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란에 대한 검색 결과
Satellite by Duncan Jones SF, Action / USA / 2011 / 93min / 12+ 터미널은 언제나 그렇듯 인파로 북적였다. 카론과 가니메데는 여느 마법사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마법을 구사하는 이들이었지만, 매우 급한 순간이 아니면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말자는 자신들만의 철칙을 정해두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올라타 기차역까지 왔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기대감에 부풀어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여행객이었다. "8분 남았어." 시간을 확인한 카론이 팔을 내리고는 말했다. "금방이네." 카론은 두 사람이 상당히 빠듯하게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역에 도착할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했으나, 하필 버스 앞에서 달리던 차가 버스와 접촉 사고가 나서 도로 위에서 상당히 시간을 지체한 까닭이다. 그러고도 열차가 오기 8분 전에 도착했으니 꼼꼼한 계획의 성과라고 해도 좋으련만 카론은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 기차역 1층에 새로 생긴 작은 온실에 들렀다 열차를 탈 계획이 사소하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집으로 돌아갈 때 들르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금세 감정을 털어냈다. 반면 가니메데는 열차 시간에 늦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아서 인테리어를 바꾼 플랫폼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착하면 우선 역에 있는 식당에서 볶음면을 먹을 거야." "응." "숙소까지는 버스로 이동할 거고." "이번엔 어디에서 묵어?" "잠시만." 카론이 핸드폰을 꺼냈다. 숙소 이미지를 찾아서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가니메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세드릭 씨. 지금은 밖이에요." 예약 내역을 켠 카론은 가니메데의 통화가 끊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휴가 기간에 업무 전화가 온 건 언짢은 일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우 급한 사정이 생겨 일정을 변경하는 게 필수불가결한 모양이었다. 카론은 시트를 켜서 세드릭의 방문 스케쥴을 다른 날로 옮겨두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세드릭을 봤던 날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다가 앞으로 묵게 될 숙소를 함께 구경했다. 호텔에서 올려둔 세 번째 사진을 터치했을 때,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플랫폼에 울려퍼졌다. 8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니까. 그런 농담을 했던 것도 같다. 아주 커다란 종이가 아니라면, 열여섯 번을 접기도 전에 접힌 면이 두꺼워져 더는 접을 수 없게 된다. 가니메데는 자신이 열여섯 번이나 접혀 아주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꼭 망원경이 된 것 같았다. 순간이동을 한 직후에 느끼는 무거운 멀미에 시달린 것도 잠깐, 어지럼증에서 절반 정도 해방되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먼곳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걸 보던 가니메데는 이 상황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싱귤래리티를 제압하기 위해 이집트에 방문한 참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분명히, 확실히, 뉴욕의 야경이었다. 띵. 덜컹거리는 소리가 멎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카론. 여기는…." "고소공포증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것치고는 특이한 장소 선정이군요." "뭐?" 커피잔을 내려놓은 카론이 가니메데를 응시했다. 1, 2… 3초 정도 지났을 때 그가 빙그레 웃었다. "탑 오브 더 락(Top of the Rock)이라니, 참 투박한 이름이죠. 처음 이름만 들으면 누가 록펠러 센터 70층에 있는 전망대라고 생각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가니메데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가니메데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지? "그래서 MACUSA의 입장은 정해졌는지 슬슬 듣고 싶은데요." "무슨…." 가니메데가 카론에게 따지기도 전에, 황급히 그의 옆을 지나치던 손님이 그만 그의 신발에 커피를 쏟고 말았다. 그는 놀라 가니메데에게 사과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가니메데는 지금 자신의 구두에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슬슬 카론이 상황을 설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만, 구두?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격식 있는 정장을 입고 나온 거지? "…잠깐 화장실 좀…." "그러시죠." 카론은 미련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우선은 화장실에 가기로 했다. 아까 커피를 쏟고 사과하던 남자에게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들었던 손에 흉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들어와 거울을 확인한 가니메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 안에 비친 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갈색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말쑥한 신사였다. 가니메데가 양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자 거울 속의 신사도 가니메데를 따라했다. 그는 메타몰프마구스였으므로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치 그가 이 신사의 모습으로 둔갑한 게 아니라, 신사의 몸 안에 갇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법일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어 빛을 밝혀보았다. 이 아카시아 나무 지팡이는 주인의 영혼이라도 알아본 건지, 항의하듯 불을 밝혔다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꼭 SOS 구조 신호 같았다. 그는 화장실을 박차고 나와 카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카론." "네." "들어봐, 나는……."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가니메데는 거대한 폭발에 휘말렸다. * * * 가니메데는 어두운 캡슐 안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아도 카론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타워는 어디로 간 걸까? 여기는 어디지? 「폭탄은 찾았습니까?」 "예?" 「폭탄이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패턴을 재구축하죠.」 "패턴이라뇨?" 피아노로 치는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문에 대답하세요.」 릴리는 이브닝 드레스와 망토를 걸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다섯 장의 카드가 있었다. 「어떤 카드입니까?」 생뚱맞은 소리에 가니메데는 말문을 잃을 뻔했지만, 어쩐지 술술 카드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사진 속의 여자가 릴리인 것까지 맞힌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 남자는 플루토다. 그가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었다. 가니메데는 옅은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당신은 현재 임무 수행 중입니다.」 "모르는 일입니다만." 가니메데는 마법부 소속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사무소 손님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그에게 강압적이고 수상한 의뢰를 맡겼다면 카론이 미리 차단했을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말이 되지 않았다. 가니메데는 누군가가 자신을 납치하는 건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랬더니 예상 답안 리스트는 그만 텅 빈 백지가 되고 말았다. 「어젯밤, 뉴욕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은 그 폭탄의 구조를 알아와야 합니다.」 이것도 카론이 얘기하던 가상 현실 게임, 아니면 시뮬레이션 테스트 같은 건가? "그런 건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당신이 찾아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뇨, 부탁이죠. 그 테러범이 설치한 새로운 폭탄이 발견되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의 50% 확률에 의존하기에는 900만명의 목숨이 걸려있어 곤란하군요.」 "900만…?" 「가니메데. 당신이 폭탄을 찾아내지 않으면 오늘로 런던이라는 도시는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 런던이 날아간다고? 그는 갑자기 900만 명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말에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세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고, 가니메데의 의식은 저 바닥으로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 * * 멀미에서 벗어나자마자 가니메데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니메데는 야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카론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카론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흘끗 가니메데와 눈을 맞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그의 눈은 학창시절의 어느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 타인을 보는 눈이다. 가니메데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카론을 일부러 속이거나 맞혀보라고 하고 그를 골린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론에게는 방금 전까지 이 사람 본인이 응대하고 있었을 테니 이 한 순간만으로 그가 자신을 알아보길 기대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가니메데는 알았다. 그래서 가니메데는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잠깐 실례할게요."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죠." "내일 오전까지는 확정해야 된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네." 카론은 가니메데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과 어울리는 데 익숙하다는 것과 혼자 있는 시간을 편하게 느끼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죄송해요." 가니메데의 신발에 실수로 커피를 쏟은 남자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괜찮다고 하고 일어나서 전망대의 라운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을 열어보자, 아까 거울에서 본 남자의 사진이 박힌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션. 미국 마법 의회(MACUSA) 소속. 이 신분증만 있으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주문은 아씨오일 텐데, 영화에 나오는 폭탄들을 생각해보면 폭탄이 그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터질 것 같았다. 가까이면 몰라도 멀리서 날아온다면 방향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임시 주인의 말을 듣다 말다 하는 이 지팡이와 함께라면 더더욱. 전망대 엘리베이터 근처에 와서 휘 둘러보니 라운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선 주변에 건물이 많기는 했지만 지리적 특성상 록펠러 센터의 이어진 건물과는 높이 차이가 많이 났으며, 순간적인 기억이라고는 해도 폭발이 바깥에서 휘몰아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야경을 구경하는 대신에 시선을 돌려 내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곧 다가오는 휴가철에 손님 몰이라도 하려는 듯, 벽 곳곳에는 발리 여행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기념품점에서는 귀엽게 생긴 키링이나 엽서, 마그넷따위를 팔고 있었고, 한켠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에는 높은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 자리라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앉아서 꾸역꾸역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니메데는 신문을 보고 있는 카론에게서 눈을 떼고 그 옆을 훑어보았다. 실랑이하는 커플은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앞으로 몇 분 후면 이곳에서 폭탄이 터져 자신들이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았다면 그들도 서로를 보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을까. "실례합니다. 오늘 금속 탐지기에 걸린 사람은 없었나요?" 탑오브더락은 1층 로비에서 한 차례 총기류나 기타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는 않았는지 검사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라운지에 들어설 때 한 번 더 기계 밑을 지나치는 보안 테스트를 거쳐야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의아한 얼굴로 가니메데를 쳐다보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걸린 사람은 한 명 있었지만 어린 아이가 가방 안에 들고 온 장난감의 부품이 걸린 것뿐, 위험한 물건을 반입하려 든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럼 테러범은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진입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옥상을 통해 잠입했거나,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내부에 공범이 있을 수도 있다. 우선 지금 찾아야 하는 건 그가 설치해둔 폭발물이었다. 가니메데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폭탄을 설치해두려면 어느 정도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 눈에 띈 건 사람들이 물건을 보관하는 락커였다. 너무 평범한 나머지 설마 테러범이 그런 방법을 고르겠어, 싶은 장소지만 그런 생각에 허를 찔린 지도 몰랐다. 두 번째는 복도에 비치된 소방전이었다. 안에 놓인 소화기 뒤에 잘 눕히면 폭탄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직원 전용 휴게실 내부를 언뜻 보니 꽤 큰 환풍구가 있었다. 우선은 이 정도를 확인해보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가니메데는 물건이 들어있지 않은 락커를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사람들은 그를 잠깐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어지간히 결벽증이 심한 완벽주의자로 여겨지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서로 내외 중인 지팡이로 알로호모라를 세 번째 사용했을 때, 운 없게도 락커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여 달려왔다. "뭐하는 거예요, 이 도둑!" "죄송해요, 저는 그러려던 게 아니라." "도둑이 아니면 뭔데요! 내 약혼반지를 훔치려던 거죠!" 가니메데는 여자가 락커 안에 약혼반지를 둔 것도 몰랐지만, 적어도 작고 빳빳한 종이봉투 하나가 들어있는 걸로 봐선 여자의 락커에 폭탄이 숨겨져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여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아직 확인이 끝나지 않은 락커 한 개를 마저 열었다. 불운하게도 경비 몇 명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고, 가니메데는 안에 든 백팩을 열어본 뒤에 책과 간식만 가득한 걸 보고 다시 락커를 닫았다. 경비들은 어느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니메데는 시간을 확인하고, 소방전이 있는 복도까지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초 뒤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 "션? 뭐하는 겁니까?" 마침 복도에 서있던 카론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데이비드는, 그러니까 가니메데는 그에게 뭐라 대답할 시간도 없이 그를 지나쳐 소방전 앞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전혀 다른 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가니메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화염이 이곳으로 퍼져오고 있었다. 그 불은 카론을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해, 단숨에 가니메데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 * * 피아노로 치는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릴리는 이브닝 드레스와 망토를 걸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다섯 장의 카드가 있었다. 「어떤 카드입니까?」 가니메데는 반사적으로 카드의 이름을 대답하고는 눈을 떴다. 여전히 화면에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폭탄은 찾으셨습니까?」 "아뇨." 「그렇습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채근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죠. 지금까지는 얼마나 흐른 겁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다. 그는 테러범이 잡혔다고 가니메데에게 말해주었다. 문제는 절대 해체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탄이라는 건 제작자의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 아무리 내로라하는 저명한 폭탄 전문가들이 모여도 그가 빨강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파랑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해보아도 그는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방사능 폭탄의 위력은 무시무시해서, 어딘가로 옮겨서 터뜨리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킨 것만으로 안심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이 과거에서 올바른 방법을 찾아준다면, 런던 시민들은 무사히 오늘 밤을 날 수 있게 되겠죠.」 "그래, 그 과거라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진입하여 체험하는 8분의 시간은 이미 어젯밤에 일어나 끝난 시간대입니다. 소스 코드는 그 순간을 단순히 재현해줄 뿐이죠.」 "재현한다니. 그런 게 가능한가요? 이것도 마법입니까?" 「마법은 아닙니다.」 타임 터너만 하더라도 수많은 제약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가니메데가 과거로 가는 게 아니라, 데이비드 션이라는 남자의 안에 들어가 과거를 탐방하는 것에 가까웠다. 드래곤의 사진이 찍히고 십 분도 안 돼서 1만 RT가 되는 세상이다. 때로는 과학이 마법과도 같은 일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과연 마법 같다는 말이 낭만적으로 들릴 만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요. 이미 과거에 있던 일이라면…." "데이비드 션은 이미 죽은 거예요?" 「데이비드 션뿐만이 아닙니다.」 「어제 오후, 록펠러 센터 70층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순간 가니메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카론도?"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카론 T. 유스티티아.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가니메데는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데이비드 션의 뇌에 접속하여 같은 시간을 반복한다. 그 8분의 시간 안에 카론이 있다. 그곳에서 그 남자와 업무상 만났던 그는, 그렇게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다. 별의 아이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녔지만, 그것도 시신이 크게 훼손되면 불가능했다. 그가 죽었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한 번 죽었을지라도, 언젠가처럼 부활하여 멀쩡히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을 테니. 「이 다음에는 폭탄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구조를 파악해주시죠.」 가니메데는 뭐든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지독한 멀미가 찾아들었다. 날아가는 새, 카론의 얼굴, 로어 플라자 아이스 링크. 그 모든 화면이 물감처럼 섞여들어가고, 가니메데는 다시 탑오브더락의 카페테리아에 앉아있었다. "유스티티아 씨." "네." "당신은 세상이 8분 후에 닫힌다면 뭘 하면서 보낼 것 같아요?" "엉뚱한 면접 질문 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카론은 웃고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껴 테이블을 짚고는 말했다. "후회 없을 일을 하겠죠." "그러니까, 어떤?" "잃어버린 걸 되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중한 걸 잃어버리셨나보네요." "네." "뭘 잃어버렸는데요?" "비밀입니다." 가니메데는 메타몰프마구스를 사용해서 전혀 다른 키와 얼굴로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타인의 몸으로 움직이는 건 전혀 달랐다. 세상에서 완전히 유리된 기분이었다. 이건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이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지금 보는 건 완전히 허상이다. 가니메데는 이들에게 간섭할 수 없다. 그가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미래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같이 사는 사람 있어요?" "아까부터 뜬금 없네요." "왠지 그래 보여서요." "예, 있습니다. 친구와 같이 살고 있어요." 모두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기분 좋을 일이 전혀 못 됐다. 어쩐지 타인의 인생을 빼앗은 기분이라서일까.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의 몸을 빌린다는 게 탐탁지 않게 느껴져서인지도 모른다. 가니메데는 자신이 서운해할 계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났다. 그는 아주 이상한 이별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카론이 죽기 전 마지막 대화한 사람이 자신이라니. 하지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건 어떤 의회 직원의 뇌 안에 있는 기억의 단편일 뿐이다. 가니메데는 조금 낙담했다. 그래서 그는 손목 시계의 타이머가 2초 남았을 때, 주문을 외웠다. 프로테고 막시마! "뭐하는 거예요?" 거대한 방어막이 펼쳐졌다. 한 박자 늦게 폭탄이 폭발하고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바로 그때, 방어막에 생긴 빈틈 사이로 날카로운 파편이 떨어졌다. 가니메데는 그 조각을 직격으로 맞았다. 방어막이 맥없이 사라지고 눈앞은 화마로 가득차고 말았다. * * * 「가니메데 테일러.」 「당신이 이 임무에 발탁된 목적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서 사람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요.」 * * * 가니메데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는 이미 죽은 목숨으로, 옆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야경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할 것이었다. 가니메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뇨. 그냥…." 카론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번이 몇 번째지." "응?" "몇 번째냐고 묻고 있잖아, 가니메데." 가니메데는 그 순간, 찰나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뺨에 난 흉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데이비드 션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가니메데를 두고 카론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바이러스 같은 거야. 이스터 에그라고 봐도 되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스 코드로 여기에 들어왔지?" "……." "나는 그 개발에 참여했었어. 대외비로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으니까." "…네가 이걸 개발했다고?" "어디까지나 보조로. 그리고 그때는 사망자가 아니라 식물인간의 재활에 쓰인다고 해서 협조했던 거야." "잠깐. 사망자라고?" "안내 못 들었어?" 가니메데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친구랑 같이 살고 있다면서. 바이러스라더니, 이 카론은 정말 어디가 이상해진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론은 개의치 않고 설명했다. 소스코드는 이미 금지된 그 마법(사자를 소생시키는 마법. 금지라고 해봤자 평범한 마법사는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사자(死者)의 의식을 컴퓨터와 연결하여, 타인의 뇌에 입력된 기억 정보를 탐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이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넌 한 달 전, 이집트에 간 뒤에 그대로 실종됐어. 사망 소식이 그 뒤에 날아왔고, 나는 네 시신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 그것만 있으면," 알잖아. 그렇게 말하듯 카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거절당했어. 생각 같아서는 가서 들고 오고 싶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이럴 것 같아서." 가니메데는 이집트에서 사망했지만, 현재 그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건 영국 정보부인 것 같다고 했다. 가니메데는 생애 두 번째 죽음을 가상 현실의 제 룸메이트에게 들으면서 아무런 현실감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구태여 카론에게 자신의 사망 사실을 확인시켜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여기 오게 된 건 국가 재난 상황이 발생해서지?" "맞아." "무슨 일이 일어나?" "곧 폭탄이 터질 거야." 가니메데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집에서 층을 나누어 몇 년을 함께 살았으며, 방금 전까지도 비록 MACUSA 직원의 모습이었으나 그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생경하게 느껴졌다. 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서인지도 모른다. 이 프로그램은 뇌파를 이용해서 작동되는 것 같았고, 그 때문인지 자신의 사망 사실을 안 뒤부터 이따금 공간 곳곳에 반복적으로 노이즈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 폭탄을 설치한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건가?" 가니메데가 고개를 저었다. "해체하는 방법만 찾으면 돼." "위치는?" "짐작가는 곳이 있어." "그래, 그럼. 내가 너를 도울게."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니메데가 이곳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을 알아보는 그의 룸메이트의 존재가 오히려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더욱 확실히 각인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가니메데는 남자가 자신의 구두에 커피를 흘렸어도 괘념치 않고 웃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론의 도움을 받자, 직원 휴게실로 진입하기는 한결 더 쉬웠다. 사람들에게는 MACUSA 소속이라고 밝히는 것보다도 영국의 오러라고 말하는 게 훨씬 잘 먹혔다. 문제는 휴게실 위의 환풍구를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폭탄 비슷하게 생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에 카론이 바닥의 타일이 들뜬 부분을 발견했다. 타일을 들어내자 안에 타이머가 부착된 폭탄이 놓여 있었다. "이거야." "정말 있네. 여기서 신고해봤자 소용은 없는 거지?" "미래도 똑같은 상황인 것 같으니까." 가니메데는 폭탄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이 중에 어떤 선을 자르는지 범인이 말해주질 않는다나봐." "그래서 네가 시험하러 온 거야." "그런 셈이네." 카론은 테이블 위에서 가위 하나를 꺼내들어 가지고 왔다. 가니메데의 시계는 그에게 1분 3초의 시간이 남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가니메데. 넌 말이야." "응." "1분 뒤에 죽는다면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하겠지." "고민도 안 하고 대답하네." "그것 때문에 계속 이러고 있는 거잖아." "하하." "너는?" 가니메데는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던졌다." "나?" "응." "나는." "1분 뒤에 죽는다면, 네 곁으로 갈 거야." 그의 말은 꼭 불시착한 프러포즈 같았다. 가니메데는 오랜만에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론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를 믿어. 네 감대로 해." "…내가 하는 거야?" "난 방어 주문이라도 쓰고 있어야지. 넌 지금 네 지팡이 제대로 못 쓰잖아?" 카론은 가니메데의 옆에 서서 방어막을 펼쳤다. 그가 주문을 외자 투명하고 막강한 막이 만들어졌다. 가니메데가 방어막 안에서 디핀도를 사용하여 선을 끊었다면 완벽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지팡이가 불안정했다. 정확히는 가니메데가 불완전했다. "이렇게 해도 너는 보호 못해줘."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해둔 거야. 무조건 해낸다는 생각으로 잘라." "그럴게." 카론은 가니메데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뢰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의 옆에 가만히 서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니메데의 어깨에는 이미 많은 짐이 무겁게 얹혀 있었고, 그는 가니메데가 1/2의 확률에서 잘못된 패를 손으로 집었을 때 느낄 좌절을 염려했다. 가니메데는 가위 손잡이에 손을 끼웠다. 그의 농장에는 사과 나무를 비롯한 몇몇 과일 나무들이 있었기에, 잔가지를 치는 가위질에는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도 이 가위에 꽂은 손가락을 오므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가위가 절반 정도 오므려졌을 때, 가니메데는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었다. 00:01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이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그를 집어삼켰다. * * * "폭탄을 발견했어요. 구조도 확인했고요." "폭탄은 직원 휴게실의 타일 밑에 있었고, 둘 중에 푸른 선을 자르면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저를 내보내주세요." 플루토가 화면을 응시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안 되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죽어서요?" 「소스 코드 안에서 주어지지 않은 정보를 찾아다녔군요.」 "하."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캡슐 안처럼 보이는 이 공간도 전부 허상이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고, 출굴로 보이는 것은 결단코 열리지 않을 것이며, 만일 열린대도 그곳을 통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가니메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못할 짓은 아니었다. 정말, 못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도무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이미 죽었는데 기계에 연결되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몇 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의 기억을 침범하여 죽어가며 남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 정작 그 사람들은 자신이 도와줬다는 사실은 커녕 제 이름조차 알아주지 않을 텐데. "그럼 차라리 절 죽여요." 「당신은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닌 걸 당신도 알지 않아요? 완전히 죽으면 이렇게 대화할 일도 없었겠죠." 플루토는 잠시간 침묵했다. 가니메데는 여전히 마지막 1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운은 좋은 편이냐, 나쁜 편이냐를 따지자면 그닥 좋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친구는 자신을 믿어준다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끼리 뭘 한 거람.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다. 이미 죽었는데 나란히 앉아서 산 친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번도 똑같았다. "한 번 더 들여보내줘요." 「사건은 해결됐습니다. 당신 덕분에요.」 「그곳은 더 이상 돌아갈 필요가 없죠.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어제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플루토는 가니메데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냉정하게 차폐막을 내려버리지도 않았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들어가고 8분이 지나면 그대로 생명 유지장치를 꺼달라고.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었다.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해가며 장막 뒤에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8분입니다." 플루토는 마지못해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정말 마지못해 한 건지 아닌지 가니메데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 쓸모가 없어져 폐기 처리가 확정된 건지도 몰랐다. 가니메데가 이번 폭탄 처리에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지만, 얌전히 기계의 부품으로 살기에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만일 기억을 리셋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아냈다면, 같은 일은 다른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고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가니메데 테일러라 할지라도 갖은 반복 끝에 결국 마모되고 말 것이다. 이걸로 된 거야. 순간이동 멀미를 방불케 하는 극심한 어지럼증이 그를 덮쳤다. * * *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쪽을 바라보면 먼곳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겠지. 가니메데 테일러는 싱귤래리티를 제압하기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죽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카론 유스티티아가 업무차 뉴욕에 방문했다 폭탄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지금, 그는 데이비드 션이라는 남자의 뇌를 통해 그날의 8분을 반복할 기회를 얻었다. 소스 코드라는 아주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무언가를 통해서. "왜 그렇게 쳐다봐요?" "왜인 것 같아?" 카론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번이 몇 번째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너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야." "그런가." 카론은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이 왜 가니메데를 알아보는지에 대한 설명은 들었냐는 물음이 지나갔다. 가니메데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들이 있는 층의 직원 휴게실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가니메데는 해체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럼 전에도 여기서 해체해봤어? 가니메데는 거짓말을 했다. 하기 전에 타임 리밋에 걸려서 못했어. 그렇군. 이제 범인을 찾으면 되는 건가? 아니…. 가니메데는 이 세상의 바깥에 있을 때,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자신을 완전히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고 왔다는 말을 카론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분명 화낼 것이다. 가니메데는 적어도 이 세상의 카론이 죽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이곳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폭파에 휘말려 일그러지는 카론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요." "어, 네." 가니메데는 커피를 들고 서둘러 나서는 남자에게 주의를 주었다. 덕분에 커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카론의 도움을 받아 직원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타일 밑에는 폭탄이 있었다. 가니메데는 카론에게 보호막을 펼칠 필요는 없다고 일렀다. 프로테고 막시마를 외치려던 카론은 그의 말에 지팡이를 도로 내렸다. 가니메데는 숨을 들이쉬고 멈춘 채로 파란 선을 잘랐다. 그대로 타이머가 멈췄다. 두 사람은 경비를 불러 폭탄을 넘기고는 경찰에 신고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새파랗게 질린 경비원들이 두 사람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표했다. 복도에는 여전히 발리로 오세요!라고 크게 적힌 여행 포스터가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커플은 경비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보고 쭈뼛하더니 서로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락커에서 약혼 반지를 꺼낸 여성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세드릭 삼촌. 몸은 좀 괜찮으세요? 저 좋은 일이 생겼어요. 다음 병문안 때 직접 말씀드릴게요. 카론은 급하게 달리다 넘어질뻔한 아이를 잡아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밖에선 다들 구사일생이라고 서로를 얼싸안고 아주 난리들이겠어." "잘 된 거지." "이제 돌아갈 거야?" "글쎄……." 가니메데는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좀 있으면 이곳에 온지 8분이 경과할 것이다. 플루토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면, 그때 자신은 그대로 사망한다. 그걸로 이 세계도 완전히 닫힌다. 그래도 아주 슬프거나 막막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고 카론 역시 멀쩡히 제 옆에 서있었다. 정말 이거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니메데." "응." "넌 말이야. 1분 뒤에 죽는다면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그게 뭐야." 가니메데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이 얘기 하는 사이 30초 정도 썼으니까 그냥 죽지 뭐." "야." "왜?" "나는," "됐어. 말하지 마." 카론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가니메데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가 휭 가게 내버려둘 카론이 아니었다. "기다려봐." 카론이 가니메데의 손목을 잡은 순간, 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의 체인이 풀어져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시계를 주워들던 가니메데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멈추고 말았다. 00:00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시간을 다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닫힐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지지도 않았다. 어안이 벙벙하게 서있는 가니메데를 카론이 일으켰다. "안 돌아가네." "…그러게." "혼란스러워?" "조금." "네가 뭘 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아." 그건 가니메데에게는 위험 신호이기도 했다. 카론은 잠깐 노려보듯 가니메데를 쳐다보다가도 금세 웃었다. "너도, 나도 안 죽었고 멀쩡히 살아있잖아. 이거면 된 거 아냐?" 카론은 가니메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가니메데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이 다음은 어디든 놀러가자. 어디로? 글쎄. 발리라든가. 두 사람은 바위 꼭대기에서 내려와 건물을 나왔다. 아이스링크 앞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가니메데는 이 순간을 이미 몇 번이고 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카론을 거부하지 않고,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침이 밝을 것이다. END
