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
- Forest

- 2023년 9월 5일
- 2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Forest
<US>
by Jordan Peele
Romance, Thriller / Norway / 1953 / 300min / 18+
앞서 말해두지만, 이 글의 요지는 단 하나다. 요즘 들어 아가타 그린힐이 제이콥 에버그린에게서 느끼는 거리감과 이 기묘한 위화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점. 마치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이 다 뒤바뀐 듯이 느껴졌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 기묘한 감각을 줄이기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해왔다는 걸 이 글을 읽는 독자가 알아주길 바란다.
아가타는 긴 녹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땋아 내려 묶으며 거울 너머의 자신을 응시했다. 중력을 거스를 수 없으니 땅을 향해 축 늘어지는 머리카락 위로, 창문에 달아둔 썬캐쳐의 빛이 일렁거리며 쏟아졌다. 빛이 닿은 곳마다 희고 가느다란 손이 흰색 리본을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함께 꼬아냈다. 계절은 다시금 추운 겨울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창밖으로는 아직도 햇빛이 따스하게 비추었다. 그 햇빛은 마치 겨울이란 영원하지 않으며, 날이 얼마나 추워지든 나를 지켜보고 있겠다고 속삭이는 착각이 들었다.
그래, 괜찮겠지.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리는 건 아마 오늘 함께하는 여행지가 노르웨이 인근이기 때문일 것이다. 둘 사이의 비틀림이 시작된 위치가 노르웨이였지. 그러나 오늘의 여행은 제이콥 에버그린만 함께하는 것도 아니었다. 둘도 없이 소중한 의남매, 체자레 야베트도 함께했고. 객관적으로는 직장 상사이지만 실상으로는 그보다 더 돈독한, 가족처럼 의존할 수 있는 하이럼 워커도 함께했으니까. 네 명이서 함께 하는 여행은 처음처럼 느껴졌다. 실질적으로 처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네 명이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된 그 드넓은 공간 위에서의 첫만남도 여행의 일종이었으니.
“아가타. 준비 다 했니?”
“네, 어머니. 나갈게요.”
몸을 일으키자 의자가 밀려나며 드르륵,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땅을 밟는 구두 굽의 또각거리는 선명한 소음을 마지막으로, 넓은 방 안에는 그 무엇의 소리도 남지 않게 되었다. 아마 당분간은 고요할 것이라고 방의 주인도 생각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오래 침묵이 이어지게 될 예정이란 걸 이때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찾아가는 노르웨이 인근의 여행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위화감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소리다…….
별장에 도착한 아가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방 창문을 열어두는 거였다. 별장 관리인이 주기적으로 청소하고, 관리하고는 있다 해도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사는 게 아닌 이상 사라지지 않는 그 꿉꿉함을 없애고 싶었다. 여행 일정은 생각보다 길었고 아가타가 이 방을 계속 사용한다면 이 사람 내음이 조금도 남지 않은 별장에도 좋은 기척들이 많이 스며들겠지. 열어둔 창문으로 겨울의 차가운 바람이 몰려온다. 순간적으로 들이닥친 바람에 아가타 그린힐이 눈을 질끈 감자 새하얀 속눈썹을 스치고 짙은 녹색 머리카락을 한 번 들썩였다. 단단하게 땋아내린 머리카락은 쉽게 풀리지 않았으나 옷자락은 꽤 오래 팔락거렸다. 아가타는 천천히 창문에서 멀어지며 겨울바람으로부터 거리감을 유지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올해 노르웨이의 겨울은 평소보다 더 춥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마 그 이유겠지.
리아─ 언제쯤 창문을 닫아야 좋을지 고민하던 찰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나갔다 와서 닫는 게 좋겠어. 아가타는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각자 짐 정리를 마친 일행들이 복도에 서있었다. 저도 정리 다 했어요, 식사 먼저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이 주변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다 함께 들린 레스토랑의 음식은 맛있었다. 부드럽게 썰린 순록 스테이크와 아스파라거스를 입안에 밀어 넣은 아가타는 느리게 음식을 씹으며 눈웃음을 지었다. 각자 본인의 삶에 열중하는 이들은 그동안 어떤 시간들을 보냈으며 어떤 순간들이 있었는지 떠들고 들려주었다. 아가타는 그에 환하게 화답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제 부모님의 과보호가 얼마나 부드럽게 변화했으며 그들이 자신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지 따위의 재잘거림이 이어졌다.
식사가 얼추 마무리되고 네 사람은 잠시 각자 할 일을 위해 찢어졌다. 아가타는 우연찮게 경로가 같은 체자레와 함께하게 되었다. 체자레는 퍽 다정한 손길로 아가타가 가는 길을 살펴주며 그쪽은 미끄러울 것 같다, 조심해라 등의 걱정을 아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치 친남매처럼─사실, 친남매들은 이렇게 사이가 좋지 않다. 아가타 그린힐은 외동딸이라 잘 모르는 것이지만 보통의 친남매들은 좀 더 원수 같은 상황을 자주 겪곤 한다.─ 눈이 두텁게 쌓인 곳에선 손을 잡고 걷거나 하며 웃었다.
“리아, 요즘 잭과는 어때?”
“응?”
“제이콥 말이야.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작년 노르웨이 여행에서 뭔가 나쁜 일이 있었던 거 아니야? 네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라, 묻는 걸 망설였는데…….”
“아아.”
아가타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 체자레에게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나을까? 오빠, 사실은 요즘 제이콥과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이 친절한 체자레 야베트라는 인물은 자신이 어떤 지점에서 그런 심리를 가지게 되는지 듣고 조언해 줄 것 같았다. 너무 상세하게 말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닐까? 체자레는 좋은 사람이고, 상냥한 오빠이며, 친절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긴장감을 갖게 되는 건 아가타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대외적으로 크게 드러내진 않았으나 뼛속까지 스며든 피해 망상에 대한 이야기다. 아가타가 한참 말하길 망설이며 입을 달싹이자, 체자레는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말하기 곤란하면 억지로 얘기하지 않아도 돼.”
그 친절함에 아가타는 눈물까지 나올 뻔했다. 아가타는 감성적이고 스위치를 누르듯이 변화의 길이 다양한 영혼이라 결국 조금은 털어놓기로 결심한다.
“……아니야. 미안해, 오빠. 신경 쓰이던 부분으로 얘기가 나오니까 조금 긴장했나 봐.”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아가타는 깊게 심호흡했다. 사실은, 요즘 제이콥이랑 거리가 벌어진 것 같아서 걱정이야.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목소리에 체자레는 음,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며 물어왔다. 아가타는 신중하게 대답을 고민했다. 자신이 제이콥 에버그린에게서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이며, 어떤 지점에서─ 그리고 어떤 행동에서 그런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을까.
“그냥.”
“전부 내가 알던 모습과는 달라진 기분이야. 내가 기억하고, 내가 예상할 수 있고, 내가 짐작할 수 있는…… 제이콥 에버그린과는 많이 달라진 느낌.”
“물론, 나도 알아. 사람은 원래 계속해서 변하는 거겠지. 어쩌면 정체되어 있는 건 나일지도 몰라. 이걸…… 제이콥과 직접 말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싶어서. 혼자 가지고 있었더니 응어리가 진 걸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언젠가는 이 거리감이 좁혀질 거라고 믿어.”
“나는 지금 단지, 방황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거든.”
별장에 다시 돌아온 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열어두고 나간 창문 덕분에 방 안은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꿉꿉함을 지우려고 환기 차 열어둔 것이었는데 예상보다 외출이 길어지니 오히려 강한 한기와 추위를 선사했다. 방 안으로 들어선 아가타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기가 무섭게 천천히 한두 송이씩 흩날리던 눈꽃이 다발처럼 쏟아졌다.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쏟아지는 눈보라를 응시하면서 어쩐지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왜일까? 눈보라 사이로 보여선 안될 것이 보일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건 분명 착각일 터다. 별장의 정문을 제외한 주변에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어둡고 눅눅한 숲 안에서 살아갈 사람 또한 없을테니 금방이라도 누군가 들이닥칠 불안감 따위, 느낄 필요도 없고 단순히 착각에 지나지 않을 텐데…….
