성자 사진: Goldenwel
    Goldenwel
  • 2023년 9월 5일
  • 8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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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enwel


<The Devil Wears Prada>

by David Frankel

Drama, Comedy / UK / 2022 / 101min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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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각이다, 지각! 세스 크라우벨은 녹색 로고가 박힌 커피잔들을 묘기처럼 아슬아슬하게 들고 직원 카드를 찍었다. 팔에는 새벽부터 공장에 가서 받아온 샘플이 가득 든 쇼핑백이 걸린 채다. (인공 감미료의 비율을 새롭게 조정했다는데 솔직히 말하면 설명의 반의반도 못 알아들었다.) 띠리링-.

 “아, 또! 가고 있다니까!”

 골든구스의 CEO 사무실은 가장 위층, 비서실은 그 아래. 울리는 휴대전화를 받을 손이 없으니 빛처럼 빠르게 엘리베이터를 탄다. 로비를 육상선수처럼 가로지른 세스가 닫히기 직전의 문을 간신히 잡아타자 안쪽 직원들이 알 만하다는 시선을 서로 주고받았다. 황금 날개의 그림자는 멀리서 바라볼 때 가장 반짝이는 자리였던 까닭이다. 이 자리를 탐내는 예비 골든구스 비서가 백만 명이나 있다고? 말도 안 돼! 세스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헉, 흐악. 좋은 아침, 감사합니다. 29층 좀 눌러주시겠어요?”

 커피 다섯 잔을 들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자 비서실의 왼쪽 책상에 앉아있던 선배가 펜을 내려놓고 일어나 본인 몫의 카페라테를 챙겨간다. 얄밉게 톡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덤이다.

 “3분 55초 늦었어. 어서 올라가 봐!”

 골든구스 씨를 기다리게 하다니! 젠장, 그쪽이 새벽 5시 반에 전화해서 공장에 다녀오라고만 하지 않았어도 이럴 일은 없었거든요? 코트만 간신히 벗어놓은 세스는 묵직한 서류 더미와 커피잔, 그리고 샘플 상자를 양손에 든 채로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다. 이번에는 CEO실로 직행하는 다른 엘리베이터다. 띵~, 몇 초 뒤 문이 열린다.


 “흠, 크흠, 안녕하세요. 골든구스 씨.”

 얇은 은테 안경을 걸친 채로 다리를 꼰 브라이언 골든구스는 누구나 인정하는 최고의 신랑감이다. 올해 32세, 젊은 시절에는 제법 난봉꾼이었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본격적으로 승계 과정을 밟으며 싹 정리했다더라. 쭉 뻗은 다리와 허리선이 돋보일 수 있도록 재단된 검은 정장은 100% 수작업으로 한 땀 한 땀 만들어진 브리오니. 반짝이는 구두는 프라다. 클래식한 안경줄은 까르띠에. 하지만 명품 브랜드에 문외한인 세스는 그저 ‘코디가 열일하네.’ 정도의 감상만 남겼을 뿐이다. 브라이언은 엘리베이터의 종소리, 세스의 소심한 인사와 책상에 놓인 스타벅스 커피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서류를 한 장 넘긴다. 이제 가봐도 된다는 뜻인가? 개당 6천 파운드짜리 조명 한 번, 거울로 써도 될 만큼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 한 번 쳐다본 세스가 발을 떼기 직전, 브라이언이 입을 열었다. 느리고 고풍스럽고 우아한 포쉬 악센트. 미국인 부친에 독일계 영국인인 어머니를 둔 세스와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발음이다.

 “크라우벨, 내가 왜 업계에 대해서라고는 일자무식인 데다가, 이력서에 경력 한 줄 없는 초짜인 자네를 채용한 줄 아나?”

 그야 전 경호원으로 채용된 거니까요. 대꾸하기 전에 브라이언이 재빠르게 타이밍을 잡아채며 말을 이었다. 세스는 자연히 억울해졌다.

 “케임브리지나 옥스퍼드밖에 모르는 고루하신 분들의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의도야. 그런데 넌 실망만 시키고 있군.”

 그야 전 경호원으로 채용된 거니까요. 이번에야말로 그렇게 반박하려 했으나 브라이언은 틈을 주지 않고 한숨을 가볍게 쉰다.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마저 틀에 박힌 듯 세련된 포즈였다. 푸른 시선은 종이 위 빼곡한 활자 외에 다른 걸 담을 틈이 없다는 것마냥 처음부터 끝까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단호하게 내려지는 축객령.

“That’s all.”

