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rce Code>
- Satellite

- 2023년 9월 5일
- 14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Satellite
<Source Code>
by Duncan Jones
SF, Action / USA / 2011 / 93min / 12+
터미널은 언제나 그렇듯 인파로 북적였다. 카론과 가니메데는 여느 마법사들에 비해 월등히 강한 마법을 구사하는 이들이었지만, 매우 급한 순간이 아니면 순간이동을 사용하지 말자는 자신들만의 철칙을 정해두고 살았다. 그래서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캐리어를 끌고 버스에 올라타 기차역까지 왔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으로 떠날 기대감에 부풀어 하나같이 들떠 있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내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평범한 여행객이었다.
"8분 남았어."
시간을 확인한 카론이 팔을 내리고는 말했다.
"금방이네."
카론은 두 사람이 상당히 빠듯하게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역에 도착할 시간을 넉넉하게 계산했으나, 하필 버스 앞에서 달리던 차가 버스와 접촉 사고가 나서 도로 위에서 상당히 시간을 지체한 까닭이다. 그러고도 열차가 오기 8분 전에 도착했으니 꼼꼼한 계획의 성과라고 해도 좋으련만 카론은 이 상황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이번에 기차역 1층에 새로 생긴 작은 온실에 들렀다 열차를 탈 계획이 사소하게 틀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집으로 돌아갈 때 들르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금세 감정을 털어냈다. 반면 가니메데는 열차 시간에 늦지만 않으면 아무래도 좋아서 인테리어를 바꾼 플랫폼을 구경하고 있었다.
"도착하면 우선 역에 있는 식당에서 볶음면을 먹을 거야."
"응."
"숙소까지는 버스로 이동할 거고."
"이번엔 어디에서 묵어?"
"잠시만."
카론이 핸드폰을 꺼냈다. 숙소 이미지를 찾아서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가니메데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세드릭 씨. 지금은 밖이에요."
예약 내역을 켠 카론은 가니메데의 통화가 끊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휴가 기간에 업무 전화가 온 건 언짢은 일이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우 급한 사정이 생겨 일정을 변경하는 게 필수불가결한 모양이었다. 카론은 시트를 켜서 세드릭의 방문 스케쥴을 다른 날로 옮겨두었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세드릭을 봤던 날에 관해 잠깐 이야기하다가 앞으로 묵게 될 숙소를 함께 구경했다. 호텔에서 올려둔 세 번째 사진을 터치했을 때, 열차가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플랫폼에 울려퍼졌다.
8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간다니까.
그런 농담을 했던 것도 같다.
아주 커다란 종이가 아니라면, 열여섯 번을 접기도 전에 접힌 면이 두꺼워져 더는 접을 수 없게 된다. 가니메데는 자신이 열여섯 번이나 접혀 아주 납작해지는 기분이었다. 꼭 망원경이 된 것 같았다. 순간이동을 한 직후에 느끼는 무거운 멀미에 시달린 것도 잠깐, 어지럼증에서 절반 정도 해방되자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먼곳의 네온사인이 번쩍거리는 걸 보던 가니메데는 이 상황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싱귤래리티를 제압하기 위해 이집트에 방문한 참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분명히, 확실히, 뉴욕의 야경이었다.
띵. 덜컹거리는 소리가 멎고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들은 전망대에 도착하자마자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카론. 여기는…."
"고소공포증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것치고는 특이한 장소 선정이군요."
"뭐?"
커피잔을 내려놓은 카론이 가니메데를 응시했다. 1, 2… 3초 정도 지났을 때 그가 빙그레 웃었다. "탑 오브 더 락(Top of the Rock)이라니, 참 투박한 이름이죠. 처음 이름만 들으면 누가 록펠러 센터 70층에 있는 전망대라고 생각할까 싶을 정도입니다." 그는 가니메데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가니메데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지?
"그래서 MACUSA의 입장은 정해졌는지 슬슬 듣고 싶은데요."
"무슨…."
가니메데가 카론에게 따지기도 전에, 황급히 그의 옆을 지나치던 손님이 그만 그의 신발에 커피를 쏟고 말았다. 그는 놀라 가니메데에게 사과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가니메데는 지금 자신의 구두에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슬슬 카론이 상황을 설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만, 구두? 오늘 따라 왜 이렇게 격식 있는 정장을 입고 나온 거지?
