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d Box>
- Sweet Creature

- 2023년 9월 5일
- 7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Sweet Creature
<Bird Box>
by Susanne Bier
Horror, SF, Romance / UK / 2020 / 143min / 18+
0.
어떤 사건들은 도저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어서 일어난다. 재난이나 재해처럼. 30년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해 온 회계 담당 직원이 갑자기 회사의 모든 돈을 들고 도망친다거나, 한평생 진심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것 같던 남성이 온 가족을 죽이고 자신의 관자놀이에까지 구멍을 뚫어놓는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다거나, 평범하게 잘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몇 년이나 살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베란다 밖으로 몸을 내던진다거나. 왜냐는 질문이 무의미한 악행들. 그 안에서 의도를 읽는 일은 그 자체로 불필요한 일인데도, 사람들은 이유 없는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끝내 악의라는 것의 존재를 신봉하고 만다.
그날 일어난 일은 그런 일이었다. 형체 없는 것을 믿는 일.
무언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게 분명해.
그 막연한 믿음, 그 흐릿한 확신.
그것이 악의의 존재를 증명했다. 형체를 내보일 필요도, 기적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드문드문 끊어지는 라디오 방송이 말했다. 인간이여,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죽음을 보았거늘.
1.
맑은 날이었다. 사방에서 불이 나고 폭발이 일어서 귓가에 들려오는 모든 소음이 각기 다른 종류의 공습경보처럼 들렸다. 1. 여기에서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2. 저기에서도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3. 미사일이요? 그런 건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 죽고 있습니다. 그래요, 스스로.
반복합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반복합니다,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소셜 미디어를 끄고 라디오 방송을 기다리세요…….
2.
기드온은 여전히 그 경보가 처음 울리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에게 그 첫 경보의 형태는 코드 블루였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다는 뜻이었고 언제나 고통스러웠지만 저항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게 그를 견디게 해 줬다. 언제나 끝까지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 대부분은 그 날카로운 경보를 잠재우고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 또는 희망. 우울의 색이지만 너무 어둡지는 않아서 바다도 하늘도 심해도 우주도 될 수 있는 이름.
그날은 달랐다. 모든 것이 될 수 없어서 아주 어두운 색이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어떤 화면에서는 요동치던 선 하나가 앞으로 볼품없이 고꾸라지고……
도망가야 해요. 피투성이가 된 들것 앞에 서 있던 동료 한 명이 소리쳤다. 도망쳐야 해요, 기드온. 집으로 가요. 가야 해. 어서.
3.
가야 해. 다급히 주차장으로 가던 중에 누군가가 그의 앞을 지나쳐 도로로 뛰어들었다. 안경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함께 둔중한 폭발음 같은 것이 동시에 났다. 잿빛이어야 할 아스팔트가 새빨갛게 물들었는데 그 경계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무렇게나 구겨진 알루미늄 캔 같은 꼴이 된 바닥 위의 남자-여자?-가 중얼거렸다. 엄마, 가지 마요…….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그런 일들의 연속이었다. 슬픈 목소리, 공포에 질린 눈, 떨리는 손과 비틀대는 두 다리, 전봇대와 가드레일, 우체통과 세워진 덤프트럭을 향해 달려드는 온갖 종류의 새롭고 낡은 차들. 처음에 머릿속을 꽉 채웠던 집이라는 단어와 ‘가야 해’라는 문장은 머잖아 하나의 흐릿한 이미지로 완전히 변해 버렸다. 집에 가야 해. 아르노가 있는 집에…… 아르노가 거기에 있을 거야. 그래야 해. 그리고, 그리고…….
(다행히도, 또는 당연하게도, 또는 둘 다) 아르노는 집에 있었다. 손에 휴대 전화가 들려있는 걸 봐선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해 보였다. 그제서야 기드온은 주머니를 더듬어 보았고 휴대 전화가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도 병원 주차장에서 누군가와 부딪혔을 때 안경과 함께 어딘가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기드온…….” “아르노.” “사람들이…….” “가야 돼.” “네?” “어디로든 가야 해. 여기 있으면 안 돼. 여긴 위험해.” “어디로요?” “어디로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아르노의 안경을 빼앗아 바닥으로 던졌다.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아르노가 헉, 숨을 들이켰다.
4.