아가타는 문득, 현관문의 잠금을 다시 한번 체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실내용 슬리퍼가 바닥에 깔린 러그와 스치며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순간은 찰나였다. 직후엔 대리석 바닥을 밟으며 작고, 급한 발걸음 소리가 이어졌다. 드넓은 3층짜리 별장에서 아가타의 방은 2층에 있었다. 아가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방도 다 2층에 있었다. 요즘 들어 눈치 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아가타의 문제 때문에 별장 관리인은 여행 기간 동안 방문하지 말라고 해두었으니 이 별장에 있는 사람은 지금 4명뿐이다. 4명. 그보다 더 많거나 적어도 안되는…….
이윽고 1층 로비에 도착한 아가타는 무거운 현관문 앞에 섰다. 굳게 잠긴 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문이 잘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도 아가타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했다. 정문까지만 다시 가볼까? 작지 않은 별장 앞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면 다시금 정문이 나타날 터다. 귀족들의 사치가 으레 그렇듯이 검은색 쇠창살이 고풍스러운 문양을 그려내며 날카롭게 들어설 이들을 막고 있는 모양새로 말이다. 아가타는 분명 정문까지 확인하고 나면 이 불안감이 가실 거라며 자신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던지고 행동으로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면 눈보라가 시야를 절반쯤 가렸다. 시간은 많이 늦었고 어린아이들은 진작 잠에 들었을 시간이었다. 이곳엔 그 어떤 어린아이들도 없었으므로 아마 각자 방에서 쉬고 있거나 내일의 계획을 생각하고 있겠지. 아가타는 거친 눈보라가 얼굴에 와닿는 걸 막기 위해 한 손을 들었다. 그 눈보라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던 순간이었다.
“아가타!”
손목이 거칠게 붙잡혔다. 몸이 바로 뒤쪽으로 끌어당겨지며 누군가의 단단한 품 안으로 들어섰다. 불안감이 들어찬 숨소리와 뒤늦게 바람 소리 사이에서 들렸던, 자신의 이름을 호령한 이의 목소리를 상기하며 아가타는 고개를 들었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거기 있었다. 그는 아가타의 몸을 끌어안고 급하게 물었다. “어딜 가려는 겁니까? 이 시간에…….” 아무리 거리감이 느껴졌다고 해도, 아가타가 이 얼굴을 모를 순 없었다. 겁에 질린듯한, 하지만 겁이라고 해야 할지. 어딘가 결이 달랐다. 마치 과거의 일을 데자뷔처럼 똑같이 느껴 불안감에 시달리는 얼굴이었다. 아가타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놀라게 했나요? 미안해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어요…….” 대답 직후 아가타는 느리게 제이콥의 손을 붙잡아 올렸다.
그건 두 사람이 언어로 대화할 수 없을 시기에 나누던 작은 제스처였다. 수화에 가까웠지만 수화는 아니다. 아가타는 손으로 하는 언어를 몰랐기에 그저 서로의 감정과 마음을 헤아리기에 있어 가장 간편한 행동을 손으로 내보였을 뿐. 그러니 그때의 기억을 상기시키며 아가타는 제이콥의 손을 느리게 펼치게 만들고 그 위로 자신의 펼친 손을 올렸다. 두 사람은 노르웨이의 여행이 끝난 직후 목소리로 대화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 정확하게 이유를 짚어낼 순 없었지만, 아마 여행길에서 겪은 일들이 꽤 큰 이유가 되겠지. 목소리, 글자, 언어, 그것들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두 사람은 단지 느리게 손을 마주 잡거나 맞닿은 채 손가락을 움직여 서로가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어쩐지…… 조금 불안했거든요. 꼭, 불청객이 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안해요. 그냥 좀…… 요즘 예민해졌더니 이런 쓸데없는 걱정도 하게 되나 봐요.”
“……아닙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제이콥은 느린 한숨과 함께 아가타를 응시하곤,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이 나가보죠. 직접 확인하면 불안이 조금 줄어들 것 아닙니까. 대신, 그대로는 안됩니다. 춥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아가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외출을 끝마치고 돌아온 지도 꽤 되었는데 제이콥은 아직 차려입은 옷이었다. 할 일이 있었나, 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어깨에 느껴지는 옷의 무게감에 아가타는 슬쩍 웃기만 했다. 고마워요, 나직한 목소리로 대꾸한다. 닫혔던 현관문을 열고 두 사람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향해 걸어가면서 바짝 붙어있는 몸은 따뜻했다. 겨울이라곤 했으나 별장 안은 따스했고 서로의 온도에 맞춰 몸이 데워졌다.
눈보라를 헤치고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불안감이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단지 옆에 함께하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만큼 진정이 될 수 있다니, 감정이란 신묘했고 때로는 엄청난 용기와 힘을 불러왔다. 멀쩡한 정문을 확인하고 나면 그와 함께 별장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별장으로 돌아간 다음엔 둘이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어. 그간 느낀 거리감을 좁히려고 노력해 보자. 언제나 나만 받을 순 없어. 그간 느낀 심정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서로에 대해 한층 더 다가서면 분명 우리는 더 견고하면서도 신뢰를 쌓아낸 관계가 될 수 있을 거야……. 따스한 온실 속에서 몸을 녹이듯이 마음이 녹아갔다. 그러나 곧 그 녹아내리던 얼음이 다시금 들썩인다. 시야에는 새카만 인영이 들어왔다. 그건 두 사람이었다. 들이삼킨 숨을 끝으로 더 이상 호흡이 이어지지 않았다. 불현듯 척추를 타고 온몸의 신경들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흩날리는 눈꽃 사이로 헛것을 본 거라고 치부하고 싶었으나 절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흩어지는 흰색 결정이 스친 직후에도 그들은 그 자리에 멀쩡히 서있었다.
“……? 저기, 사람이.”
제이콥 에버그린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그의 손을 덥석 붙잡고 별장 안으로 뛰었다. 제대로 얼굴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녹아가던 마음은 녹은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얼어붙어 직전보다 더 큰 공포, 불안감을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불청객이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날 숲을 끼고 있는 귀족의 별장 앞에 찾아올 이들이 누가 있겠는가? 그들은 구걸하러 온 이들도 아닌 기색이었다. 걸어온 발자국이 남은 눈길 위를 거칠게 뛰어 아가타는 제이콥과 함께 별장 안으로 다시 들어섰다. 놀란 제이콥이 아가타에게 괜찮냐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아가타는 히스테릭하게 소리치는 것밖엔 할 수 없었다.
“제이콥! 도망쳐야 해요. 여기서 나가야 해요! 저 사람들이 여기 들어오면 안 돼요! 너무 무서워요. 오빠랑 하이럼을 깨울까요? 어떡하죠? 나는, 난.”
“아가타!”
절규 어린 목소리에 제이콥이 그녀의 어깨를 힘주어 붙잡았다. 아프지 않지만 그가 이곳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강도였다. 제이콥 또한 불청객들의 존재가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또한 지나온 시간과 그 자신이 가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눈보라 속 태연하게 서있는 모습이 꼭……. “일단, 일단 진정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제이콥 또한 평소보다는 목소리가 흔들렸다.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아가타는 알 수 있었다. 아가타는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그 사태에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중얼거렸다. “그 ……들은 아니겠지.” 아가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침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이콥, 방금 뭐라고 말했…….”
순간, 어딘가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콥 에버그린이 눈에 띄게 표정을 굳히고 소리가 들린 쪽을 한 번 바라보더니, 아가타 그린힐을 바라봤다. 그는 아가타의 손을 잡고 2층으로 가는 계단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소란을 느낀 것인지 체자레와 하이럼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을 향해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거칠게 묻는 하이럼의 목소리에 제이콥이 대답하기도 직전에 1층에서 급하게 뛰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곳에 있던 네 사람 전부 그 발소리를 들었다. 침입자가 있는 겁니까? 체자레 야베트의 직업병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이런 날에.” 제이콥이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헤집는 모습에 아가타는 초조한 낯으로 바닥을 내려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자레가 흩어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란 말을 꺼냈다.