"…잠깐 화장실 좀…."
"그러시죠."
카론은 미련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왜 처음 보는 사람처럼 자신을 대하느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우선은 화장실에 가기로 했다. 아까 커피를 쏟고 사과하던 남자에게 자신이 괜찮다는 사실을 알려주려 들었던 손에 흉터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 들어와 거울을 확인한 가니메데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울 안에 비친 건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갈색 더벅머리에 안경을 쓴 말쑥한 신사였다. 가니메데가 양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지자 거울 속의 신사도 가니메데를 따라했다. 그는 메타몰프마구스였으므로 다시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려 해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치 그가 이 신사의 모습으로 둔갑한 게 아니라, 신사의 몸 안에 갇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마법일까? 그렇다면 대체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지팡이를 꺼내들어 빛을 밝혀보았다. 이 아카시아 나무 지팡이는 주인의 영혼이라도 알아본 건지, 항의하듯 불을 밝혔다 꺼뜨리기를 반복했다. 꼭 SOS 구조 신호 같았다.
그는 화장실을 박차고 나와 카론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돌아왔다.
"카론."
"네."
"들어봐, 나는……."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가니메데는 거대한 폭발에 휘말렸다.
* * *
가니메데는 어두운 캡슐 안에서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아도 카론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있었던 타워는 어디로 간 걸까? 여기는 어디지?
「폭탄은 찾았습니까?」
"예?"
「폭탄이요.」
"죄송하지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패턴을 재구축하죠.」
"패턴이라뇨?"
피아노로 치는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문에 대답하세요.」
릴리는 이브닝 드레스와 망토를 걸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다섯 장의 카드가 있었다.
「어떤 카드입니까?」
생뚱맞은 소리에 가니메데는 말문을 잃을 뻔했지만, 어쩐지 술술 카드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사진 속의 여자가 릴리인 것까지 맞힌 다음에야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 이 남자는 플루토다. 그가 그렇게 가르쳐주었다. 하지만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었다. 가니메데는 옅은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당신은 현재 임무 수행 중입니다.」
"모르는 일입니다만."
가니메데는 마법부 소속이 아니었으며, 자신의 사무소 손님이라 할지라도 이런 식으로 그에게 강압적이고 수상한 의뢰를 맡겼다면 카론이 미리 차단했을 게 분명했다. 어느 쪽이든 말이 되지 않았다. 가니메데는 누군가가 자신을 납치하는 건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랬더니 예상 답안 리스트는 그만 텅 빈 백지가 되고 말았다.
「어젯밤, 뉴욕에서 테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요?"
「당신은 그 폭탄의 구조를 알아와야 합니다.」
이것도 카론이 얘기하던 가상 현실 게임, 아니면 시뮬레이션 테스트 같은 건가?
"그런 건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당신이 찾아내지 않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겁니다.」
"협박하시는 건가요."
「아뇨, 부탁이죠. 그 테러범이 설치한 새로운 폭탄이 발견되었습니다. 모 아니면 도의 50% 확률에 의존하기에는 900만명의 목숨이 걸려있어 곤란하군요.」
"900만…?"
「가니메데. 당신이 폭탄을 찾아내지 않으면 오늘로 런던이라는 도시는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이었다. 런던이 날아간다고? 그는 갑자기 900만 명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는 말에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늘 그래왔듯, 그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마다 세상은 설명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언가가 진동하는 소리가 울리고, 가니메데의 의식은 저 바닥으로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 * *
멀미에서 벗어나자마자 가니메데는 헉, 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니메데는 야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카론을 바라보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카론은 그의 시선을 느끼고 흘끗 가니메데와 눈을 맞추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눈이었다. 그의 눈은 학창시절의 어느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 타인을 보는 눈이다.
가니메데는 자신의 재능을 이용하여 카론을 일부러 속이거나 맞혀보라고 하고 그를 골린 적은 단연코 한 번도 없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가 조금은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카론에게는 방금 전까지 이 사람 본인이 응대하고 있었을 테니 이 한 순간만으로 그가 자신을 알아보길 기대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가니메데는 알았다.