 아~!!! 보디가드로 채용해 놓고 비서 업무를 시키는 미친놈이 다 있네! 이번에야말로 때려치운다! 세스는 씩씩거리며 본인의 자리로 돌아와 분노의 마우스질을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부상을 당하는 일만 없었어도 프로 복싱 선수로 잘만 활동하고 있을 텐데. 전 구단에서 러브콜을 보내던 유망주 시절이 바로 그의 전성기였다. 은퇴하고 사회에 나와보니 아마추어 스포츠 선수란 경력이 되지 못하더라.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띠리링-.

 “크라우벨, 메일 다 보냈으면 이퀴녹스 사에 연락해. 로렌스한테 기간 체크해서 연구 자료 올리라고 전해. 캐스 블랙과 모델 컨택하기 전 마지막 컨펌도 잊지 말고. 프랑스 거래처와 미팅 시간 조율은 마쳤나? 저녁 7시에는 그리니치 예약. 내일은 6시 48분에 집 앞으로 데리러 와.”

 줄줄이 읊는 지시를 하나하나 받아적고 (참고로 반복은 안 해준다.) 이쯤이면 인사도 없이 전화가 끊기겠구나 하던 시점, 브라이언이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 캣타워도 청소해.”

 그리고 뚝.

 “으악!!!!!”

 “시끄러워, 세스.”

 두고 봐라. 1년만 버티고 나면 다른 곳으로 이직하고 말 테니까. 사실 정말로 취직하고 싶었던 곳은 스포츠 업계란 말이다. 애초에 이곳도 보디가드를 구한다고 해서 온 건데! 열이 오른 상태에서도 착착 업무를 진행하는 세스는 이미 회사의 노예가 된 지 오래다. 도저히 못 버티겠으면 어느 날부터인가 품 안에 넣고 다닌 사직서를 얼굴에 던져줄 생각이었는데, 브라이언은 사람을 구슬리는 데에 재주가 있는 남자였다. 분명히 알고 하는 짓인 게 분명하지만, 그렇지만…….

 “이번에는 나쁘지 않았네.”

 몇 주간 진행된 대형 프로젝트를 마친 후 ─그는 2주간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뻗어 있는 세스에게 웃으며 그런 말을 던진다거나, 비서실에 보너스를 투척하는 걸 잊지 않는다거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돈이란 성과에 대한 무엇보다 확고한 증명으로 다가오기 마련이었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다. 굽힐 바에는 부러지는 성정의 소유자 세스 크라우벨이 돈으로 굴복할 리 없지 않은가! 동트는 새벽에 출근해 야경을 벗 삼아 일하는 브라이언을 보고 소소한 핀잔을 건넸던 게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살다가 일찍 죽는다고요. 귓등으로도 안 들은 상사는 잔말 말고 아메리카노에 샷 추가나 해오라고 했다. 그보다는 고상하게 돌려 말했을 테지만 세스가 듣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골든구스가 손 뻗고 있는 분야가 얼마나 많은데 전부 다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직성이 풀린다니, 완전 컨트롤프릭 아냐? 이상한 건 세스가 브라이언에게 틱틱거리는 일이 늘어날수록 골든구스 씨에게 그렇게 굴다니 제정신이야?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죠! 브라이언이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상한 취향이 있는 게 분명해. 그렇게 중얼거리면 황금 거위를 신봉하는 선배는 옆에서 눈썹을 휙 치켜올리고는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스는 브라이언에게 ‘책’을 전달하는 위치까지 순조롭게 도달했다. Brian’s Ongoing Office worK, 통칭 BOOK은 그가 자택에서 처리하는 결재 서류 모음의 총칭을 뜻하는데, 그 두께가 한 권의 책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서재의 문을 노크하려던 세스는 문득 문이 조금 열려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이언, 넌 아직 어려.”

 “저한테 와서 이러지 마시고 회장님께 그렇게 주장해보시는 게 어때요.”

 “아버지는 이미 늙었어. 언제까지 널 지켜줄 수 있겠니? 기회가 있을 때 잘 생각해보렴.”

 거칠게 문이 열리는 순간 세스는 뒤로 물러났다. 부딪힐 뻔했잖아! 반짝이는 금발을 한 중년의 남자는 문 앞에 선 비서(25세, 185cm, 전직 운동선수.)를 보고 어깨를 움찔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골든구스 저택을 빠져나갔다. 안에는 흐트러진 셔츠를 걸친 브라이언이 앉아있었다. 평소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한 꺼풀 벗어던진 그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피로가 가득했다.