“경찰에 전화를 해보죠. 리아, 별장 전화기는 어디 있어?”
“그, 그게…….”
아가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아무리 그린힐 명의의 별장이라고 해도 아가타는 이 별장에 처음 왔다. 아가타는 어려서부터 극단적인 과보호에 시달려 부모의 손바닥 안에서만, 부모가 허락한 장소까지만 갈 수 있었다. 아무리 그린힐 부부 소유의 별장이었다고 한들…… 실제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이곳에 온 적이 있을 리가.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린 체자레가 조금 눈매를 누그러트리며 아가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야. 괜찮아, 리아. 같이 찾아보자.”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화기를 들고 있던 체자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네 사람은 별장 관리인이 가끔 별장에서 밤을 지세울 때 쓰는 관리실 안에서 멀쩡한 전화기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바짝 긴장한 정신을 조금 가다듬고 쉴 차원에서, 체자레가 경찰서에 연락을 넣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의 안색이 나빠지는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낯선 이의 목소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크기로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제이콥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는지 딱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응시했다. 아가타는 그런 제이콥의 옆얼굴을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체자레가 얼추 전화를 갈무리한 뒤 수화기를 내려두었다.
“믿기 어렵지만…… 지금 이런 일이 이곳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닌 모양이군요.”
“지금 사방에서, 온갖 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듯합니다. 붉은 옷을 입고, 가위를 들고 있다고 하는데…….”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모른다고 하네요. 아마 테러 단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많은 곳에서 일어나다 보니 규모가 커서 대처가 늦어지는 모양이에요. 경찰이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하는군요.”
아가타는 그 말에 창백한 얼굴로 두 손을 꾹 모아 쥐었다. 규모가 그렇게 크다면, 이 별장에는 몇 명의 테러범이 찾아올까? 잘 견딜 수 있을까? 무사할 수 있겠지? 그들 중 일부는 이미 저택 안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되니 함부로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네 사람이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리를 옮기죠.” 그 목소리에 하이럼과 체자레, 아가타가 전부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 여기 있는 건 위험합니다. 몇 명이 들이닥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적어도 관리실은 벗어나서, 저택의 2층과 3층에서 머물도록 하죠.”
“무슨 일이 있을 때 1층으로 도망치려면 1층에 있는 편이 낫지 않겠어?”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대비할지 모르니까.”
그 말을 들은 아가타는 어쩐지 제이콥이 유난히 그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상대를 말하는 어조로 들렸다. 분명 기분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지금의 최선이었다. 지금의 아가타 그린힐에게는, 그러했다.
네 사람은 2층, 체자레의 방에서 몸을 살피기로 했다. 3층으로 가자니 위급 시에 뛰어내려갈 계단이 너무 길어졌고 각자의 방에 놓인 짐들 중 쓸만한 것을 챙겨 올라가는 과정도 복잡했다. 그러니 2층. 각자의 방에서 위험한 상황이 왔을 때 쓸만한 것을 챙겨와 모였다. 사실…… 쓸만한 것이라고 해도 아가타에게는 이렇다 할 물건이 없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어두운 낯을 하고 있던 아가타는 문득 목이 타는 감각을 느꼈다.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것도 눈치가 보였다. 한참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제이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가타, 어딘가 불편합니까?”
“……아, 저. 그게.”
머뭇거리던 아가타는 작게 중얼거렸다. “목이 말라서요…….” 그 말에 제이콥이 잠시 침음했다. 네 사람이 모이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마땅히 갈증을 해소할 것이 부족했다. 수분은 중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갈증을 해소하지 못하면 아가타가 앞으로 닥쳐올 일을 견디지 못할지도 모르니까. 체자레 또한 그것을 짐작했는지 제이콥과 눈을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대꾸했다.
“그럼 저랑 같이 1층에 내려가서 물을 좀 챙겨오죠. 어차피, 수분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니까요. 충분히 넉넉하게 챙겨오면 좀 괜찮을 겁니다.”
“그래, 리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다녀와.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다 같은 곳에 있는 셈이니까, 분명 걱정하는 상황은 생기지 않을 거야.”
“그래요. 다녀오시죠. 어차피 제이콥과 함께 가면 괜찮을 겁니다. 쟤는 오러잖아요.”
어처구니없다는 제이콥의 표정에 하이럼이 어깨를 으쓱인다. 아가타는 그 모습을 보고 조금 긴장감이 풀린 듯 겨우 옅은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다녀올까요.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아가타와 제이콥은 손을 마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어두운 복도를 함께 걸었다. 발소리도 최대한 줄여야만 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창문이 깨진 것인지, 또는 지금의 상황 때문인지 계단을 따라 내려간 1층은 유난히 더 춥게 느껴졌다. 그대로 깊게 숨을 내쉬면 허공으로 하얀 김이 사라지리라 생각했으나, 숨소리에도 신중을 가했기에 아가타는 부러 시험해 보지 않았다. 제이콥 에버그린은 한 팔로 아가타 그린힐의 어깨를 감싸며 걸었다. 아가타는 어둠 속에서 느리게 제이콥을 올려보았다. 두 사람은 따로 대화를 하진 않았으나 서로에 대한 희미한 신뢰를 발판 삼아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에 도착하고 난 다음에서야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 저기 있군요.” “고마워요.”
물을 뜨겁게 데울 시간은 없었다. 차라리 체자레의 방으로 돌아가 벽난로 앞에 물통을 놔두는 쪽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하여 아가타는 급한 대로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차가운 물을 삼켰다. 목울대를 타고 내려가는 시린 감각에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지금은 차분함이 필요한 때였다. 그 옆에서 제이콥에 넉넉한 크기의 물병 안으로 물을 쏟아 넣은 뒤, 두 사람은 다시 손을 붙잡았다. 오는 내내 함께했던 덕분인지 손의 온도는 서로의 체온과 비슷한, 미적지근한 온도였다.
침입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간 게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로 별장 안은 고요했다. 다시금 1층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2층으로 향하기 위해 계단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계단을 오르기 위해 고개를 들고 첫 번째 칸을 밟는 순간 저 위에서 어떤 그림자가 보였다. 아가타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고 순간 흠칫 놀랐으나, 곧 익숙한 그림자임을 깨달았다. “오빠?” 체자레 야베트였다. 어쩌면 물을 가지고 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생각해서 마중 나온 걸지도 모른다. 그 뒤로 서있는 사람은 아마 하이럼 워커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던 찰나 제이콥이 한 팔을 아가타의 앞으로 내밀며 더 올라가는 것을 제지하였다. “제이콥.” 어리둥절하게 뜨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 제이콥이 작게 읊조렸다. “아가타, 잘 보세요.”
제이콥의 말에 순순히 아가타는 고개를 돌리고 그림자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어둠 속이지만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들어오는 민트색 머리카락, 부드럽게 뜨인 눈매와 흰색 눈동자 끝에 섞인 코발트 블루. 자신이 아는, 체자레 야베트가…….