그래서 가니메데는 그냥 자기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잠깐 실례할게요."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죠."
"내일 오전까지는 확정해야 된다는 사실, 잊지 마세요."
"네."
카론은 가니메데가 갑자기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사람과 어울리는 데 익숙하다는 것과 혼자 있는 시간을 편하게 느끼는 건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이런, 죄송해요."
가니메데의 신발에 실수로 커피를 쏟은 남자가 그에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괜찮다고 하고 일어나서 전망대의 라운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주머니에 들어있던 지갑을 열어보자, 아까 거울에서 본 남자의 사진이 박힌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데이비드 션. 미국 마법 의회(MACUSA) 소속. 이 신분증만 있으면 웬만한 상황에서는 협조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신에 마법을 사용하는 건 어려웠다. 더군다나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주문은 아씨오일 텐데, 영화에 나오는 폭탄들을 생각해보면 폭탄이 그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터질 것 같았다. 가까이면 몰라도 멀리서 날아온다면 방향을 확인하는 것조차 어려울 게 분명했다. 그것도 임시 주인의 말을 듣다 말다 하는 이 지팡이와 함께라면 더더욱.
전망대 엘리베이터 근처에 와서 휘 둘러보니 라운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우선 주변에 건물이 많기는 했지만 지리적 특성상 록펠러 센터의 이어진 건물과는 높이 차이가 많이 났으며, 순간적인 기억이라고는 해도 폭발이 바깥에서 휘몰아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야경을 구경하는 대신에 시선을 돌려 내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곧 다가오는 휴가철에 손님 몰이라도 하려는 듯, 벽 곳곳에는 발리 여행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기념품점에서는 귀엽게 생긴 키링이나 엽서, 마그넷따위를 팔고 있었고, 한켠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에는 높은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 자리라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앉아서 꾸역꾸역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가니메데는 신문을 보고 있는 카론에게서 눈을 떼고 그 옆을 훑어보았다. 실랑이하는 커플은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였다. 저 사람들은 앞으로 몇 분 후면 이곳에서 폭탄이 터져 자신들이 목숨을 잃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는 것 같았다. 그걸 알았다면 그들도 서로를 보고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을까.
"실례합니다. 오늘 금속 탐지기에 걸린 사람은 없었나요?"
탑오브더락은 1층 로비에서 한 차례 총기류나 기타 위험 물품을 소지하지는 않았는지 검사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라운지에 들어설 때 한 번 더 기계 밑을 지나치는 보안 테스트를 거쳐야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의아한 얼굴로 가니메데를 쳐다보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걸린 사람은 한 명 있었지만 어린 아이가 가방 안에 들고 온 장난감의 부품이 걸린 것뿐, 위험한 물건을 반입하려 든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럼 테러범은 다른 방법으로 이곳에 진입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몰라도 옥상을 통해 잠입했거나, 마법사일지도 몰랐다. 내부에 공범이 있을 수도 있다. 우선 지금 찾아야 하는 건 그가 설치해둔 폭발물이었다. 가니메데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폭탄을 설치해두려면 어느 정도 공간이 필요할 것이다. 우선 눈에 띈 건 사람들이 물건을 보관하는 락커였다. 너무 평범한 나머지 설마 테러범이 그런 방법을 고르겠어, 싶은 장소지만 그런 생각에 허를 찔린 지도 몰랐다. 두 번째는 복도에 비치된 소방전이었다. 안에 놓인 소화기 뒤에 잘 눕히면 폭탄 정도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직원 전용 휴게실 내부를 언뜻 보니 꽤 큰 환풍구가 있었다. 우선은 이 정도를 확인해보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는 게 좋을 듯 싶었다.
가니메데는 물건이 들어있지 않은 락커를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사람들은 그를 잠깐 쳐다보고는 그대로 지나쳤다. 어지간히 결벽증이 심한 완벽주의자로 여겨지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서로 내외 중인 지팡이로 알로호모라를 세 번째 사용했을 때, 운 없게도 락커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대경실색하여 달려왔다.
"뭐하는 거예요, 이 도둑!"
"죄송해요, 저는 그러려던 게 아니라."
"도둑이 아니면 뭔데요! 내 약혼반지를 훔치려던 거죠!"