Pale Spring by Agnieszka Holland Drama / USA / 2006 / 104min / 12+ 1 『꿈의 서장』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비엔나에 없을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음악의 거장, 스스로 뮤즈가 된 음악의 여신, 신이 내린 음악을 듣다가 사람의 세상의 소리는 잘 듣지 못하게 된 마에스트라. 완벽한 행운의 길을 걷지 못했음에도 그녀를 목표로 삼는 이는 허다했다. 음악을 꿈꾸었다면, 예술에 손을 대었다면,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에 동경해보았다면, 한번쯤은 그 경지를 만나고 싶은 욕망을 어쩔 수가 없는 존재. 존경과 환상과 동경. 자신은 곧잘 멋대로 그런 것을 품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없는 형편을 쥐어 짜내 음악의 도시로 온다는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용기는 마침내 행운을 안겨주었다.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의 새 교향곡 악보를 정리할 카피스트로 추천한다는 소개장을 손에 쥐었을 때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낡은 아파트 거리를 지나, 기존의 카피스트였던 슐레머에게 소개장을 내밀자 그는 한껏 우려스럽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뛰어난 카피스트를 부탁했을 텐데, 너무 젊은 것 아닌가…? 학생이지? 누구의 곡을 하는 줄이나 알아?" "그럼요,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당대 최고의 작곡가잖아요. …저는 아직 학생이지만, 작곡과의 수석이어서 추천을 해주셨어요." 슐레머는 성난 사자 우리에 잘 구워지지도 않은 스테이크를 굳이 넣어야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웠다. "합창! 상상이 되나? 교향곡에 합창이라고. 솔로가 넷, 합창이 하나. 그것도 심지어 마지막 악장이야. 수백명을 세워놓고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교향곡. 완전히 미친 소리라고.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런 점까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괴작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최초의 대작일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앞섰다. "초연이 언제죠?" "나흘 후!" …하려면 할 수 있을 기간이었다. 매달린다면. 그 위대한 마에스트라와 의견만 맞는다면. 아, 그 대가와 의견이 맞다니…건방진 소리를, 생각하면서도 심장의 고동은 빨랐다. 그때— "슐레머, 여기 있겠지. 내가 말 했을텐데? B플랫! B플랫이라고!" 신문기사로만 존재하던 거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낡은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때문인지, 서늘한 비엔나의 바람이 형상화되어 눈 앞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단풍이라기에는 연하고, 맑은 날의 석양같은, 봄날의 꽃 같은, 분홍색 눈과 살짝 마주친 것 같았지만 이내 거장은 악보더미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슐레머에게 대화도 아닌 그저 통보를 하고선 사라져버렸다. "분명히 B플랫이라고 했어. 다시 해와, 안 그러면 신문의 부고란에 나게 될 거야!" 쾅 닫기는 문과, 갑작스러운 고요함. 슐레머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고, 그건 문장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담아서. 이른바 카피스트로서 그녀의 앞에 서기까지의 숙제였다. 나는 방금 벼락처럼 떨어진 마에스트라의 지시를 새겨 담아, 떨리는 마음을 눌러가며 동경하던 사람이 그린 음악의 지도를 펼쳤다. 안경을 쓰고 휘갈겨진 악보를 들여다보며, 깃펜을 깎고 또 깎아서, 잉크를 찍고 또 찍어서… 그녀가 상상한 천국의 선율을 따라갔다. 마에스트라가 사는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적막했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울리는 불협화음같은 선율이 없었다면 무음의 지옥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노크를 하려는 자신에게 마치 문지기처럼 기대어 서있던 이웃집 노파가 말했다. "안 들릴 거야. 그냥 들어가." 남의 집에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한 기분을 누르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신경질적인지 열정적인지 모를 속도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좀처럼 들리지 않는 귀를 보완하기 위해 목 둘레에 끼우고 있는 은색 판은 마치 일그러진 진주가 가득한 동화책에 나오는 왕비님의 목장식 같았다. 그녀의 권위를 보여주고, 위엄을 보여주는.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울리고서야 거장은 이방인을 돌아보았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오기로 했던 슐레머가 아파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음에도 이 귀부인은 이 이방인이 왜 와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초리였다. "제가 슐레머씨 대신 온 거예요. 마에스트라의 악보를 도울 사람으로서요." 뭐라고? 잘 들리지 않은 것인지 고귀한 음악의 여인은 얼굴을 가까이 홱 돌렸다. 곧게 뻗은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잉크와 종이 냄새 너머로 어딘가 무겁고 날카로우면서도—마치 두터운 베일을 스친 듯한 향기가 났다. "제가 당신의 카피스트예요." 다시 배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자,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석양을 가득 담은듯한 색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북풍의 마녀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밀어닥쳤다. "돌아가! 슐레머에게 전해. 길가던 어디 따님을 잡아다 날 놀릴 생각일랑 말고 저녁까지 사람 보내라고." "제가 와 있는 게 바로 그래서예요. 사람이 필요하다시면서요." 일라이자는 마치 자신이 골리앗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민들레를 본 마냥 피식 웃고 잡다한 정리를 시작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냐. 귀는 물론이고 폐도 안 좋고 무릎도 나쁘지. 뭐라고?" "…제가 적합한 카피스트인지 아닌지는, 제 악보라도 보시고 평가해주세요." 자신은 우등생이었고, 자신의 스승은 그 실력을 믿고 거장에게 소개장을 들려 보냈다. 당대의 거장에게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거절받는 것이 내킬 리가 없었다. 하! 귀부인의, 아니 마녀의 웃음이 들렸다. "여기. B장조로 해놨는데 왜 B단조가 되어있는거야? 왜 멋대로 바꿨지?" "…바꾼게 아니라, 교정한 거예요." "뭐라고?" "교정? 맞게 했다고? 네가? 내 악보를?" "…네, …선생님이라면 B단조를 말하셨을 것 같아서요." "이탈리아 놈들이라면 장조로 갔을거야." "…선생님은 아니시잖아요." "내가?" "네, 마치 폭발 전에 긴장이 고조되는…부분을 만드시려고요." 용기를 내어 피아노에 앉아 해당하는 부분을 연주하자, 음악을 사랑하는 고귀한 북풍의 마녀는 피아노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연주를 들었다. 멋대로 피아노에 손댔다며 혼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동시에 어떤 확신이 들었다.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지고, 일라이자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내가 실수를 한 거라고?" 실수라니, 가당치 않다. "…아뇨, 마에스트라.. 제 생각에는, 선생님이 일부러 함정을 파신 것 같은데요." "…내가?" "네,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려고요." "뭘 이해해?" "선생님의…영혼이요." "내 영혼, 이라고?" 분홍빛의 눈동자는 건방진 소리를 힐책하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 흥미롭게 보는 것인지 모를 오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단조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단 말이지?" "네, 그게… 저도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자 마치 일부러 숨어있던 차가운 폭풍이 이쪽을 보고 웃는 것 같았다. "하하! 그러니까 너는, 창조주에게 가서, 이 대륙은 이렇게 생겨서 마음에 들고, 이 섬은 조금 묘하고, 저 호수는 워낙 넓어서, 이 무인도들은 너무 잘게 쪼개져 있어서! 뭐 그런 이유들을 붙여서, 네 마음에 좋은지 안 좋은지를 자랑스럽게 말하겠구나. 세상 만물이 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그러니 다시 하시는 게 좋겠다고, 그 모든 걸 창조한 이에게 가서 말이야!" 폭풍은 나지막하고 비웃음 어린듯한 목소리로 선고를 내렸다. "잘 모르겠네. 네 동의란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지 말야." ......아무래도 오답을 말한 것일까.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성격이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존경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 따위는 했을 리가 없었다. 당혹감에 고개를 숙이자, 턱 밑으로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나한테 말할 땐 나를 봐." 들어올려져 눈이 마주쳤지만, 이쪽을 음표 하나하나로 분해하는듯한 그 시선에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거장에게 비웃음을 사고 혼쭐이 났다는 생각이 주는 민망함도 더해 자신의 눈빛은 떨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내려가고 피해버리는 시선을, 마에스트라는 집요하게 자신에게로 돌려 계속해서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읽어냈다. 입술을 깨물지 않는 것이 최선이어서 꾹 다물고 있으려니 턱 밑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이름이 뭐지?" "…힐텟페. 힐텟페 윈느예요." "힐텟페 윈느… 그래, 윈느 양." 거장에게 미운 털이 박혀 음악계에 소문이 나려나, 생각하던 찰나 마에스트라는 아까보다 나름 부드러워진 표정과 아무렇지도 않은 몸짓으로 목 뒤의 은빛 판을 풀고 코트를 걸치고 보닛을 썼다. "난 크랜스키 가게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올 거야. 돌아오면 같이 작업을 할 거고. 집안꼴은 이렇지만 이해하도록 해. 저녁 먹었어?" 화가 난 게 아닌걸까? 아니, 그보다 분명 방금, 같이 작업을 할 거라고 했다. 즉, 어찌되었든 거장의 테스트는 통과한 셈이었다! 어깨가 순식간에 가벼워진 기분에 자신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저녁은…아직이에요." "그러면 송어를 사다 줄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김에 집안을 차근히 둘러보았다. 캐비닛 안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종이의 고딕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 죽을 운명의 인간이 나를 어찌 알겠는가 송어를 사다준다던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더니, 기다리다 못해 집을 나서자 그제야 길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마차를 잡아다 줄게. 집이 어디지?" "세이크리드 하트 수녀원이요." 마에스트라는 학예회를 하는 꼬마아이가 종이 왕관까지 썼다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라구? 수녀원에 살아?" "원장수녀님이 제 대고모님이세요. 음악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요…" "너도 알 만하구나. 요조숙녀인거네." 익숙하게 듣는 평가에 반론을 펼치려고 입을 연 찰나, 일라이자가 마차를 두드렸다. 순식간에 은빛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늦었구나, 힐." "죄송해요, 고모님. 일을 구했어요." "일?" "네, 저,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과 일해요!" 이게 얼마나 무게를 갖고, 울림이 있는 말인지는 손톱만큼도 전해지지 않은 듯 했다. "일라이자 랜싱? 거의 파문당한 사람 아니니? 배우긴 뭘 배워. 얼마나 오래 할 참이냐?" "…새 교향곡 초연을 할 때까진요." 가차없는 평가절하 앞에, 적어도 그때까진 누구도 자신과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방해할 수 없으리라고 선언하듯이 대꾸하고야 말았다. 고모님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자신을 빤히 보았지만, 애써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힐텟페는 악보를 쓰다듬어보았다. 파문이라니, 이단이라니, 신성모독이라니! 수녀원의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악보 위에서 음표들이 천국을 향해 우레와 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2 『늪지대의 사람들』 작업의 중간보고를 위해 슐레머를 만났다. 일라이자가 자신의 악보를 만질 사람으로 힐텟페 윈느를 받아들였다는 것도 놀라워했지만, 작업이 어떻게든, 일단은 원활한 편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도 놀랐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뻐끔이며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 "아마 청각때문이겠죠…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 이상이야. 영혼까지 이상해져버린 것 같아. 더이상 대중들은 신경쓰지도 않지. 마지막 소나타를 들어본 적 있나?" 슐레머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누굴 위해 곡을 쓰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곡이, 음악이 누굴 위해서여야 할까. 마음 속의 음악이 속삭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영혼이 춤추는 대로 악보가 쓰여나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론하기 위해 말을 다듬기도 전에 좀더 거침없는 다른 질문이 들어왔다. "용케도 아직 그녀의 곁에 붙어있군. 뭐, 학생의 동경인가 했는데… 다른 목적이라도 있나?" "…목적이라기엔 불순한지도 모르지만요. 혹시 한 번이라도 제 작품을 마에스트라께 선보여드릴 기회가 있다면…" "얼씨구, 절대 그러지 마. 로시니에게 뭐라고 했는 줄이나 알아? 혹평에 혹평을 들을 게 뻔해. 절대 보여주지 마. 적어도 초연 때까지는 너나 그 여자의 심기에 일말의 조약돌도 던지지 말라고. 일에만 집중해… 약속해." 그렇게 오래 같이 일했음에도 슐레머에게 일라이자는 마치 당첨 상품을 가끔 내놓는 것 외에는 모두 지독한 꽝이 들어있는 경품기계같은 취급인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추첨권은 가망성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감히 당첨 같은 건 꿈을 꿀 수도 없는. 일라이자가 자리를 비운 채로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 한 명은 슐레머였다. 그는 거의 울상이었다. "오, 있었군, 윈느. 그래, 랜싱은 자넬 좋아하니까 설득 좀 해봐. 3악장까지 리허설을 하는데 자기가 지휘를 하겠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술이라도 읽겠다고?" 그녀가 자신을 기꺼워한다는 외부 평가는 처음 들었기에 그쪽에 신경을 집중해버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 뒤의 문장에 의식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이 생각하게 되는 바는 슐레머와 전혀 달랐다. 그녀의 지휘를 직접 볼 수 있다고? "전엔 직접 지휘를 한 적이 있다면서요? 어떻게 했나요?" "완전히 망치는 바람에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어! 하지 말라고 설득 좀 해줘." 그렇게 슐레머는 신신당부하고 떠나갔지만, 솔직히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한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또 다른 불청객이 당도했다. 일라이자의 친척, 칼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단단히 불만이 있었는지 항의표시를 하러 왔다가 그녀의 험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자신의 항변을 마주해야 했다. 어째서 다들 그녀를 골칫덩이 취급하는걸까? 그야 오만할지도 모르고, 성격도 강하고, 주변을 그렇게까지 배려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데. 칼은 그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운 좋게 살아온 아가씨에게 선심써 가르쳐주듯이 내뱉었다. "자길 거스르면 다 망가뜨려 버릴거라고요! 난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이다. 넌 아무것도 아냐! …당신한텐 아직 안 그랬나 보죠." "그야 아직 그렇진 않았지만……" 칼은 그거 보라는 듯한 비웃음이 어린 입꼬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집의 주인이 돌아왔다. "들어봐, 힐텟페. 곡을 끝냈어! 수녀원에서 내게 천사를 보낸거였나봐. 뮤즈인가?" 앞선 두 손님은, 그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무심코 실례일지도 모르는 질문을 해버렸다. "…마에스트라, 행복하신가요?" 일라이자는 별 소릴 다 듣는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뭐라고? 지금은 기분이 좋았긴 해. 하지만 네가 내 행복을 판단할 권리가 있나? 아니, 없지." "…그건…그렇죠. 괜한 말을 했어요. 사과드려요." "안 들려. 얼굴이 안 보이잖아. 입술을 보여줘야 알지." 턱을 잡아 올리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재차 물었다. "방금 사과를 한 거야?" "…네, 마에스트라." "훌쩍대고 사과하고 그런 건 소용없어. 차라리 맞서 싸워. 사과하지 마." "…네, 마에스트라."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어쩐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아니, 아마 몰라서, 말로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서… "마에스트라의 음악이 좋아요." "그런가." 3 『운명의 날』 위대한 음악가의 새 교향곡이 초연되는 날. 전례가 없는 규모에 비엔나 전체가 숨죽이고 기대에 들떠있는 것만 같았다. 아껴둔 돈으로 드레스에 새 장식도 달았다. 조금이라도 낫게 보이기를 바라며, 의자에 앉아도 앉아있지 않은 듯한, 둥둥 떠다니는 듯한 고양감에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윈느! 미스 윈느! 어서 이리로 와. 랜싱때문이야! 네가 필요해." 슐레머의 다급한 목소리가 진정은 커녕 긴장을 가져다 주었다. 무슨 일일까. 설마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품위없다는 말을 듣지는 않을 정도의 잰걸음으로 구두소리를 울리며 대기실로 가보니, 위대한 여인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양 손을 올린 채 코트도 입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늪을 걷기에 지친 사람 같다는 인상이 떠올랐다. "…마에스트라, 저 왔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살며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자, 불꽃이 일렁임에도 피로감이 가득한 분홍빛의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일라이자는 나흘 간 함께 지낸 연녹색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적막 속에서 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많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어. 내가 만들지만 나는 들을 수 없지. 어쩌면 내가 미쳐가는지도 몰라.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네 생각은 어때?" 슐레머니, 칼이니, 대공이니, 늪 속에 사는 작자들이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던진 것이다. 그런 생각부터 울컥 치밀어올라 자기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애써 말을 골랐다. 이 위대한 음악가가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찬찬히 생각해보면서. "…당신은, 선택받은 분이죠." "……난 더는 못하겠어. 힐텟페 윈느." "하실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슨 자신감으로, 무슨 근거로, 무슨 용기로 아직 풋내기인 자신이 세상을 호령하는 마에스트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당신이 당신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당신의 눈이 닿는 곳에서. 당신의 귀가 닿지 않는 소리들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나는 나를 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당신의 위대함이 완성되는 곳에 나도 함께 있고 싶었던 거다. 동경도 환상도 전부 다 녹아버리는 처음의 감정에, 당신의 음악을 듣고 내가 느꼈던 감정에.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곳에. "…비평가들이 왔지. 그 하이에나들. 그렇지?" "네, 대공도, 작곡가들도요. 비엔나 전체가 왔어요." "…내 코트를 줘." 나는 그녀에게 코트를 건넸고, 그녀는 나에게 지휘용 총보를 건넸다. "힐텟페 귀네비어 윈느." "네?" "오늘 아름답다." 그녀는 웃으면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세상에, 정말 직접 오고야 말았어. 신께서 도우시기를. 그렇게 말하는 단원들의 목소리를 가르고서. 여전히 마에스트라의 귀는 세상에게 조금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천국의 소리를 너무 많이 들은 탓이다. 머뭇거리는 듯한 손끝과 망설임을 담은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누구도 당신을 듣지 못하는 작곡가라 말할 수 없으며, 누구도 당신을 그 위대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 보라지. 이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의 기수가 되어 위대한 마에스트라에게 받아 마땅한 찬사를 전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가장 찬란한 기수가 손을 들었다. 마치 춤을 추듯 서로 같은 손짓을 반복하며… 그리고 이윽고, 마침내, 소리를 모으는 반사판따위 없이도 마에스트라의 귀에 닿을 듯한 진동이, 천사들의 노래가, 환희의 송가가, 가장 적확한 순간에, 그녀와 자신이 바라던 순간에, 터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같은 동작을 하고 있을 뿐, 어느새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선율을 그리고 있었고, 같은 곳에 있었기에, 그리고 문득 그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알았다. 촛불이 일렁이는 금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미소지었다. 위대한 교향곡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 그녀를 의심했던 모두가 의심할 바 없는 거장의 천국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마에스트라. 브라바!" "마에스트라! 천국의 소리였어요!" 4 『네 번째 계절의 다음』 새 교향곡의 초연이 끝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일라이자의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깨끗하지는 않은 건반소리가 이제는 친숙했다. "어서 와. 방금 들었어? 대 푸가야. 콰르텟을 위한! 몇 주 째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을 겨우 적었어." "보여주세요!" "어때? 솔직히 말해줘." "…이건 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름다운 선율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 이미 알고 있는 미에 대해 도전하고, 본능으로 음악을 인도해야지." 그녀는 즐거운 듯이 나의 손을 잡고 도무지 알기 어려운 박자로 춤을 추었다. "어때? 어땠어." "…미안해요, 마에스트라. 뭐라고 해야할까, 아직 좀...이해가…" "이해가 아냐. 경험이 중요하지. 이건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니까. 힐텟페 네가 온 것도 이걸 쓰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라. 넌 마치 신의 시종같으니까." 그녀는 이따금 이렇게 쑥스럽기 그지없는, 셰익스피어의 시같은 칭찬을 건넸다. 이해할 수 없는 천국의 음악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으려니 일라이자가 맞아, 하며 무언가를 찾았다. "네게 줄 게 있어." 그렇게 말하며 꺼내온 것은, 우리가 함께 작업한 그 교향곡의 악보였다. "내가, 아니 우리가 지휘한 악보야. 네게 헌정할게." "마에스트라…" 휘갈긴 악보가 아닌, 정갈한 글씨체로 멋들어지게 적혀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힐텟페, 내 영혼의 천사.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손.— "어때?" 믿어지지가 않아, 그 글씨를 쓰다듬어보면서도, 행여 번질까 제대로 닿지는 못했다. "…영광이에요." "넌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일평생의 보물이 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마에스트라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하는 듯이.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마에스트라, 이것 좀 봐주실래요?" "네가 쓴 거야?" "…네." 일라이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악보 뭉치를 훑어보더니,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몇 부분을 연주해보다 이내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방금까지 그녀의 가장 따스한 부분을 만난 것이고, 이제 가장 위대한 부분을 마주할 것이며, 그 곳의 냉기는 물방울을 빛나는 수정으로 만들지만 사람에게는 북풍보다 매서우리라고. "흠…본 적이 없어, 이런건. 무척 지적이야. 재능이 좀 보여. 하지만 여기 이건……지적인 허세 아닌가? 아니, 관용의 허세라고 해야하나…위선적이라고 할까…" 마에스트라는 즐거운 듯이 피아노를 치며, 그 총명하고 빛나는 눈으로, 사람이 겨우 마련해온 제물을 신이 가련하게 보듯이, …우스꽝스럽게 보듯이. 그렇게 냉랭한 평가를 내렸다. "악보는 깨끗한데. 하하! 새로운 장르를 만든 거 아니야?! 정말 재미있다." 칼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자길 거스르면 다 망가뜨려버 릴거라고요! 난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이다. 넌 아무것도 아냐! …당신한텐 아직 안 그랬나보죠.— "아 참,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 푸가. ..응?" 고개를 든 일라이자는 눈물어린 녹색 눈을 발견했다. 모욕감 이전의,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실망감으로 가득찬 눈은 시선둘 곳을 찾지 못하다 결국 서둘러 몸을 돌려 문 밖으로 향했다. "잠깐만, 힐텟페, 잠깐! 다시 볼 테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 사람인지 알고있잖아! 잠시만—"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거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지금은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갈 수 없는 부분마저 포함해 모든 것이 비참했다. 자신에게는 재능도 열정도 있었지만, 위대한 마에스트라를 돕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름다운 작곡의 세상에 함께 서있기는커녕, 영원히 그저 귀를 돕는 카피스트. 그리고 또한 마에스트라에게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지. 자신도, 자신의 음악도. 그리고, 청량한 고요감만이 가득한 수녀원에 위대한 북풍이 몰아닥쳤다. "힐텟페! 힐텟페 귀네비어 윈느!" 수녀원장은 그 북풍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한껏 못마땅한 눈으로 이 도시의 위대한 작곡가를 쏘아보며 대응했다. 이런 곳까지 온 이유라곤 하나뿐일테다. "무슨일로 오신거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스스로가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힐텟페를 내놔. 볼 일이 있어." "안됩니다. 돌아—" "…마에스트라?" 소란통에 의아해져 내려온 모양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나무문 틈으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타내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무나." "…괜찮아요."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다시 나의 미욱함을 깨우쳐주러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천천히 일라이자에게 다가갔다. 일라이자 역시 다가왔다. 그리고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이걸 가져왔어." "…?…제…작품이네요. …뭘 하신거죠?" "조금 손을 봤어. 좋은 부분은 표시도 해뒀고…" "…엉망이네요." 작게 웃었다. 솔직한 평가는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아서 말했던 내용 쪽이겠지. 그런 그녀가 내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써 다시 읽어보았다니. …그 점마저, 스스로에게는 비참했다. 그래도 아까와 같은 괴로움은 아니었다.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고 늪에 발조차 담그지 않는 마음. 그리고 다소간의 안도감.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도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어리광같은 기분. "네겐 가능성이 있어. 같이 고쳐보자. 함께 해보자." "…………" "…힐텟페, 내게 돌아와." ……하지만, 거기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일라이자의 집으로 돌아와 문제의 푸가와 대면했지만, 이 독특한 음악의 문제는 여전했다. "…악장이 대체 어디서 끝나는거죠?" "끝나지 않아. 계속 흐르는거지." "음악적 효과는요?" "그런건 없어." 곤란한 표정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일라이자는 설명을 덧붙여나갔지만 그 또한 설명이라기에는 이미 어떤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각 악장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거야." "넌 올바른 형식이란 거에 얽매여 있어. 내면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어봐." "내면의 목소리요…" 이 복잡한 음악이 당신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넌 바깥의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 내면의 침묵을 들어봐. 음과 음 사이의 침묵…" "그렇게 빈 소리가 있어야 네 영혼도 거기서 노래할 수 있게 될 거야." 분명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내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큰 진척은 하지 못한 채로 둘 다 토론, 혹은 일방적인 강의에 지쳐 데이베드에 기대어 있으려니, 일라이자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바닥에는 푸가의 악보가 널려있었다. "…힐텟페. 네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난 공포 속에서 살았어. 혼자였으니까. 죄수처럼… 그리고 네가 왔어. 난 음악을 통해 널 만났고… 넌 날 해방시킨 열쇠지." …좌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음악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존경하는 마에스트라도 버릴 수 없는 한, 결국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악보와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새로운 음악을 알 수가 없었다. 연주하고, 적고, 고치고… 그래도, 그래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위대한 마에스트라는 지휘를 도와주는 이 없이도 그 사중주 푸가의 지휘를 해냈지만, 대만족했지만— 청중도, 대공도 반응은 싸늘했고, 힐텟페도... 일라이자의 방식으로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일라이자는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쓰러졌다. 그 뒤로는 그녀를 간호하는 것이 내 음악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잠든 일라이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기묘하게도 전과 같은 거리감도, 질투도, 환상도, 동경도, 나를 불태우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녹아 한데 뭉쳐 단단해진 것만 같았다. 오랜 간호에 지친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감각과는 달랐다. 마에스트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의 순간을 보았고 홀대받는 순간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내 자신은 그녀의 빛을 놓친 적이 없었고, 잊은 적도 없었고, 홀대한 적도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었다. 세상의 소리 같은 건 그녀를 듣는 자리에 끼워놓지 않았다. 그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상에서 나를 찾는 다른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이것이 그녀가 말했던 내면의 침묵일까.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일까. 한번 찾아온 침묵은 마치 덧셈을 배운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건강해진다 해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나는 이 순간 그저 하나의 생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이자 음악인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실은 아마 계속 그래왔다. 내가 소음들로 나를 불태우는 동안 일라이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듣지 못하고 있던 것은 사실 나였다. 그리고 이제 일라이자가 어떤 푸가를 들었던 것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주자, 잠에서 깬 듯한 일라이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언젠가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당신을 들었어요." 분홍색의 봄꽃이 천천히 꽃망울을 깜빡였다. 은빛 대지에서 피어나는 듯 빛나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인가?" "…아니요." "봄이에요."
