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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andmaiden>

  • 작성자 사진: Makina
    Makina
  • 2023년 9월 5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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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kina


<The Handmaiden>

by Park Chan-Wook

Romance, Thriller / Korea / 2016 / 144min /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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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용 게다를 신은 작은 발이 잽싸게 달린다. 땅을 박차고,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가는 팔에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단번에 올라앉는다. 바람이 불면 벚꽃잎과 함께 높이 묶은 긴 머리카락이 날린다. 꽃잎 하나를 낚아챈 아이가 티 없이 웃었다. “엄마, 이것 좀 봐!” 나무 아래로 검은 그림자가 다가온다. 눈치채지 못한 아이는 두 번째 벚꽃잎을 잡으려 했다. 그림자보다 짙은 검은 장갑이 머리채를 움켜쥐어 거세게 당긴다. 아이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새된 비명이 터졌는데,

 “헉, ……헉, 읏…….”

 마리는 번쩍 눈을 떴다. 하녀는 제법 놀란 눈치였다. 내가 비명을 질렀던가? 얼굴을 훔치자 식은땀이 흥건하다. 젖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앞으로 쏟아졌다. 하녀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누구지?”

 “어제부터 아가씨를 모시게 된 하녀입니다. 칸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 이름이 어색한지 눈을 한 바퀴 굴린다. 어딘가 거친 데가 있는 목소리 위로 느물거리는 남자의 발성이 겹쳤다.

 “쿠사하라 아가씨가 남자에겐 요만큼도 관심이 없는 것, 잘 압니다.”

 백작이 담뱃재를 털었다. “그러니 저와 손을 잡으시지요.”

 화려한 기모노 자락에 반쯤 가려진 마리의 손은 굳은살 하나 없이 연하다. 넓은 저택에 갇혀 곱게 자라온 아가씨였다.

 “연수하는 정신 병원에 들어갈 겁니다. 쿠사하라 마리의 이름으로요.”

 나무를 뽑아 풀밭에 버렸구나. 마리는 생각했다.

 과연 수하는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다. 코르셋도 제대로 채우지 못했으며 리본은 엉성하게 묶어두었다. 머리카락을 빗다가 뭉텅이로 엉키게 만들어 결국 마리가 빗을 빼앗아 들었다. 눈치를 보던 수하가 제 이마를 빡, 소리 나게 때렸다. 연수하 이 멍청이…… 저 부드러운 머리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은사처럼 반짝거리고 가벼웠는데, 악! 잡생각 그만!

 마리는 수하 모르게 소리 죽여 웃었다. 움직이는 인형 같은 하녀들만 보다가, 수하가 들어오니 여러 의미로 활력이 넘쳐흘렀다.

 “아가씨, 그건 사랑이 틀림없어! ……요.”

 일도 존대도 서투른 수하는 사랑에도 서투르다.

 “백작님을 보면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어쩐지 초조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뛴다면서요. 그거 분명 사랑? 이라니까요.”

 문득 마리는 호기심이 생긴다. “칸나. 너도 사랑을 해봤어?”

 질문을 받은 수하가 한참 곱씹다 입을 열었다. 딱 잘라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가슴 안쪽이 불쾌하게 근질거렸다.

 “밥이나 먹자고, 밥이 싫으면 차나 한잔하자고 계속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구는 놈이 있었는데요…….”

 “응. 그래서?”

 “그 빌어 먹, 아니, 밥 한번 먹으면 그만 올 거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해서. 굳이 약속을 또 잡아서 어쨌든 만났어요.”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싫다는 얼굴로 수하가 목을 벅벅 긁었다.

 “그런데 밥 먹는 동안에도 자꾸 손을 잡으려고 들어서. 염병, 밥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엔 데려다주겠다면서 내내 쫓아오더니 으슥한 골목에 다다르니 어깨를 덥석 붙잡고…….”

 뭔 굴러다니는 말 뼈다귀 같은 남자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잠깐, 어깨를 덥석 붙잡고, 뭐? 이 새끼가?

 “……입을, 맞추려고 하길래 패버렸어요.”

 저도 모르게 힘껏 쥐었던 주먹이 사르르 풀어졌다. 마리가 웃자 수하가 애매하게 따라 웃는다. 마리는 그제야 만족스럽다. 그런 자신에게 놀라기도 했다. 무엇 하나 욕심내지 않고 살아왔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 손바닥 위에서 뛰노는 하녀를 가만히 그러모아 쥐고 싶어진 것이다. 어디서부터 이리되었을까. 저 뻣뻣하게 땋은 말총머리도, 매사 화가 난 눈썹도, 바싹 마른 작은 입술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돌연 그 남자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내가 입을 맞춰도 때릴 거야?”

 “네?” “말해봐.”