붉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옷을 입은 체자레 야베트의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 봤다. 심지어 그 뒤에 서있는 하이럼 워커도 그런 옷을 입고 입고 있었다. 붉은 옷을 입고, 가위를 들고 있다고 하는데……. 문득 통화 직후 상황을 설명하던 체자레의 목소리가 귓가를 다시금 스친다. 그들은 천천히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체자레의 손에 무엇이 들려있는지 아주 잘 보였다. 그건, 가위였다. 금속으로 만들어지고 누런 금빛이 반짝이는. 아가타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때 제이콥은 지팡이를 꺼냈다. ─여기서 깨알같이 설명하자면 네 사람 중 제이콥 에버그린과 하이럼 워커는 마법사다. 체자레 야베트와 아가타 그린힐은 비마법사, 머글이고.─
그리고 아가타가 바라본 제이콥의 지팡이 끝에서 빛이 번쩍였다. 제이콥이 무언가 주문을 외운 것 같은데 뭐였는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워낙 충격이 컸고 무엇 하나 제대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번쩍인 빛이 그대로 붉은 옷을 입은 체자레와 하이럼을 향해 다가갔는데, 하이럼이 체자레보다 앞장서 나서면서 일순 그 빛이 튕겨나가듯 사라진 광경이었다. 말 그대로, 튕겨나간 빛이 허공에서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예상하건대 그건 아마 상대를 기절시키거나 하는 마법이었을거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모양새를 보라고……. 붉은 옷을 입은 하이럼 워커는 기이할 정도로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쭉 올린 모습이 평소의 그와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져 거북함까지 들었다. 그는 제이콥 에버그린처럼 지팡이를 꺼내거나 하진 않았으나, 마치 자신에게는 그와 같은 마법사의 기운이 있으며 그런 것은 아무 소용 없다는 듯이 계단을 절반만큼 내려오고 있었다.
“아, 아.” 경악과 두려움으로 입 밖으로 목소리가 끊어지던 순간이었다. 순간 별장 전체에 거대한 총성이 한 번 울려 퍼졌다. “악!” 아가타가 그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반면 제이콥은 고개를 더 높게 들어 2층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또 다른 체자레를 찾아냈다. 총에 맞은 붉은 옷의 체자레 야베트가 비틀거리자, 또 다른 하이럼 워커가 2층으로 쏜살같이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대로 체자레 야베트는 휘청거리면서 난간을 붙잡고 다시금 한 칸씩 내려왔다.
“리아, 잭! 도망가!”
“아아아아! 흑, 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아가타는 탄환이 꿰뚫고 지나가 바닥으로 피를 뚝뚝 떨어트리는 체자레를 바라보며 절규했다. 그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정신적 충격이 너무 컸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신을 가다듬기엔 방금 들은 총성이 너무 컸다. 비명을 내지르고 있을 무렵 제이콥 에버그린이 아가타 그린힐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가타, 달려요!” 잇새로 더한 절규와 비명이 울리기 전에, 그들은 그대로 1층 로비를 달려나갔다. 닥치는 대로 달려야만 했다. 이 별장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없었다. 닥쳐온 불안과 재난이 서로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신뢰조차도 발판 삼을 수 없게 된 채 달렸다…….
아가타와 제이콥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직 밤이었고, 주변은 어두웠다. 숲 안은 더더욱 어두웠으나 그만큼 남의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내린 판단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만 숲에서 조금 쉬었다 가자는 의견이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들키지 않고 잠들 곳을 찾기 위해 살면서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걸어야만 했다. 오래 걸었기 때문일까? 어쩐지 갈비뼈 즈음이 욱신거렸다. 아니, 단순히 이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와 참을 수 없는 심리적 요인으로 느끼는 환상통일지도 모른다. 문득 걸음을 멈춘 아가타는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겨울의 한기가 온몸을 휘감고 있는데도 단순히 상황 때문에 몸이 뜨거웠다. 느린 기침이 이어진다. 그 모습을 본 제이콥이 가까이 다가와 아가타를 안아주었다. 아가타의 몸은 얼음장 같았다. 본인 스스로는 홧홧한 열기를 느끼고 있었는데도, 제이콥이 끌어안은 몸은 그러했다.
“아가타, 괜찮습니까? 여기서 잠깐 쉴까요.”
“……네, 그렇게…… 해요. 쉬고 싶어요.”
그러죠, 짧은 대답 직후 두 사람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까이에 붙어 앉은 둘은 침묵을 유지했다. 아가타는 그 침묵이 유지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체자레와 하이럼이 각각 두 명. 그렇다면 아가타와 제이콥 또한 두 명일까. 마주치지 않았을 뿐, 제이콥도 두 명, 나도 두 명……. 그럼 그 둘은 지금 어디 있을까? 어쩌면 그 별장에 있을지도 모른다. 체자레와 하이럼의 분신이 그곳, 2층 계단에 서있었듯. 자신과 제이콥의 분신은 3층이나 1층 어딘가 구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숲까지 따라온 건 아닐까? 우리와 모습만 똑같은 걸까. 확실히 붉은 옷을 입은 하이럼 워커는 기이하게 웃고 있는 웃음이 어울리지 않았다. 일란성 쌍둥이라고 주장하는 편이 오히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질지도 몰라. 반대로 체자레 야베트의 분신은 어땠지? 그 분신은 시종일관 무표정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탄환이 몸을 스쳐서 비틀거리며 계단을 내려올 때에도 아무런 감흥 없는 무표정을 마주하고 피가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제이콥 에버그린의 분신도 활짝 웃고 있을지 모른다. 제이콥은 웃는 얼굴이라고 해봤자 옅은 웃음이나 어쩐지 능글맞은 웃음이라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활짝 웃는 얼굴은 거의 없어서……. 그럼 내 분신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제이콥이 입을 열었다.
“아가타.”
“네, 제이콥.”
“……괜찮을 겁니다. 분명. ……하필이면 노르웨이에 여행 온 참에 겪은 일이라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만. 저희는 언제나 잘해오지 않았습니까.”
“…….”
제이콥은 진심으로 아가타를 살펴주는 눈치였다. 아가타는 그 사실에 잠시 말을 잃고 그를 마주했다. 녹색 눈동자가 금색의 이질적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할 말을 골라냈다. “그럼요. 당연한 일이에요.” 그게 아가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그 외의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그날 이후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거든. 똑바로 눈을 마주해도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이유가 뭘까? 당신은 내가 아는 제이콥 에버그린이 맞나? 평생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이 말을 꺼내는 순간 모든게 틀어질 것처럼 느껴져 무서웠다. 그래서 말을 더 꺼내는 대신 아가타는 제이콥의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댔다. 피곤하다는 그 암묵적인 표시에 제이콥도 더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제이콥, 잠깐 자고 일어나요.”
“전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단 말이에요……. 어차피 너무 소란스러워도 조금 그렇고, 옆에 있을게요. 불침번 서듯이 번갈아가면서 자요. 네?”
제이콥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으로 아가타를 바라봤다. 아가타는 제이콥의 수면을 재촉하듯 가만히 기댄 채 기다렸다. 결국 제이콥이 느린 한숨과 함께, 그럴 거라면 차라리 같이 자자는 말을 꺼냈다. 그래요, 그럼. 나직한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숲의 바닥에 짙게 깔린 수풀 위로 겉옷을 이불처럼 깔고 나란히 누웠다. 겨울, 숲은 빼곡하게 차있는 나무들 덕에 덜 추운 편에 해당됐지만 그래도 살벌한 추위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안은 채 잠들기로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가타는 느리게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 차라리 TV의 전원을 끄고 켜듯이 잠들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까. 이 사람 옆에서 아주 오래 잠들고 일어나서, 아침에는 더 나은 세상을 확인하고……. 문득 갈비뼈가 시큰거리며 아팠다. 숨을 들이마시며 몸이 부풀려질 때마다 욱신거리며 심장을 조여왔다. 이런 통증은 익숙하지 않았다. 낯설기만 했다. 아가타 그린힐은 생각보다도 더 많고, 다른 사람들이라면 비명을 내지를 고통들을 견뎌왔지만 이건 느낌이 조금 달랐다. 이걸 뭐라고 하는 게 좋을지 고심하는 생각에는 또 다른 우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내가 이러고 있는 동안 체자레와 하이럼은 어떻게 됐을지, 두 사람은 멀쩡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슨 꿈을 꾸고 있고,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아가타는 곁에서 잠든 제이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원망했다. 왜 나와 벌어져 있는 거리를 좁히려고 해주지 않아? 사실, 이건 잘못된 원망이다.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 아가타 그린힐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망이 한 번 시작되니 담쟁이덩굴처럼 타고 올라왔다. 당신은 나에 대해서 얼만큼 알고 있어? 내가 잘못되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거야……?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좀 더 기쁘게 반응해 줄 거야? 당신이랑 있으면 어쩐지 내가 이상한 것처럼 느껴져.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옳게 된 관계야? 당신과 어떻게 지내야만 하는 거야? 일전에는 그래도 이렇지 않았잖아. 당신 옆에 있으면 나는 이상해져.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나는…….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된 아가타는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자신을 끌어안은 제이콥의 팔이 풀려 아래로 내려갔다. 그걸 지켜보던 끝에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바닥에 누운 제이콥을 내려보면서 아가타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기분을 느낄 리 없어. 이건 전부, 이건 전부…… 내 탓이 아니야. 내 탓이 아니라, 이건…….