가니메데는 여자가 락커 안에 약혼반지를 둔 것도 몰랐지만, 적어도 작고 빳빳한 종이봉투 하나가 들어있는 걸로 봐선 여자의 락커에 폭탄이 숨겨져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여자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그가 충분히 멀어지자 아직 확인이 끝나지 않은 락커 한 개를 마저 열었다. 불운하게도 경비 몇 명이 이쪽을 주목하고 있었고, 가니메데는 안에 든 백팩을 열어본 뒤에 책과 간식만 가득한 걸 보고 다시 락커를 닫았다. 경비들은 어느새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가니메데는 시간을 확인하고, 소방전이 있는 복도까지 뛰기 시작했다. 앞으로 몇 초 뒤면 폭탄이 터질 것이다.
"션? 뭐하는 겁니까?"
마침 복도에 서있던 카론이 그를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그에게 물었다. 데이비드는, 그러니까 가니메데는 그에게 뭐라 대답할 시간도 없이 그를 지나쳐 소방전 앞까지 내달렸다.
그리고,
전혀 다른 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가니메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엄청난 화염이 이곳으로 퍼져오고 있었다. 그 불은 카론을 삼키고도 만족하지 못해, 단숨에 가니메데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 * *
피아노로 치는 자장가 소리가 흘러나왔다.
릴리는 이브닝 드레스와 망토를 걸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는 다섯 장의 카드가 있었다.
「어떤 카드입니까?」
가니메데는 반사적으로 카드의 이름을 대답하고는 눈을 떴다. 여전히 화면에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폭탄은 찾으셨습니까?」
"아뇨."
「그렇습니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채근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죠. 지금까지는 얼마나 흐른 겁니까? 그러나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다.
그는 테러범이 잡혔다고 가니메데에게 말해주었다. 문제는 절대 해체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폭탄이라는 건 제작자의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라, 아무리 내로라하는 저명한 폭탄 전문가들이 모여도 그가 빨강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파랑을 마음에 들어 했는지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해보아도 그는 묵묵부답이라고 했다. 방사능 폭탄의 위력은 무시무시해서, 어딘가로 옮겨서 터뜨리거나 사람들을 대피시킨 것만으로 안심하기란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이 과거에서 올바른 방법을 찾아준다면, 런던 시민들은 무사히 오늘 밤을 날 수 있게 되겠죠.」
"그래, 그 과거라는 것 말입니다. 어떻게 된 거죠?"
「당신이 진입하여 체험하는 8분의 시간은 이미 어젯밤에 일어나 끝난 시간대입니다. 소스 코드는 그 순간을 단순히 재현해줄 뿐이죠.」
"재현한다니. 그런 게 가능한가요? 이것도 마법입니까?"
「마법은 아닙니다.」
타임 터너만 하더라도 수많은 제약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가니메데가 과거로 가는 게 아니라, 데이비드 션이라는 남자의 안에 들어가 과거를 탐방하는 것에 가까웠다. 드래곤의 사진이 찍히고 십 분도 안 돼서 1만 RT가 되는 세상이다. 때로는 과학이 마법과도 같은 일을 탄생시키기도 한다. 과연 마법 같다는 말이 낭만적으로 들릴 만한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요. 이미 과거에 있던 일이라면…."
"데이비드 션은 이미 죽은 거예요?"
「데이비드 션뿐만이 아닙니다.」
「어제 오후, 록펠러 센터 70층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습니다.」
순간 가니메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카론도?"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카론 T. 유스티티아. 사망을 확인했습니다.」
가니메데는 소스 코드라는 시스템을 이용하여 데이비드 션의 뇌에 접속하여 같은 시간을 반복한다. 그 8분의 시간 안에 카론이 있다. 그곳에서 그 남자와 업무상 만났던 그는, 그렇게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다. 별의 아이들은 죽은 사람이라도 살릴 수 있는 전능한 힘을 지녔지만, 그것도 시신이 크게 훼손되면 불가능했다. 그가 죽었다는 건 그런 의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한 번 죽었을지라도, 언젠가처럼 부활하여 멀쩡히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을 테니.