 “그거 이리 주고 이만 가봐, 크라우벨.”

 고요한 목소리가 얼음장으로 감싼 듯 냉랭하다. 세스는 직감한다.

 아, 망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받는 대신, 세스의 다음 몇 주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비서 선배가 엄연히 있는데도 그날부터 브라이언의 옆자리는 세스가 독점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선배의 태도가 유난히 쌀쌀맞아진 걸 느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어 더욱 곤란했다. 혹시 못된 상사가 이걸 노린 걸까?

 “크라우벨. 이퀴녹스 건은 어떻게 됐지?”

 갑니다, 가요. 입 속으로만 하는 대답도 이제는 도가 텄다. 세스의 손은 벌써 키보드를 두드리며 필요한 자료를 띄운다. 브라이언이 다음 비서로 문어를 채용하더라도 세스가 일을 더 잘할 거다. 오징어 비서라면 쪼끔은 밀릴 수도 있겠다. 커피 10잔 한번에 들기 같은 분야에서.

 그날도 한바탕 커피잔 묘기를 성공해 냈는데, 묘하게 회사 분위기가 소란스러웠다. 브라이언의 부재를 틈타 세스는 선배와 접촉을 시도한다.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만 어쨌든 대답은 받을 수 있었다.

 “거위들의 내분이야.”

 그제야 세스는 그가 엿보았던 정보의 앞뒤를 이해한다. 흔한 재벌들의 집안싸움 이야기였다. 골든구스 회장이 손자인 브라이언을 총애한다는 사실은 이미 단물 빠진 가십거리였다. 회장의 아들 로버트 골든구스, 그러니까 브라이언의 아버지는 젊을 때 방탕하게 놀아난 탓에 회장의 눈에는 영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헌데 ‘이미 늙은’ 회장이 부쩍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여, 로버트는 반격을 결심한다. 거대한 황금알 앞에서는 아버지고 아들이고 없었다.

 사업의 성공으로 말하자면야 그 누구도 브라이언을 넘어서지 못하겠으나, 편집증적인 통제 탓에 ‘뒷돈 나올 구석’은 전무했다.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이 알음알음 다른 편에 서버린 거다.

 하여튼 있는 놈들이 더하다니까. 세스는 좀 입맛이 쓰다. 왜 그런지는 본인도 모르겠, 아니 알겠다. 컨트롤프릭 골든구스 씨가 아침부터 새벽까지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무장한 그 사람이 집에서는 놀랄 만큼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도 알아서 그랬다. 그의 고용주는 프라다를 입는 악마다. 그러나 그걸 벗어던졌을 때의 브라이언은…….

 내가 왜 걱정하고 있는 거야?

 이번만큼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골든구스 씨, 제 말 좀 들어보라고요. 당신 아버지가…….”

 “늦었어. 크라우벨. 그 입 닫고 당장 들어가도록. 자료는?”

 “여기 있, 아니, 이대로는 골든구스 씨가 실각한다고요!”

 브라이언의 얇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무어라 말하려 했을 때, 복도 저편에서 찬란한 금발이 나타났다. 로버트 골든구스. 황금을 몸에 휘감은 남자. 돈을 물처럼 쓰고 술을 숨처럼 마시는 골든구스 지사의 사장은 브라이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라이언.”

 “안녕하세요, 아버지. 들어가시죠.”

 로버트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브라이언을 위해 문을 열어주는 선심을 발휘하기도 했다. 아들을 노골적으로 경쟁자로 여기는 태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세스는 남자에게서 승리의 확신을 감지한다.

 그해의 사업 결과와 내년의 사업 계획이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과연 브라이언은 실전에 강한 사람이었다.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은 로버트와 브라이언 사이를 흘끔거렸고 로버트는 허리를 쭉 편 채 의자에 기대앉는다. 지금이라도 한 대 갈기고 끌어내야 하나? 투자자들의 마음이 로버트로 기운 탓에, 로버트가 ‘브라이언 CEO를 해고시켜야만 하는 이유 7가지’의 운을 떼자마자 전폭적인 지지가 쏟아질 게 뻔했다. 젠장, 라이언. (세스는 답답한 나머지 상사의 애칭을 읊조린다.) 그렇게 태연하게 안경을 고쳐 쓸 때가 아니라고요. 지금 당신 아버지가 “로버트 골든구스 씨 본인 되십니까? 경찰입니다. 헤로인 사용 및 공급 혐의로 긴급 체포하겠습니다.” 경찰에 체포…… 엥?

 “헤로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함정이야, 함정이라고!”