아가타 그린힐은 달렸다. 자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숲은 광활하게도 넓었고 방향을 구분하기엔 별조차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빼곡하게 차있었으므로 아가타는 그저 자신의 무의식에만 의존한 채, 이곳이 동쪽이라고 간절히 믿으며 달려야만 했다. 별장의 2층에서 갈아 신은 신발이 둔탁하게 땅을 밟고 나아갔다. 한참 달리고 달리면 언젠가 끝이 나오겠지. 이 숲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닌 것만 같아서. 이 숲은 어둡고 두려웠다. 어둡고 위험천만한 숲에 갇혀 살고 싶지 않았다. 달리던 도중 몇 번 발을 헛디뎌 구르고 넘어졌지만 아가타는 그때마다 몸을 일으켜 다시 달렸다.
이건 전부 네 탓이야.
이건 전부…… 내 탓이나 잘못이 아니라, 네가 문제였던 거야…….
미친 듯이 달리던 끝에 수풀 사이로 빛이 들어오는 광경을 목도한 아가타는 그쪽을 향해 절뚝이면서 뛰었다. 1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잠든 이를 홀로 둔 채 도망쳐오는 길은 까마득했으나 결국 끝은 있었다. 빛이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윽고 그곳에 도달했을 때 아가타는 높은 절벽 앞에 서있었다. 헉, 하면서 크게 내쉬고 삼키는 자신의 호흡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은 숲의 끝이다. 절벽. 낭떠러지. 아무것도 없는…….
어쩐지 눈물이 쏟아졌다. 숲을 가로질러 달려오며 잔가지에 스쳐 붉어진 얼굴 위로 투명한 눈물이 후두둑 흘러내린다. 아가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절벽 앞에 서서 한참 오열하고 울었다. 이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이곳에 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었어. 차라리 집에 있을걸. 집에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지도 몰라……. 모든 생각의 회로가 누군가를 탓하거나 자신을 향해 비수를 꽂아낼 무렵 등 뒤에서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내려가고 등을 돌린다.
그곳에는 제이콥 에버그린이 서있었다. 아가타 그린힐은 엉망이 된 표정과 눈동자로 그를 마주했다. 기어코 나를 따라왔구나. 두고 떠나온 사람이 나를 다시……. 그러나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제법,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직전까지는 누구라도 탓하고 싶고 비수를 꽂아 불안한 심리의 근간이 되는 것들은 전부 내다 버리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니.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이곳에 밤은 없다. 아침이다. 새하얀 여명이 피어오른다. 아가타 그린힐이 천천히 제이콥 에버그린을 향해 걸어갔다.
“제이콥.” 아가타는 아주 오래전, 자신이 알고 있던 제이콥 에버그린을 마주했다. 음울한 그림자가 죽죽 눌러붙어 결코 헷갈릴 수 없는 그 인영. 얼굴 위로 두른 오래된 빛깔의 붕대. 두 손으로 들고 있는 가위. 감히 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부를 수 없는. “제이콥… 레이, 에버그린.” 그 손 아래로 이어지는 붉은 빛깔의 옷. 나를 보면서 언제나 항상 활짝 웃어주던. “보고 싶었어요…….”
나는 사실 아름다운 사랑과 감정, 연인이나 가족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수없이 찬란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그냥 그것들이 좋아 보여서 갖고 싶었다. 내가 가진 건 죄다 새카맣고 질척하고 끈적하고 더러운 것들뿐이라.
공평하지 않잖아, 그건. 나는 이렇게 새카맣게 사는데 너는 그렇게 밝고 환하게 산다는게 말이 안 되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욕심부리며 산 네 잘못이라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어.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 나를 손가락질할 수 없을 거야. 다들 불쌍하게 여겼을 거야. 다들 나보다 깨끗하게 살았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건 너무 서두르지 않는 거야. 나는 이날을 기다려왔어. 너무 오랫동안. 이제 너와 나의 관계를, ‘절단’하는 거야.
만약, 네가 없었으면, 나도 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을 거야…….
듣고 있어? A.
※ 빈칸에 올바른 알파벳을 채우시오.
아무래도 망했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망했다. ─비록 이 글은 조던 필 감독의 영화, ‘어스’를 원작으로 하나 해당 문장만큼 완벽하게 서론을 시작할 방법이 없어 소설 ‘마션’의 도입부를 오마주한다.
이야기는 약 한 달 전의 런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이콥 에버그린은 자주 찾는 카페에 앉아 누군가가 한 입만 먹고 내버려 둔 음식들을 열심히 먹어 치우는 중이었다. 당연하게도 에리스의 바로 앞에 놓인 리코타 치즈 샐러드와 구운 채소 모둠은 해당하지 않았다. 식기를 고작 여덟 번 들었던 그녀는 여유롭게도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무슨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달그락, 잔이 소서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슬슬 돌아가고 싶은데.”
“우리가 만난 지 30분도 안 됐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건 맞나?”
“그랬던가.”
네가 처먹기만 하는 걸 구경한 지도 벌써 30분이 지났단 말이군. 평소라면 농담 섞인 비난에 ‘네가 메뉴를 (이하생략)’하며 유구한 고정 멘트로 반박했겠으나 어쩐지 그날의 제이콥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꼭 켕기는 구석이 있는, 심문실에 갓 잡혀 온 어둠의 마법사처럼. 괜스레 찜찜해진 에리스가 다시 한번 입을 열려던 차, 이번에는 식기가 테이블 유리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입을 열 생각이 드신 모양이야.”
“프…즈…를 할까 해.”
“뭐?”
“그러니까, 프로포즈를 할까 해.”
“뭐?”
“프로포-,”
“아니. 제대로 들었어. 그런데 뭐? 프로포즈를… 누구한테?”
“누구긴 누구야. 아가-,”
“그것도 알면서 물어본 거니까 닥쳐.”
드디어 갈 데까지 가는구나. 양심 없는 새끼… 원색적인 비난에도 제이콥은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물잔을 들었다. 교제는 하고 있지만 그녀와 결혼하고 싶단 생각은 없다고 했다면 난 분명 독살당한 오러의 시체로 마법부에 인계됐을걸. 이 반응이면 업계 포상이나 다름없지… 폭탄을 던진 후에는 되레 이쪽이 여유로웠다. 에리스는 열이라도 받았는지 손을 뻗어 제이콥의 한쪽 뺨을 아프게 잡아당겼다. 아야야. 엄살이라 쳐도 한참은 건성인 반응이었다. 결국 에리스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손이 쑤셔 넣어지고, 무언가를 잡아 쥔 듯 보이자 그제야 ‘아가타에게 이런 방식으로 실연의 아픔을 알려줄 셈이야?’라는 말로 겨우 멈춰 세웠다. 두 손을 들어 보이는 것이 완벽한 항복 선언이었다. 에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어쩌다 그런 마음을 다 먹었어. 그 제이콥 에버그린이 말이야.”