「이 다음에는 폭탄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구조를 파악해주시죠.」
가니메데는 뭐든 반박하고 싶었지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지독한 멀미가 찾아들었다. 날아가는 새, 카론의 얼굴, 로어 플라자 아이스 링크. 그 모든 화면이 물감처럼 섞여들어가고, 가니메데는 다시 탑오브더락의 카페테리아에 앉아있었다.
"유스티티아 씨."
"네."
"당신은 세상이 8분 후에 닫힌다면 뭘 하면서 보낼 것 같아요?"
"엉뚱한 면접 질문 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카론은 웃고선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껴 테이블을 짚고는 말했다.
"후회 없을 일을 하겠죠."
"그러니까, 어떤?"
"잃어버린 걸 되찾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중한 걸 잃어버리셨나보네요."
"네."
"뭘 잃어버렸는데요?"
"비밀입니다."
가니메데는 메타몰프마구스를 사용해서 전혀 다른 키와 얼굴로 여기저기 다녀보았다. 그러나 생면부지의 타인의 몸으로 움직이는 건 전혀 달랐다. 세상에서 완전히 유리된 기분이었다. 이건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이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죽었다. 지금 보는 건 완전히 허상이다. 가니메데는 이들에게 간섭할 수 없다. 그가 구할 수 있는 건 오직 미래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뿐이다.
"같이 사는 사람 있어요?"
"아까부터 뜬금 없네요."
"왠지 그래 보여서요."
"예, 있습니다. 친구와 같이 살고 있어요."
모두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기분 좋을 일이 전혀 못 됐다. 어쩐지 타인의 인생을 빼앗은 기분이라서일까. 아니면 이미 죽은 사람의 몸을 빌린다는 게 탐탁지 않게 느껴져서인지도 모른다. 가니메데는 자신이 서운해할 계제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쉴새없이 일어났다. 그는 아주 이상한 이별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카론이 죽기 전 마지막 대화한 사람이 자신이라니. 하지만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건 어떤 의회 직원의 뇌 안에 있는 기억의 단편일 뿐이다. 가니메데는 조금 낙담했다.
그래서 그는 손목 시계의 타이머가 2초 남았을 때, 주문을 외웠다. 프로테고 막시마!
"뭐하는 거예요?"
거대한 방어막이 펼쳐졌다. 한 박자 늦게 폭탄이 폭발하고 건물이 흔들렸다. 천장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는…."
바로 그때, 방어막에 생긴 빈틈 사이로 날카로운 파편이 떨어졌다. 가니메데는 그 조각을 직격으로 맞았다. 방어막이 맥없이 사라지고 눈앞은 화마로 가득차고 말았다.
* * *
「가니메데 테일러.」
「당신이 이 임무에 발탁된 목적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서 사람들을 지키는 게 아니라요.」
* * *
가니메데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는 남자는 이미 죽은 목숨으로, 옆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야경이 그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할 것이었다.
가니메데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아뇨. 그냥…."
카론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번이 몇 번째지."
"응?"
"몇 번째냐고 묻고 있잖아, 가니메데."
가니메데는 그 순간, 찰나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뺨에 난 흉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여전히 데이비드 션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혼란스러워하는 가니메데를 두고 카론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나는 바이러스 같은 거야. 이스터 에그라고 봐도 되고."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소스 코드로 여기에 들어왔지?"
"……."
"나는 그 개발에 참여했었어. 대외비로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었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쓰일 거라고는 생각 못 했었으니까."
"…네가 이걸 개발했다고?"
"어디까지나 보조로. 그리고 그때는 사망자가 아니라 식물인간의 재활에 쓰인다고 해서 협조했던 거야."
"잠깐. 사망자라고?"
"안내 못 들었어?"
가니메데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죽은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친구랑 같이 살고 있다면서. 바이러스라더니, 이 카론은 정말 어디가 이상해진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카론은 개의치 않고 설명했다. 소스코드는 이미 금지된 그 마법(사자를 소생시키는 마법. 금지라고 해봤자 평범한 마법사는 사용할 수조차 없었다.)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사자(死者)의 의식을 컴퓨터와 연결하여, 타인의 뇌에 입력된 기억 정보를 탐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특이한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넌 한 달 전, 이집트에 간 뒤에 그대로 실종됐어. 사망 소식이 그 뒤에 날아왔고, 나는 네 시신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 그것만 있으면,"
알잖아. 그렇게 말하듯 카론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거절당했어. 생각 같아서는 가서 들고 오고 싶었지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보시다시피 이럴 것 같아서."