 수하의 뺨을 감싸며 당긴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진다. 레이스 달린 잠옷이 구겨져 사락거린다. “아가씨는…….” 수하는 어쩐지 몸을 물릴 수가 없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의 녹색 눈이 휘어진다. 에라, 모르겠다. 수하가 눈을 꼭 감았다.

 “괘, 괘, 괘, 괜찮아요.”

 아가씨는 대체 뭘 먹길래 숨도 이렇게 단 걸까?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말캉한 혀가 수하의 혀에 따라붙으며 비비고 눌러댔다. 여린입천장을 쓸어올릴 때는 저도 모르게 허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가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마리가 수하의 허리를 받치며 한층 깊이 혀를 밀어 넣었다. 으, 응. 수하가 가르랑거렸다.

 “아가씨, 안, 돼요. 이, 이상은…….”

 “괜찮아.” 조금 전 수하의 답을 마리가 제 것처럼 써먹었다.

 “……아가씨의 손이 하녀의 허벅지를 쓸어내리자, 하녀는 애달픈 신음을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송골송골 맺힌 구슬땀이 우묵한 빗장뼈를 지나, 부풀어 오른 가슴을 적시며 미끄러졌다. 움푹 들어간 배꼽에 머무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흘러내려 아주, 깊고, 깊은 갈라진 사이로……”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독 적나라하게 들렸다. 이전과 다름없는 낭독회였으나 오늘만큼은 그 내용이 마리의 흥미를 끌었다. 등장인물이 모두 여자뿐인 책이었다. 더군다나 아가씨와 하녀가 나오는.

 갓 시골에서 상경하여 아는 게 없는 신출내기 하녀는 종일 실수를 저지른다. 상냥한 아가씨는 하녀를 훈계하기는커녕 귀애하고, 하녀는 남몰래 아가씨를 향한 연정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밤, 아가씨의 부름으로 침실에 들어간 하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의 아가씨와 마주하는데…… 라는 흔한 통속적인 소설이었다.

 “아가씨, 안, 돼요. 이, 이상은…….”

 중절모를 눌러쓴 신사들이 헛기침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나 마리에게 그들은 더 이상 안중에 없었다.

 “괜찮아.”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것도 만져주렴.”

 오직 박수갈채만이 마리를 지난밤에서 현실로 되돌렸다. 숙부는 흡족한 듯이 경매를 진행하고, 마리는 가만히 고개를 숙인다. 옷이 흐트러지고 더러워지는 건 아랑곳하지 않는 두 여자가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그 서책은 삽화가 들어있는 까닭에 두 배나 높은 가격에 양도되었다. 신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떠난다. 가장자리에 앉았던 백작이 몸을 숙여 귀띔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마리는 순간, 백작의 눈빛에서 욕망을 읽는다. 그건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천천히 다리를 감아오는 문어의 촉수처럼 불쾌하여 진저리가 처졌다. 마리가 옷깃을 여민다. 그 어깨에 살며시 남자의 손이 얹혔다.

 “당신은 연수하가 되어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그다음은 당신에게 얽히겠지.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한 영영 자유는 얻지 못한다. 뿌리가 드러난 채 고사한 나무를 떠올린다. 마리는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수하도 마찬가지일 테지. 누구도 그리 죽게 두지 않으리라.

 “아가씨, 제가 잘못,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게다를 벗어 던진 희뿌연 발이 비틀거리며 달린다. 땅을 박차고, 낮게 드리운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가는 팔에 힘이 모자라 몇 번이고 긁어내다 간신히 올라앉았다. 바람이 불면 벚꽃잎과 함께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이 나부낀다. 꽃잎 하나가 울며 뒤따르는 수하의 뺨에 붙었다.

 “전부 말할게요, 아가씨! 저는 사실…….”

 죽을 마음은 없었다. 백작과 도망치기로 약조한 날이 목전까지 다가왔음에도 입을 열지 않는 수하가 못내 서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애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백작만 나타나면 잔뜩 경계하면서! 입을 맞출 때마다 아가씨, 아가씨, 하고 끌어안았으면서. 발작적으로 터진 분노가 마리를 정원으로 이끌었다. 수하는 엉엉 울었다. 잘못했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전부 제가 잘못했는데, 탓할 다른 게 필요했어요. 아무나 희생양을 하나 정하고 싶었어요. 윽, 흑……. 그래서 불행을 대신 다, 떠넘, 기면 저는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뚜렷한 목적도 없. 었으면서, 이제 괜찮을 줄 알아서…….” 마리는 멀거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초승달이 떠 있었다. 그게 참 외롭고, 가엾고, 서글펐다.

 “스스로 인생을 망, 친 걸 계속, 후회해요. 그래서, 그래서 백작의 제안을 수락했, 어요.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를 팔아넘기면서까지 다시 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위해 살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 살고 싶어요. 당신은 내 삶에 목적을 줘요. 저는요, 아가씨…….”