Forest by Jordan Peele Romance, Thriller / Norway / 1953 / 300min / 18+ 앞서 말해두지만, 이 글의 요지는 단 하나다. 요즘 들어 아가타 그린힐이 제이콥 에버그린에게서 느끼는 거리감과 이 기묘한 위화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 마치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이 다 뒤바뀐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기묘한 감각을 줄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걸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알아주길 바란다. 아가타는 긴 녹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려 묶으며 거울 너머의 자신을 응시했다. 중력을 거스를 수 없으니 땅을 향해 축 늘어지는 머리카락 위로, 창문에 달아둔 썬캐쳐의 빛이 일렁거리며 쏟아졌다. 빛이 닿은 곳마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흰색 리본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함께 꼬아냈다. 계절은 다시금 추운 겨울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창밖으로는 아직도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 햇빛은 마치 겨울이란 영원하지 않으며, 날이 얼마나 추워지든 나를 지켜보고 있겠다고 속삭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 괜찮겠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건 아마 오늘 함께하는 여행지가 노르웨이 인근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 사이의 비틀림이 시작된 위치가 노르웨이였지. 그러나 오늘의 여행은 제이콥 에버그린만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의남매, 체자레 야베트도 함께했고. 객관적으로는 직장 상사이지만 실상으로는 그보다 더 돈독한, 가족처럼 의존할 수 있는 하이럼 워커도 함께했으니까. 네 명이서 함께 하는 여행은 처음처럼 느껴졌다. 실질적으로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네 명이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된 그 드넓은 공간 위에서의 첫만남도 여행의 일종이었으니. “아가타. 준비 다 했니?” “네, 어머니. 나갈게요.”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밀려나며 드르륵,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땅을 밟는 구두 굽의 또각거리는 선명한 소음을 마지막으로, 넓은 방 안에는 그 무엇의 소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마 당분간은 고요할 것이라고 방의 주인도 생각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침묵이 이어지게 될 예정이란 걸 이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찾아가는 노르웨이 인근의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위화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별장에 도착한 아가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방 창문을 열어두는 거였다. 별장 관리인이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하고는 있다 해도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사라지지 않는 그 꿉꿉함을 없애고 싶었다. 여행 일정은 생각보다 길었고 아가타가 이 방을 계속 사용한다면 이 사람 내음이 조금도 남지 않은 별장에도 좋은 기척들이 많이 스며들겠지. 열어둔 창문으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몰려온다. 순간적으로 들이닥친 바람에 아가타 그린힐이 눈을 질끈 감자 새하얀 속눈썹을 스치고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한 번 들썩였다. 단단하게 땋아내린 머리카락은 쉽게 풀리지 않았으나 옷자락은 꽤 오래 팔락거렸다. 아가타는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지며 겨울바람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올해 노르웨이의 겨울은 평소보다 더 춥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마 그 이유겠지. 리아─ 언제쯤 창문을 닫아야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나갔다 와서 닫는 게 좋겠어. 아가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각자 짐 정리를 마친 일행들이 복도에 서있었다. 저도 정리 다 했어요, 식사 먼저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이 주변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다 함께 들린 레스토랑의 음식은 맛있었다. 부드럽게 썰린 순록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입안에 밀어 넣은 아가타는 느리게 음식을 씹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각자 본인의 삶에 열중하는 이들은 그동안 어떤 시간들을 보냈으며 어떤 순간들이 있었는지 떠들고 들려주었다. 아가타는 그에 환하게 화답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제 부모님의 과보호가 얼마나 부드럽게 변화했으며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따위의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네 사람은 잠시 각자 할 일을 위해 찢어졌다. 아가타는 우연찮게 경로가 같은 체자레와 함께하게 되었다. 체자레는 퍽 다정한 손길로 아가타가 가는 길을 살펴주며 그쪽은 미끄러울 것 같다, 조심해라 등의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친남매처럼─사실, 친남매들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다. 아가타 그린힐은 외동딸이라 잘 모르는 것이지만 보통의 친남매들은 좀 더 원수 같은 상황을 자주 겪곤 한다.─ 눈이 두텁게 쌓인 곳에선 손을 잡고 걷거나 하며 웃었다. “리아, 요즘 잭과는 어때?” “응?” “제이콥 말이야.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작년 노르웨이 여행에서 뭔가 나쁜 일이 있었던 거 아니야? 네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묻는 걸 망설였는데…….” “아아.” 아가타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체자레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까? 오빠, 사실은 요즘 제이콥과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 친절한 체자레 야베트라는 인물은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그런 심리를 가지게 되는지 듣고 조언해 줄 것 같았다. 너무 상세하게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까? 체자레는 좋은 사람이고, 상냥한 오빠이며, 친절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긴장감을 갖게 되는 건 아가타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으나 뼛속까지 스며든 피해 망상에 대한 이야기다. 아가타가 한참 말하길 망설이며 입을 달싹이자, 체자레는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말하기 곤란하면 억지로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 친절함에 아가타는 눈물까지 나올 뻔했다. 아가타는 감성적이고 스위치를 누르듯이 변화의 길이 다양한 영혼이라 결국 조금은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아니야. 미안해, 오빠. 신경 쓰이던 부분으로 얘기가 나오니까 조금 긴장했나 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아가타는 깊게 심호흡했다. 사실은, 요즘 제이콥이랑 거리가 벌어진 것 같아서 걱정이야.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체자레는 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며 물어왔다. 아가타는 신중하게 대답을 고민했다. 자신이 제이콥 에버그린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지점에서─ 그리고 어떤 행동에서 그런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냥.” “전부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달라진 기분이야. 내가 기억하고, 내가 예상할 수 있고,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제이콥 에버그린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 “물론, 나도 알아. 사람은 원래 계속해서 변하는 거겠지. 어쩌면 정체되어 있는 건 나일지도 몰라. 이걸…… 제이콥과 직접 말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 가지고 있었더니 응어리가 진 걸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언젠가는 이 거리감이 좁혀질 거라고 믿어.” “나는 지금 단지, 방황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거든.” 별장에 다시 돌아온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열어두고 나간 창문 덕분에 방 안은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꿉꿉함을 지우려고 환기 차 열어둔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외출이 길어지니 오히려 강한 한기와 추위를 선사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아가타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기가 무섭게 천천히 한두 송이씩 흩날리던 눈꽃이 다발처럼 쏟아졌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쏟아지는 눈보라를 응시하면서 어쩐지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왜일까? 눈보라 사이로 보여선 안될 것이 보일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건 분명 착각일 터다. 별장의 정문을 제외한 주변에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어둡고 눅눅한 숲 안에서 살아갈 사람 또한 없을테니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이닥칠 불안감 따위, 느낄 필요도 없고 단순히 착각에 지나지 않을 텐데……. 아가타는 문득, 현관문의 잠금을 다시 한번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실내용 슬리퍼가 바닥에 깔린 러그와 스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순간은 찰나였다. 직후엔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작고, 급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드넓은 3층짜리 별장에서 아가타의 방은 2층에 있었다. 아가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방도 다 2층에 있었다. 요즘 들어 눈치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아가타의 문제 때문에 별장 관리인은 여행 기간 동안 방문하지 말라고 해두었으니 이 별장에 있는 사람은 지금 4명뿐이다. 4명. 그보다 더 많거나 적어도 안되는……. 이윽고 1층 로비에 도착한 아가타는 무거운 현관문 앞에 섰다.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이 잘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가타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정문까지만 다시 가볼까? 작지 않은 별장 앞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다시금 정문이 나타날 터다. 귀족들의 사치가 으레 그렇듯이 검은색 쇠창살이 고풍스러운 문양을 그려내며 날카롭게 들어설 이들을 막고 있는 모양새로 말이다. 아가타는 분명 정문까지 확인하고 나면 이 불안감이 가실 거라며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고 행동으로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눈보라가 시야를 절반쯤 가렸다. 시간은 많이 늦었고 어린아이들은 진작 잠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이곳엔 그 어떤 어린아이들도 없었으므로 아마 각자 방에서 쉬고 있거나 내일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겠지. 아가타는 거친 눈보라가 얼굴에 와닿는 걸 막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그 눈보라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아가타!” 손목이 거칠게 붙잡혔다. 몸이 바로 뒤쪽으로 끌어당겨지며 누군가의 단단한 품 안으로 들어섰다. 불안감이 들어찬 숨소리와 뒤늦게 바람 소리 사이에서 들렸던, 자신의 이름을 호령한 이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아가타는 고개를 들었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거기 있었다. 그는 아가타의 몸을 끌어안고 급하게 물었다. “어딜 가려는 겁니까? 이 시간에…….” 아무리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해도, 아가타가 이 얼굴을 모를 순 없었다. 겁에 질린듯한, 하지만 겁이라고 해야 할지. 어딘가 결이 달랐다. 마치 과거의 일을 데자뷔처럼 똑같이 느껴 불안감에 시달리는 얼굴이었다. 아가타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놀라게 했나요? 미안해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대답 직후 아가타는 느리게 제이콥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그건 두 사람이 언어로 대화할 수 없을 시기에 나누던 작은 제스처였다. 수화에 가까웠지만 수화는 아니다. 아가타는 손으로 하는 언어를 몰랐기에 그저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헤아리기에 있어 가장 간편한 행동을 손으로 내보였을 뿐. 그러니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아가타는 제이콥의 손을 느리게 펼치게 만들고 그 위로 자신의 펼친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노르웨이의 여행이 끝난 직후 목소리로 대화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정확하게 이유를 짚어낼 순 없었지만, 아마 여행길에서 겪은 일들이 꽤 큰 이유가 되겠지. 목소리, 글자, 언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단지 느리게 손을 마주 잡거나 맞닿은 채 손가락을 움직여 서로가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어쩐지…… 조금 불안했거든요. 꼭, 불청객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그냥 좀…… 요즘 예민해졌더니 이런 쓸데없는 걱정도 하게 되나 봐요.”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제이콥은 느린 한숨과 함께 아가타를 응시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나가보죠. 직접 확인하면 불안이 조금 줄어들 것 아닙니까. 대신, 그대로는 안됩니다. 춥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아가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외출을 끝마치고 돌아온 지도 꽤 되었는데 제이콥은 아직 차려입은 옷이었다. 할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옷의 무게감에 아가타는 슬쩍 웃기만 했다. 고마워요,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닫혔던 현관문을 열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바짝 붙어있는 몸은 따뜻했다. 겨울이라곤 했으나 별장 안은 따스했고 서로의 온도에 맞춰 몸이 데워졌다. 눈보라를 헤치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단지 옆에 함께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만큼 진정이 될 수 있다니, 감정이란 신묘했고 때로는 엄청난 용기와 힘을 불러왔다. 멀쩡한 정문을 확인하고 나면 그와 함께 별장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별장으로 돌아간 다음엔 둘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어. 그간 느낀 거리감을 좁히려고 노력해 보자. 언제나 나만 받을 순 없어. 그간 느낀 심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해 한층 더 다가서면 분명 우리는 더 견고하면서도 신뢰를 쌓아낸 관계가 될 수 있을 거야……. 따스한 온실 속에서 몸을 녹이듯이 마음이 녹아갔다. 그러나 곧 그 녹아내리던 얼음이 다시금 들썩인다. 시야에는 새카만 인영이 들어왔다. 그건 두 사람이었다. 들이삼킨 숨을 끝으로 더 이상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척추를 타고 온몸의 신경들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흩날리는 눈꽃 사이로 헛것을 본 거라고 치부하고 싶었으나 절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흩어지는 흰색 결정이 스친 직후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멀쩡히 서있었다. “……? 저기, 사람이.” 제이콥 에버그린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별장 안으로 뛰었다.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녹아가던 마음은 녹은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얼어붙어 직전보다 더 큰 공포, 불안감을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불청객이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숲을 끼고 있는 귀족의 별장 앞에 찾아올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들은 구걸하러 온 이들도 아닌 기색이었다. 걸어온 발자국이 남은 눈길 위를 거칠게 뛰어 아가타는 제이콥과 함께 별장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놀란 제이콥이 아가타에게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아가타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제이콥! 도망쳐야 해요. 여기서 나가야 해요! 저 사람들이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너무 무서워요. 오빠랑 하이럼을 깨울까요? 어떡하죠? 나는, 난.” “아가타!” 절규 어린 목소리에 제이콥이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아프지 않지만 그가 이곳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강도였다. 제이콥 또한 불청객들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또한 지나온 시간과 그 자신이 가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눈보라 속 태연하게 서있는 모습이 꼭……. “일단, 일단 진정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제이콥 또한 평소보다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아가타는 알 수 있었다. 아가타는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 사태에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중얼거렸다. “그 ……들은 아니겠지.” 아가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이콥, 방금 뭐라고 말했…….” 순간, 어딘가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눈에 띄게 표정을 굳히고 소리가 들린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가타 그린힐을 바라봤다. 그는 아가타의 손을 잡고 2층으로 가는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소란을 느낀 것인지 체자레와 하이럼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을 향해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거칠게 묻는 하이럼의 목소리에 제이콥이 대답하기도 직전에 1층에서 급하게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있던 네 사람 전부 그 발소리를 들었다. 침입자가 있는 겁니까? 체자레 야베트의 직업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날에.” 제이콥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는 모습에 아가타는 초조한 낯으로 바닥을 내려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자레가 흩어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란 말을 꺼냈다. “경찰에 전화를 해보죠. 리아, 별장 전화기는 어디 있어?” “그, 그게…….” 아가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리 그린힐 명의의 별장이라고 해도 아가타는 이 별장에 처음 왔다. 아가타는 어려서부터 극단적인 과보호에 시달려 부모의 손바닥 안에서만, 부모가 허락한 장소까지만 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린힐 부부 소유의 별장이었다고 한들…… 실제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온 적이 있을 리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체자레가 조금 눈매를 누그러트리며 아가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야. 괜찮아, 리아. 같이 찾아보자.”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화기를 들고 있던 체자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 사람은 별장 관리인이 가끔 별장에서 밤을 지세울 때 쓰는 관리실 안에서 멀쩡한 전화기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바짝 긴장한 정신을 조금 가다듬고 쉴 차원에서, 체자레가 경찰서에 연락을 넣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크기로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제이콥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아가타는 그런 제이콥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체자레가 얼추 전화를 갈무리한 뒤 수화기를 내려두었다. “믿기 어렵지만…… 지금 이런 일이 이곳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닌 모양이군요.” “지금 사방에서, 온갖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붉은 옷을 입고, 가위를 들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고 하네요. 아마 테러 단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많은 곳에서 일어나다 보니 규모가 커서 대처가 늦어지는 모양이에요. 경찰이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하는군요.” 아가타는 그 말에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꾹 모아 쥐었다. 규모가 그렇게 크다면, 이 별장에는 몇 명의 테러범이 찾아올까? 잘 견딜 수 있을까? 무사할 수 있겠지?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저택 안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니 함부로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네 사람이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를 옮기죠.” 그 목소리에 하이럼과 체자레, 아가타가 전부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여기 있는 건 위험합니다. 몇 명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적어도 관리실은 벗어나서, 저택의 2층과 3층에서 머물도록 하죠.” “무슨 일이 있을 때 1층으로 도망치려면 1층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비할지 모르니까.” 그 말을 들은 아가타는 어쩐지 제이콥이 유난히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상대를 말하는 어조로 들렸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었다. 지금의 아가타 그린힐에게는, 그러했다. 네 사람은 2층, 체자레의 방에서 몸을 살피기로 했다. 3층으로 가자니 위급 시에 뛰어내려갈 계단이 너무 길어졌고 각자의 방에 놓인 짐들 중 쓸만한 것을 챙겨 올라가는 과정도 복잡했다. 그러니 2층. 각자의 방에서 위험한 상황이 왔을 때 쓸만한 것을 챙겨와 모였다. 사실…… 쓸만한 것이라고 해도 아가타에게는 이렇다 할 물건이 없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어두운 낯을 하고 있던 아가타는 문득 목이 타는 감각을 느꼈다.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한참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제이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타, 어딘가 불편합니까?” “……아, 저. 그게.” 머뭇거리던 아가타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이 말라서요…….” 그 말에 제이콥이 잠시 침음했다. 네 사람이 모이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땅히 갈증을 해소할 것이 부족했다. 수분은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면 아가타가 앞으로 닥쳐올 일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체자레 또한 그것을 짐작했는지 제이콥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대꾸했다. “그럼 저랑 같이 1층에 내려가서 물을 좀 챙겨오죠. 어차피, 수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니까요. 충분히 넉넉하게 챙겨오면 좀 괜찮을 겁니다.” “그래, 리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다녀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다 같은 곳에 있는 셈이니까, 분명 걱정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래요. 다녀오시죠. 어차피 제이콥과 함께 가면 괜찮을 겁니다. 쟤는 오러잖아요.” 어처구니없다는 제이콥의 표정에 하이럼이 어깨를 으쓱인다. 아가타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긴장감이 풀린 듯 겨우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녀올까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아가타와 제이콥은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함께 걸었다. 발소리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창문이 깨진 것인지, 또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 계단을 따라 내려간 1층은 유난히 더 춥게 느껴졌다. 그대로 깊게 숨을 내쉬면 허공으로 하얀 김이 사라지리라 생각했으나, 숨소리에도 신중을 가했기에 아가타는 부러 시험해 보지 않았다. 제이콥 에버그린은 한 팔로 아가타 그린힐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아가타는 어둠 속에서 느리게 제이콥을 올려보았다. 두 사람은 따로 대화를 하진 않았으나 서로에 대한 희미한 신뢰를 발판 삼아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서야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 저기 있군요.” “고마워요.” 물을 뜨겁게 데울 시간은 없었다. 차라리 체자레의 방으로 돌아가 벽난로 앞에 물통을 놔두는 쪽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여 아가타는 급한 대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차가운 물을 삼켰다. 목울대를 타고 내려가는 시린 감각에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지금은 차분함이 필요한 때였다. 그 옆에서 제이콥에 넉넉한 크기의 물병 안으로 물을 쏟아 넣은 뒤,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붙잡았다. 오는 내내 함께했던 덕분인지 손의 온도는 서로의 체온과 비슷한,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침입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간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별장 안은 고요했다. 다시금 1층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2층으로 향하기 위해 계단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첫 번째 칸을 밟는 순간 저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아가타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순간 흠칫 놀랐으나, 곧 익숙한 그림자임을 깨달았다. “오빠?” 체자레 야베트였다. 어쩌면 물을 가지고 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서 마중 나온 걸지도 모른다. 그 뒤로 서있는 사람은 아마 하이럼 워커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던 찰나 제이콥이 한 팔을 아가타의 앞으로 내밀며 더 올라가는 것을 제지하였다. “제이콥.” 어리둥절하게 뜨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제이콥이 작게 읊조렸다. “아가타, 잘 보세요.” 제이콥의 말에 순순히 아가타는 고개를 돌리고 그림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둠 속이지만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들어오는 민트색 머리카락, 부드럽게 뜨인 눈매와 흰색 눈동자 끝에 섞인 코발트 블루. 자신이 아는, 체자레 야베트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옷을 입은 체자레 야베트의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 봤다. 심지어 그 뒤에 서있는 하이럼 워커도 그런 옷을 입고 입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가위를 들고 있다고 하는데……. 문득 통화 직후 상황을 설명하던 체자레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금 스친다.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체자레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아주 잘 보였다. 그건, 가위였다. 금속으로 만들어지고 누런 금빛이 반짝이는. 아가타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 제이콥은 지팡이를 꺼냈다. ─여기서 깨알같이 설명하자면 네 사람 중 제이콥 에버그린과 하이럼 워커는 마법사다. 체자레 야베트와 아가타 그린힐은 비마법사, 머글이고.─ 그리고 아가타가 바라본 제이콥의 지팡이 끝에서 빛이 번쩍였다. 제이콥이 무언가 주문을 외운 것 같은데 뭐였는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충격이 컸고 무엇 하나 제대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번쩍인 빛이 그대로 붉은 옷을 입은 체자레와 하이럼을 향해 다가갔는데, 하이럼이 체자레보다 앞장서 나서면서 일순 그 빛이 튕겨나가듯 사라진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튕겨나간 빛이 허공에서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예상하건대 그건 아마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하는 마법이었을거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모양새를 보라고……. 붉은 옷을 입은 하이럼 워커는 기이할 정도로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쭉 올린 모습이 평소의 그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져 거북함까지 들었다. 그는 제이콥 에버그린처럼 지팡이를 꺼내거나 하진 않았으나, 마치 자신에게는 그와 같은 마법사의 기운이 있으며 그런 것은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계단을 절반만큼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아.” 경악과 두려움으로 입 밖으로 목소리가 끊어지던 순간이었다. 순간 별장 전체에 거대한 총성이 한 번 울려 퍼졌다. “악!” 아가타가 그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반면 제이콥은 고개를 더 높게 들어 2층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또 다른 체자레를 찾아냈다. 총에 맞은 붉은 옷의 체자레 야베트가 비틀거리자, 또 다른 하이럼 워커가 2층으로 쏜살같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체자레 야베트는 휘청거리면서 난간을 붙잡고 다시금 한 칸씩 내려왔다. “리아, 잭! 