가니메데는 이집트에서 사망했지만, 현재 그의 시신을 보관하고 있는 건 영국 정보부인 것 같다고 했다. 가니메데는 생애 두 번째 죽음을 가상 현실의 제 룸메이트에게 들으면서 아무런 현실감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구태여 카론에게 자신의 사망 사실을 확인시켜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가 여기 오게 된 건 국가 재난 상황이 발생해서지?"
"맞아."
"무슨 일이 일어나?"
"곧 폭탄이 터질 거야."
가니메데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와 같은 집에서 층을 나누어 몇 년을 함께 살았으며, 방금 전까지도 비록 MACUSA 직원의 모습이었으나 그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상황이 매우 생경하게 느껴졌다. 뇌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서인지도 모른다. 이 프로그램은 뇌파를 이용해서 작동되는 것 같았고, 그 때문인지 자신의 사망 사실을 안 뒤부터 이따금 공간 곳곳에 반복적으로 노이즈가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 폭탄을 설치한 사람을 찾으면 되는 건가?"
가니메데가 고개를 저었다.
"해체하는 방법만 찾으면 돼."
"위치는?"
"짐작가는 곳이 있어."
"그래, 그럼. 내가 너를 도울게."
그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다. 가니메데가 이곳에 진입하자마자 자신을 알아보는 그의 룸메이트의 존재가 오히려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더욱 확실히 각인시켜주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가니메데는 남자가 자신의 구두에 커피를 흘렸어도 괘념치 않고 웃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론의 도움을 받자, 직원 휴게실로 진입하기는 한결 더 쉬웠다. 사람들에게는 MACUSA 소속이라고 밝히는 것보다도 영국의 오러라고 말하는 게 훨씬 잘 먹혔다. 문제는 휴게실 위의 환풍구를 열고 내부를 들여다보아도 폭탄 비슷하게 생긴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던 중에 카론이 바닥의 타일이 들뜬 부분을 발견했다. 타일을 들어내자 안에 타이머가 부착된 폭탄이 놓여 있었다.
"이거야."
"정말 있네. 여기서 신고해봤자 소용은 없는 거지?"
"미래도 똑같은 상황인 것 같으니까."
가니메데는 폭탄을 유심히 들여다보더니, 한쪽을 가리켰다.
"이 중에 어떤 선을 자르는지 범인이 말해주질 않는다나봐."
"그래서 네가 시험하러 온 거야."
"그런 셈이네."
카론은 테이블 위에서 가위 하나를 꺼내들어 가지고 왔다. 가니메데의 시계는 그에게 1분 3초의 시간이 남았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가니메데. 넌 말이야."
"응."
"1분 뒤에 죽는다면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하겠지."
"고민도 안 하고 대답하네."
"그것 때문에 계속 이러고 있는 거잖아."
"하하."
"너는?"
가니메데는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던졌다."
"나?"
"응."
"나는."
"1분 뒤에 죽는다면, 네 곁으로 갈 거야."
그의 말은 꼭 불시착한 프러포즈 같았다. 가니메데는 오랜만에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론은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너를 믿어. 네 감대로 해."
"…내가 하는 거야?"
"난 방어 주문이라도 쓰고 있어야지. 넌 지금 네 지팡이 제대로 못 쓰잖아?"
카론은 가니메데의 옆에 서서 방어막을 펼쳤다. 그가 주문을 외자 투명하고 막강한 막이 만들어졌다. 가니메데가 방어막 안에서 디핀도를 사용하여 선을 끊었다면 완벽했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의 지팡이가 불안정했다. 정확히는 가니메데가 불완전했다.
"이렇게 해도 너는 보호 못해줘."
"만에 하나를 대비해서 해둔 거야. 무조건 해낸다는 생각으로 잘라."
"그럴게."
카론은 가니메데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뢰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의 옆에 가만히 서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니메데의 어깨에는 이미 많은 짐이 무겁게 얹혀 있었고, 그는 가니메데가 1/2의 확률에서 잘못된 패를 손으로 집었을 때 느낄 좌절을 염려했다.