라디오에선 도시를 휩쓴 이 기이한 현상-누군가는 절망이라고 부르고 누군가는 생화학 테러라고 부르며 또 누군가는 종말과 심판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대규모 집단 자살’이라는 말로 갈무리했다. 아직도 생존 본능이라는 사치품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은 미약한 신호를 서로와 주고받으며 이 현상에 대한 답을 찾으려 애썼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귀결됐다. 추측들만이 전파를 타고 오갈 뿐이었다. 저 밖에 무언가 있어요. 그게 우리를 공격한 거예요. 그걸 보면 죽게 돼요. 저는 그걸 본 사람의 눈을 봤어요. 동공과 홍채가 전부 확장되고 실핏줄이 터지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어요. 잘 지워지지 않는 지우개를 써서 엉망으로 지운 그림처럼. 그걸 보고 누군가는 슬퍼했고 누군가는 무서워했고 누군가는…….
무엇을 느끼든 죽었어요. 문장을 완성하지 않아도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 있는 법이다. 이 ‘현상’은 너무 거대했던 탓에 문제가 될 수조차 없었다. 문제란 모름지기 언젠가 기필코 따라올 답안과 해설을 동반하는 법인데, 진단조차 할 수 없는 병을 어떻게 알아내고 고친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이제 그 문제를 똑바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날 두 사람은 집을 떠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결과적으로 도망치는 데에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그 적의에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형체가 있었으므로, 이따금 단단히 닫힌 창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나 노성들-“당신들도 봐야 해, 봐야 한다고!”-을 외면할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꼴이 되는 것만은 아직 피할 수 있었다. 세상은 그때부터 열 배쯤 더 흐렸지만 피부에 와 닿는 감각들은 점차 더 선명해져 갔다. 냉장고 안의 음식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라디오 전파는 날로 더 약해지고 있으며, 저 밖에서 사람들이 죽어서 썩어가고 있는데 이제는 누구도 코드 블루를 외칠 만큼 타인의 심장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을 살필 수 없다는 사실 같은 것들이.
그러는 동안 아르노는 가끔 벽에 부딪히고 기드온은 종종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일어나 아픔을 두려워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런 상황에는 그런 것들이 안도가 됐다.
한동안 사람들은 집에서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속삭였고, 각자 집에 챙겨둔 음식이 떨어질 때쯤이 되어서는 어디로든 가야 한다고 웅성거렸다. 분명 어딘가엔 정부가 마련한 안전지대 같은 게 있을 거라는, 희망적이라면 희망적이고 바보 같다면 바보 같을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 그런데 그런 걸 지킬 사람들도 전부 저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라디오를 껐을 때 아르노가 중얼거렸다. 습관적인 비관이었다. “최대한 여기에서 버티면서 상황을 살펴보는 게…….” 현실적인 낙관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르고…….
얼마간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기드온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나가 보자.”
바깥에서 어물거리면서 아침 해가 뜨던 때였다.
“헤매지 않고서는 찾을 수도 없으니까.”
정확히 뭘? 아르노가 그렇게 되묻지 않은 것이 그에겐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전부 펼치면 흩어질 모래알 같았다. 영영 펼치지 않고 그 안에 가둬만 둔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바다도 하늘도 심해도 우주도 될 수 있는 푸른색. 요동치는 코드 블루.
5.
행선지는 계속 바뀌었다. 빈집이었고 헤집어진 마트였고 숲이었고 강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작동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안경 없이는 둘 다 지도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었으므로 이동보다는 방랑이라는 말이 더 맞았다. 어디로든 악의가 없는 곳. 잡은 손이 조금이라도 느슨해질라치면 기드온이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어디라도 슬픔이나 공포가 없는 곳으로.
도시의 경계를 얼추 넘었다고 생각되던 때에 아르노가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그리고 긴 침묵이 있었다. 눈을 제아무리 가늘게 떠도 하늘에 뜬 구름의 형태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면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우리는. 제대로 작동하는 비행기나 배 없이는 스페인으로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스페인인들 안전하리라는 보장도 없고. 하지만 목적지 하나 없이 표류하는 것은 결국 도로 위에 죽어 널브러진 사람들의 신세가 우리의 미래가 되리라고 선포하는 것과도 비슷한 일이었다. 스코틀랜드로 갈까. 아니면 웨일스로. 게다가 영국은 섬이니까……
“바다로 갈까?”