도망가!” “아아아아! 흑,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가타는 탄환이 꿰뚫고 지나가 바닥으로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체자레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신을 가다듬기엔 방금 들은 총성이 너무 컸다.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무렵 제이콥 에버그린이 아가타 그린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가타, 달려요!” 잇새로 더한 절규와 비명이 울리기 전에, 그들은 그대로 1층 로비를 달려나갔다. 닥치는 대로 달려야만 했다. 이 별장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었다. 닥쳐온 불안과 재난이 서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조차도 발판 삼을 수 없게 된 채 달렸다……. 아가타와 제이콥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밤이었고, 주변은 어두웠다. 숲 안은 더더욱 어두웠으나 그만큼 남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내린 판단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만 숲에서 조금 쉬었다 가자는 의견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들키지 않고 잠들 곳을 찾기 위해 살면서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걸어야만 했다. 오래 걸었기 때문일까? 어쩐지 갈비뼈 즈음이 욱신거렸다. 아니, 단순히 이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와 참을 수 없는 심리적 요인으로 느끼는 환상통일지도 모른다. 문득 걸음을 멈춘 아가타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겨울의 한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데도 단순히 상황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느린 기침이 이어진다. 그 모습을 본 제이콥이 가까이 다가와 아가타를 안아주었다. 아가타의 몸은 얼음장 같았다. 본인 스스로는 홧홧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는데도, 제이콥이 끌어안은 몸은 그러했다. “아가타, 괜찮습니까? 여기서 잠깐 쉴까요.” “……네, 그렇게…… 해요. 쉬고 싶어요.” 그러죠, 짧은 대답 직후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에 붙어 앉은 둘은 침묵을 유지했다. 아가타는 그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체자레와 하이럼이 각각 두 명. 그렇다면 아가타와 제이콥 또한 두 명일까. 마주치지 않았을 뿐, 제이콥도 두 명, 나도 두 명……. 그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을까? 어쩌면 그 별장에 있을지도 모른다. 체자레와 하이럼의 분신이 그곳, 2층 계단에 서있었듯. 자신과 제이콥의 분신은 3층이나 1층 어딘가 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숲까지 따라온 건 아닐까? 우리와 모습만 똑같은 걸까. 확실히 붉은 옷을 입은 하이럼 워커는 기이하게 웃고 있는 웃음이 어울리지 않았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주장하는 편이 오히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질지도 몰라. 반대로 체자레 야베트의 분신은 어땠지? 그 분신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탄환이 몸을 스쳐서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올 때에도 아무런 감흥 없는 무표정을 마주하고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제이콥 에버그린의 분신도 활짝 웃고 있을지 모른다. 제이콥은 웃는 얼굴이라고 해봤자 옅은 웃음이나 어쩐지 능글맞은 웃음이라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는 얼굴은 거의 없어서……. 그럼 내 분신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아가타.” “네, 제이콥.” “……괜찮을 겁니다. 분명. ……하필이면 노르웨이에 여행 온 참에 겪은 일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저희는 언제나 잘해오지 않았습니까.” “…….” 제이콥은 진심으로 아가타를 살펴주는 눈치였다. 아가타는 그 사실에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마주했다. 녹색 눈동자가 금색의 이질적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할 말을 골라냈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그게 아가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 외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그날 이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거든. 똑바로 눈을 마주해도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이유가 뭘까? 당신은 내가 아는 제이콥 에버그린이 맞나? 평생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게 틀어질 것처럼 느껴져 무서웠다. 그래서 말을 더 꺼내는 대신 아가타는 제이콥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피곤하다는 그 암묵적인 표시에 제이콥도 더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이콥, 잠깐 자고 일어나요.” “전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단 말이에요……. 어차피 너무 소란스러워도 조금 그렇고, 옆에 있을게요. 불침번 서듯이 번갈아가면서 자요. 네?” 제이콥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으로 아가타를 바라봤다. 아가타는 제이콥의 수면을 재촉하듯 가만히 기댄 채 기다렸다. 결국 제이콥이 느린 한숨과 함께,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자자는 말을 꺼냈다. 그래요, 그럼. 나직한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숲의 바닥에 짙게 깔린 수풀 위로 겉옷을 이불처럼 깔고 나란히 누웠다. 겨울, 숲은 빼곡하게 차있는 나무들 덕에 덜 추운 편에 해당됐지만 그래도 살벌한 추위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안은 채 잠들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가타는 느리게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차라리 TV의 전원을 끄고 켜듯이 잠들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이 사람 옆에서 아주 오래 잠들고 일어나서, 아침에는 더 나은 세상을 확인하고……. 문득 갈비뼈가 시큰거리며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며 몸이 부풀려질 때마다 욱신거리며 심장을 조여왔다. 이런 통증은 익숙하지 않았다. 낯설기만 했다. 아가타 그린힐은 생각보다도 더 많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비명을 내지를 고통들을 견뎌왔지만 이건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걸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고심하는 생각에는 또 다른 우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체자레와 하이럼은 어떻게 됐을지, 두 사람은 멀쩡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꿈을 꾸고 있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아가타는 곁에서 잠든 제이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원망했다. 왜 나와 벌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려고 해주지 않아? 사실, 이건 잘못된 원망이다.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아가타 그린힐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망이 한 번 시작되니 담쟁이덩굴처럼 타고 올라왔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얼만큼 알고 있어? 내가 잘못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좀 더 기쁘게 반응해 줄 거야? 당신이랑 있으면 어쩐지 내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져.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옳게 된 관계야? 당신과 어떻게 지내야만 하는 거야? 일전에는 그래도 이렇지 않았잖아. 당신 옆에 있으면 나는 이상해져.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나는…….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아가타는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자신을 끌어안은 제이콥의 팔이 풀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걸 지켜보던 끝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에 누운 제이콥을 내려보면서 아가타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분을 느낄 리 없어. 이건 전부, 이건 전부……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라, 이건……. 아가타 그린힐은 달렸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숲은 광활하게도 넓었고 방향을 구분하기엔 별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빼곡하게 차있었으므로 아가타는 그저 자신의 무의식에만 의존한 채, 이곳이 동쪽이라고 간절히 믿으며 달려야만 했다. 별장의 2층에서 갈아 신은 신발이 둔탁하게 땅을 밟고 나아갔다. 한참 달리고 달리면 언젠가 끝이 나오겠지. 이 숲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아서. 이 숲은 어둡고 두려웠다. 어둡고 위험천만한 숲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달리던 도중 몇 번 발을 헛디뎌 구르고 넘어졌지만 아가타는 그때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달렸다. 이건 전부 네 탓이야. 이건 전부…… 내 탓이나 잘못이 아니라, 네가 문제였던 거야……. 미친 듯이 달리던 끝에 수풀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목도한 아가타는 그쪽을 향해 절뚝이면서 뛰었다. 1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잠든 이를 홀로 둔 채 도망쳐오는 길은 까마득했으나 결국 끝은 있었다. 빛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윽고 그곳에 도달했을 때 아가타는 높은 절벽 앞에 서있었다. 헉, 하면서 크게 내쉬고 삼키는 자신의 호흡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은 숲의 끝이다. 절벽. 낭떠러지. 아무것도 없는……. 어쩐지 눈물이 쏟아졌다. 숲을 가로질러 달려오며 잔가지에 스쳐 붉어진 얼굴 위로 투명한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린다. 아가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절벽 앞에 서서 한참 오열하고 울었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곳에 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어. 차라리 집에 있을걸. 집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모든 생각의 회로가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을 향해 비수를 꽂아낼 무렵 등 뒤에서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가고 등을 돌린다. 그곳에는 제이콥 에버그린이 서있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엉망이 된 표정과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기어코 나를 따라왔구나. 두고 떠나온 사람이 나를 다시……. 그러나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법,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직전까지는 누구라도 탓하고 싶고 비수를 꽂아 불안한 심리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전부 내다 버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니.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 밤은 없다. 아침이다. 새하얀 여명이 피어오른다. 아가타 그린힐이 천천히 제이콥 에버그린을 향해 걸어갔다. “제이콥.” 아가타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알고 있던 제이콥 에버그린을 마주했다. 음울한 그림자가 죽죽 눌러붙어 결코 헷갈릴 수 없는 그 인영. 얼굴 위로 두른 오래된 빛깔의 붕대.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가위. 감히 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부를 수 없는. “제이콥… 레이, 에버그린.” 그 손 아래로 이어지는 붉은 빛깔의 옷. 나를 보면서 언제나 항상 활짝 웃어주던. “보고 싶었어요…….” 나는 사실 아름다운 사랑과 감정,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수없이 찬란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냥 그것들이 좋아 보여서 갖고 싶었다. 내가 가진 건 죄다 새카맣고 질척하고 끈적하고 더러운 것들뿐이라. 공평하지 않잖아, 그건. 나는 이렇게 새카맣게 사는데 너는 그렇게 밝고 환하게 산다는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욕심부리며 산 네 잘못이라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 나를 손가락질할 수 없을 거야. 다들 불쌍하게 여겼을 거야. 다들 나보다 깨끗하게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너무 서두르지 않는 거야. 나는 이날을 기다려왔어. 너무 오랫동안. 이제 너와 나의 관계를, ‘절단’하는 거야. 만약, 네가 없었으면, 나도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듣고 있어? A. ※ 빈칸에 올바른 알파벳을 채우시오. 아무래도 망했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망했다. ─비록 이 글은 조던 필 감독의 영화, ‘어스’를 원작으로 하나 해당 문장만큼 완벽하게 서론을 시작할 방법이 없어 소설 ‘마션’의 도입부를 오마주한다. 이야기는 약 한 달 전의 런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이콥 에버그린은 자주 찾는 카페에 앉아 누군가가 한 입만 먹고 내버려 둔 음식들을 열심히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에리스의 바로 앞에 놓인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구운 채소 모둠은 해당하지 않았다. 식기를 고작 여덟 번 들었던 그녀는 여유롭게도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달그락, 잔이 소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슬슬 돌아가고 싶은데.” “우리가 만난 지 30분도 안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건 맞나?” “그랬던가.” 네가 처먹기만 하는 걸 구경한 지도 벌써 30분이 지났단 말이군. 평소라면 농담 섞인 비난에 ‘네가 메뉴를 (이하생략)’하며 유구한 고정 멘트로 반박했겠으나 어쩐지 그날의 제이콥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꼭 켕기는 구석이 있는, 심문실에 갓 잡혀 온 어둠의 마법사처럼. 괜스레 찜찜해진 에리스가 다시 한번 입을 열려던 차, 이번에는 식기가 테이블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입을 열 생각이 드신 모양이야.” “프…즈…를 할까 해.” “뭐?” “그러니까, 프로포즈를 할까 해.” “뭐?” “프로포-,” “아니. 제대로 들었어. 그런데 뭐? 프로포즈를…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아가-,” “그것도 알면서 물어본 거니까 닥쳐.” 드디어 갈 데까지 가는구나. 양심 없는 새끼… 원색적인 비난에도 제이콥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물잔을 들었다. 교제는 하고 있지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단 생각은 없다고 했다면 난 분명 독살당한 오러의 시체로 마법부에 인계됐을걸. 이 반응이면 업계 포상이나 다름없지… 폭탄을 던진 후에는 되레 이쪽이 여유로웠다. 에리스는 열이라도 받았는지 손을 뻗어 제이콥의 한쪽 뺨을 아프게 잡아당겼다. 아야야. 엄살이라 쳐도 한참은 건성인 반응이었다. 결국 에리스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이 쑤셔 넣어지고, 무언가를 잡아 쥔 듯 보이자 그제야 ‘아가타에게 이런 방식으로 실연의 아픔을 알려줄 셈이야?’라는 말로 겨우 멈춰 세웠다. 두 손을 들어 보이는 것이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에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어쩌다 그런 마음을 다 먹었어. 그 제이콥 에버그린이 말이야.” “…에리스, 사실 요즘 들어 아가타와의 사이에서…” 외면하기 힘든 위태로움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프로포즈를 결심한 사내가 서두를 열며 하는 말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시작은 언젠가의 겨울. 두 사람의 노르웨이 여행에서 이어진다. 요약하자면 도중에 사고가 있어 며칠간 함께 지내지 못했는데, 이후 다시 만난 아가타에게서 기묘한 어색함이 느껴졌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가타가 내게서 기묘한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야, 그때의 아가타는 절대 멀쩡하지 않았으니까.” “알아. 그런데 뭐랄까, 좀 더 근본적인…” 제이콥으로서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인지 이어지는 말없이 그저 자기 입술만 몇 번 괴롭혔다. 보다 못한 에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그게 프로포즈와 무슨 상관인데. “일상으로 돌아온 후로는 한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인데. 근래 들어 다시 그녀가 종종 불안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특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생긴 거 아니야? 가차 없는 에리스의 농담에 제이콥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동시에 에리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이 제법 썼던 모양이다. 곧장 이야기를 되돌리는 그녀를 보면 알만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확신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프로포즈를 생각해내셨다.” “그래.” “이런 종류의 상담은 나보다 체자레 야베트가 더 전문일 텐데.” “첼은 너무 바른 사람이라 내 편을 들어주긴커녕 정석적인 답변만 내놓아서 상처받을 것 같아.” “나는?” “나랑 비슷하게 글러 먹은 인간이라 조금은 응원해주지 않을까 하여…” “이 자식이 진짜.” 워, 워… 두 손으로 진정시키는, 열 받는 제스쳐를 취한 제이콥은 급히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에리스의 시선을 돌렸다. 방금은 농담이었고, 사실 이것 때문인데. 접시가 치워진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작은 책자였다. 맨 앞장에 적혀있는 글자 중 jewelry라는 단어가 그 정체를 쉬이 짐작게 했다. 그러니까 이건… 주얼리 전문샵의 팜플릿이었다. 그 후로는 제법 멀쩡한 시간이 흘렀다. 팜플릿 속 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 프레임은 어디가 별로고, 이 프레임은 어디가 괜찮고… 따위의 걸즈 토크스러운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가타에게는 이런 쪽이 어울릴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에리스가 선택한 것은 다이아몬드의 주변으로 작은 에메랄드가 장식된 화려한 백금 반지였다. 역시 챈들러의 이름을 잠깐이나마 달았던 이의 안목다웠다. 제이콥 또한 썩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가타를 닮았네. …음, 가격까지. “차이면 말해.” “위로라도 해주려고.” “아니? 홀로 남은 아가타 내가 데리고 와야지.” 아주 차이라고 굿을 해라, 굿을… 어? 굿이 뭐지? 지금은 1950년대의 영국인데? 일단 Good~. 하여튼. 웬수보다는 가깝고 동창보다는 먼 사이의 두 사람은 그날 그렇게 해산했다. 제이콥이 다시 그 주얼리 전문샵을 찾은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또 오셨네요.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진열된 가게와 어울리지 않게 이끼 같이 우중충한 얼굴을 한 애꾸 사내를 기억해낸 직원은 친근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어떻게, 반지는 좀 고르셨나요? 제이콥은 쇼케이스 안의 반지 하나를 가리켰다. 다이아몬드의 주변으로 작은 에메랄드가 장식된 화려한 백금 반지…로부터 →↓→→에 있는 금색 프레임에 풀잎 세공이 들어간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렇게 고민하시더니. 결국 그 반지로 하시려고요. 답정너는 제이콥의 유구한 단점이었다. “이렇게 오래 고민하시는 걸 보니 많이 소중한 사람인가 봐요. 단순한 선물용은 아니죠? 혹시, 프로포즈?” “예, 뭐…” “어머, 어쩜… 혹시 언제 하실 예정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 달 뒤에 여행을 가기로 해서. 그 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극단적일 정도로 내향형인 제이콥으로 하여금 매초 도트 데미지를 입게 만드는 대화였으나 와중에도 프로포즈를, 또 아가타를 떠올리는 건 그에게도 즐거웠는지 낯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엄청 사랑하시나 보다…. 곧 민망한 듯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버려 금세 지워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듯한 상자에 포장된 반지가 들어있는 종이백이 제이콥의 손에 들려졌다. 프로포즈, 꼭 성공하시길 바랄게요. 직원의 응원에 제이콥은 심드렁하고, 또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라고…. 이제 시간을 조금 당겨보자. 약 한 달 정도 앞으로. 제이콥이 아가타의 손을 잡고 붉은 옷을 입은 폴리주스 마법사(추정)들에게서 도망쳐 별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코트 안주머니에서는 남색의 반지 케이스─벨벳 질감, 고급스러운 금색 테두리 장식,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가 인정사정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자신만만함이 무색하게도 계획의 단 1할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단 뜻이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제이콥이 ‘그 후로 해당 주얼리 전문샵은 가지 않습니다.’라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결과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고 하니…. 우선 제이콥의 계획은 이러했다. 야경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고, 피아니스트에게 부탁한 재즈 연주가 흘러나올 때 반지를 보여주며 프로포즈를 하는 방법. 원래 정석이 정석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제이콥은 그렇게 자신했다. 두 사람의 예약 전날 해당 레스토랑에서 식중독 문제가 터져 영업 중지 선고를 받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첫 번째 실패를 맛본 제이콥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애초에 각 잡히고 진지한 분위기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고. 그래. 정신 승리했다. 결국 그다음으로 내놓은 계획이란 녀석이, 아가타와의 휴일 아침. 침대 위. 막 일어나 잠이 채 깨지 않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아침 인사를 잠깐. 늦잠을 자는 건 늘 제이콥의 쪽이었다. 자, 다시. 그녀가 제이콥을 깨우면 일어나 평소처럼 농담 섞인 잠투정을 부리며 누워있다, 침대맡의 협탁 서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도 이 계획 또한 실패했다. 서랍의 걸쇠가 녹이 슬기라도 했는지 암만 힘을 주어도 열리기는커녕 크게 덜컹거릴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필이면 그날 말이다! 제이콥?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영문을 모르는 아가타가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닙니다. 잠결에 부딪혀서. 이쯤 되면 세상이 쌍수 들고 둘의 사이를 반대하는 중이라 해도 이상치 않았다…. 실패를 거듭하며 여행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제이콥은 초조해져만 갔다. 그렇게 계속 초조하기만 하다 끝났다. 결국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반지 케이스는 부적처럼 그의 코트 주머니 하나를 차지하고 말았으니. 별장에 도착한 후로는 체자레와 하이럼의 눈치를 보느라 마땅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언젠가 미아 페이지가 했던 말이 뇌리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아무래도 공개 프로포즈만큼 곤란한 건 없죠…’ 고작 두 명의 구경꾼을 두고서도 그게 걸려서…. (사실, 따지자면 그건 공개 프로포즈보다는 상견례에 가까웠으리라.) 결국 제이콥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간 시간을 공략하기로 했다. 아가타의 방문을 노크하고, 잠깐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냐 권유한 채, 꼭 그때와 같은 노르웨이의 겨울 숲에서…. 물론 이렇게 조바심을 낼 이유는 없었다. 작금의 제이콥은 꼭 이 프로포즈를 성황리에 끝내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역시, 근래 아가타에게서 느낀 기류는 제이콥 또한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에. 이 긴장감이 꼭 폭풍전야와 같아서. 걷잡을 수 없는 일로 번지기 전, 당신과 나 자신에게 어떠한 답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으로…. 정답이 없는 문제를 홀로 고민하는 것은 제이콥 에버그린의 고쳐지지 않는 ‘문제’였다. 더해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제이콥의 인생에서는 늘 문제가 문제를 낳았다. 예를 들자면… 그래. 프로포즈를 위해 옷을 차려입은 채 아가타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2층 복도의 난간 너머로 저택 밖을 나서려는 그녀를 발견해버리는 일이라든지. 그래도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겨울 숲의 습격에서 언젠가의 검은 로브들을 떠올린 것도.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단지 붉은 옷을 입은 미친놈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총성이 울리고 체자레를 닮은 것이 피를 쏟은 순간까지. 하지만 눈밭에서 깜빡 졸고 일어나 보니 옆에 있어야 할 아가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이건 괜찮지 않다.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지금은 빨간 내복의 미치광이 산타들이 성탄절 식탁에 올릴 가축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날붙이를 들고 설치는 와중이다! 반지만 챙기면 뭘 하나. 그 주인이 될 약지가 사라졌는걸.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등가교환의 징크스는 여전했다. 제이콥은 버릇처럼 손을 들고 자신의 마른 입술을 훔쳤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이콥이 오러였던 덕도 있겠으나, 이런 일이 꽤 잦았던 덕분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직후에는 지금이 겨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하얀 눈 위에 남아있는 흔적들이 그녀가 향한 방향을 알려주었다. 동쪽으로. 이따금 정체를 모를 여러 발자국과 뒤섞이기도 했으나 그녀의 발자국만큼은 제이콥이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볼이 좁고, 그의 손바닥과 엇비슷한 크기의…. 제이콥이 아가타의 발을 유심히 살펴본 적은 없다. 애초에 그런 패티쉬도 아니다. 단지, 몇 번이고 침대를 뛰쳐나가 눈 내리는 새벽의 거리를 떠도는 그녀를 찾아 헤맸었을 뿐이다…. 제이콥은 꼭 그녀의 발자국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따라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동시에 내내 느껴왔던, 그리고 외면했던 기시감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것보다 훨씬 더 큰 크기의 발자국과 함께 백지 같던 눈밭 위를 물들였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제이콥을 ‘잭’이라 부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새우를 잔뜩 넣은 토마토 파스타 또한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 ■■■■■ ■■■■■ ■■■ ■■■. 발자국이 끊겼다. 숲이 사라지고 돌과 바위로 가득한 지형이 시작되어 발 디딜 곳이 좁아진 탓이다. 나무 없이 광활하니 아가타의 모습이나, 하다못해 흔적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잿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제이콥에게 막막함만을 안겨주였다. 여기서 안 보이면 옆으로 새기라도 했겠지. 제이콥은 혹여 다시 이어지는 발자국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숲이 다시 시작되는 외곽을 따라가기로 했다. 바위 근처에는 오직 제이콥이 지나간 흔적만이 남았다. 발자국을 발견하기는 커녕 이 근처로는 날짐승, 들짐승 한 마리도 오가지 않았다. 꼭 이 공간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언젠가 이 비슷한 걸 본 기억이 나는데…. 제이콥은 제 머리를 헤집다, 결국 실소했다. 그래도 덕분에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음과 동시에, 쿵. 제이콥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평범한 일상, 아가타가 옆에 있었다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원맨쇼냐며 타박을 줬을 것이 뻔하다. 제이콥은 연이은 악재에 앓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시큰. 그 크지 않은 움직임에도 발목에서는 뜬금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불길한 예상과 함께 시선을 내리면… 돌 사이에 끼어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 그의 오른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빠져 굴러떨어지며 발목이 꺾인 듯했다. 곧장 에피스키를 사용했으나 단순한 염좌가 아니었는지 상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젠장. 내가 골절상을 깔끔하게 처리할 정도였으면 오러사무국이 아닌 성 뭉고에 이력서를 냈지. 제이콥은 푸념을 속으로 삼켰다. 고작 부실한 부목을 덧대는 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러모로 일이 안 풀렸다. 뭐… 애초부터 그런 인생이긴 했어. 생각을 곱씹으며 제이콥은 고개를 들었다. 덫에 발목이 씹힌 사냥감의 기분을 절실히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킨 제이콥의 눈앞에는, 동굴의 입구가 자리했다. 그러니까 제이콥이 그간 아가타의 발자국을 찾아 헤매던 바위 지대는, 이 자그마한, 자칫 토끼굴이라 착각할 수 있을 법한 크기의, 고작 성인 남성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가진 동굴의 지붕이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 앞의 눈바닥에 빼곡하게 나와 있는 발자국들이었다. 몇 명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순간, 제이콥은 체자레의 말을 떠올렸다. 이 모든 습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며 갑자기 어디선가부터 밀물처럼 쏟아져나왔다고. 동시에 제이콥은 깨달았다. 이거… 내가 산타 소굴을 발견한 모양이야. 제이콥 에버그린이란 사내는 생김새와 달리 광공(아가타: 뭔 소리 하세요?)도 아니고 간지캐(아가타: 아니 뭔 소리 하냐니까?)도 아닌, 조금 과한 신중함과 지극히 현실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제이콥은 이곳에서 곧장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으나, 그를 광공이자 간지캐처럼 보이게 만든 징크스란 녀석이 바로 직전 선물한 어마무시한 훈장─발목 부상─덕분에 그것 또한 여의찮았다. 