 이사회는 엉망이 되었고, 이제 존경하는 내빈 여러분은 끌려가는 로버트에게 최대한 눈길을 주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세스는 단상에 선 브라이언을 바라보았다. PPT가 마지막 장으로 넘어간다.

 “감사합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이어진다. 젊은 골든구스는 안경을 벗어 정장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마치 런웨이를 걷듯 여유롭게 걸어, 세스의 곁에 앉는다.

 “당신 설마…….”

 “다음 일정 준비해.”

 로버트 골든구스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은 72시간 정도 화제가 되었다가, 유명 연예인의 불륜 소식에 사그라졌다. 그 72시간 동안 브라이언은 내내 일을 하고 있었다. 하긴 브라이언은 지금까지도 일만 했다만. 세스는 BOOK을 들고 서재 문을 두드린다. 오늘은 책을 내려놓는 것 외에도 할 말이 있었다.

 “알고 있었어요?”

 오늘의 브라이언은 ‘지난번’보다는 나은 꼴이었다. 혼자서 와인을 즐기고 있었는지 책상 위엔 치즈 플래터가 있다. 함정에 걸린 쥐. 문이 닫힐 때까지 핏발이 선 눈으로 브라이언을 향해 삿대질하던 로버트 골든구스가 겹쳤다. 꼴꼴꼴 고급 와인이 잔 속으로 떨어졌다.

 “한 잔 들지.”

 “까딱하면 골든구스 씨도 위험할 수 있다고요…….”

 세스는 여전히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냥 말이 터져 나왔다. 공이 울리면 어떤 상황이건 간에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다. 세스는 여전히 프로 복싱 선수였다. 그리고 골든구스의 비서였고.

 “아버지는 내가, 그런 것들을 모른다고 생각하더군.”

 결국 브라이언 혼자 잔을 비웠다.

 “못 해서 안 하는 게 아닌데 말이야. 제 발에 제가 걸린 셈이니 동정할 것 없어. 크라우벨. 내가 걱정되나?”

 “네.” 놀랍게도 여전히 그랬다.

 브라이언은 다시 잔을 채운다. “네 선배는 겉면밖에 몰라. 내 정장 한 벌에 몇 파운드가 쓰였는지, 구두의 가죽이 얼마나 고급인지. 그것만 보고 숭상하지. 그런 애들은 오래 살아남지 못해. ……내 곁을 줄 수도 없고.” 바로 머금는 대신 천천히 잔을 돌려 기울인다. 붉은 액체가 넘칠 듯이 찰랑거렸다. “너는 감이 좋아. 꽤나 똑똑하고…… 그래, 크라우벨. 나를 닮고 싶다면.”

 “한 계단 아래. 내가 네게 허락한 위치야. 마음에 들었을까?”

 “나는 내 아버지를 감옥에 보내면서까지 꼭대기에 서 있진 않을 거예요.”

 “삶은 어차피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아. 너도 이미 네 선배한테 같은 일을 하지 않았나. 이런 삶을 바란다면 그런 어려운 선택도 해야 하는 법이지.”

 쾅. 책상이 흔들리고 와인이 쏟아졌다. 서재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융단이 흉하게 젖어 들었다. 살인사건이라도 난 것처럼. 정작 브라이언은 흔들림 없이 그대로 앉아있었다.

 “난 당신 같은 삶을 바란 적 없어요.”

 쏘아낸 목소리는 뜻했던 것보다 딱딱하다. 세스는 하나의 피사체 같은 브라이언의 옆모습을 집요하게 들여다 본다. 시선으로 잠긴 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기라도 할 것처럼. 설원을 닮은 색을 하고 있으면서 담고 있는 온도는 뜨겁다. 브라이언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세스는 브라이언을 걱정한다. 브라이언에게 끌리고, 브라이언을 생각하고, 때로는 브라이언을 원한다. 그러나 결코 골든구스마저 포함하지는 못했다.

 한 계단 아래? 세스는 황금의 위광에 눈을 가리고 싶지 않았다. 브리오니, 프라다, 까르띠에. 발음하다 혀가 꼬일 법한 무수한 브랜드의 이름을 외우고 싶지도 않았다. 세스가 사랑한 것은 흐트러진 셔츠. 한 꺼풀 벗어던진 얼굴. 숨기지 못한 피로. 비인간적인 CEO에게 때때로 드러나는 인간적인 모습들.