방향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될 것이므로 바다는 개중에서도 가장 쉬운 목적지였다. 아르노가 되묻기 전에 기드온이 재빠르게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바다로 가자.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든.
6.
출출하지 않아?
괜찮아요.
정말? 지난번에 마트에서 꽤 챙겼으니까 조금 먹어도 돼.
아니에요, 다음에 또 어디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고…….
그러면 나중에 배고파지면.
네, 나중에 배고파지면.
조금 가까이 와 볼래?
왜 그러세요?
잘 안 보여서, 아쉬워서…….
이 편이 안전하다고 하셨잫아요.
응, 그래도.
…….
울지 마.
안 울었어요…….
…….
보고 싶어요…….
나도.
도착하면…….
응, 도착하면.
그다음엔 어디로 가요?
어디로든.
배 같은 게 있을까요…….
<쇼생크 탈출> 기억해?
네, 같이 봤잖아요…….
마지막에 보면 허름한 배를 손보고 있잖아…….
기억 나요.
바닷가엔 언제나 그렇게 묶인 배가 한 척은 있어.
왜요?
수평선을 보면 사람들은 떠나고 싶어지거든.
타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가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그치만…… 앗…… 비겁해요.
싫어?
아니요…….
7.
영국과 바르셀로나의 해변. 수색도 햇빛도 모래 입자도 모두 달랐지만 떠올리면 같은 것이 하나 있었다. 잡은 손끝에 있는 사람.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닿아 있는, 밝은 청록색과 정돈된 포말처럼 희게 쏟아지는 실루엣. 그걸 생각하면 아스팔트 위에 희고 노란 페인트 대신 보이는 붉은 자국들과 발치에 채이는 뭉그러진 무언가의 덩어리들, 어디에서나 코를 마비시키는 지독한 시취 따위는 전부 중요치 않은 것이 되었다. 닥쳐온 재해가 해결할 수 없는 현상이 되어 곁을 떠나지 않아도, 더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아도, 이제는 누구도 다른 누구를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없어도, 원인 모를 악의가 자멸의 형태로 그가 알고 모르는 모든 사람을 집어삼켜도, 기드온은 여전히 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오래전 선서했던 것처럼, 그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달리 보면 그것보다도 훨씬 더 완전한 방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지평선을 보고서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떠나고 싶어.
너랑 같이 아주 멀리.
원하는 곳에 닿았다면 그보다 더 너머로까지.
보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소음이 없는 곳으로까지.
그건 내가 너를 구하고 네가 나를 구한다는 뜻이지.
그건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뜻이지, 이 재난에서……
8.
그건 내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도, 너와 함께 있으면 그 푸른색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는 말이지. 이국의 바다도 청명한 하늘도 연안의 호수도 놀랍도록 멀리 나는 나비도 될 수 있는 새하얀 청록…….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희게 칠한 코드 블루.
9.
“저기 보여요.”
“응?”
“수평선 같은데…….”
그리고 아르노가 손을 들어 가리킨 자리에 그것이 있었다. 보이되 보이지 않는 악의. 너머의 풍경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물결 속에서 뭘 본 거지. 오래된 기억이나 덮어둔 죄의식, 피해오던 상처 같은 것들?
“기드온?”
눈을 깜빡이자 바람이 불어 두 사람을 넘어트렸다. 아르노의 당황한 목소리가 새된 소리로 쉭쉭대는 그것의 비명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아르노!” 기드온이 다급하게 외치고 아르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언제나 안개 낀 강가 같은 시야에 어렴풋한 형체가 다시 비쳤다. 아르노가, 아니 그것이, 아니 그가 알고 있는 모든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였다. 여기로 와. 날 봐. 똑바로 봐. 나를 보려고 해. 나를 보고 싶잖아. 그들이 나로부터 뭘 봤는지 알고 싶잖아.
10.
다시 감각을 되찾았을 땐 덜덜 떠는 두 팔이 그를 단단히 안고 있었다. 겁에질린 목소리로 아르노가 중얼거렸다. 기드온, 기드온…… 보지 마세요. 여기 있어요. 저랑 있어요…… 같이 있어요.