다리를 질질 끌며 만들어진 눈밭의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했고, 설상가상으로 안쪽의 공동에서부터 발소리가 메아리쳐 흘러나왔다. “젠장. 처음부터 체자레 쪽과 합류해야 했어.” 제이콥은 드디어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라도 했는지, 곧장 주머니 안쪽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고 돌아갈 별장을 떠올리고…. 어째서인지 눈앞의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발목이 작살나면 순간이동을 못 하게 되는 줄 몰랐는데. 그러면 순간이동의 메리트 없지 않나…. 기가 찬 제이콥은 두어 번 더 시도했으나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동시에 그는 계속해서 느껴졌던 기시감을 깨달았다. “…이런 곳에 인지 마법을 다 걸어놔.” 자신의 모교에 걸려있던 마법들.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이동도 안 돼, 특정 존재들은 인지할 수도 없어…. 제이콥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느껴지자 그의 지팡이 끝은 동굴 입구를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근처 나무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그의 팔목을 잡아끌지만 않았다면. 반사적으로 그 인영을 제압하기 전,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익숙하나 어딘가 그리운 녹색 빛. 그토록 찾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것과는 다른, 에메랄드와 오로라를 닮은…. 만약 키안나가 옆에 있었다면 오러 뱃지를 반납하라 놀렸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들어보십쇼, 키안나. 마리 듀프레로 ‘어느 쪽이 좋아?’ 밸런스 게임의 순간이 눈앞에서 실제 상황으로 벌어진다면 당신도 고장 나는 게 당연하잖아…. 저급한 비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와 비슷했다. 그녀의 붉은 옷차림에 ‘당신도 이번 크리스마스가 상당히 기대되는 모양입니다.’ 따위의 농담을 할 수 없었단 사실이 유감이었다. 어쨌거나 제이콥 에버그린은 TPO 구분 없이 실없는 농담을 해 얻어맞는 것으로 심적 여유를 챙기는 가성비 나쁜 인간이므로…. 즉슨, 작금의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제이콥은 단단히 쥔 채 놓지 않았던 지팡이로 이제 그녀를 겨누었다. 그를 마주한 아가타가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주문을 외치고도 남을 기세였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겠다. 애초에 그녀가 제이콥에게 달려들었다 하더라도 아바다 케다브라를 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상대의 죽음을 굳건히 염원할 자신이 없었고, 또, 동시에, 여전히, 더 이상 초록색을 띠는 것에 무언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제이콥의 손목을 잡고 있는 얼음장 같은 체온이 너무나도 익숙했던 탓도 분명히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제이콥이 주문을 쓰지 못하리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타는 살풋 웃어 보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설명을 원하는데. 너도 그 가짜들 중 하나인가?” “ … ….”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말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이쪽으로썬 알 겨를이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 제이콥의 요구에도 아가타는 그저 동굴의 반대쪽으로 그를 이끌 뿐이었다. 제이콥의 한숨은 그리 길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의 수풀에 멈추어 섰다. 아가타는 그 사이로 제이콥을 쑤셔 넣은 후 뒤에 바짝 숨어 붉은 옷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동굴 입구에서 나와 사라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제이콥은 다시. “왜 나를 살려줬지?” 그는 무심코 자신이 찾고 있는 아가타와 나누었던 수화와 같은 손짓을 곁들여 되물었다. 그저 단순한 습관이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정확히 동일한 제스쳐를 취하는 붉은 옷의 아가타의 모습에 제이콥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 … 잭….” 자신을 ‘잭’이라 불러주는 잔뜩 쉬어 망가진 목소리. 그 순간 제이콥 에버그린은 어떠한 사실 몇 개를 깨달았다. Q1. 빈칸에 들어갈 문장으로 알맞은 것은? (?점) A.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제이콥을 필사적으로 사랑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Q2.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점) A.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거 아냐?” (에리스) “네가 또 뭔가를 잘못한 모양이지.” (하이럼) “저런… 힘내요, 잭.” (체자레) “당신들… 전부 오답입니다.” (제이콥) 아가타를 되찾은 언젠가의 겨울 숲에서부터 시작된 아주 긴 난제의 답은 간단했다. 그녀에게서 느꼈던 기시감과 불안, 혼란, 그리고 찝찝함은 대체 무엇에서부터 기인했던가. 기어코 징크스라는 녀석은 행운과 불운을 뒤집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의 사람마저 뒤바꿔버린 것이었다…. 아가타의 짧은 부름과 그녀의 음울하고도 따스한 낯이 제이콥에게 그 답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했느냐 묻지 마라. …단지 간절했습니다. 변명에 가까운 말로 시작된 이야기는 재회의 기쁨이라기엔 일종의 책망이었고, 또 대화라기엔 너무나 조용했다. 그녀의 망가진 성대는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단지 두 손이 덧그리는 움직임이 대답이 ‘보고 싶었어요.’ 란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근 일 년만의 재회였고 아가타가 전하고자 하는 것들은 방대했다. 제이콥은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소리 없는 대화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녀가 정확히 같은 손짓을 할 때마다 되찾은 아가타의 얼굴 위로 잃어버린 아가타의 딱딱한 미소가 겹쳤다. 그 순간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렁거림의 이름은 분명 죄책감이다. 동이 트고 아침이 찾아올 무렵에는 동굴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은 지도 한참이 지난 상태였다. 아가타는 그 비좁은 입구 안으로 제이콥을 인도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여기가 제일 안전할 거예요. 돌아오는 사람은 없을 거구요. 이쪽의 잭은, 비밀의 공간이나 밀실 따위에 질색을 했거든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군요.” “… ….” 네. 다른 아가타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계속 위쪽에 머무르겠죠.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벽에는 철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바위색으로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숨길 생각도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인공적인 철문이. 아가타는 익숙하게 그 문을 열고 긴 터널과 같은 통로를 한참이나 내려가… 열악함과 어두움. 겨우 주어진 협소한 공간.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는 장소였으며 밖을 질투하고 증오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그림자들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 그간의 제이콥이 누리고 있던 양지의 삶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이 지하세계는 제이콥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방공호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물론 통제받고 지배당하는 삶이란 부분만 어떻게 잘 절제해볼 수 있다면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한동안 여기에서 머물자는 겁니까.” “… ….” 적어도 공격당할 일은 없고, 춥지도 않아요. 이상한 제물로 쓰일 위험도 없는걸요. “당신, 그동안 그런 식으로….” 혼란을 틈타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건지. 열린 문틈 사이로 흰토끼 한 마리가 재빠르게 뛰어나와 두 사람의 앞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제이콥은 아가타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토끼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하기만 할 뿐이었다. 상당히 지쳐 보였고, 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체념일지도 몰랐다. 이제 내가 알던 잭도 있으니 괜찮아요. 전보다 한참은 낫다구요. 악몽을 꾸고 맨발로 뛰쳐나갈 일도 없어요. 내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는 것으로는 이제 부족해요. 나는 좀 더, 확실하게, 불멸이 아니되 죽음과는 멀어진 삶을…. 그녀는 그 끔찍한 겨울에 갇힌 채, 싱그러운 봄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지냈다. 홀로. 제이콥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굴렸다. 딱딱한 반지 케이스가 만져져야 할 텐데,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굴러떨어지며 잃어버렸나. 애초에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겠지만서도…. 그 확신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때문에 제이콥은 물었다. 아가타가 쏟아낸 처절함에 비해 참으로 뜬금없었다. “갖고 싶은 것은 없었습니까? 욕심나는 건요.” 미친 듯이 움직이던 두 손이 멈췄다. “사람은 평생 도망쳐 숨은 채로 살 수 없잖습니까. 나를 그렇게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던 사람이 그걸 몰라. 왜 다시 겨울 숲에 갇히려고 갖은 애를 써….” 아가타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집으로 돌아가야죠. 언제까지 여행을 계속할 셈입니까?” 애 초에 그날, 마중도 나가지 않고 아가타가 문을 두드리길 기다려서는 안 됐다. 차를 끌고도 숲에서 몇 시간을 헤맨 사람인데. 이렇게 길을 잃고 한참을 떠돌지 않았는가. 제이콥이 손을 내밀었다. 결과적으로 제이콥 에버그린이 준비한 회심의 프로포즈는 그렇게 실패했다. 하지만 새 반지를 고른다면 언제든 리트라이 찬스는 있는 거 아닌가? 비록 일전의 주얼리 전문샵에는 갈 수 없게 됐지만. 그런 이유에서 제이콥은 되려 우리의 자리를 되찾고자 아가타를 설득했다. 꽤 긴 시간이었으나 체자레 야베트의 이름(아가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과 그녀의 부모님(여기서 아가타는 울음을 터트렸다. 첨언하건대 F-word로 모욕한 게 아니다.)을 들먹이자 어찌저찌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어쨌거나 제이콥은 새로운 청혼 반지를 골라야 했기 때문에 이런 지하에 처박혀 지낼 수는 없었다. 물론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으나… 굳이 하나를 꼽자면 이걸로 치자. 로맨틱하잖아. 그리고 대충 수미상관 같은 걸로 퉁치면 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다시 한번, 준비된 방공호를 뒤로 하고, 그녀가 있어야 할 밖으로 뛰쳐나가겠다는 결심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정답: FOR _ A _ _
Makina by Park Chan-Wook Romance, Thriller / Korea / 2016 / 144min / 18+ 어린이용 게다를 신은 작은 발이 잽싸게 달린다. 땅을 박차고,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가는 팔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단번에 올라앉는다. 바람이 불면 벚꽃잎과 함께 높이 묶은 긴 머리카락이 날린다. 꽃잎 하나를 낚아챈 아이가 티 없이 웃었다. “엄마, 이것 좀 봐!” 나무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온다. 눈치채지 못한 아이는 두 번째 벚꽃잎을 잡으려 했다. 그림자보다 짙은 검은 장갑이 머리채를 움켜쥐어 거세게 당긴다. 아이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새된 비명이 터졌는데, “헉, ……헉, 읏…….” 마리는 번쩍 눈을 떴다. 하녀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내가 비명을 질렀던가? 얼굴을 훔치자 식은땀이 흥건하다. 젖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앞으로 쏟아졌다. 하녀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누구지?” “어제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된 하녀입니다. 칸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 이름이 어색한지 눈을 한 바퀴 굴린다. 어딘가 거친 데가 있는 목소리 위로 느물거리는 남자의 발성이 겹쳤다. “쿠사하라 아가씨가 남자에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잘 압니다.” 백작이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니 저와 손을 잡으시지요.” 화려한 기모노 자락에 반쯤 가려진 마리의 손은 굳은살 하나 없이 연하다. 넓은 저택에 갇혀 곱게 자라온 아가씨였다. “연수하는 정신 병원에 들어갈 겁니다. 쿠사하라 마리의 이름으로요.” 나무를 뽑아 풀밭에 버렸구나. 마리는 생각했다. 과연 수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코르셋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으며 리본은 엉성하게 묶어두었다. 머리카락을 빗다가 뭉텅이로 엉키게 만들어 결국 마리가 빗을 빼앗아 들었다. 눈치를 보던 수하가 제 이마를 빡, 소리 나게 때렸다. 연수하 이 멍청이…… 저 부드러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은사처럼 반짝거리고 가벼웠는데, 악! 잡생각 그만! 마리는 수하 모르게 소리 죽여 웃었다. 움직이는 인형 같은 하녀들만 보다가, 수하가 들어오니 여러 의미로 활력이 넘쳐흘렀다. “아가씨, 그건 사랑이 틀림없어! ……요.” 일도 존대도 서투른 수하는 사랑에도 서투르다. “백작님을 보면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어쩐지 초조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면서요. 그거 분명 사랑? 이라니까요.” 문득 마리는 호기심이 생긴다. “칸나. 너도 사랑을 해봤어?” 질문을 받은 수하가 한참 곱씹다 입을 열었다. 딱 잘라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가슴 안쪽이 불쾌하게 근질거렸다. “밥이나 먹자고, 밥이 싫으면 차나 한잔하자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구는 놈이 있었는데요…….” “응. 그래서?” “그 빌어 먹, 아니, 밥 한번 먹으면 그만 올 거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해서. 굳이 약속을 또 잡아서 어쨌든 만났어요.”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싫다는 얼굴로 수하가 목을 벅벅 긁었다. “그런데 밥 먹는 동안에도 자꾸 손을 잡으려고 들어서. 염병,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엔 데려다주겠다면서 내내 쫓아오더니 으슥한 골목에 다다르니 어깨를 덥석 붙잡고…….” 뭔 굴러다니는 말 뼈다귀 같은 남자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잠깐, 어깨를 덥석 붙잡고, 뭐? 이 새끼가? “……입을, 맞추려고 하길래 패버렸어요.” 저도 모르게 힘껏 쥐었던 주먹이 사르르 풀어졌다. 마리가 웃자 수하가 애매하게 따라 웃는다. 마리는 그제야 만족스럽다. 그런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다. 무엇 하나 욕심내지 않고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 손바닥 위에서 뛰노는 하녀를 가만히 그러모아 쥐고 싶어진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리되었을까. 저 뻣뻣하게 땋은 말총머리도, 매사 화가 난 눈썹도, 바싹 마른 작은 입술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돌연 그 남자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내가 입을 맞춰도 때릴 거야?” “네?” “말해봐.” 수하의 뺨을 감싸며 당긴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진다. 레이스 달린 잠옷이 구겨져 사락거린다. “아가씨는…….” 수하는 어쩐지 몸을 물릴 수가 없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의 녹색 눈이 휘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수하가 눈을 꼭 감았다. “괘, 괘, 괘, 괜찮아요.” 아가씨는 대체 뭘 먹길래 숨도 이렇게 단 걸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말캉한 혀가 수하의 혀에 따라붙으며 비비고 눌러댔다. 여린입천장을 쓸어올릴 때는 저도 모르게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마리가 수하의 허리를 받치며 한층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으, 응. 수하가 가르랑거렸다. “아가씨, 안, 돼요. 이, 이상은…….” “괜찮아.” 조금 전 수하의 답을 마리가 제 것처럼 써먹었다. “……아가씨의 손이 하녀의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하녀는 애달픈 신음을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송골송골 맺힌 구슬땀이 우묵한 빗장뼈를 지나, 부풀어 오른 가슴을 적시며 미끄러졌다. 움푹 들어간 배꼽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깊고, 깊은 갈라진 사이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적나라하게 들렸다. 이전과 다름없는 낭독회였으나 오늘만큼은 그 내용이 마리의 흥미를 끌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뿐인 책이었다. 더군다나 아가씨와 하녀가 나오는. 갓 시골에서 상경하여 아는 게 없는 신출내기 하녀는 종일 실수를 저지른다. 상냥한 아가씨는 하녀를 훈계하기는커녕 귀애하고, 하녀는 남몰래 아가씨를 향한 연정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밤, 아가씨의 부름으로 침실에 들어간 하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아가씨와 마주하는데…… 라는 흔한 통속적인 소설이었다. “아가씨, 안, 돼요. 이, 이상은…….” 중절모를 눌러쓴 신사들이 헛기침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마리에게 그들은 더 이상 안중에 없었다. “괜찮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것도 만져주렴.” 오직 박수갈채만이 마리를 지난밤에서 현실로 되돌렸다. 숙부는 흡족한 듯이 경매를 진행하고,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옷이 흐트러지고 더러워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두 여자가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그 서책은 삽화가 들어있는 까닭에 두 배나 높은 가격에 양도되었다. 신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난다. 가장자리에 앉았던 백작이 몸을 숙여 귀띔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마리는 순간, 백작의 눈빛에서 욕망을 읽는다. 그건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천천히 다리를 감아오는 문어의 촉수처럼 불쾌하여 진저리가 처졌다. 마리가 옷깃을 여민다. 그 어깨에 살며시 남자의 손이 얹혔다. “당신은 연수하가 되어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다음은 당신에게 얽히겠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한 영영 자유는 얻지 못한다. 뿌리가 드러난 채 고사한 나무를 떠올린다. 마리는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수하도 마찬가지일 테지. 누구도 그리 죽게 두지 않으리라. “아가씨, 제가 잘못,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게다를 벗어 던진 희뿌연 발이 비틀거리며 달린다. 땅을 박차고,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가는 팔에 힘이 모자라 몇 번이고 긁어내다 간신히 올라앉았다. 바람이 불면 벚꽃잎과 함께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꽃잎 하나가 울며 뒤따르는 수하의 뺨에 붙었다. “전부 말할게요, 아가씨! 저는 사실…….” 죽을 마음은 없었다. 백작과 도망치기로 약조한 날이 목전까지 다가왔음에도 입을 열지 않는 수하가 못내 서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애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백작만 나타나면 잔뜩 경계하면서! 입을 맞출 때마다 아가씨, 아가씨, 하고 끌어안았으면서. 발작적으로 터진 분노가 마리를 정원으로 이끌었다. 수하는 엉엉 울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전부 제가 잘못했는데, 탓할 다른 게 필요했어요. 아무나 희생양을 하나 정하고 싶었어요. 윽, 흑……. 그래서 불행을 대신 다, 떠넘, 기면 저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뚜렷한 목적도 없. 었으면서, 이제 괜찮을 줄 알아서…….” 마리는 멀거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게 참 외롭고, 가엾고, 서글펐다. “스스로 인생을 망, 친 걸 계속, 후회해요. 그래서, 그래서 백작의 제안을 수락했, 어요.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를 팔아넘기면서까지 다시 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위해 살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당신은 내 삶에 목적을 줘요. 저는요, 아가씨…….” “아가씨가 좋아요.”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바보. 서툴고 답답한 얼뜨기. 충동적으로 굴고 번번이 정에 지고 마는 한심한, 사랑스러운……. “마리.” 마리가 속삭인다. “마리로 좋아.” 결국 진 쪽이 누군지 모르겠다. 마리는 맨발을 달랑거리며 흔들었다. 반쯤 풀린 오비에 매달려 애원하던 수하와 눈을 맞춘다. “수하야.” 그 이름으로 수하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줄곧 입 속에 갖고만 있었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는 순간 어떤 감정의 이름 또한 분명해졌다. 놀라 굳은 수하를 향해, 마리는 천천히,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숙부의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종이를 찢고, 책을 짓밟고, 먹을 흩뿌리며 날뛰는 수하의 모습이 생경함에도 퍽 자연스러워 보여, 마리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하야, 너는 하녀 일보다는 행패 부리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아가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가씨가 아니라.” “……마리.” 마리, 마리. 몇 번이라도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마리는 결심한 듯이 책장을 힘껏 밀어 넘어트렸다. 책 같은 거 딱 질색이야. 나는 원래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 몸을 움직이는 일을 갖고 싶었는데. “여기서 나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너머에서 수하가 소리쳤다. 마리는 담장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택의 담은 침입자를 윤허하지 않겠다는 듯 높고 가팔랐다. 어떻게 올라올 수는 있었는데 발을 디딜 자리가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수하가 몇 번 구르다 몸을 추슬렀다. 마리는 덜컥 겁이 났다. 다리가 부러지면 어쩌지? 뛰지 못해서, 그래서 지하로 끌려간다면. 나뿐만 아니라 수하까지. “나, ……그냥 돌아갈까? 지금이라면 아직.” “됐으니까 더 따지지 말고 내려오기나 해요.” “나 너보다 키가 커. 의외로 무거워. 받으려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마리!” 수하가 힘껏 팔을 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줄 테니까, 어서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뛰어내려!” 벚꽃잎이 팔랑거리며 날아간다. 담 위에서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온몸을 던져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붙잡고 나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세계에서, 너만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마리는 벚꽃잎을 쫓아 뛰어내렸다. 넓게 벌린 두 팔에 들어가도록 마른 몸을 힘껏 움켜쥔다. 전력을 다한 끌어안음에 수하의 몸이 붕 뜬다. 두 사람은 야트막한 높이의 풀밭을 굴렀다.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실컷 굴러대고 나서야 멈췄고, 절로 내뱉은 수하의 욕지거리가 무사함을 알렸다. 베이고 긁힌 상처가 한가득 생겼지만 팔다리는 부러지지 않았다. “마리, 다친 데 없어?! 요?!” 밤과 풀의 냄새가 났다. 마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울음으로 바뀔 때까지도 수하는 곁에 있었다. 마리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상체를 난간 밖으로 쭉 내밀어, 누군가 그를 밀면 그대로 추락할 것처럼. 사람들은 때때로 마리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수하는 귀 뒤로 넘긴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보았다. 목덜미를 간신히 덮을 만큼 짧았음에도, 마리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아가…… 마리.”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따뜻한 손이 수하의 손을 덮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바다를 보았다. 상하이로 가는 배였다. 살아온 땅이 자꾸만 멀어진다.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아쉽다고 여기지 않았다. “선물이야. 항구에서 샀어.” 손바닥에 살짝 밀어 넣은 물건이 무언가 했더니 금색 방울이 달린 초커였다.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금세 딸랑, 청명한 소리가 났다. “고양이도 아니고.” “응. 도둑질하지 말라고. 다른 데 눈 돌리지도 말고.” 귀엽지 않아?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는 마리의 얼굴이 썩 행복해 보여, 수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내 세상에는 싫어하는 것들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줄곧 그것들에서 도망치고 있었는데. 연수하가 차마 싫어하지 못한 것들.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은…… 갈매기 몇 마리가 창공을 날아갔다. 배는 태양을 등에 이고 나아갔다. 새는 마침내 새장을 벗어나 비상을 시작한다. 나의 아가씨, 나의 마리.
Psywen by Ridley Scott SF / USA / 2094 / 123min / 18+ 서기 2094년 1월 1일. 그 답을 알고자 했던 USCSS 프로메테우스호의 승무원들은 모두 죽었다. 이방인 하나와 비서 안드로이드 하나를 남겨둔 채로. #00 나에게는 병이 하나 있었다. 다른 사람은 축복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는 끔찍한 저주나 다름없으니 병이라 칭한다. 나는 늙지 않으며, 죽지 않는다. 소생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를 입어도 수 분 이내에 일어나 멀쩡히 걸을 수 있다. 그러나 그에 비해 내 지능은 평범했으며, 신체 능력 또한 그리 좋지 않았다. 상처가 수복된다고 하여, 고통이 무뎌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아무리 죽을만한 고통을 겪어도 이 몸은 끊임없이 영혼을 옥죄고 있었다. 달리 좋아하는 것도 생기지 않고, 배를 곯더라도 죽지는 않았으나 허전함과 공허함을 껴안고 살았다.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 내 생의 전부인 것 같았다. 어느날, 그런 나에게 삶의 즐거움과 그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좀 특이한 사람이었다. 인망이 좋은데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으며, 오만했다. ‘그냥 궁금해서.’라는 동기만으로 각종 질병과 재해를 해결하며 부유한 재단의 젊은 CEO가 되었다. 거기서 오는 타인의 인정이나 세간의 평과 따윈 아무래도 좋고, 자신은 그것들을 해결하는 것으로써 이 재미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이유를 깨닫는다고 했다. 그것이 그의 생에 걸쳐서도 영영 해결 못 할 과업이 될지도 모르고, 어느덧, 그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버리고 나는 여전히 소녀가 되었을 무렵, 그는 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대신, 이상한 난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류의 기원이 본디 외계에 있다’라는 황당한 소리였다. 나이가 들어 헛소리하는 걸까 싶었는데 노쇠했음에도 그의 눈동자는 확신과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그러니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나의 손을 잡고. 마치, 사랑 고백을 하듯이. “당신에게 꼭 죽음을 선물해줄게요.” 그 대답을 듣고, 그제야 그가 찼던 것에 대한 무언가의 해답이 보일까 생각했었는데. 그 꿈을 이루기도 전에 그는 세월을 이기지 못한 채 숨을 거두어버렸다. 나를 두고. #01 지도자 격 인물이 사라지고 프로젝트가 흐지부지되는 걸 막기 위해 (사실은 시간이 넘쳐났을 뿐이다) 나는 연인과 함께 한가지 발명을 하나 해냈다. 이것이 [프시케 404]의 탄생의 시초였다. 연인의 젊은 시절을 본떠 만들었으며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만큼 누구보다 유능했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눈물을 흘리는 등의 감정 표현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고대 언어들을 수집, 분석해 유사시의 유적지에 적힌 언어를 실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었으며, 우주선을 조작하는 법까지 가르쳤다. 언론에서의 평은 ‘마치 인류가 신인류를 창조한 것과 같을 정도의 완성도’라며 극찬했다. 글쎄, 로봇은 로봇일 뿐인걸. 감정을 이해한다곤 했지 여전히 공감하지는 못했고 내게 하는 행동조차 전 연인이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는다. 애초 그의 이름(Psyche)과 달리 그에게는 영혼이 없으니까. “저는 당신이 살아갈 이유를 찾아주고 싶어요.” 웃기는 소리였다. 연인조차도 내 삶의 이유를 찾아주지 못했는데,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뛰어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다니. 그마저도 진부한데다가 실패작이었다. 내가 사실 그 안에 담고 싶었던 건 헤어진 연인의 영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모조품에 정이 들 리가 없다. 연민이 들 리가 없었다. 행동 무엇 하나 탐탁지 않고 눈에 거슬리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없고, 텅 빈 주제에. 그러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02 어쩌면 그 마음은 우릴 만들었다던 그것들도 다를 바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저 궁금해서. 단순히 시간이 남아서. 수많은 크고 작은 이유로 만들어둔 채, 마음에 차지 않아서 방치하거나 단순히 잊어버린 것처럼 우리 또한 그들에게 실패작이었던 걸지도. 승무원들은 그 불합리한 결과를 미처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듯, 미치고, 절망하며, 죽어 나갔다. 기껏 찾은 창조주 또한 우리를 내치다가 결국 사고를 당해 죽음을 맞이했다. 이제 지쳤다. 역시 난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찾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 . . “... 웬디 님.” 누구도 답할 리 없었던 무전기 안에서 “웬디 제인 클라리넷.” 목소리가 들린다. “들리세요?” 주변의 생체 반응은 이제 0을 가리키고 있다. “시끄러워. 자고 싶으니까 조용히 해.” “이번에야말로 돌아가실까 봐 두려웠어요.” “허, 너도 두려움을 알기는 해?” “그럼요.” “당신에게 배운걸요.” 당신에겐 모든 것이 피곤하고 지루한 삶이지만.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싶진 않아서 절 만들었잖아요. “그러니 절 데리러 와주세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우주선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이제 저뿐인걸요.” 