“…에리스, 사실 요즘 들어 아가타와의 사이에서…”
외면하기 힘든 위태로움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아. 프로포즈를 결심한 사내가 서두를 열며 하는 말은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시작은 언젠가의 겨울. 두 사람의 노르웨이 여행에서 이어진다. 요약하자면 도중에 사고가 있어 며칠간 함께 지내지 못했는데, 이후 다시 만난 아가타에게서 기묘한 어색함이 느껴졌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가타가 내게서 기묘한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그야, 그때의 아가타는 절대 멀쩡하지 않았으니까.”
“알아. 그런데 뭐랄까, 좀 더 근본적인…”
제이콥으로서도 설명하기 힘든 무언가인지 이어지는 말없이 그저 자기 입술만 몇 번 괴롭혔다. 보다 못한 에리스가 물었다. 그래서 그게 프로포즈와 무슨 상관인데.
“일상으로 돌아온 후로는 한동안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인데. 근래 들어 다시 그녀가 종종 불안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특히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생긴 거 아니야? 가차 없는 에리스의 농담에 제이콥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동시에 에리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이 제법 썼던 모양이다. 곧장 이야기를 되돌리는 그녀를 보면 알만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확신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프로포즈를 생각해내셨다.”
“그래.”
“이런 종류의 상담은 나보다 체자레 야베트가 더 전문일 텐데.”
“첼은 너무 바른 사람이라 내 편을 들어주긴커녕 정석적인 답변만 내놓아서 상처받을 것 같아.”
“나는?”
“나랑 비슷하게 글러 먹은 인간이라 조금은 응원해주지 않을까 하여…”
“이 자식이 진짜.”
워, 워… 두 손으로 진정시키는, 열 받는 제스쳐를 취한 제이콥은 급히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에리스의 시선을 돌렸다. 방금은 농담이었고, 사실 이것 때문인데. 접시가 치워진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작은 책자였다. 맨 앞장에 적혀있는 글자 중 jewelry라는 단어가 그 정체를 쉬이 짐작게 했다. 그러니까 이건… 주얼리 전문샵의 팜플릿이었다.
그 후로는 제법 멀쩡한 시간이 흘렀다. 팜플릿 속 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이 프레임은 어디가 별로고, 이 프레임은 어디가 괜찮고… 따위의 걸즈 토크스러운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가타에게는 이런 쪽이 어울릴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에리스가 선택한 것은 다이아몬드의 주변으로 작은 에메랄드가 장식된 화려한 백금 반지였다. 역시 챈들러의 이름을 잠깐이나마 달았던 이의 안목다웠다. 제이콥 또한 썩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아가타를 닮았네. …음, 가격까지.
“차이면 말해.”
“위로라도 해주려고.”
“아니? 홀로 남은 아가타 내가 데리고 와야지.”
아주 차이라고 굿을 해라, 굿을… 어? 굿이 뭐지? 지금은 1950년대의 영국인데? 일단 Good~. 하여튼. 웬수보다는 가깝고 동창보다는 먼 사이의 두 사람은 그날 그렇게 해산했다.
제이콥이 다시 그 주얼리 전문샵을 찾은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또 오셨네요. 휘황찬란한 보석들이 진열된 가게와 어울리지 않게 이끼 같이 우중충한 얼굴을 한 애꾸 사내를 기억해낸 직원은 친근한 미소로 그를 반겼다. 어떻게, 반지는 좀 고르셨나요? 제이콥은 쇼케이스 안의 반지 하나를 가리켰다. 다이아몬드의 주변으로 작은 에메랄드가 장식된 화려한 백금 반지…로부터 →↓→→에 있는 금색 프레임에 풀잎 세공이 들어간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렇게 고민하시더니. 결국 그 반지로 하시려고요. 답정너는 제이콥의 유구한 단점이었다.
“이렇게 오래 고민하시는 걸 보니 많이 소중한 사람인가 봐요. 단순한 선물용은 아니죠? 혹시, 프로포즈?”
“예, 뭐…”
“어머, 어쩜… 혹시 언제 하실 예정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한 달 뒤에 여행을 가기로 해서. 그 전을 노리고 있습니다.”
극단적일 정도로 내향형인 제이콥으로 하여금 매초 도트 데미지를 입게 만드는 대화였으나 와중에도 프로포즈를, 또 아가타를 떠올리는 건 그에게도 즐거웠는지 낯에 옅은 미소가 스몄다. 엄청 사랑하시나 보다…. 곧 민망한 듯 몇 번인가 헛기침을 해버려 금세 지워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듯한 상자에 포장된 반지가 들어있는 종이백이 제이콥의 손에 들려졌다. 프로포즈, 꼭 성공하시길 바랄게요. 직원의 응원에 제이콥은 심드렁하고, 또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라고….
이제 시간을 조금 당겨보자. 약 한 달 정도 앞으로.
제이콥이 아가타의 손을 잡고 붉은 옷을 입은 폴리주스 마법사(추정)들에게서 도망쳐 별장을 빠져나오는 순간, 코트 안주머니에서는 남색의 반지 케이스─벨벳 질감, 고급스러운 금색 테두리 장식, 손가락 세 개 정도 크기.─가 인정사정없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 자신만만함이 무색하게도 계획의 단 1할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단 뜻이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제이콥이 ‘그 후로 해당 주얼리 전문샵은 가지 않습니다.’라 선언해도 이상하지 않을 처참한 결과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고 하니…. 우선 제이콥의 계획은 이러했다. 야경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고, 피아니스트에게 부탁한 재즈 연주가 흘러나올 때 반지를 보여주며 프로포즈를 하는 방법. 원래 정석이 정석인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는 없다. 제이콥은 그렇게 자신했다. 두 사람의 예약 전날 해당 레스토랑에서 식중독 문제가 터져 영업 중지 선고를 받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첫 번째 실패를 맛본 제이콥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애초에 각 잡히고 진지한 분위기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았다고. 그래. 정신 승리했다. 결국 그다음으로 내놓은 계획이란 녀석이, 아가타와의 휴일 아침. 침대 위. 막 일어나 잠이 채 깨지 않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운 아침 인사를 잠깐. 늦잠을 자는 건 늘 제이콥의 쪽이었다. 자, 다시. 그녀가 제이콥을 깨우면 일어나 평소처럼 농담 섞인 잠투정을 부리며 누워있다, 침대맡의 협탁 서랍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자연스럽게…. 당연하게도 이 계획 또한 실패했다. 서랍의 걸쇠가 녹이 슬기라도 했는지 암만 힘을 주어도 열리기는커녕 크게 덜컹거릴 뿐이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필이면 그날 말이다! 제이콥?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영문을 모르는 아가타가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닙니다. 잠결에 부딪혀서. 이쯤 되면 세상이 쌍수 들고 둘의 사이를 반대하는 중이라 해도 이상치 않았다….
실패를 거듭하며 여행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제이콥은 초조해져만 갔다. 그렇게 계속 초조하기만 하다 끝났다. 결국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반지 케이스는 부적처럼 그의 코트 주머니 하나를 차지하고 말았으니. 별장에 도착한 후로는 체자레와 하이럼의 눈치를 보느라 마땅한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언젠가 미아 페이지가 했던 말이 뇌리에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아무래도 공개 프로포즈만큼 곤란한 건 없죠…’ 고작 두 명의 구경꾼을 두고서도 그게 걸려서…. (사실, 따지자면 그건 공개 프로포즈보다는 상견례에 가까웠으리라.)
결국 제이콥은 저녁 식사가 끝난 후 각자 방으로 돌아간 시간을 공략하기로 했다. 아가타의 방문을 노크하고, 잠깐 산책이라도 하지 않겠냐 권유한 채, 꼭 그때와 같은 노르웨이의 겨울 숲에서…. 물론 이렇게 조바심을 낼 이유는 없었다. 작금의 제이콥은 꼭 이 프로포즈를 성황리에 끝내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역시, 근래 아가타에게서 느낀 기류는 제이콥 또한 혼란스럽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에. 이 긴장감이 꼭 폭풍전야와 같아서. 걷잡을 수 없는 일로 번지기 전, 당신과 나 자신에게 어떠한 답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으로…. 정답이 없는 문제를 홀로 고민하는 것은 제이콥 에버그린의 고쳐지지 않는 ‘문제’였다.