그런 말들이 한참이나 이어지고 나서야 그가 팔을 들어 아르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날개뼈를 조금 넘던 길이의 머리가 어느새 허리에 훌쩍 닿아 있었고 옷 아래로 마른 뼈가 느껴졌다. 이제는 고장 나 버린 날짜와 요일이라는 감각 대신 그런 것들이 지나간 시간을 헤아리게 해 주었다. 풍경은 선명하고 선의는 명징하며 정원에는 햇살이 비치는 시간들이 망상이 아닌 실재였음을 증명해 주었다. 지금도 그 시간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를 방랑자나 길 위의 객이 아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안전히 도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
응, 여기 있어.
어떤 한 인간이 고약한 악취로 가득한 거리에서도 막 세탁한 커튼과 방금 내린 커피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그는 마침내 정신이 나간 걸까, 아니면 집에 도착한 걸까?
무서워하지 마. 나 여기 있어.
그리고 그들이 지금 쓰러져 앉아 있는 이 길은 언젠가 새것이었다. 모래사장과 방파제로 이어지는 길을 내고 시멘트가 굳는 동안 인부들이 바로 이 자리에 앉아 있었을 것이었다. 당장의 요깃거리와 집에 돌아가 할 일을 떠올리며 일상의 무료를 견뎠을 것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 피와 공포와 죽음이 있었다. 수많은 죽음이.
그러나 이 길에 지금 그들이 있었다. 심해와 연안, 우주도 나비도 될 수 있는 두 사람. 조금도 흐리지 않은 정신으로, 결코 뿌옇지 않은 눈으로. 지금은 그것이 중요했다. 그것만이 훨씬 더 중요했다.
11.
그리고 나도 보여.
뭐, 뭐가요?
수평선. 아르노, 내 손 잡아 봐.
네…….
하나, 둘, 셋 하면 같이 일어나는 거야.
네…….
그리고 수평선을 보면서 앞으로 가서, 모래사장 앞에서는 신발을 벗은 다음에…….
예전처럼요?
응, 예전처럼.
다음에요?
배가 보일 때까지 걸어가야지.
바닷가엔 언제나 그런 배가 한 척은 있으니까요?
응, 언제나 그런 배가 한 척은 있으니까.
12.
하나, 둘, 셋.
13.
모래사장은 길었다. 영국의 해안치곤 모래알이 꽤 고르고 입자가 고운 편이라 사람들이 으레 피서를 오는 곳인 듯 싶었다. 표지판이 보였는데 글씨를 읽을 수는 없어서 이름은 영영 미지로 남았지만 괜찮았다. 이유는 몰라도 모래가 점점 더 축축해질수록 주변은 점점 더 고요해졌다. 세상에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듯 예사롭게 밀려 들어오는 파도 소리와 불규칙한 발소리만이 가득했다…….

그때였다.
그림자가 스치는가 싶더니 새가 울었다…… 깃털이 푸르고 꼬리깃이 희었다. 어렴풋 보이는 까만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서 도리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려진 것 하나 없이 세상의 전부를. 바닷가엔 칙칙한 잿빛 새들만 살지 않던가, 그런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퍼덕이는 실루엣 너머로 배가 보였다. 너무 크지도 하찮게 작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떠나면 어디로 갈 수 있지.
저걸 타고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지…….
기드온이 아르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것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모든 말들에 의미가 사라졌다. 지금 뱉는 어떤 말에도 별 효용은 없을 텐데, 기드온은 이유를 찾고 싶어서 그 안에 어떤 마음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 애정의 존재를 증명했다. 형체를 내보일 필요도, 기적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다. 드문드문 새의 울음소리가 말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아르노,”
기드온이 말했다. 푸르고 노랗고, 또 희고 청록색을 띄는 빛이 눈앞에서 아물거렸다. 분명히 아름답겠지만 이제는 보아선 안 될 것들. 그러나 보이는 것에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악의는 촘촘한 눈의 형태를 했고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나를 구하고 내가 너를 구했으니까. 그건 우리가 한시도 실패하지 않고 함께 했다는 뜻이니까.
“이제 어디로 갈까?”

14.
아, 테스트, 테스트. 이 말이 들리세요? 요새는 라디오 전파도 영……. 들린다면 이제부터 불러주는 좌표로 와 주세요. 여긴 안전해요. 해안에서 배를 타고 조금 나오면 돼요. 오는 길에 암초가 있으니 조심하세요. 도착하면 분명히 안전해져요. 여기엔 그것이 없어요. 우리는 살아났어요.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갈 거예요. 한 사람이라도 더 와 준다면 기쁠 거예요. 부디 여기로 와 주세요. 여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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