가니메데는 가위 손잡이에 손을 끼웠다. 그의 농장에는 사과 나무를 비롯한 몇몇 과일 나무들이 있었기에, 잔가지를 치는 가위질에는 아주 능숙했다. 그런데도 이 가위에 꽂은 손가락을 오므리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가위가 절반 정도 오므려졌을 때, 가니메데는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었다.
00:01
지근거리에서의 폭발이 1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그를 집어삼켰다.
* * *
"폭탄을 발견했어요. 구조도 확인했고요."
"폭탄은 직원 휴게실의 타일 밑에 있었고, 둘 중에 푸른 선을 자르면 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저를 내보내주세요."
플루토가 화면을 응시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안 되나요?"
「그렇습니다.」
"제가 죽어서요?"
「소스 코드 안에서 주어지지 않은 정보를 찾아다녔군요.」
"하."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두운 캡슐 안처럼 보이는 이 공간도 전부 허상이다. 출구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고, 출굴로 보이는 것은 결단코 열리지 않을 것이며, 만일 열린대도 그곳을 통해 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가니메데는 두 손으로 얼굴을 짚었다. 못할 짓은 아니었다. 정말, 못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도무지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이미 죽었는데 기계에 연결되어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몇 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의 기억을 침범하여 죽어가며 남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 정작 그 사람들은 자신이 도와줬다는 사실은 커녕 제 이름조차 알아주지 않을 텐데.
"그럼 차라리 절 죽여요."
「당신은 이미 사망했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닌 걸 당신도 알지 않아요? 완전히 죽으면 이렇게 대화할 일도 없었겠죠."
플루토는 잠시간 침묵했다. 가니메데는 여전히 마지막 1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운은 좋은 편이냐, 나쁜 편이냐를 따지자면 그닥 좋지 않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친구는 자신을 믿어준다고 했다. 이미 죽은 사람들끼리 뭘 한 거람. 생각해보면 그때도 그랬다. 이미 죽었는데 나란히 앉아서 산 친구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에게 자신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번도 똑같았다.
"한 번 더 들여보내줘요."
「사건은 해결됐습니다. 당신 덕분에요.」
「그곳은 더 이상 돌아갈 필요가 없죠.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어제의 사건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어요."
「이미 끝난 일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플루토는 가니메데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지만, 냉정하게 차폐막을 내려버리지도 않았다. 가니메데는 그에게 부탁했다. 자신이 들어가고 8분이 지나면 그대로 생명 유지장치를 꺼달라고.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었다. 이런 식으로 목숨을 부지해가며 장막 뒤에서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8분입니다."
플루토는 마지못해 「알겠습니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사실 정말 마지못해 한 건지 아닌지 가니메데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제 쓸모가 없어져 폐기 처리가 확정된 건지도 몰랐다. 가니메데가 이번 폭탄 처리에 큰 도움이 된 건 사실이었지만, 얌전히 기계의 부품으로 살기에는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만일 기억을 리셋한다고 하더라도 한 번 이런 식으로 진실을 알아냈다면, 같은 일은 다른 상황에서도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고 제아무리 정신력이 강한 가니메데 테일러라 할지라도 갖은 반복 끝에 결국 마모되고 말 것이다.
이걸로 된 거야.
순간이동 멀미를 방불케 하는 극심한 어지럼증이 그를 덮쳤다.
* * *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는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건너편에는 카론이 앉아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 석간신문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넓게 트인 창을 통해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쪽을 바라보면 먼곳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겠지.
가니메데 테일러는 싱귤래리티를 제압하기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죽었다. 그리고 한 달 뒤, 카론 유스티티아가 업무차 뉴욕에 방문했다 폭탄 테러에 휘말려 사망했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지금, 그는 데이비드 션이라는 남자의 뇌를 통해 그날의 8분을 반복할 기회를 얻었다. 소스 코드라는 아주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무언가를 통해서.
"왜 그렇게 쳐다봐요?"
"왜인 것 같아?"
카론이 신문을 내려놓았다.
"이번이 몇 번째지."
"모르겠어.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너를 만난 건 이번이 두 번째야."
"그런가."