 “아가씨가 좋아요.”

 앞으로 제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바보. 서툴고 답답한 얼뜨기. 충동적으로 굴고 번번이 정에 지고 마는 한심한, 사랑스러운…….

 “마리.” 마리가 속삭인다. “마리로 좋아.”

 결국 진 쪽이 누군지 모르겠다. 마리는 맨발을 달랑거리며 흔들었다. 반쯤 풀린 오비에 매달려 애원하던 수하와 눈을 맞춘다.

 “수하야.”

 그 이름으로 수하를 부른 건 처음이었다. 줄곧 입 속에 갖고만 있었던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하는 순간 어떤 감정의 이름 또한 분명해졌다. 놀라 굳은 수하를 향해, 마리는 천천히,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숙부의 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종이를 찢고, 책을 짓밟고, 먹을 흩뿌리며 날뛰는 수하의 모습이 생경함에도 퍽 자연스러워 보여, 마리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수하야, 너는 하녀 일보다는 행패 부리는 게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아가씨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아가씨가 아니라.”

 “……마리.”

 마리, 마리. 몇 번이라도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좋겠다. 마리는 결심한 듯이 책장을 힘껏 밀어 넘어트렸다. 책 같은 거 딱 질색이야. 나는 원래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 몸을 움직이는 일을 갖고 싶었는데.

 “여기서 나가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너머에서 수하가 소리쳤다. 마리는 담장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저택의 담은 침입자를 윤허하지 않겠다는 듯 높고 가팔랐다. 어떻게 올라올 수는 있었는데 발을 디딜 자리가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수하가 몇 번 구르다 몸을 추슬렀다. 마리는 덜컥 겁이 났다. 다리가 부러지면 어쩌지? 뛰지 못해서, 그래서 지하로 끌려간다면. 나뿐만 아니라 수하까지.

 “나, ……그냥 돌아갈까? 지금이라면 아직.”

 “됐으니까 더 따지지 말고 내려오기나 해요.”

 “나 너보다 키가 커. 의외로 무거워. 받으려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마리!”

 수하가 힘껏 팔을 벌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줄 테니까, 어서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뛰어내려!”

 벚꽃잎이 팔랑거리며 날아간다. 담 위에서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다. 온몸을 던져도 제대로 잡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붙잡고 나서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으리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내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세계에서,

 너만이 내 이름을 불러준다면.

 마리는 벚꽃잎을 쫓아 뛰어내렸다.

 넓게 벌린 두 팔에 들어가도록 마른 몸을 힘껏 움켜쥔다. 전력을 다한 끌어안음에 수하의 몸이 붕 뜬다. 두 사람은 야트막한 높이의 풀밭을 굴렀다.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실컷 굴러대고 나서야 멈췄고, 절로 내뱉은 수하의 욕지거리가 무사함을 알렸다. 베이고 긁힌 상처가 한가득 생겼지만 팔다리는 부러지지 않았다.

 “마리, 다친 데 없어?! 요?!”

 밤과 풀의 냄새가 났다. 마리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이 울음으로 바뀔 때까지도 수하는 곁에 있었다.

 마리는 바다를 보고 있었다. 상체를 난간 밖으로 쭉 내밀어, 누군가 그를 밀면 그대로 추락할 것처럼. 사람들은 때때로 마리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수하는 귀 뒤로 넘긴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보았다. 목덜미를 간신히 덮을 만큼 짧았음에도, 마리는 여전히 머리카락을 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아가…… 마리.”

 쭈뼛거리며 다가가자, 따뜻한 손이 수하의 손을 덮는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바다를 보았다. 상하이로 가는 배였다. 살아온 땅이 자꾸만 멀어진다. 둘 중 누구도 그것을 아쉽다고 여기지 않았다.

 “선물이야. 항구에서 샀어.”

 손바닥에 살짝 밀어 넣은 물건이 무언가 했더니 금색 방울이 달린 초커였다. 조금 움직이기만 해도 금세 딸랑, 청명한 소리가 났다.

 “고양이도 아니고.”

 “응. 도둑질하지 말라고. 다른 데 눈 돌리지도 말고.”

 귀엽지 않아? 장난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는 마리의 얼굴이 썩 행복해 보여, 수하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내 세상에는 싫어하는 것들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줄곧 그것들에서 도망치고 있었는데.

 연수하가 차마 싫어하지 못한 것들.

 좋아하는 것들.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이름은……

 갈매기 몇 마리가 창공을 날아갔다. 배는 태양을 등에 이고 나아갔다.

 새는 마침내 새장을 벗어나 비상을 시작한다.

 나의 아가씨, 나의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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