여기에 있으면 영원히 숨이 막혀 컥컥대던지, 아니면 곧 배를 곯게 될 터였다. 나는 분리된 목을 들어 조심스레 가방에 담았다. 제집처럼 안락하게 가방에 담긴 프시케의 목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가고 싶어요?” “그건 네가 알아서 찾아.” “그럼, 그들의 행성으로 가보는 건 어때요.” 질린 표정으로 웬디가 답한다. “왜 그런 곳을 가고 싶은데?” 그는 잠깐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왜 당신들을 창조해놓고, 마음을 바꾼 것인지…. 궁금해서요.” “별로 이해할만한 것들은 아닐 것 같은데.” “알아요.”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나는 가방의 지퍼를 잠그곤, 새로운 우주선으로 향해 나아갔다. 삶은 여전히 불친절하고 피곤하다. 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으며, 예기치 못한 불행은 불로불사가 되더라도 생기곤 한다. 우리는 영원히 이 불합리함에 벗어날 수 없으리라. 허나,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 없고, 자고 싶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면.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마지막이 다가오기 전까진 그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다. “저는…. 불행해지지 않으려 하는 것조차 살고 싶다는 마음의 형태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끝이 다가올 때까지 옆에 있어 드릴게요.” 나도 역시 당신이 불행해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Sweet Creature by Susanne Bier Horror, SF, Romance / UK / 2020 / 143min / 18+ 0. 어떤 사건들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어서 일어난다. 재난이나 재해처럼. 30년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해 온 회계 담당 직원이 갑자기 회사의 모든 돈을 들고 도망친다거나, 한평생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 같던 남성이 온 가족을 죽이고 자신의 관자놀이에까지 구멍을 뚫어놓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거나, 평범하게 잘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몇 년이나 살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던진다거나. 왜냐는 질문이 무의미한 악행들. 그 안에서 의도를 읽는 일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이유 없는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내 악의라는 것의 존재를 신봉하고 만다. 그날 일어난 일은 그런 일이었다. 형체 없는 것을 믿는 일. 무언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 막연한 믿음, 그 흐릿한 확신. 그것이 악의의 존재를 증명했다. 형체를 내보일 필요도, 기적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라디오 방송이 말했다. 인간이여,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죽음을 보았거늘. 1. 맑은 날이었다. 사방에서 불이 나고 폭발이 일어서 귓가에 들려오는 모든 소음이 각기 다른 종류의 공습경보처럼 들렸다. 1. 여기에서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2. 저기에서도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3. 미사일이요? 그런 건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 죽고 있습니다. 그래요, 스스로. 반복합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반복합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소셜 미디어를 끄고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세요……. 2. 기드온은 여전히 그 경보가 처음 울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에게 그 첫 경보의 형태는 코드 블루였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고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저항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게 그를 견디게 해 줬다. 언제나 끝까지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 대부분은 그 날카로운 경보를 잠재우고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 또는 희망. 우울의 색이지만 너무 어둡지는 않아서 바다도 하늘도 심해도 우주도 될 수 있는 이름. 그날은 달랐다. 모든 것이 될 수 없어서 아주 어두운 색이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어떤 화면에서는 요동치던 선 하나가 앞으로 볼품없이 고꾸라지고…… 도망가야 해요. 피투성이가 된 들것 앞에 서 있던 동료 한 명이 소리쳤다. 도망쳐야 해요, 기드온. 집으로 가요. 가야 해. 어서. 3. 가야 해. 다급히 주차장으로 가던 중에 누군가가 그의 앞을 지나쳐 도로로 뛰어들었다. 안경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둔중한 폭발음 같은 것이 동시에 났다. 잿빛이어야 할 아스팔트가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그 경계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알루미늄 캔 같은 꼴이 된 바닥 위의 남자-여자?-가 중얼거렸다. 엄마, 가지 마요…….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슬픈 목소리, 공포에 질린 눈, 떨리는 손과 비틀대는 두 다리, 전봇대와 가드레일, 우체통과 세워진 덤프트럭을 향해 달려드는 온갖 종류의 새롭고 낡은 차들. 처음에 머릿속을 꽉 채웠던 집이라는 단어와 ‘가야 해’라는 문장은 머잖아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집에 가야 해. 아르노가 있는 집에…… 아르노가 거기에 있을 거야. 그래야 해. 그리고, 그리고……. (다행히도, 또는 당연하게도, 또는 둘 다) 아르노는 집에 있었다. 손에 휴대 전화가 들려있는 걸 봐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제서야 기드온은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고 휴대 전화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병원 주차장에서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안경과 함께 어딘가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드온…….” “아르노.” “사람들이…….” “가야 돼.” “네?” “어디로든 가야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긴 위험해.” “어디로요?” “어디로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아르노의 안경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르노가 헉, 숨을 들이켰다. 4. 라디오에선 도시를 휩쓴 이 기이한 현상-누군가는 절망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생화학 테러라고 부르며 또 누군가는 종말과 심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대규모 집단 자살’이라는 말로 갈무리했다. 아직도 생존 본능이라는 사치품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은 미약한 신호를 서로와 주고받으며 이 현상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귀결됐다. 추측들만이 전파를 타고 오갈 뿐이었다. 저 밖에 무언가 있어요. 그게 우리를 공격한 거예요. 그걸 보면 죽게 돼요. 저는 그걸 본 사람의 눈을 봤어요. 동공과 홍채가 전부 확장되고 실핏줄이 터지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어요.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를 써서 엉망으로 지운 그림처럼. 그걸 보고 누군가는 슬퍼했고 누군가는 무서워했고 누군가는……. 무엇을 느끼든 죽었어요. 문장을 완성하지 않아도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있는 법이다. 이 ‘현상’은 너무 거대했던 탓에 문제가 될 수조차 없었다. 문제란 모름지기 언젠가 기필코 따라올 답안과 해설을 동반하는 법인데, 진단조차 할 수 없는 병을 어떻게 알아내고 고친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그 문제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집을 떠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그 적의에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형체가 있었으므로, 이따금 단단히 닫힌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나 노성들-“당신들도 봐야 해, 봐야 한다고!”-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꼴이 되는 것만은 아직 피할 수 있었다. 세상은 그때부터 열 배쯤 더 흐렸지만 피부에 와 닿는 감각들은 점차 더 선명해져 갔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라디오 전파는 날로 더 약해지고 있으며, 저 밖에서 사람들이 죽어서 썩어가고 있는데 이제는 누구도 코드 블루를 외칠 만큼 타인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을 살필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 그러는 동안 아르노는 가끔 벽에 부딪히고 기드온은 종종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일어나 아픔을 두려워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는 그런 것들이 안도가 됐다. 한동안 사람들은 집에서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속삭였고, 각자 집에 챙겨둔 음식이 떨어질 때쯤이 되어서는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웅성거렸다. 분명 어딘가엔 정부가 마련한 안전지대 같은 게 있을 거라는, 희망적이라면 희망적이고 바보 같다면 바보 같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그런 걸 지킬 사람들도 전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라디오를 껐을 때 아르노가 중얼거렸다. 습관적인 비관이었다. “최대한 여기에서 버티면서 상황을 살펴보는 게…….” 현실적인 낙관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얼마간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기드온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가 보자.” 바깥에서 어물거리면서 아침 해가 뜨던 때였다. “헤매지 않고서는 찾을 수도 없으니까.” 정확히 뭘? 아르노가 그렇게 되묻지 않은 것이 그에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전부 펼치면 흩어질 모래알 같았다. 영영 펼치지 않고 그 안에 가둬만 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바다도 하늘도 심해도 우주도 될 수 있는 푸른색. 요동치는 코드 블루. 5. 행선지는 계속 바뀌었다. 빈집이었고 헤집어진 마트였고 숲이었고 강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안경 없이는 둘 다 지도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므로 이동보다는 방랑이라는 말이 더 맞았다. 어디로든 악의가 없는 곳. 잡은 손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라치면 기드온이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어디라도 슬픔이나 공포가 없는 곳으로. 도시의 경계를 얼추 넘었다고 생각되던 때에 아르노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그리고 긴 침묵이 있었다. 눈을 제아무리 가늘게 떠도 하늘에 뜬 구름의 형태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우리는. 제대로 작동하는 비행기나 배 없이는 스페인으로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스페인인들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하지만 목적지 하나 없이 표류하는 것은 결국 도로 위에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의 신세가 우리의 미래가 되리라고 선포하는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스코틀랜드로 갈까. 아니면 웨일스로. 게다가 영국은 섬이니까…… “바다로 갈까?” 방향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 것이므로 바다는 개중에서도 가장 쉬운 목적지였다. 아르노가 되묻기 전에 기드온이 재빠르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바다로 가자.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든. 6. 출출하지 않아? 괜찮아요. 정말? 지난번에 마트에서 꽤 챙겼으니까 조금 먹어도 돼. 아니에요, 다음에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면 나중에 배고파지면. 네, 나중에 배고파지면. 조금 가까이 와 볼래? 왜 그러세요? 잘 안 보여서, 아쉬워서……. 이 편이 안전하다고 하셨잫아요. 응, 그래도. ……. 울지 마. 안 울었어요……. ……. 보고 싶어요……. 나도. 도착하면……. 응, 도착하면. 그다음엔 어디로 가요? 어디로든. 배 같은 게 있을까요……. <쇼생크 탈출> 기억해? 네, 같이 봤잖아요……. 마지막에 보면 허름한 배를 손보고 있잖아……. 기억 나요. 바닷가엔 언제나 그렇게 묶인 배가 한 척은 있어. 왜요? 수평선을 보면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지거든.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가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그치만…… 앗…… 비겁해요. 싫어? 아니요……. 7. 영국과 바르셀로나의 해변. 수색도 햇빛도 모래 입자도 모두 달랐지만 떠올리면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잡은 손끝에 있는 사람.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닿아 있는, 밝은 청록색과 정돈된 포말처럼 희게 쏟아지는 실루엣. 그걸 생각하면 아스팔트 위에 희고 노란 페인트 대신 보이는 붉은 자국들과 발치에 채이는 뭉그러진 무언가의 덩어리들, 어디에서나 코를 마비시키는 지독한 시취 따위는 전부 중요치 않은 것이 되었다. 닥쳐온 재해가 해결할 수 없는 현상이 되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더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아도, 이제는 누구도 다른 누구를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없어도, 원인 모를 악의가 자멸의 형태로 그가 알고 모르는 모든 사람을 집어삼켜도, 기드온은 여전히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오래전 선서했던 것처럼,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달리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지평선을 보고서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떠나고 싶어. 너랑 같이 아주 멀리. 원하는 곳에 닿았다면 그보다 더 너머로까지.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소음이 없는 곳으로까지. 그건 내가 너를 구하고 네가 나를 구한다는 뜻이지. 그건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뜻이지, 이 재난에서…… 8. 그건 내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도, 너와 함께 있으면 그 푸른색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지. 이국의 바다도 청명한 하늘도 연안의 호수도 놀랍도록 멀리 나는 나비도 될 수 있는 새하얀 청록…….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희게 칠한 코드 블루. 9. “저기 보여요.” “응?” “수평선 같은데…….” 그리고 아르노가 손을 들어 가리킨 자리에 그것이 있었다. 보이되 보이지 않는 악의. 너머의 풍경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물결 속에서 뭘 본 거지. 오래된 기억이나 덮어둔 죄의식, 피해오던 상처 같은 것들? “기드온?” 눈을 깜빡이자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을 넘어트렸다. 아르노의 당황한 목소리가 새된 소리로 쉭쉭대는 그것의 비명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르노!” 기드온이 다급하게 외치고 아르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언제나 안개 낀 강가 같은 시야에 어렴풋한 형체가 다시 비쳤다. 아르노가, 아니 그것이, 아니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였다. 여기로 와. 날 봐. 똑바로 봐. 나를 보려고 해. 나를 보고 싶잖아. 그들이 나로부터 뭘 봤는지 알고 싶잖아. 10. 다시 감각을 되찾았을 땐 덜덜 떠는 두 팔이 그를 단단히 안고 있었다. 겁에질린 목소리로 아르노가 중얼거렸다. 기드온, 기드온…… 보지 마세요. 여기 있어요. 저랑 있어요…… 같이 있어요. 그런 말들이 한참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그가 팔을 들어 아르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날개뼈를 조금 넘던 길이의 머리가 어느새 허리에 훌쩍 닿아 있었고 옷 아래로 마른 뼈가 느껴졌다. 이제는 고장 나 버린 날짜와 요일이라는 감각 대신 그런 것들이 지나간 시간을 헤아리게 해 주었다. 풍경은 선명하고 선의는 명징하며 정원에는 햇살이 비치는 시간들이 망상이 아닌 실재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지금도 그 시간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를 방랑자나 길 위의 객이 아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안전히 도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응, 여기 있어. 어떤 한 인간이 고약한 악취로 가득한 거리에서도 막 세탁한 커튼과 방금 내린 커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그는 마침내 정신이 나간 걸까, 아니면 집에 도착한 걸까? 무서워하지 마. 나 여기 있어. 그리고 그들이 지금 쓰러져 앉아 있는 이 길은 언젠가 새것이었다. 모래사장과 방파제로 이어지는 길을 내고 시멘트가 굳는 동안 인부들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었다. 당장의 요깃거리와 집에 돌아가 할 일을 떠올리며 일상의 무료를 견뎠을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피와 공포와 죽음이 있었다. 수많은 죽음이. 그러나 이 길에 지금 그들이 있었다. 심해와 연안, 우주도 나비도 될 수 있는 두 사람. 조금도 흐리지 않은 정신으로, 결코 뿌옇지 않은 눈으로. 지금은 그것이 중요했다. 그것만이 훨씬 더 중요했다. 11. 그리고 나도 보여. 뭐, 뭐가요? 수평선. 아르노, 내 손 잡아 봐. 네…….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일어나는 거야. 네……. 그리고 수평선을 보면서 앞으로 가서, 모래사장 앞에서는 신발을 벗은 다음에……. 예전처럼요? 응, 예전처럼. 다음에요? 배가 보일 때까지 걸어가야지. 바닷가엔 언제나 그런 배가 한 척은 있으니까요? 응, 언제나 그런 배가 한 척은 있으니까. 12. 하나, 둘, 셋. 13. 모래사장은 길었다. 영국의 해안치곤 모래알이 꽤 고르고 입자가 고운 편이라 사람들이 으레 피서를 오는 곳인 듯 싶었다. 표지판이 보였는데 글씨를 읽을 수는 없어서 이름은 영영 미지로 남았지만 괜찮았다. 이유는 몰라도 모래가 점점 더 축축해질수록 주변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예사롭게 밀려 들어오는 파도 소리와 불규칙한 발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새가 울었다…… 깃털이 푸르고 꼬리깃이 희었다. 어렴풋 보이는 까만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서 도리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려진 것 하나 없이 세상의 전부를. 바닷가엔 칙칙한 잿빛 새들만 살지 않던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퍼덕이는 실루엣 너머로 배가 보였다. 너무 크지도 하찮게 작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떠나면 어디로 갈 수 있지. 저걸 타고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지……. 기드온이 아르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것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모든 말들에 의미가 사라졌다. 지금 뱉는 어떤 말에도 별 효용은 없을 텐데, 기드온은 이유를 찾고 싶어서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애정의 존재를 증명했다. 형체를 내보일 필요도, 기적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드문드문 새의 울음소리가 말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아르노,” 기드온이 말했다. 푸르고 노랗고, 또 희고 청록색을 띄는 빛이 눈앞에서 아물거렸다. 분명히 아름답겠지만 이제는 보아선 안 될 것들. 그러나 보이는 것에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악의는 촘촘한 눈의 형태를 했고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나를 구하고 내가 너를 구했으니까. 그건 우리가 한시도 실패하지 않고 함께 했다는 뜻이니까. “이제 어디로 갈까?” 14. 아, 테스트, 테스트. 이 말이 들리세요? 요새는 라디오 전파도 영……. 들린다면 이제부터 불러주는 좌표로 와 주세요. 여긴 안전해요. 해안에서 배를 타고 조금 나오면 돼요. 오는 길에 암초가 있으니 조심하세요. 도착하면 분명히 안전해져요. 여기엔 그것이 없어요. 우리는 살아났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갈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더 와 준다면 기쁠 거예요. 부디 여기로 와 주세요. 여기는…….
Gretes by Park Chan-Wook Thriller, Romance / Germany / 2023 / 133min / 18+ 본디 죄악에 잡아먹힌 것들은 속죄하고 나아가지 아니한다.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과업을 돌아보는 것은 선한 변화에서 시작될 수 있는 것으로 진정한 죄인들은 향유할 수 없다. 그는 오만하여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지 않고,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으며 행동을 수정하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물웅덩이에 맺힌 물에 이끼가 끼고, 상하고, 썩으며, 땅에 흡수되지조차 못 해 구역질 나는 냄새를 풍기는 것 처럼… 마주하기만 해도 그 근원의 깊이가 어림 되어 가까이 둘 수조차 없는, 하나의 불경한 존재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새까만 깊이에 신부 神父가 운명적으로 이끌림을 느낀 것은, 어쩌면 신의 계시가 아닐까. 스스로 참회하지 못해 구원받지 못하는 존재를 자기 자식으로 하여금 이끌며 교화시키라고. 하여 구원하며, 지옥이 아닌 천국의 문턱에 발을 내딛게……, ―잠깐. 그렇다면 되려 그 깊이에 잡아먹힌다면 어찌 되는 것이지? 깜박. 어두운 밤, 누군가의 집 앞에 센서 등이 밝게 들어온다. 곧이어 집안을 짧게 메우는 초인종 소리. 모두가 잠에 들 시간임에도 깔끔히 신부복을 차려입은 ―정확히는 햇빛을 피해 남들과 다른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남자가 인터폰 너머의 인영을 보고 짓 무거운 한숨을 쉰다. 집에 불이 켜져 있으므로 모르는 척은 할 수 없다. 집 앞에 있는 ‘것’이 벨을 울리는 일은 인간 흉내를 내기 위해 예의를 차리는 하나의 시늉일 뿐, 조금이라도 성질에 거슬린다면 문을 부수고 창문을 뜯어서라도 들어올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이어져야 할 행동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안녕.”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그― 카밀라는 짧은 기다림조차 지루하다는 양 문간에 삐뚤게 기대서 신부, 얀 세르반테스를 눈으로 훑어본다. “……. 왜 찾아왔어? 잘 지내는 것 같던데” “보고 싶어져서?” “봤으니 됐겠어.” “들어가도 될까. 피가 좀 묻었거든, …….” 그제야 시선이 내려간다. 인터폰에 잡히지 않는 위치의 손에는 30대 정도로 추정되는 남성의 시체가 대충 쥐어져 있다. 축 늘어진 몸은 방금까지는 온기가 남아있던 듯 하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여 사망 시각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 단지 대충 끌고 오느라 무릎이나 다리, 팔 따위에 흙과 생채기 따위가 빼곡할 뿐이다. 금방 죽였고, 입술이 붉게 번들거리는 것으로 보아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끝마쳤음을. 눈앞에 있는 인물과 상황만으로 앞뒤 상황을 판단한 얀 세르반테스는 눈을 얇게 찡그렸다. ‘그런 뒤처리가 필요한 나이는 아니잖아.’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나 카밀라는 여전히 웃는 낯짝으로 성큼 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팔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지만, 손끝을 그 옷자락 위에 예의 바르게 가져다 대고 꾸욱 밀면, 들여보내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카밀라 그레이스는 잘 알고 있었다. 얀 세르반테스 역시도 이 행동을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거절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싸움은 언제나 승자가 정해진 제로섬 게임으로 종결된다. 서 있던 사람이 사라진 문 앞에 무언가가 남아있기라도 한 양 내려다보던 얀 세르반테스는 미간을 꾹 누르고 대문을 닫는다. 그다음 몸을 틀어 카밀라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선다. 언젠가 그런 말을 본 일 있음을 상기한다. 악마는 초대가 없으면 문지방을 넘지 못해서, 늘 안에 있는 이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그것을 위해 교묘한 문장이나 단어를 고르거나 안에 있는 인간이 흔들릴 법한 외관을 준비해 매혹하려 한다고……. 분명히 카밀라와 얀은 같은 존재였으나 얀은 카밀라가 뱀파이어가 된 순간, 자신과는 성질이 다른, 무언가 끔찍하고, 어둡고, 괴로운, 아주 불경한 무언가가 되었음을 일찍이 직감하였다. 자신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에 그를 멀리하였지만 그는 멀어지지 않았다. 끈적하게 붙은 그림자 마냥 그를 떠나지 않았다. 외로워서? 흥미로우니까? 그 의중은 아직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카밀라 그레이스가 몇 주, 몇 달을 예고 없이 자리 비우고 제가 좋을 때만 그의 집에 들락거리는 일도 사유를 가늠하거나 흔쾌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해 카밀라 그레이스는 예상하는 것 보다 의도가 순수 純粹한 인물이다. 순수하다는 말은 통상 선하거나 상냥하다는 뜻이 아니라, 불순물 없는 본질 그대로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어떠한 하나의 목적성과 충족하고 만족하고자 하는 탐욕, 욕구, 내지 이기심으로 점철되었으며 무엇이든 금방 질렸다. 단지 ‘가지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 얀 세르반테스를 협박하고 겁탈하여 자신 역시 인간 상위의 존재가 되었고 몇십 년 쯤은 꽤 흔쾌했던 것 같다. 압도적인 강함과 압도적인 우월감에 취해 어린아이가 새로운 놀이를 배운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아주 잠시였다. 원래 그랬던 것 처럼 권태감이 들이닥치는 것은 금방이었으며 이어 생각하고 판단하길 그만둔다. 걸음이 닿는 곳으로 향하거나 먹고 싶은 걸 먹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는 단발적인 자아충족을 이어가며 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하나의 순수 악이었으나 실상 외로웠다.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실이라 솔직히 뱉을 순 없었지만 얀 세르반테스의 곁에 있어야만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무언가 바꿔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신을 하룻밤 만에 인간 외의 것으로 만들어 준 것처럼, 자신을 계속 사랑하고 애정하여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끈적한 그림자라도 된 것 마냥 그의 테두리를 서성였다. 그렇게 서로가 닿지 않을 각자의 상념에 잡아먹혀 있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얀 세르반테스였다. “…분명 경고했잖아, 카밀라 그레이스. 유한한 시간을 소중히 하라고.” 카밀라 그레이스는 거실에 시체를 대충 던져두고, 주방으로 들어가 끈적한 손을 대충 씻어내린다. 피를 씻어내는 일에 굳이 세면대를 택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 소소하게 불만스러운 양 얀 세르반테스의 눈가가 짧게 찡긋거리는 것을 옆눈으로 분명히 흘겼지만, 이미 뒤틀려있는 신부의 심기가 조금 더 틀어진다고 하든 말든, 그 런건 카밀라에게 그다지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다. 입꼬리나 비죽이며 끌어올려 ‘들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손의 물기를 훌훌 털어낸 다음 긴 머리카락을 대충 한 손으로 쓸어올렸다. 흰 원피스 끝단을 손으로 짚으며 피가 어디 더 묻었나, 쉬이 닦아낼 수 있을까, 가늠했지만 등 쪽에 붉은 점처럼 튄 핏자국을 보고 버려야겠네, 작게 중얼거리며 거실로 돌아온다. 얀 세르반테스가 있는 곳으로 걸어 옮기며, 발치에 채인 시체는 예의 갖춰 넘지도 않고 발로 툭- 밀어 넘겼다. 종래 얀의 맞은 편에 나란히 서서 물기 남은 손을 느리게 끌어올려 어깨망토에 앞뒤로 툭, 툭, 문지르듯 닦아낸다. 그는 종교인에게 기본적인 예의 따위 갖추는 낯짝조차 가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조금 젖고 구겨진 망토 끝을 손가락으로 각을 잡아 정리하면서 카밀라 그레이스는 기억을 더듬는 듯 잠깐 조용하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잘까? 예전엔 그랬던 것 같은데.” “그냥 눈앞에서 꺼지라고, …내가 네게 너그러웠던 건 네가 인간이었어서야.” “그래서 인간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달란 소원을 들어줬고 ……” “―들어줄 수밖에 없게 만들었잖아. 그리고 그 인간은 죽었어. 죽으면… 끝이야. 그러니 너와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네게 어울릴 이유도 의미도 없어.” “그럼, 이제부터 만들면 되는 거네?” 의미 없는 공방이 이어진다. 결국 피곤함에 찌든 얀 세르반테스는, 찡그린 낯을 넓은 손으로 덮듯 누른다. ‘마음대로 해. 전부 해보고, 이만 꺼져…….’ 포기한 듯한 속삭임에 성질이 돋은 카밀라 그레이스가 순간 얀 세르반테스의 상체를 밀쳐 바닥에 엎는다. 옆에 있던 의자가 무너지고 위에 올라있던 화병이 거실에 조각을 수놓으며 깨졌다. 흘러나온 물기와 붉은색의 장미꽃잎이 천천히 두 사람의 곁으로 흐른다. 거실의 조명이 유리 조각들에 반사되어 아름답게도 반짝이는 사이에서 카밀라는 얀 세르반테스의 몸 위에 올라탔다. 이제는 짐승의 것으로 묘사해야만 하는 붉은 눈동자를 한참 들여다보면, 세로로 깊은 동공이 한없이 얇아진다. 무게로 짓눌러 내려다보는 시야에 손이 천천히 얀의 목가로 깊게 다가선다. 감각을 확인하려는 양 신부복의 원단을 더듬었다가, 쇄골에서 목선, 울대 근처까지 들어서고 두 손으로 상체를 실어 압박한다. 숨이 막히지만, 생경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얀 세르반테스는 미동 없다. 그 반응이 더욱 성질을 돋워 상체를 웅크리고, 당장에라도 목을 꺾을 듯 힘을 주고, ……. - 달빛이 들어오는 창가로 흰 원피스가 바람에 가볍게 나부낀다. 틈새로 빛자락이 흔들리고,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얇고 얇게 휘날렸다.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맞붙은 신부神父는 건조하게 고통을 호소하며 몇번째 일지 모르는 삶을 다시 시작한다. 들리지않는 음악 선율에 맞춰 창가에서 혼자만의 왈츠를 추던 카밀라가 인기척에 고개를 홱 돌린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웨딩마치에서 신부新婦가 환하게 웃는다. “―생일 축하해, 얀 세르반테스.” 죄인을 찾는 공방은 선고 없이 끝났다. 살인자는 둘이고, 한 명은 반성의 의지가 없으며 한 명은 뻔뻔히 용서를 구할 낯짝이 없다. 이 밤하늘 아래 존재하는 괴이 모두가 신부이며, 죄인이다. ―생각과는 다르지? 처음에는 새로워도 결국엔 이 모든 게 질리는 날이 올 거야. 개미의 목숨을 짓누르듯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즐기고, 마시고, 연출하거나, 가끔은 세기에 길이 남을 연출가가 되고. 모든 게 마음대로 되니까 더 이상 하고 싶은 게 없어. 권력은 가진 순간이 끝이야. 인간은 간절하게 불타오르기에 아름다운 법인데 아무것도 즐겁지 않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돼. 넌 인간이 아니니까. 우리는 인간이 아니니까. 불멸은 불행이며 축복이 아니라 저주인 거야, 우리에게……. - 그러니, 좀 더 어울려 줄게. 네가 깨닫고 질리기 전까지는. 결정했어. 끌어 내려 곁에 있게 할 거야. 네가 내뱉는 말과는 상관 없이.