더해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제이콥의 인생에서는 늘 문제가 문제를 낳았다. 예를 들자면… 그래. 프로포즈를 위해 옷을 차려입은 채 아가타의 방으로 향하던 도중, 2층 복도의 난간 너머로 저택 밖을 나서려는 그녀를 발견해버리는 일이라든지.
그래도 그것까지는 괜찮았다. 겨울 숲의 습격에서 언젠가의 검은 로브들을 떠올린 것도.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단지 붉은 옷을 입은 미친놈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총성이 울리고 체자레를 닮은 것이 피를 쏟은 순간까지. 하지만 눈밭에서 깜빡 졸고 일어나 보니 옆에 있어야 할 아가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건… 이건 괜찮지 않다.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지금은 빨간 내복의 미치광이 산타들이 성탄절 식탁에 올릴 가축이라도 잡으려는 것처럼 날붙이를 들고 설치는 와중이다! 반지만 챙기면 뭘 하나. 그 주인이 될 약지가 사라졌는걸. 그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등가교환의 징크스는 여전했다. 제이콥은 버릇처럼 손을 들고 자신의 마른 입술을 훔쳤다.
상황을 파악하기까지 그다지 오랜 시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제이콥이 오러였던 덕도 있겠으나, 이런 일이 꽤 잦았던 덕분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직후에는 지금이 겨울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새하얀 눈 위에 남아있는 흔적들이 그녀가 향한 방향을 알려주었다. 동쪽으로. 이따금 정체를 모를 여러 발자국과 뒤섞이기도 했으나 그녀의 발자국만큼은 제이콥이 못 알아보려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볼이 좁고, 그의 손바닥과 엇비슷한 크기의…. 제이콥이 아가타의 발을 유심히 살펴본 적은 없다. 애초에 그런 패티쉬도 아니다. 단지, 몇 번이고 침대를 뛰쳐나가 눈 내리는 새벽의 거리를 떠도는 그녀를 찾아 헤맸었을 뿐이다…. 제이콥은 꼭 그녀의 발자국이 아닌,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따라가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동시에 내내 느껴왔던, 그리고 외면했던 기시감에 대한 생각이 그녀의 것보다 훨씬 더 큰 크기의 발자국과 함께 백지 같던 눈밭 위를 물들였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제이콥을 ‘잭’이라 부르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새우를 잔뜩 넣은 토마토 파스타 또한 원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 ■■■■■ ■■■■■ ■■■ ■■■.
발자국이 끊겼다. 숲이 사라지고 돌과 바위로 가득한 지형이 시작되어 발 디딜 곳이 좁아진 탓이다. 나무 없이 광활하니 아가타의 모습이나, 하다못해 흔적이라도 보여야 할 텐데. 잿빛으로 가득한 공간은 제이콥에게 막막함만을 안겨주였다. 여기서 안 보이면 옆으로 새기라도 했겠지. 제이콥은 혹여 다시 이어지는 발자국이라도 찾을 수 있을까 숲이 다시 시작되는 외곽을 따라가기로 했다.
바위 근처에는 오직 제이콥이 지나간 흔적만이 남았다. 발자국을 발견하기는 커녕 이 근처로는 날짐승, 들짐승 한 마리도 오가지 않았다. 꼭 이 공간을 애써 외면하려는 것처럼. 언젠가 이 비슷한 걸 본 기억이 나는데…. 제이콥은 제 머리를 헤집다, 결국 실소했다. 그래도 덕분에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음과 동시에,
쿵.
제이콥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평범한 일상, 아가타가 옆에 있었다면 이게 무슨 뜬금없는 원맨쇼냐며 타박을 줬을 것이 뻔하다. 제이콥은 연이은 악재에 앓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머리를 털었다. 시큰. 그 크지 않은 움직임에도 발목에서는 뜬금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불길한 예상과 함께 시선을 내리면… 돌 사이에 끼어 이상한 각도로 뒤틀린 그의 오른발이 눈에 들어왔다. 발이 빠져 굴러떨어지며 발목이 꺾인 듯했다. 곧장 에피스키를 사용했으나 단순한 염좌가 아니었는지 상태는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젠장. 내가 골절상을 깔끔하게 처리할 정도였으면 오러사무국이 아닌 성 뭉고에 이력서를 냈지. 제이콥은 푸념을 속으로 삼켰다. 고작 부실한 부목을 덧대는 것이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러모로 일이 안 풀렸다. 뭐… 애초부터 그런 인생이긴 했어. 생각을 곱씹으며 제이콥은 고개를 들었다.
덫에 발목이 씹힌 사냥감의 기분을 절실히 느끼며 겨우 몸을 일으킨 제이콥의 눈앞에는, 동굴의 입구가 자리했다. 그러니까 제이콥이 그간 아가타의 발자국을 찾아 헤매던 바위 지대는, 이 자그마한, 자칫 토끼굴이라 착각할 수 있을 법한 크기의, 고작 성인 남성 한 명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를 가진 동굴의 지붕이었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그 앞의 눈바닥에 빼곡하게 나와 있는 발자국들이었다. 몇 명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순간, 제이콥은 체자레의 말을 떠올렸다. 이 모든 습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며 갑자기 어디선가부터 밀물처럼 쏟아져나왔다고. 동시에 제이콥은 깨달았다. 이거… 내가 산타 소굴을 발견한 모양이야.
제이콥 에버그린이란 사내는 생김새와 달리 광공(아가타: 뭔 소리 하세요?)도 아니고 간지캐(아가타: 아니 뭔 소리 하냐니까?)도 아닌, 조금 과한 신중함과 지극히 현실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제이콥은 이곳에서 곧장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달았으나, 그를 광공이자 간지캐처럼 보이게 만든 징크스란 녀석이 바로 직전 선물한 어마무시한 훈장─발목 부상─덕분에 그것 또한 여의찮았다. 다리를 질질 끌며 만들어진 눈밭의 흔적은 너무나도 선명했고, 설상가상으로 안쪽의 공동에서부터 발소리가 메아리쳐 흘러나왔다.
“젠장. 처음부터 체자레 쪽과 합류해야 했어.”
제이콥은 드디어 자신이 마법사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기라도 했는지, 곧장 주머니 안쪽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고 돌아갈 별장을 떠올리고…. 어째서인지 눈앞의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발목이 작살나면 순간이동을 못 하게 되는 줄 몰랐는데. 그러면 순간이동의 메리트 없지 않나…. 기가 찬 제이콥은 두어 번 더 시도했으나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동시에 그는 계속해서 느껴졌던 기시감을 깨달았다.
“…이런 곳에 인지 마법을 다 걸어놔.”
자신의 모교에 걸려있던 마법들.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순간이동도 안 돼, 특정 존재들은 인지할 수도 없어…. 제이콥은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느껴지자 그의 지팡이 끝은 동굴 입구를 향했다.
아니, 향하려 했다. 근처 나무 뒤에서 불쑥 나온 손이 그의 팔목을 잡아끌지만 않았다면. 반사적으로 그 인영을 제압하기 전,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익숙하나 어딘가 그리운 녹색 빛. 그토록 찾고 있었으나 어쩐지 그것과는 다른, 에메랄드와 오로라를 닮은…. 만약 키안나가 옆에 있었다면 오러 뱃지를 반납하라 놀렸을 것이 뻔했다. 하지만 들어보십쇼, 키안나. 마리 듀프레로 ‘어느 쪽이 좋아?’ 밸런스 게임의 순간이 눈앞에서 실제 상황으로 벌어진다면 당신도 고장 나는 게 당연하잖아…. 저급한 비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와 비슷했다. 그녀의 붉은 옷차림에 ‘당신도 이번 크리스마스가 상당히 기대되는 모양입니다.’ 따위의 농담을 할 수 없었단 사실이 유감이었다. 어쨌거나 제이콥 에버그린은 TPO 구분 없이 실없는 농담을 해 얻어맞는 것으로 심적 여유를 챙기는 가성비 나쁜 인간이므로…. 즉슨, 작금의 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제이콥은 단단히 쥔 채 놓지 않았던 지팡이로 이제 그녀를 겨누었다. 그를 마주한 아가타가 그저 고요한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주문을 외치고도 남을 기세였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겠다. 애초에 그녀가 제이콥에게 달려들었다 하더라도 아바다 케다브라를 외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상대의 죽음을 굳건히 염원할 자신이 없었고, 또, 동시에, 여전히, 더 이상 초록색을 띠는 것에 무언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물론 제이콥의 손목을 잡고 있는 얼음장 같은 체온이 너무나도 익숙했던 탓도 분명히 있었다. 흉흉한 분위기는 점차 사그라들고, 제이콥이 주문을 쓰지 못하리라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타는 살풋 웃어 보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설명을 원하는데. 너도 그 가짜들 중 하나인가?”