카론은 신문을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자신이 왜 가니메데를 알아보는지에 대한 설명은 들었냐는 물음이 지나갔다. 가니메데는 상황을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들이 있는 층의 직원 휴게실에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가니메데는 해체하는 법을 알고 있다. 그럼 전에도 여기서 해체해봤어? 가니메데는 거짓말을 했다. 하기 전에 타임 리밋에 걸려서 못했어. 그렇군. 이제 범인을 찾으면 되는 건가? 아니….
가니메데는 이 세상의 바깥에 있을 때,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에 자신을 완전히 죽여달라는 부탁을 하고 왔다는 말을 카론에게 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분명 화낼 것이다. 가니메데는 적어도 이 세상의 카론이 죽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 비록 이곳이 만들어진 가상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폭파에 휘말려 일그러지는 카론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조심해요."
"어, 네."
가니메데는 커피를 들고 서둘러 나서는 남자에게 주의를 주었다. 덕분에 커피가 흐르는 일은 없었다. 그는 카론의 도움을 받아 직원 휴게실 안으로 들어섰다. 타일 밑에는 폭탄이 있었다. 가니메데는 카론에게 보호막을 펼칠 필요는 없다고 일렀다. 프로테고 막시마를 외치려던 카론은 그의 말에 지팡이를 도로 내렸다. 가니메데는 숨을 들이쉬고 멈춘 채로 파란 선을 잘랐다. 그대로 타이머가 멈췄다. 두 사람은 경비를 불러 폭탄을 넘기고는 경찰에 신고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새파랗게 질린 경비원들이 두 사람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표했다.
복도에는 여전히 발리로 오세요!라고 크게 적힌 여행 포스터가 즐비하게 붙어 있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커플은 경비원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걸 보고 쭈뼛하더니 서로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락커에서 약혼 반지를 꺼낸 여성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세드릭 삼촌. 몸은 좀 괜찮으세요? 저 좋은 일이 생겼어요. 다음 병문안 때 직접 말씀드릴게요.
카론은 급하게 달리다 넘어질뻔한 아이를 잡아주고는 몸을 일으켰다.
"밖에선 다들 구사일생이라고 서로를 얼싸안고 아주 난리들이겠어."
"잘 된 거지."
"이제 돌아갈 거야?"
"글쎄……."
가니메데는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좀 있으면 이곳에 온지 8분이 경과할 것이다. 플루토가 자신의 말을 들어준다면, 그때 자신은 그대로 사망한다. 그걸로 이 세계도 완전히 닫힌다. 그래도 아주 슬프거나 막막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평화로워 보였고 카론 역시 멀쩡히 제 옆에 서있었다. 정말 이거면 된다고 생각한다.
"가니메데."
"응."
"넌 말이야. 1분 뒤에 죽는다면 뭘 하고 싶을 것 같아?"
"그게 뭐야."
가니메데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우리가 이 얘기 하는 사이 30초 정도 썼으니까 그냥 죽지 뭐."
"야."
"왜?"
"나는,"
"됐어. 말하지 마."
카론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는 가니메데는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가 휭 가게 내버려둘 카론이 아니었다. "기다려봐." 카론이 가니메데의 손목을 잡은 순간, 그가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의 체인이 풀어져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시계를 주워들던 가니메데는 몸을 채 일으키기도 전에 멈추고 말았다.
00:00
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 시간을 다 보내버린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닫힐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눈앞이 흐려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지지도 않았다. 어안이 벙벙하게 서있는 가니메데를 카론이 일으켰다.
"안 돌아가네."
"…그러게."
"혼란스러워?"
"조금."
"네가 뭘 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아." 그건 가니메데에게는 위험 신호이기도 했다. 카론은 잠깐 노려보듯 가니메데를 쳐다보다가도 금세 웃었다.
"너도, 나도 안 죽었고 멀쩡히 살아있잖아. 이거면 된 거 아냐?"
카론은 가니메데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 가니메데는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기만 했다. 이 다음은 어디든 놀러가자. 어디로? 글쎄. 발리라든가. 두 사람은 바위 꼭대기에서 내려와 건물을 나왔다. 아이스링크 앞의 동상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가니메데는 이 순간을 이미 몇 번이고 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자신의 손을 잡아오는 카론을 거부하지 않고, 힘을 주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아침이 밝을 것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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