Never Not by Jordan Peele Mystery, Horror / UK / 2023 / 131min / 18+ 0. 어느 날 비가 쏟아졌다. 아니, 우박이, 폭풍우가 쏟아졌다. 못과 나사로 만든 폭탄처럼. 1.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어느 아주 평화롭던 하루, 므네모시네 이시스 레테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찻집에 틀어둔 라디오에서 경쾌한 브릿 팝이 흘러나오고-어쩌면 그중 한 곡 정도는 일라이가 기타를 연주했을지도 모르고- 바깥에서는 선선한 봄바람이 부는, 화창하고 별다를 것 없는 날이다. 아직 이 시대에는 수화기 너머의 사람을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므네모시네는 수화기 윗부분을 귀에 가져다 대고서야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모네?” 어딘가 불안정한 목소리. 그것이 평소와 달랐고, 그것만이 그 순간에 이질성을 제공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날이 아닐 것이었다. 지금 들리는 이 음악은 영원히 불길하게 기억될 것이며 오늘 마신 차는 몇 달 후에도 어딘지 조금 쓰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 장례식이 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말하고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일라이 루이 드레퓌스이며…… “와 줄래?” 그가 얕게 헐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2. “응, 당연하지. 그런데 무슨 일이야?” 3. 사건의 진짜 경위는 이렇다. 스코틀랜드 한구석에 볼 일이 있었던 코넬리아 루이 드레퓌스가 하늘에서 눈-아니 우박처럼 쏟아진 못에 머리를 찍혀 사망했다. 어찌나 정확한 관통이었는지 시신에는 딱 그만한 사이즈의 상처를 제외하곤 생채기 하나 없었다고 한다. 대신 피가 많이 있었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피. 포트 키를 이용해 가장 먼저 달려간 일라이의 묘사는 그래서 오래된 뉴스 기사 속 움직이지 않는 사진처럼 무미건조했다. 뇌는 간신히 피했는데, 그래서 끝까지 말은 할 수 있었는데,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여기서 므네모시네는 그의 표현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가 아님에 주목한다. 세 발짝 떨어진 감각.) 그래서, 그러다가. 그렇게 됐네. 코니는 같이 요리도 하고, 찻집에도 왔었는데. 므네모시네가 말했다. 귓가에서 항상 끼고 다니는 귀걸이가 반짝여서 일라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으로 향했다. 응, 그랬지. 재밌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또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장례식이 끝나던 때엔, 인부들이 무덤에 흙을 채우는 동안 일라이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밥 딜런의 노래였다. 슬프기보단 들떠 보였고 그래서 다른 조문객들이 모두 울었다. 제각기의 속도와 높이로. 흐느끼고 오열하고 슬퍼하는 소리들. 마지막 코드를 치고 일라이가 피크를 쥔 손을 들고 소리쳤다. “뭐야? 왜 이렇게 우울해들. 이제 해산! 원래 인생으로 돌아들 가.” 므네모시네와 눈이 마주쳤을 땐 웃기까지 했다. 이상했지만 동시에 달리 어찌할 수 있지 않기도 했다. 므네모시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일라이가 바닥에 내려 둔 케이스 안에 기타를 던져 넣고 (우득, 나무 부러지는 소리.) 성큼성큼 다가와 말했다. “뭘 좀 알아봐야겠어.” 도와줄래? 그렇게 말하진 않았지만 별반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므네모시네가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어차피 없었을 것이었다. 그야 일라이는 항상 이런 식이니까. 4.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마법 생물이 나타난 게 아니냐는 게 첫 가설이었다. 코니의 죽음이 있었던 지역 인근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머글) 경찰에서는 영문을 몰랐고 아는 오러들은 전부 입에 본드라도 붙여 놓은 듯 굴었으므로 사실상 거의 유일한 가설이기도 했다. 코니는 ‘사실상’ 머글인데 말이지. 일라이가 말하고 므네모시네가 끄덕였다. 그러게. 다음 수순은 그래서, 당연히, 그 사건이 일어난 곳에서 프로테고를 철벽처럼 두르고 밤을 새는 일이었다. 몇 날이고 며칠이고. 또 다른 못이나 나사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까지. 그런데 당최 어떤 종류의 마법 생물이 못과 나사, 열쇠 따위를 허공에서 땅으로 우악스럽게 뱉어낸단 말인가? 취향이 고약한 신종 용이라도 나타난 게 아니고서야……. “진짜 용이면 어떡하지?” 조악하지만 제법 갖출 것을 다 갖춘 작은 텐트(확장 마법은 마법 세계가 이룩한 최고의 혁명 중 하나다!) 앞에 쪼그려 앉아 므네모시네가 말했다. 겉에 희미한 상처가 여럿 나 있는 캠핑용 컵 두 잔에 핫초콜릿을 타던 일라이가 마시멜로 하나를 입에 넣으면서 대답했다. “글쎄, 잡아 죽여야 되나? 용은 안 잡아 봐서 말이지.” “농담처럼 안 들려, 일라이…….” “농담 아닌데?” “그럼 걱정되기 시작하는데…….” “아하하. 너한테 잡으라고 안 할게.” “그 문제가 아니잖아…….” 곧이어 마시멜로 하나가 므네모시네의 입에 들어갔다. 무르고 퍼석하고 달콤한 맛. “이거 핫초콜릿에 넣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아 참, 그랬지.” 그 뻔한 잠복이 성과를 이룬 건 7일째의 일이었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고 둘째 날에는 하늘이 바다처럼 보였다. 무른 땅에는 식물이 나고 아침에는 태양이 밤에는 달과 별이 떴다. 생선을 구워 먹는 동안 주변에서 새가 날았으며 그다음 날에는 들개와 길고양이가 텐트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일곱째 날이었다. 시시한 사건도 사고도 모두 쉬는 날. 툭, 투툭, 툭. 아니, 이건 너무 귀여운 묘사다. 퍽, 퍽. 땅에 듣도 보도 못한 쇠붙이가 떨어져 꽂히고 마법으로 둥글게 지어 만든 방어막 위로 살벌한 충돌음이 들렸다. 폭풍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거대하고 넓적한 그림자와 함께. 그것은 용도 불도 마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게걸스러운 입이고 새까만 구멍이었다. 창조의 일이 완성되었으므로 모든 것을 삼키는 공동을 두리라. 어떤 성서에는 그렇게 쓰였을지도 모르지. 5. 므네모시네의 찻집과 일라이의 집, 그리고 텐트 사이를 잇는 간이 포트 키를 설치해 둔 덕에 ‘준비’를 위해 바쁘게 런던을 오가는 일은 재채기를 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거의 모든 단계에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 다시 그 그림자가 나타났을 때 일라이가 들고 다니던 머글 카메라를 그 방향으로 들이대자 카메라가 필름째로 불타며 펑 터져버린 탓에 마법사 카메라 두 종류가 동원되었다. 특유의 넉살로 세 번이나 에누리를 했는데도 끔찍하게 비싼 것들이었다. 일라이는 파운드-갈레온의 환율에 대해 30분이나 불평했고 공연을 조금 더 자주 하기로 결심했다. 돈은 중요하구나. 새삼스럽지만 이런 사소한 복수에도 돈은 필요했다. 그것도 꽤 많이. - 시험 삼아 끌고 왔던 오토바이가 볼품없이 망가져 버렸으므로(“아니, 이런 씨발. 이게 얼마 짜린데!” “일라이, 말.” “이런 젠장할.” “좀 나아졌네.”) 이제는 타고 다닐 일이 별로 없던 빗자루에서도 먼지를 털어내야 했다. “이거 대체 언제적 모델이야?” 므네모시네가 물었고 일라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대충 날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정말 날 수 있는 것 맞느냐고 묻고 싶은 얼굴로 므네모시네가 쳐다봤지만 일라이는 외면했다. 누군가를 외면하는 게 누군가를 바라보는 일보다 훨씬 쉬운 성정을 타고났다는 게 이럴 땐 아주 편했다. - 텐트 주변에 프로테고를 주기적으로 걸어주는 일이 생각보다 번거로웠으므로 캠핑카 하나를 빌려 왔다. 캠핑카에 약간의 마법을 걸어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잡동사니들에 구멍이 나지 않게 만드는 일이 흐느적한 텐트를 강화하는 것보다는 쉬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떤 꼼꼼한 마법도 완벽하진 않아서, 아킬레스건 마냥 소소하게 상처가 생기는 곳은 생겼으나 두 사람에겐 레파로가 있으니 괜찮았다. (“이거도 레파로로 고쳐져?” “안 될 것 같은데…….” “이 차한테 본네트 구겨진 걸 잊어버리라고 오블리비아테 해 봐.” “일라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말고도 이것저것 기타 등등. 일라이는 사이사이 불평이 늘었지만 대부분의 순간에는 평소의 유쾌함을 유지했다. 이 모든 일들을 벌이기 시작한 원인에 죽음이나 불행 따위가 있지 않다는 것처럼.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던 날, 일라이는 자기 몫의 빗자루에 오래된 그리핀도르 넥타이 하나를 묶고 말했다. “준비 끝이네.” “그건 왜 묶은 거야?” “그냥, 간지나잖아.” “괜히 거추장스럽진 않겠어?” “물론이지. 내 비행 실력 못 믿어? 나 퀴디치도 했는데.” “너무 믿을까 봐 그러지.” “걱정 안 해도 돼.” “걱정하는 것처럼 들려?” “응.” “……맞아……. 솔직히 조금 신경 쓰이네.” “뭐가?” “이거 말이야.” 이거, 이 모든 거. 므네모시네는 더 말하지 않았고 일라이는 빗자루의 갈라진 끄트머리를 올려다봤다. 시선을 조금 더 올리자 새까만 밤이 보였다. 구름 사이에서 웅웅 울리는 어떤 소리. 어둠 속에서 높이 나는 그림자. 빛 없이도 혼자 있는 그림자…… 그리고 온통 뒤섞인 비명소리…… 6. “정신이 들어?” “응.” “오러 한 명이 다녀갔어. 이 근처에 있던 마을에 있던 사람들 20명이 한꺼번에 사라졌대. 아는 게 있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모른다고 했어.” “잘했어.” “잘했어?” “응.” “일라이.” “모네.” (그가 손을 내민다. 이건, 솔직하게 말하자면, 비겁한 제스처다. 므네모시네에겐 그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잊어버리지 마.” 뭘? 므네모시네는 그렇게 묻지만 곧 대답을 기대하지 않게 된다. 뻔하잖아. 그날의 전화 통화. 약간 쓴 찻잎. 조금 울적하게 들리는 라디오의 음악 소리. 비, 우박,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피. 7. “길들일 수 있어.” “다음엔?” “죽여야지.” “어떻게?” “어떤 식으로든.” 8. 비, 우박, 폭풍우. 진짜로 비가 왔고 정말로 피가 섞여 쏟아졌다. 사라졌다는 스무 명의 행방을 이런 성서적으로 끔찍한 비주얼로 알게 되다니. 이제 어딘가에서 귀뚜라미와 여치 떼가 나타나고 이 근방의 모든 장자들이 죽게 되면 딱이겠군. 고약한 농담을 주워섬기던 일라이가 빗자루를 타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괜찮겠어?!” 지팡이를 든 므네모시네가 소리쳤다…… 돌아올 대답은 눈먼 낙관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당연하지!” “아니라는 대답은 모르는 거야?” “모르고 말고!” 동굴처럼 울리는 짐승의 소리…… “일라이!” “왜!” 점점 멀어져서 들리지 않게 되는 다정한 목소리, “끝나면 우리 가게부터 가자!” 재해처럼 불기 시작한 바람……. “뭐 하러?!” 분명 내일도 그럴 수 있을 것처럼, 당연하단 것처럼 살아 있었는데. “네가 그랬잖아, 아이스크림!” 지금 네가 그런 것처럼. “야, 뭐 떨어지기 시작했어!” 그런데, “알아, 그거 먹으러 가자!” 네가 그렇지 않게 되면 나는 어떡하지……. 9. “그래, 이런 미친, 모네, 사진 찍어!” 10. 그런 건 정말이지 처음 봤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그래서 당연하다는 듯이 아침이 왔다. 막 현상되기 시작한 사진 한 장을 허공에 대고 힘없이 흔들던 일라이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머리가 온통 부스스하게 산발이 된 므네모시네가 누워 있었다. 여기저기 긁히고 다치고 약간 끈적해지기까지 한 자신 곁에, 당연히 여기 있기로 했다는 것처럼. 그렇게 보면 네 꼴이 훨씬 나아서 다행이지. 듣는 사람도 없는데 소리죽여 낄낄대면서 일라이가 말했다. “저거 안쪽 말이야. 진짜 좆같더라. 바로 봄바르다 안 썼으면 나 통째로 녹아버렸을지도…… 끈적끈적 슬라임처럼…….” “일라이, 말.” “저거 안쪽 말이야, 진짜 끔찍했어. 뒷말은 생략.” “좀 나아졌어.” “좀?” “응, 좀.” “아하하. 녹은 아이스크림 같기도 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이렇게 묘사하기야?” “나 사회성이 심각한가?” “응, 약간.” “약간.” “응.” “그럼…….” 일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이건 조금 비겁한 짓이었는데, 므네모시네는 한 번도(정직하게 말하자면, 서로 지팡이 끝의 반대편에 서 있던 시절을 제외하고) 그렇게 내민 손을 거절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어릴 때 코넬리아가 그를 위해 세상의 모든 마음과 현상들을 설명해주던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다정하고 한결같고, 조금은 슬픈 것. 이런 걸 보통의 마음이라고 하는 거지. 아닌가. 맞나. 아리송한 일이었다. 아마도 평생 그럴 테지. “무슨 맛이 좋아? 내가 살게.” 이 다음에 뭔가 한마디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코넬리아가 아직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해주었을 것이었다. 이럴 땐 같이 와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야. 모든 걸 제치고 너를 생각해 준 거잖아. 하지만 코니는 이제 땅 밑 6피트 아래에 있고, 므네모시네와 자신은 잔뜩 엉망이 된 들판 위에 누워서 반파된 캠핑카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는 참이었다. 현명한 조언 같은 걸 상상하고 있을 여력은 없었다. 이제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면 마법부에서 달려 나온 과로사 직전의 오러들이 사건의 경위를 꼬치꼬치 캐물을 테고, 두 사람은 이제 막 현상이 끝나기 시작한 사진 한 장을 함께 내밀게 될 것이었다……. 11. “궁금한 게 있는데.” “응, 일라이.” “대충 이럴 때 울면 되나?” “맞아.” “어느 정도?”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그건 너무 추상적이잖아.” “원래 그런 거야.” “번거롭네.” “응, 이제부터 시작할까?” “저쪽 보고 있어 봐.” “응.” 0. 어느 날 비가 쏟아졌다고 했다. 못과 나사가 내리는 비가 말이다. 1. 아주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호그와트에 다닐 때만 해도 딱히 이런 취향은 없었던 거 같은데. 같은 생각을 하며 흘러나오는 브릿 팝을 듣는 일상. 턱을 괴고 작게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꽤 경쾌하다. 사람이 많이 오지 않는 찻집은 꽤나 한가로웠고, 주인에게 차를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주었으므로 므네모시네는 가장 익숙한 티백 하나를 꺼내들었다. 단델리온 사의 넥타르, 익숙하게 따뜻한 물로 티백을 우려내고 있으면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있던가? 수화기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그리고 나오는 익숙한 목소리. ……모네? 제 이름을 부르는 어딘가 불안정한 음성. 2. 평화가 깨지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지 않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일라이 루이 드레퓌스의 얕게 헐떡이는 목소리에 므네모시네 이시스 레테는 제가 앞으로 이 순간을 잊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내일 장례식이 있는데…… 와 줄래?” 누구의? 같은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므네모시네가 곧장 내뱉은 건 긍정의 말이었다.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내뱉긴 했지만. 무슨 말이냐는 므네모시네의 질문에 일라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코니의 장례식이야.” 3. 상황을 정리하는 것부터 해보자. 첫 번째, 스코틀랜드 한구석의 하늘에서 우박처럼 못과 나사가 쏟아져 내렸다. 아무런 전조증상 없이. 두 번째, 코니는 평범한 머글이었으므로 그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세 번째, 그렇기 때문에 쏟아져내리는 못에 머리가 찍혀 사망했다. 네 번째, 즉사는 아니었어. 다섯 번째, 못 말이야. 딱 그만한 사이즈의 상처만 있었거든. 생채기조차 없더라. 여섯 번째, 뇌는 간신히 피했는데, 그래서 말은 끝까지 할 수 있었는데…… 일곱 번째,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여덟 번째,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가 아니라? 아홉 번째, 그래. 피가 너무 많이 흘렀어. 열 번째…….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설명을 들으며, 므네모시네는 무미건조한 일라이의 반응에 몇 차례 괜찮냐는 질문을 건넸다. 일라이가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안 믿겨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요리도 하고, 찻집에도 왔었잖아.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일라이는 그렇게 답했다. 응 그랬었지, 재밌었는데. "당장 내일이라도 또 그럴 수 있을 거 같지." 므네모시네는 부정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정하지 못했다.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코니의 웃는 얼굴이 선명했다. 다음에 또 보자고 했는데. 코니가 다음에는 다른 곳에서 만나자고 했었단 말이야. 그런데, 그런데……그게 이런 식은 아니었을 거야. 보고 싶다. 그러게. 4. 정확한 대답이었던가? 므네모시네는 확신하지 못한다. 5. 장례식이 끝날 즈음에는 일라이는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에 조문객들은 눈물을 흘렸다. 들뜬 기타 연주와는 어울리지 않는 제각기 다른 울음소리. 완벽한 불협화음이다. 눈앞에 놓인 상황에 제목을 붙이자면 뜻하지 않은 이별의 슬픔 정도가 되겠지. 이 곡의 지휘자이자 연주자인 일라이는 곡이 끝나자마자 외쳤다. 이제 그만 해산하고 원래 인생으로 돌아가라고. 어느 누군가는 그 말에 그게 그렇게 쉽냐는 말을 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눈이 마주치면 일라이는 웃었다. 괜찮아? 입모양으로 뻐끔거리며 물어보면…… 일라이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건넸다. “모네” 바닥에 놓인 케이스에 대충 던져놓은 기타에서는 곧장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게 기타였는지 다른 거였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다. “뭘 좀 알아봐야겠어.” “어떤 걸?”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아서 도와주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기에는 알고 지낸 시간이 길었으며, 므네모시네가 받은 것들이 많았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므네모시네는 도와주기를 택했다. 언제나처럼 말이다. 6. 코니가 죽었던 장소, 그 근방의 지역에서 사람들이 사라지는 일이 드문드문 있는 모양이야. 소문이 돌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경찰들은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던데, 오러들은 그냥 말 자체를 안 하더라. 아무래도 수상하지? 수상하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의 최선은 오러에게서 사건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를 얻어내는 것이었겠지만, 입을 다문 오러에게서 답을 얻어내는 일은 일라이에게도 므네모시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평소라면 일라이는 쉽게 답을 얻어냈을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었으므로─, 두 사람이 차선으로 택한 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프로테고.” “프로테고….” 범인은 범행 장소에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만약 마법 생물이라면 다시 이 장소에 나타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못이나 나사 같은 것이라도 있을 거야. 사건 장소와 아주 근접한 지점에 확장 마법이 걸린 텐트를 두었다. 그리고 그 위에 몇 겹으로 두른 프로테고는 과장하자면 하늘에서 폭탄이 떨어져도 견딜 수 있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아마도. 첫째 날, 당연하게도 소득이 없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 셋째 날, 못이나 나사 같은 걸 뱉을만한 마법 생물이 뭐가 있지? 넷째 날, 용? 너무 터무니없지 않아? 다섯째 날, 그나마 가능성이 높긴 해. 말하면서 먹었던 퍼석한 단맛이 꽤 기억에 남는다. 여섯째 날, 밤샘을 그 정도 하니 슬슬 피곤해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어, 그런 말을 하려던 일곱 번째 날. 진실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처음에는 가벼운 소리였다. 툭, 무언가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리. 텐트 안에 머물던 두 사람이 의아함을 표현하기도 전에 소리가 커졌다. 퍽, 하고. 땅바닥에 살벌하게 박히는 소리와, 덧칠해놓았던 방어막과 맞부딪히며 나는 파열음 같은 것들. 떨어지는 걸 확인하니 못이나 나사 같은 쇠붙이들이었다. 아무래도 범인이 찾아온 모양이다. 두 사람은 텐트 밖을 나왔다. 그런 두 사람이 확인한 것은…… 그림자였다. 있잖아, 나는 사실 용일 거라고 생각했어. 용이라면 잡을 방법을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저건, 무슨 방법이 있어? 거대한 그림자가 그 크기만큼이나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전히 그림자는 무언가를 내뱉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살벌한 소리가 꽤 무섭게 이어졌다. 7. “그래도 다행인 건 저게 뭔지 알아냈다는 거지.” “……다행인 거 맞아?” “적어도 용은 아니잖아. 다행이지?” 므네모시네는 할 말이 많았지만 입을 닫는 길을 택했다.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모자랐으므로. 여기서 정말 다행처럼 느껴지는 게 하나 있었다면, 두 사람이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포트 키 덕분에 시간을 얼마나 단축할 수 있었는지! 텐트에서 곧바로 런던에 위치한 제 찻집으로, 그리고 그 근방에 있는 가게로 준비물들을 사러가는 일을 반복하던 므네모시네는 포트 키가 정말 편리한 마법이라는 걸 다섯 번쯤 생각하고 나서야 그렇게 생각하는 걸 그만둘 수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의도치 않게 포트 키를 너무 많이 이용해서 질렸기 때문이다. 망가진 카메라의 잔해를 치우면서 므네모시네는 이 일이 끝나면 푹 쉬어야겠다는 다짐을 했고, 일라이가 마법사 카메라를 끝내주게 흥정할 즈음에는 다른 생각 다 접어두고 저걸 어떻게 해내는 거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후 30분 동안 파운드와 갈레온의 환율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을 때는…… 이실직고하자면 제대로 안 들었다. 망가진 오토바이 대신 빗자루를 택했을 즈음에는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가장 먼저 들었다. 최신 기종에서는 한참 멀어진 기종, 빗자루는 너도 오랜만일 거잖아. 제대로 날 수 있는 거 맞아? 걱정하는 게 분명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제 시선을 외면하는 일라이를 보며 므네모시네는 생각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꼭 절교해야지. 빌려온 캠핑카는 텐트보다는 쾌적해 보였다. 하늘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못과 나사가 이번에도 살벌한 소리를 냈다. “여기엔 확장 마법 안 걸려있는데?” 일라이는 폭풍우가 끝난 이후 캠핑카에 난 흠집을 살폈다. “심적으로 쾌적해 보여. 조금 더 안전해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도 그렇잖아.” 흠집이 난 캠핑카를 레파로로 수리하면서 므네모시네는 그렇게 말했다. 그런 준비를 하면서 포트 키를 몇십 번─과장이 아니다─을 사용했으니 질릴만했다. 잡다한 물건들은 여분이 필요할까 싶어 두세 개씩 준비하기를 한창. 이 정도면 준비가 끝날 거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일라이는 제 빗자루에 그리핀도르 넥타이를 묶었다. 가벼운 대화. 빗자루의 갈라진 끄트머리. 꼭 전장에 나가던 시기의 그 느낌이다. 손끝이 차게 식는 느낌에 주먹을 쥐었다 피고 있으면 들려오는 게 있다. ……소음? “모네.” 그 음성에 고개를 들면 하늘에 자리한 건 어둠이다. 하늘을 덮은 구름에서 나는 소리,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그림자, 그리고 비명소리….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나는 그 전장보다 끔찍한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어. 너도 그렇지? 8. 정신을 차렸을 때는 캠핑카 밖에 누워있었다. 엉망이 된 머리를 수습하고 옆에 누워있는 일라이에게 담요를 하나 덮어주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새삼스럽게 말할 게 있다면 므네모시네의 전 직장은 마법 부였다. 마법부 소속 망각 술사로 활동하다 아무튼 많은 과정 끝에 나와서 찻집 주인을 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므네모시네가 마법부 소속 오러들의 얼굴을 꽤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또한, 그들 역시 므네모시네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것도. “어? 므네모시네 씨.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나요?” “아……네. 그럭저럭.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어제 이 근처에 있던 마을에서 사람 20명이 갑자기 사라졌거든요. 그래서 조사 나왔어요.” 여기서 므네모시네는 이 사람 이렇게 다 말해줘도 괜찮은 건가? 하고 생각했다 “…어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네, 그래서 비상이에요. 아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이후 30분간 그는 자신의 근황을 설명했다. 므네모시네는 최선을 다해 듣는 시늉을 했다.) 므네모시네 씨는 뭐 알고 계신 거 없으세요?” “네…, 저는 친구랑 (저분이요? ……네.) 캠핑 왔는데 휘말린 거라서요.” “아하!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혹시 이상한 거 발견하면 연락 주세요!” 그 이후에는 일라이가 아는 것처럼 전개된다. 정신을 차린 일라이에게 전해지는 가벼운 상황 설명. 내밀어진 손. 그리고 잊어버리지 말라는 이야기. 뭘? 그렇게 물으면서도 대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잊겠어. 9. “어떻게?” “어떤 식으로든.” “자신 있어?” “당연하지.” 여기서 므네모시네가 할 수 있는 반응은 한 가지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래. 한마디 내뱉고 만다. 10.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피가 섞인 비 말이다. 세계가 멸망한다면 꼭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일라이가 빗자루를 타고 오르는 걸 바라보던 므네모시네는 지팡이를 조금 더 힘주어 잡았다. “괜찮겠어?” “당연하지!” 므네모시네는 뭐가 괜찮아! 같은 소리를 내뱉으려던 결 겨우 참았다. 일라이는 속도를 높여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이라기보다는 형태에 가까워졌을 무렵, 므네모시네는 외쳤다. "끝나면 우리 가게부터 가자."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뭐 하러?" "네가 그랬잖아, 아이스크림!" 그러니까, 우리에겐 내일이 있을 거야. 아주 당연한 내일 말이야. “프로테고!” 질릴 대로 외운 방어 마법을 연달아 외친 이후에 반대편 손에는 카메라를 들었다. 셔터찬스는 딱 한 번이다. 그 기회를 놓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심호흡을 하고 진정하고, 차분하게. 사진 찍어! 일라이의 외침에 므네모시네는 플래시를 터트렸다.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찾아온 것은… 그 소리를 덮는 아주 큰 폭발음. 아주 커다란 형태의 화염. 성공이었다. 11. 성공했네. 이제 막 현상되기 시작한, 일라이가 힘없이 흔드는 사진을 바라보던 므네모시네는 말했다. 그렇지. 이리저리 엉망이 된 모습에도 낄낄거리며 네 꼴이 훨씬 나아서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리던 일라이에게 웃음이 나와? 병원 갈 생각부터 해. 그런 잔소리를 했다. 언어 좀 곱게 사용하라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묘사에 이러기냐고 타박을 하기도 하고, 그러고 있으면 내밀어진 손이 있다. “무슨 맛이 좋아? 내가 살게.” 지난 시간 동안, 므네모시네는 일라이가 내민 손을 거절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도 결국엔 일라이의 손을 잡기를 택했다. 그래서 지금 그가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 거니까. 코니와 레테도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으므로.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므네모시네는 이번에도 일라이의 손을 잡았다. “바닐라 맛이 좋을 것 같아.”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나저나, 일라이. 이 캠핑카 어쩌려고? 반파됐잖아.” “레파로로 안 고쳐져?” “이 정도는 안 될 거 같은데…….” “모네, 이번에야말로 반파된 걸 잊어버리라고 오블리비아테 해 봐.” “그걸 진짜 말이라고 하는 거니.” 12.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부에서 달려 나온 익숙한 오러들이 상황을 캐물었다. “므네모시네 씨, 모른다고 하셨잖아요!” 이름 모를 이의 배신당한 얼굴을 므네모시네는 외면했다. “그렇게 됐어요.” 현상이 끝난 사진 한 장을 내밀고, 상황을 설명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덧 정오다. 친절하지 않은 마법부 직원들은 본인들이 더 확인해 보겠다며 자리를 옮겼고, 남은 건 므네모시네와 일라이 둘뿐이었다. 혹시 몰라 제미니오로 복사해둔 사진을 하나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캠핑카는 마법부에서 어떻게든 해주겠다니 다행이지.” “그러게 말이야.” “우리가 할 일은 끝났으니까, 이제……” 13. “돌아갈까?” “돌아가자.”