 황금 거위의 동상은 끌어안고 싶지 않아. 차갑고, 딱딱하고, 살아 있지 않으니까. 그는 벌떡 일어나 서재를 나간다. 브라이언은 붙잡지 않았고, 세스는 골든구스와 관련된 모든 번호를 차단했다. 끝내주게 요란한 퇴사였다.

 골든구스의 연말 파티가 뉴스 한 꼭지에 등장했다. 구석진 테이블에서 세스는 적당히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연말의 술집은 북적거렸고 문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임에도 바텐더는 캐롤을 크게 틀었다. 세스는 콜캐논을 추가로 주문한다. 대중 친화적인 인테리어와 가격은 작은 화면 속 파티와는 천지 차이였다.

 “다른 세계 사람들이라니까! 쟤네들은 우리가 뭐 먹고 사는지도 모를걸.”

 취객 하나가 툴툴거렸다. 문이 열리고 우르르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왔다. 바텐더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만석이에요.” 대꾸한다. 다시 문이 열렸다 닫혔는데도 한 사람의 손님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만석이라니까요, 손님. 손님?”

 그 손님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어, 세스의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세스는 위에서부터 들리는 아주 익숙하고 오만한 목소리를 인식한다.

 “이거, 나를 가장 실망시킨 비서 아닌가.”

 “이제 당신 비서 아니에요.”

 맞은편 의자가 잡아당겨졌다. 이런 술집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브라이언이 앉았다. 침묵을 이겨내지 못하고 먼저 눈을 들어 올린 건 세스 쪽이다. 보라색에 가까운 푸른 눈은 의외로 차분했다. “알아.”

 “그래, 이제 아니지.”

 이제 상사와 부하가 아닌 두 사람은 떠들썩한 술집과는 대조적으로 조용히 술만 들이켰다. 브라이언의 입맛에 이런 맥주는 안 맞을 텐데도 군소리 없이 삼켜낸다. 건배도 없이 빈 술잔만 하나둘 쌓여갈 무렵, 브라이언이 취기를 빌려 중얼거린다.

 “내 비서가 가끔 네 이야기를 해. 그래도 크라우벨이 일은 잘했지, 하고. 후임을 뽑아야 하는데 마땅치 않은가 봐.”

 “그것 참 애틋하게 들리네요. 그립기까지 할 정도예요.”

 “네 자리는 아직 비어있어.”

 “정말요?”

 “그래.”

 침묵이 이어진다. 세스는 포기한 어떤 가능성을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 애쓴다. 상상 속에서 그는 언제나 브라이언의 곁에 있었다. 때로는 비서로, 때로는 경호원으로, 그리고 때로는…….

 “사실, 면접을 봤어요.”

 트레이너 쪽 일이에요. 재활에 관심이 많이 생겨서. 제 이름을 알더라고요. 분위기가 좋았어요. 아마 잘될 것 같아요. 브라이언의 대답이 늦게 돌아왔다. 당신도 가끔 상상을 했나요? 그 상상엔 내가 있었어요?

 “그거, 축하할 일이군……. 오늘 술은 내가 사지.”

 브라이언은 다시금 잔을 든다. 그리고 세스는,

 그리고 세스는 재킷 끝에서 튀어나온, 구겨진 흰 셔츠 소매를 발견한다. 순간 부글거리는 맥주의 거품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와도 돼요.” 불현듯 세스가 내뱉었다.

 “뭐?”

 “골든구스 씨, 운동은 조금도 안 하고 야근만 철야로 해대니까 나이 들면 몸 망가지는 거 금방이라고요. 당신 할아버지가 장수한다고 안일하게 굴지 말고요. 저, 잘하니까. 종잇장 같은 체력의 사회인도 자신 있어요.”

 “뭣 하면 당신이 좋아하는 그놈의 계단도 준비해 둘게요. 천국의 계단이라고 있거든요. 인기 아주 많아요. 그러니까…….”

 “크라우벨.”

 겨우 맥주였다. 그래도 브라이언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 있었다. 독한 술을 단번에 들이마신 것처럼.

 “이게 다 무슨…….”

 “언제든 와도 된다고요.”

 세스가 서툴게 덧붙였다. “That’s all.” 아무래도 브라이언의 포쉬 악센트를 완벽하게 재현하진 못했다. 입을 살짝 벌린 브라이언의 얼굴이 얼마나 멍청했던지, 세스는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웃고 난 다음에야 자신이 긴장했다는 걸 알았다.

 종이 울리고 환성이 퍼졌다. 사람들은 축하하며 폭죽을 터트린다. Happy New Year! 새로운 날. 새로운 시작. 새로운 고백.

 그들은 위스키를 주문했다. 멋진 새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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