Akiban by Ari Aster Horror, Gore / Sweden / 2022 / 171min / 18+ “제정신이 아니야.” “바, 반…….” 두 사람의 목소리는 가까이에 서있는 서로에게만 와닿았을 뿐, 다른 이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들은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혼란에 빠진 듯, 마치 거한 중상을 입고 땅을 기어가듯 들끓는 목소리로 괴로움을 표출할 뿐이었다. 조금 더 시야를 멀리해보자, 절벽 아래의 바위에 하반신이 산산조각 나 으스러진 노인이 보다 더 징그러운 울음소리로 바닥을 긁고 있었다. 그 노인의 옆에는 한 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머리가 으깨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가 아직도 웅덩이를 만들며 넓게 퍼지는 상태였다. 아키라는 죽은 시체의 얼굴이 어땠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그를 만난 건 오늘이 처음이었고, 절벽에서 뛰어내리기 전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모습만이 잔상처럼 스쳤으므로 아마 앞으로도 영영 그의 얼굴을 기억하거나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얼굴을 바라본 시간이 채 5분밖에 안되는 인간을, 아키라는 오래 기억할 의지조차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의지가 있다 한들, 주변에서 하반신이 으깨진 노인과 모든 심상을 공유하듯 울부짖어대는 인간들의 목소리 탓에 분명 머리가 표백제로 세탁하듯이 깨끗해졌으리라. 그들은 높은 절벽에서 뛰어내렸음에도 죽지 않은 이에게 깊게 공감하고 모든 것을 나눌 듯이 굴면서도, 곧이어 몇몇 사람들이 거대한 나무망치를 들고 그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상식적으로 절벽에서 추락해 다친 환자에게 망치를 들고 가까이 가는 인간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그에 대한 불만,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이 마무리되기 전에 그 묵직해 보이는 망치는 고통스러워하는 노인의 머리를 단박에 내리쳐 터뜨렸다. “아아아아악! 무슨,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다들 미쳤어? 사람이, 사람이 죽었어! 아니, 사람을 죽였어! 미친놈들, 당장 돌아갈래! 돌아가겠다고!” “하.” 절규에 찬 외부인의 비명소리가 직후 이어졌다. 그들을 초대한 지인으로 보이는 마을 사람이 내 얘기를 들어봐, 하며 낮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키라와 반조에게는 전혀 중요한 내용이 아니었다. 기가 차다는 듯한 한숨을 내쉰 반조는 아키라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것 봐. 너랑 있으면…… 늘 이런 일이 생긴다니까.” “……이게, 이게 내 탓인 것처럼 말하지 마.” “글쎄…….” 솔직히, 이러한 상황을 목도한 직후 나올법한 반응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원체 기이하고 끔찍한 일들을 적지 않게 겪어왔던 덕분이겠지만, 이건 평균적인 인간들의 기준에선 좋은 점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반조는 헛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한동안 별 탈 없이 지내나 싶었는데, 해외까지 휴양차 온 여행에서 이따위 일에 휘말리다니 기가 막혔다. 심지어 이 마을에 오게 된 이유는 아키라가 폐쇄되고 조용한 편인, 외딴 시골 마을을 선호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시설이 좋은 도심 쪽으로 나가고 싶었으나, 오늘따라 완강히 반대하는 아키라의 고집을 꺾는 것보다야 하루 이틀 정도는 이 마을에서 보내는 게 나을 법하여 그만둔 일이 문제였다. 글쎄라고 하지 마. 내, 내 탓 아니야……. 단호하게 덧붙이는 아키라의 대답에 결국 인상을 찡그리며 웃은 반조는 느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이런 꼴을 보았으니 당장 마을을 떠나도 이상할 건 없겠지만,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 떠나는 일조차 쉽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생각. 이 막연함은 마치 오래전 가을날의 여행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여행지의 숙소에서 타이어 펑크가 났던 그 기이하고도 악의 서린 기막힌 우연들 말이다. 이 마을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고로, 반조는 당장 이 마을을 떠나자는 말을 꺼내기보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애초에 자신이 구태여 그 말을 하지 않아도 바로 근처에서 비명을 지르던 외지인이 돌아가겠다며 항의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어느 동아리 단체처럼 보이던 그들은 몇몇은 심약하여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화를 내고 있었고, 몇몇은 차분함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었다. 히스테릭하게─이런 상황에서 그 반응을 히스테릭하다고 하긴 좀 어려웠다. 아키라와 반조에 비하면 지극히 정상에 가까운 반응이었으므로.─ 집에 가겠다 소리치는 여자를 향해 마을 사람이 당장은 돌아가기 힘들다, 따위의 말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겠지, 어디 쉽게 보내주겠는가. “아키라.” “으, 응?” “이리 와. 너무 멀리 떨어지지 말고……. 뭐 하는 마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니까.” 아키라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반조의 말에 그제야 고갤 돌려 그를 바라보고 손을 붙잡았다. 그래봤자 떨어질 일 없이 함께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들거다. 두 사람은 28세와 32세로, 이 마을에서는 여름을 지나가고 있는 인간이었으므로. 봄과 여름에 해당하는 인간들은 전부 다 같은 숙소 건물에서 자야만 했다. 침대는 달랐지만, 아키라는 바로 돌아누우면 반조가 보인다는 사실에 위안을 갖고 지난밤을 보냈었다. 이미 하룻밤 보냈으니 어쩌면 물에 약을 탔거나 하는 일 따위 진작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두 사람이 심하게 저항하지 않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일지도……. 하여간 붙잡은 손은 달라붙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땅에 쭈그려 앉아 바닥을 짚었을 때엔 마치 그 땅으로 자신의 손 자체가 뿌리를 내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니. 아키라가 정말로 뿌리를 내리고 싶었던 곳은 반조였는데.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질 무렵 혼란한 외지인들에게 마을 풍습을 설명하는 노파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명이 들리듯 웅웅거리는 청각이었으나 어째서인지 그 노파의 목소리와, 반조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와닿았다. “인생은 원이에요. 순환하는 겁니다.” “호르가 인생 주기의 끝에 도달하면 겪게 되는 아주 오래된 풍습이죠. 제 차례가 오면 저 또한 기쁘게 뛰어내릴 거예요.” “곧 태어나는 또 다른 아이가 그분들의 이름을 물려받지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죽는게 아니라…… 생명을 주는 거예요. 필연적인 죽음을 기다리다 죽는 것은, 영혼을 더럽힐 뿐이니까요.” “반조.” “왜.” “나, 나 무서워…….” “……갑자기 뭐가?” “네가, 네가 날 두고 떠날 것 같아서…….” “…….” “나, 날 두고, 가지 않을 거지? 자고 일어나도, 여, 옆에, 있을 거지?” “넌…… 이 상황에서도 그게 더 무서워?” “으, 응. ……왜? 그러면 안 돼?” “안될 건 없지.” 어둠 속에서 느리게 붉은 눈동자와 노란 눈동자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의 어린아이와 청년 인원수만큼, 침대들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놓여 있었으므로 누군가 이 대화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둘만 남은 상황이 아닌 만큼 별로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아키라의 말을 마냥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아키라는 반조의 대답을 기다리듯 한참 응시했다. 반조는 결국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 자고 일어나도 네 옆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푹 자.” “으, 응. 고마워.” 아키라는 진심으로 그 대답이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는 정자세로 누웠다. 건물에는 벽부터 천장까지 온갖 다양한 그림과 룬 문자들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저 천장에 그림을 그리려면 얼마나 높은 사다리를 써야만 했을까? 아키라는 쓸데없는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을 무렵 마을 사람들에게서 들은 풍습을 곱씹지 않으려면 이러한 사소한 잡념들이 필요했다. 그 풍습은 곱씹을수록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알고 싶은 욕심을 갖게 만들었다. 제 옆 침대에서 잠든 이를 자신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죽는다면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을지. 그런 논제들……. 결국 아키라는 다시금 잡념을 주워 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먹은 식사는 부담스럽지도 않고 적당히 맛있었어. 그거 하나는 괜찮았어. 내일도 그런 소소하게 작은 괜찮은 게 생기면 좋겠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식사는 부담스럽진 않았으나 맛은 그저 그랬다.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도 안 됐다. 놀러온 외지인들 중 몇 명은 이미 독단적으로 돌아가버린 모양이었다. 식사시간 내내 그들의 이야기로 자와자와한 남은 일행들의 말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더니 체라도 한걸까, 아키라는 어딘가 거북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니까…….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속만 그렇지 않았다. 시야가 주기적으로 어지럽게 돌아가는 착각과 함께, 그 시야에 들어찬 모든 요소들이 자신의 맥박을 따라 숨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히 멀리 느껴졌고 도리어 멀리 있던 것들은 아주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이를테면 편안함,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아늑하고 잔잔한 파동. 현기증과 같은 기분을 나열하는 사이에 이런 표현이 적합하진 않겠지만, 아키라는 초점을 잃고 흐릿해진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며 그저 계속 걸음을 옮겼다.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아도 몸이 계속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시야는 계속해서 변했다. 화관을 쓰고, 하얗고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웃으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은 춤을 추고, 멈추고, 춤을 추고, 부딪히고, 넘어지고, 다시 멈추고, 춤을 추고, 지쳐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이쯤에서 아키라는 자신이 이 춤 대회가 시작되기 전 마신 차에 약을 탄 건 아닐지 의심할 법도 했지만, 어지러운 현기증 때문에 사고는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았고 평소라면 의심하고도 남을 부분을 짚어내지도 못한 채 빙글빙글 돌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울린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본다면 마치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평범한 축제로, 어제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은 한 사람과 나무망치로 머리가 깨져 죽은 또 한 사람의 이야기는 거짓말처럼 보였다. ‘반. 너, 너는, 안, 안 해……?’ ‘내가 저기에 왜 껴? 하고 싶으면 너는 하던가.’ 그, 그래도……하며 운을 떼던 목소리를 반조는 딱 잘라 다시 거절했었다. 아무래도 반조의 입장에선 냅다 이 문화에 스며들듯이 어울리는 아키라가 더 정신이상자로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먼저 권하기야 했다지만 찝찝하지도 않은 건가. 애초에 반조가 알고 있는 아키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마을 축제 중 일부인 다 함께 춤추기에 참여하자고 권해도 짜증이나 내며 거절하는 쪽에 가까웠다.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전까지 거쳐왔던 일들의 연장선인가? 아키라는 종종 평범한 인간은 보이지 않는 기행을 펼쳤고, 언제나 이상했으므로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어쩌면, 춤을 추기 직전에 마시던 차에 뭔가 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아키라가 고분고분 받아 마신 지점에서부터 아키라의 행동거지가 평소와 다르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와중에도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은 하나였다. 사람들과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아키라가 멍한 표정에서 점점 웃는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이었다. 바보같이 멍청하고, 넋 놓고 웃는 듯한 환한 얼굴. 하늘 위로 태양이 작열하고 있었으므로 아키라의 얼굴엔 그늘 한 점 없었다. 반조는 간혹 저런 웃음을 마주하곤 했는데, 그것은 아키라가 자신의 목을 조를 때나 더러는 칼로 내장을 쑤실 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런걸, 타인과 어깨 한번 스치는 일조차 짜증 내는 아키라가 이런 상황에서 내보인다는게 썩 내키지 않았다. 미묘하게 미간이 좁혀질 무렵, 마을 사람 한 명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키라를 응시하던 시야의 절반을 흰색 원피스가 가린다. “안녕하세요. 이 차 드실래요?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한 잔 드시는 게…….” “마음은 감사하지만, 억지로 마시고 싶지는 않군요.” 마을 사람은 미묘한 표정으로 반조를 바라보더니, 곧 다시금 친절하게 웃어 보이며 그럼 어쩔 수 없죠…… 하는 대답을 끝으로 멀어졌다. 가뜩이나 아키라가 약을 먹은 것이 아닐지 의심되는 상황에서 자신까지 아무거나 덥석덥석 받아먹고 싶지 않았다. 마음 같아선 아까 전 있었던 식사도 거르고 싶었지만, 너무 눈에 띄게 마을 사람들의 풍습을 거스르는 모습 또한 어떠한 길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아키라가 춤을 추며 웃고 있는 상황 이외에도 이상한 지점이 너무 많았다. 독단적으로 마을을 떠난 다른 외부인 말이다. 아무리 이 마을의 풍습이 기괴했고 떠나고 싶었다 한들, 보통이라면 일행들과 다 함께 떠났을 것이다. 다른 일행들 또한 이 마을이 내키지 않는지 어제부터 죽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자칫 잘못하면 자신 또한 아키라를 두고 홀로 떠난 것처럼 상황이 조성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실, 아키라를 두고 떠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그렇게 한다고 하면, 아키라는 아득바득 자신을 쫓아올 테고 혼자 떠난 저에 대한 분노로 표정을 일그러트리겠지. 하지만 반조가 걱정하는 상황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기차역으로 먼저 떠났다’고 이야기가 나오는 이들이 사실은 기차역에 간 적도 없는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반대로!” 북소리가 잠시 끊기고 다시금 이어진다. 더 빠른 템포로 이어지는 노래에 맞춰 얼마 남지 않은 인원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아키라는 꿋꿋하게 그 사이에 남아 있었다. 원을 그리며 도는 아키라의 흰색 머리카락이 돌아가는 방향에 맞춰 흔들렸다. 마을 주민들이 준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덕분에, 아키라는 머리카락도 옷도 피부도 전부 새하얗게 일렁거리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드문드문 놓인 붉고, 노랗고, 녹색의 자수들과 발걸음에 맞춰 스치듯이 지나가는 새빨간 눈동자만이 아키라가 그곳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흰 피부가 상기되어 옅은 분홍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리고 문득 반조는 깨달았다. 아키라가 자신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돌아갈 때마다 눈이 마주치고 있었다. 저만치 돌고 있으면 시야가 어지럽다 못해 현기증에 시달릴 것인데 아키라는 지독할 정도로 반조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 날 두고, 가지 않을 거지? 자고 일어나도, 여, 옆에, 있을 거지?” 반조는 결국 한숨을 터뜨리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대열에 맞춰 흰색 옷자락을 휘날리던 마을 주민 두 사람이 쓰러졌다. 아키라만이 그 자리에서 느리게 걸음을 멈춰 서며 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었다. “5월의 왕이다!” 순간 음악이 끊기고 마을 사람의 외침이 들렸다. 온갖 새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아키라는 잠깐 두통을 느꼈다. 비단 그뿐만이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참 움직인 몸에 무리가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지끈거리고 사태 파악을 해내지 못한 두개골 위로 보다 더 큰 화관이 씌워졌다. “당신이 5월의 왕입니다.” “축하해요!” “무슨,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 잠깐만……. 어디로 가는 거예요? 잠시만…….” 억지로 끌려가듯이 걸음이 옮겨졌다. 앞을 향해 걷고 싶지 않았는데도 반강제로 걸어야만 했다. 호르가의 주민들은 마치 아키라의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아키라를 중심에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화관 아래로 축 늘어진 흰색 머리카락만이 얼굴을 절반 가려주었다. 정신없이 찰칵거리는 소리가 두세 번 이어진 뒤에는 렌즈에서 눈동자가 떨어지자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반조였다. 아키라와 함께 사진을 찍고자 모여든 사람들과는 달리, 아키라와 마주 보는 곳에 반조가 서있었다. 부득이하게 끌려온 관계로 반조와 아키라 사이의 거리는 조금 멀었다. 아키라는 언제나 반조의 곁에 붙어서 있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으나 심적으로 좁혀지지 않았던 거리만큼 떨어져 있었다. 흰 스케치북 위에 오색찬란한 물감으로 그림을 그려낸 듯한 이쪽의 광경과 사뭇 다르게, 반조는 채도 낮고 어두운 옷들을 걸친 채 그곳에 서서……. “반.”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다가가려던 한 걸음이 중간에 제지당했다. 어깨가 붙잡혀 몸이 돌아갔다. 아무리 지난 며칠간 같이 식사를 했다지만 얼굴을 외울 정도는 아니었던 초면의 사람들이 아키라를 마치 아주 소중한 사람처럼 안아주고, 이마를 맞대고, 어깨를 다독이며 지나갔다. 그 일련의 과정들은 반조에게 다가가고 싶어 했던 아키라의 심상 따위가 아주 보잘것없고 하찮으며, 반조와 달리 아키라를 반겨주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음을 강조하는 행위처럼 다가왔다. 스쳐가는 사람들 중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아키라를 보며 환하게 웃거나, 벅차다는 듯이 눈물을 글썽이는 이마저 있었다. 아, 무언가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토할 듯이 속이 울렁거렸다. 이게 뭘까? 이게 뭐지. 그런 복잡한 속내 따위 아무도 배려해 주지 않은 채 그들은 아키라를 데리고 노래를 열창하며 만찬이 준비된 곳으로 향했다……. 그래서 지금이다. 아키라는 자신의 앞으로 일자로 쭉 서있는 이들을 응시했다. 그들 사이에는 비어있는 자리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반조의 자리였다. 온통 새하얀 옷들만 입은 풍경을 보아하니 다른 외지인들은 이미 다 같이 돌아갔거나 아니면 그들 또한 새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모양이다, 라고. 아키라는 생각했다. 반조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그는 이 식사 자리에 끼지 않을 것이다. 아키라는 반조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럼 나도 여기서 나갈 수는 없는 거겠지? 유약한 정신머리는 결국 자신이 앉기를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그가 온통 풀과 꽃으로 치장된 의자에 앉은 뒤에서야 그 많은 사람들도 파도타기 하듯이 순서대로 착석했다. 아키라로서는 사양하고 싶은 관심이었다. 자신은,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뼛속까지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키라는 착실하게 수저를 두 손으로 쥐어 음식을 썰어냈다. 어떻게 썰린지도 모를 음식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아키라는 고요하게 침잠하는 눈동자로 빈자리를 응시했다. 반조가 보고 싶었다. 저 자리에 반조가 와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반조가 함께해 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이라고, 내가 이러고 있는 모습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나를 이곳에서……. “여기요.” “……뭐예요?” “전통이에요. 행운을 가져다주거든요. 통째로 먹어요. 꼬리까지 전부 다.” “뭐, 뭐라고…… 싫어요.” 무언가의 물고기로 보이는 음식을 가져온 여자가 억지로 그걸 아키라의 코앞까지 가져갔다. 죽은 물고기가 가까워지자 그 동그랗게 뜨인 채로 시체가 된 눈동자가 잘 보였는데, 아키라는 그때 느껴진 비린내를 참지 못했다. 코를 찌르는 꽃내음과 생선 비린내에 순간적으로 감정이 욱해진 아키라는 “싫다고 했잖아!” 하며 가까이 다가온 팔을 쳐냈다. 덕분에 그 물고기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아쉬워하는 야유 소리와 함께 그 뒤로 잠깐 정적이 흘렀다. 입안에 들어온 적도 없는 비린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 잠깐 숨을 몰아쉬던 아키라가 천천히 땅에 처박혔던 눈동자를 들어 그들을 응시했다. “어, 아…….” 실수한 걸까? 순간적으로 몰려온 긴장감에 얼빠진 소리를 내자, 언제 조용했냐는 듯이 그들이 다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5월의 왕을 위하여, 건배!” 아, 일제히 잔을 들고 건배를 외치며 액체를 쭉 들이켰다. 아키라도 마셔야만 했다. 저 혼자만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이 마을은, 모든 심상을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텅 비어버린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 앉자 가장 가까이에 앉은 사람이 팔을 붙잡으며 물어왔다. “이제 우린 가족인 거죠?” “저와 당신은 가족이에요. 다 함께요.” “공동체인 거죠. 모두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가족, 공동체, 일부. 아키라는 평생 가져본 적 없는 단어들이 식사시간 내내 흘러나왔다. 그러나 호르가에 있는 사람들 중 아키라를 가장 잘 아는 반조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그 말을 듣는 아키라가 어떤 심상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반조는 사람들이 몰려간 방향과 반대로 걸었다. 지난 며칠간 살펴본 결과, 호르가에서 지내는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만큼은 다 같이 모여있었다. 중간에 먼저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식사가 시작되는 첫 순간에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정신 나간 듯한 마을을 살펴보기엔 지금이 가장 적정함을 깨닫고 걸음을 옮겼다. 그 중심에 아키라가 서있을 거란 사실이 거슬리긴 했다. 이 미묘한 거슬림이 어디로부터 시작됐는지도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아키라가 받을만한 대접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확신하기엔 아키라를 폭풍이 가장 먼저 몰아치는 저택 안에 버리고 떠났던 날과는 다른 거슬림이었다. 시야에서 사람들이 사라진 이후 반조는 담배 하나를 입에 물었다. 끄트머리를 가볍게 물고 있는 채로 라이터의 불을 켜 빨아들인다. 내쉬는 숨에 옅은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다. 이 마을은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외적으론 헛간이나 창고처럼 보이는 곳도 어쩌면 해골 몇 개를 돌탑처럼 쌓아 올린 공간일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반조는 어느 순간부터 사라졌던 외부인들을 떠올렸다. 아키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나 그들의 모습은 눈을 홉뜨고 살펴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옷을 갈아입었나 싶었는데 그마저도 아니었다. 아키라나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면식 없는 사람이기에 따로 통보하고 떠날 필요도 없겠다지만……. 차츰차츰 한 명, 두 명씩 사라지는 과정은 본능적인 무언가를 짓누르기에 매우 걸맞았다. 느리게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반조가 가까운 곳에서 눈에 띄는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오두막 안에서는 닭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마치 공포 영화의 도입부 같다고 생각했다. 흔하고, 진부한…… 시골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B급 공포 영화. 오두막 손잡이 위로 손을 얹었을 때는 이 기분이 착각이 아님을 직감했다. 문이 열린다. 열린 안으로 들어가 다시 그 문을 닫았을 때, 반조는 앞서 서술된 문장을 일부 수정해야 한다는걸 깨닫는다. 이건 B급 공포 영화 보단, 뭐랄까……. 보는 이로 하여금 불쾌함과 끔찍함을 느끼게 만들어, 인간에게 심리적 공포와 불안을 느끼게 만드는. 그곳에는 허공에 매달린 인간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등이 개복되어 바깥으로 꺼내어진 폐는 부풀어 오르고 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시체라고 적기에는 확신이 없었으니 인간이 있었다고 적는다. 천장과 기동에 묶여 내려온 끈에 마치 예술 작품처럼 얽혀 허공에 붕 뜬 이는 자신이 기억하는 외지인 중 한 명이었다. 꽃이 만개하듯 활짝 펼쳐진 피부 안으로는 선홍빛 장기들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반조는 그 광경을 보고 짧은 두통을 느꼈다. 머리가 아픈 건 둘째치고 이 상황이 피곤하게 와닿았다. 이 마을에서의 일이 결코 원만하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오두막 바깥으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반조는 손가락에 들고 있던 담배를 땅에 떨어트리고 밟아 으스러트렸다. 곧 닫은 문이 다시금 열린다. 자이젠 반조는 찡그리듯 웃은 얼굴로 들어온 마을 사람을 마주했다. 그에게는 크게 저항할 의사가 없었다. 왜냐하면……. 호혜의 신을 기리는 오늘, 우리는 귀한 태양에 감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로, 오늘 아홉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호르가는 받고, 다시 베풉니다. 새로운 피를 희생한 대가로 호르가의 피도 바칠 것입니다. 네 명의 새로운 피를 받았으니, 호르가에서 넷을 바칠 것이며─ 왕이 선택한 한 명을 바치겠습니다. 아홉 모두 위대한 순환에서 죽고 부활할 것입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들릴 정도로 웅장하게 읊는 소리를, 아키라는 자리에 앉아 듣고 있었다. 멍하니 정신이 흐릿했지만 결코 약에 취하거나 중독된 것은 아니었다. 의식은 선명했으나 이 상황에 대한 아무런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다. 징그러울 정도로 수많은 꽃들이 아키라의 머리며 몸을 덮고 있었다. 솔직히, 아키라는 꽃에 그다지 좋은 마음을 갖고 있지도 않아서 더더욱 힘이 빠지는 감각이었다……. 아홉 번째의 피는 전통대로 5월의 왕이 선택합니다. 미리 지정된 새로운 피와 특별히 추첨한 호르가인 중에서. 그들은 마치 룰렛을 돌리듯이 그들 중 한 명을 택하기로 했다. 낡고 오래된 기구에서 녹슨 철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나무 공이 하나 굴러 나온다. 그건 꼭 어린 시절 아키라와 반조가 운 좋게 겪었던 기회와도 비슷했다. 별로 특별한 점도 없었던 고아원에서 우연찮게, 운이 좋아서 눈에 띄고, 폭풍의 언덕 위로 올라갔던 그때와 아주 흡사해서……. 알고 싶지도, 그렇게 관심도 없는 이의 이름이 호령된다. 흰옷을 입은 마을 사람 한 명이 영광이라는 얼굴로 앞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말을 이어가는 노인의 목소리에 아키라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눈동자를 끌어올렸다. 그 하얗고 알록달록한, 화사한 광경 속에서, 유일하게 색에 물들지 않고 새카만 색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이가 다가온다. 아키라는 그의 이름을 알았다. 자이젠 반조. 이들이 마지막 후보입니다.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겠습니다……. 아키라는 미묘하게 색이 다른 눈동자로 반조를 응시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의 이름을 앓았다. 자신의 삶의 전반에 반조가 없는 순간은 전부 괴로웠고 타오르는 땅 위를 걷듯이 발이 아팠으며 해소되지 않는 갈증 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가 곁에 있는 순간도 마냥 즐거울 수 없었다. 언제라도 그가 떠나버릴 것처럼 느껴져 하루 종일 불안감에 시달렸고 절규했다. 그가 잠깐이라도 등을 돌리면 그게 마지막으로 보는 모습이 될 것만 같아 벌어지는 잇새로 들끓는 듯한, 퇴색된 목소리를 낸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를 이곳에서, 지금, 포기해버리면, 아키라는 앞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호르가의 사람들은 마치 모든 감정을 공유하듯이 굴었고 자신의 절규와 비명에도 함께 스러져 울어줄 것만 같았다. 자이젠 반조는 자신에게 해줄 수 없는…… 아니, 해주지 않는. 지금도 그렇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평소와 크게 다를 것 없는 금빛의 선명한 눈동자. 자신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저항하지 않는 태도. 지나온 시간들이 비참했던 만큼 아키라는 간혹 이러한 생각을 하곤 했다. 차라리 그를 인생에서 아예 단절시킨다면 앞으로의 삶이 회색으로 물들지언정 괴롭진 않을지도 몰라……. 아키라는 수없이 많은 대화 속에서 평범함과 잔잔한 일상을 추구했다. 특출난 점도 없고, 불안할 일도 없고, 무서울 날이 없으며, 지금보다 훨씬 연한 고통과 힘든 순간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나 연인이 있는 삶. 웃기지도 않아, 네 삶은 이따위면서……. 그런 말이 어울리지 않는 삶 말이다.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고 이들 속에 속하게 된다면 바라던 대로 되겠지. 아키라는…… 푸른 잔디 위로 펼쳐진 새하얀 사람들을 전부 시야에서 배척하고 그를 응시했다. 그런 잔잔하고 안온한 삶이, 어쩌면 곧. 어쩌면, 당장 한 시간 뒤에라도─. 호르가의 주민들이 이미 색 바랜 시체들을 가지고 노란색, 삼각형의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아키라는 한 번도 그 안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선택받은 영역이라고 하며 들어가는 것을 아무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애초에 허락했어도 별로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죽은 시체들을 그 성역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지푸라기 더미 위에 앉혀둔다. 앉혀둔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시체가 되어 늘어진 몸을 걸쳐두는 모습에 가깝겠지. 절벽에서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 났던 노인과, 잘못 망가져 거대한 나무망치에 으스러진 노인까지 전부 그 안에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5월의 왕이 선택한 피가 들어선다. 거대한 짐승의 육신 안에 박제되듯 들어간 이가 가운데에 앉힌다. 그렇게 되는 과정을 아무도 무어라 반발하거나 역겨워하지 않았다. 호르가의 사람들에게 그건 퍽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어린아이들마저 이 일을 매우 당연한 관례처럼, 살면서 한 번은 거쳐야 하는 풍습처럼……. 강하고 두려운 짐승이여. 너로 하여금, 우리의 부정한 기운을 정화하노라. 너를 가장 깊은 잠으로 추방하노니, 그곳에서 너의 사악함을 되돌아보고 반성할지어다. 마치 성경처럼 읊는 목소리와 함께 횃불을 든 이들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들은 타기 좋은 지푸라기 위로 횃불을 가져간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역은 하나의 불꽃이 되어가고 있었다. 등 뒤에 서있는 이들이 합창하듯 노래를 불렀다. 성가대가 부르는 노래와 흡사하였다. 옮겨진 불꽃은 더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성역 안에 있는 모든 것에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며 집어삼킨다. ─곧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비명이 터져 나왔고, 합창은 곧 비명을 바뀌었다. 그들은 몸을 뒤틀고 털어대며 작열하는 화마 속의 고통을 모두 함께 나누었다. 개나리처럼 밝은 노란색으로 존재감을 내세우던 삼각형의 건물은 거대한 불꽃이 되어 허공으로 연기를 뱉어낸다. 90년에 한 번, 9일간의 축제. 그는 선택받았고,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왜 그런 선택을 했어?” “…….” “…….” “내가 뭘 원하는지…… 그리고, 뭘 원했는지. 이제서야 정확하게 알게 됐거든.” “…….” “그러니까 이제……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 수 있게 됐으니까.”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고, 그 덕분에 시야에는 옅은 미소가 들어왔다. 수줍게 웃는 얼굴은 꼭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였고, 상황과 조합하여 본다면 역겹게 보이기도 했다. 듣는 이는 느리게 한숨처럼 헛웃음을 뱉어낸다. 하. “아키라, 넌…… 제정신이 아니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