“ … ….”
“일부러 대답하지 않는 건지, 아니면 말하는 법을 모르는 건지. 이쪽으로썬 알 겨를이 없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
제이콥의 요구에도 아가타는 그저 동굴의 반대쪽으로 그를 이끌 뿐이었다. 제이콥의 한숨은 그리 길지 않았고,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떨어진 곳의 수풀에 멈추어 섰다. 아가타는 그 사이로 제이콥을 쑤셔 넣은 후 뒤에 바짝 숨어 붉은 옷을 입은 사람 몇 명이 동굴 입구에서 나와 사라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들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 제이콥은 다시.
“왜 나를 살려줬지?”
그는 무심코 자신이 찾고 있는 아가타와 나누었던 수화와 같은 손짓을 곁들여 되물었다. 그저 단순한 습관이었다. 분명 그랬을 터인데…. 정확히 동일한 제스쳐를 취하는 붉은 옷의 아가타의 모습에 제이콥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 … 잭….”
자신을 ‘잭’이라 불러주는 잔뜩 쉬어 망가진 목소리. 그 순간 제이콥 에버그린은 어떠한 사실 몇 개를 깨달았다.
Q1. 빈칸에 들어갈 문장으로 알맞은 것은? (?점)
A. 언제부터인가 아가타는 제이콥을 필사적으로 사랑하려는 것처럼 굴었다.
Q2.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점)
A. “다른 남자라도 생긴 거 아냐?” (에리스)
“네가 또 뭔가를 잘못한 모양이지.” (하이럼)
“저런… 힘내요, 잭.” (체자레)
“당신들… 전부 오답입니다.” (제이콥)
아가타를 되찾은 언젠가의 겨울 숲에서부터 시작된 아주 긴 난제의 답은 간단했다. 그녀에게서 느꼈던 기시감과 불안, 혼란, 그리고 찝찝함은 대체 무엇에서부터 기인했던가. 기어코 징크스라는 녀석은 행운과 불운을 뒤집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의 사람마저 뒤바꿔버린 것이었다….
아가타의 짧은 부름과 그녀의 음울하고도 따스한 낯이 제이콥에게 그 답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바로 알아볼 수 있었으면서 어떻게 그동안은 눈치채지 못했느냐 묻지 마라. …단지 간절했습니다. 변명에 가까운 말로 시작된 이야기는 재회의 기쁨이라기엔 일종의 책망이었고, 또 대화라기엔 너무나 조용했다. 그녀의 망가진 성대는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단지 두 손이 덧그리는 움직임이 대답이 ‘보고 싶었어요.’ 란 의미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근 일 년만의 재회였고 아가타가 전하고자 하는 것들은 방대했다. 제이콥은 말을 할 수 있음에도 소리 없는 대화가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그녀가 정확히 같은 손짓을 할 때마다 되찾은 아가타의 얼굴 위로 잃어버린 아가타의 딱딱한 미소가 겹쳤다. 그 순간마다 치밀어 오르는 울렁거림의 이름은 분명 죄책감이다.
동이 트고 아침이 찾아올 무렵에는 동굴에서 사람이 나오지 않은 지도 한참이 지난 상태였다. 아가타는 그 비좁은 입구 안으로 제이콥을 인도했다. 아마 지금이라면 여기가 제일 안전할 거예요. 돌아오는 사람은 없을 거구요. 이쪽의 잭은, 비밀의 공간이나 밀실 따위에 질색을 했거든요.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군요.”
“… ….”
네. 다른 아가타를 찾는다고 하더라도 계속 위쪽에 머무르겠죠. 동굴의 가장 깊은 곳 벽에는 철문 하나가 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바위색으로 페인트칠도 되지 않은, 숨길 생각도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인공적인 철문이. 아가타는 익숙하게 그 문을 열고 긴 터널과 같은 통로를 한참이나 내려가…
열악함과 어두움. 겨우 주어진 협소한 공간. 누군가에게는 이보다 더 끔찍할 수 없는 장소였으며 밖을 질투하고 증오하게 만든 원흉이었다. 그림자들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 그간의 제이콥이 누리고 있던 양지의 삶이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이 지하세계는 제이콥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방공호의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물론 통제받고 지배당하는 삶이란 부분만 어떻게 잘 절제해볼 수 있다면의 이야기지만.
“그래서 한동안 여기에서 머물자는 겁니까.”
“… ….” 적어도 공격당할 일은 없고, 춥지도 않아요. 이상한 제물로 쓰일 위험도 없는걸요.
“당신, 그동안 그런 식으로….”
혼란을 틈타 어디선가 도망쳐 나온 건지. 열린 문틈 사이로 흰토끼 한 마리가 재빠르게 뛰어나와 두 사람의 앞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제이콥은 아가타를 곁눈질했다. 그녀는 토끼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하기만 할 뿐이었다. 상당히 지쳐 보였고, 또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건 체념일지도 몰랐다.
이제 내가 알던 잭도 있으니 괜찮아요. 전보다 한참은 낫다구요. 악몽을 꾸고 맨발로 뛰쳐나갈 일도 없어요. 내 심장이 뛰는지 확인하는 것으로는 이제 부족해요. 나는 좀 더, 확실하게, 불멸이 아니되 죽음과는 멀어진 삶을….
그녀는 그 끔찍한 겨울에 갇힌 채, 싱그러운 봄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 공간에서 지냈다. 홀로.
제이콥은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굴렸다. 딱딱한 반지 케이스가 만져져야 할 텐데, 그새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아까 굴러떨어지며 잃어버렸나. 애초에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되지 않겠지만서도…. 그 확신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때문에 제이콥은 물었다. 아가타가 쏟아낸 처절함에 비해 참으로 뜬금없었다.
“갖고 싶은 것은 없었습니까? 욕심나는 건요.”
미친 듯이 움직이던 두 손이 멈췄다.
“사람은 평생 도망쳐 숨은 채로 살 수 없잖습니까. 나를 그렇게 밖으로 끌어내려 애쓰던 사람이 그걸 몰라. 왜 다시 겨울 숲에 갇히려고 갖은 애를 써….”
아가타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집으로 돌아가야죠. 언제까지 여행을 계속할 셈입니까?”
애 초에 그날, 마중도 나가지 않고 아가타가 문을 두드리길 기다려서는 안 됐다. 차를 끌고도 숲에서 몇 시간을 헤맨 사람인데. 이렇게 길을 잃고 한참을 떠돌지 않았는가. 제이콥이 손을 내밀었다.
결과적으로 제이콥 에버그린이 준비한 회심의 프로포즈는 그렇게 실패했다. 하지만 새 반지를 고른다면 언제든 리트라이 찬스는 있는 거 아닌가? 비록 일전의 주얼리 전문샵에는 갈 수 없게 됐지만. 그런 이유에서 제이콥은 되려 우리의 자리를 되찾고자 아가타를 설득했다. 꽤 긴 시간이었으나 체자레 야베트의 이름(아가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과 그녀의 부모님(여기서 아가타는 울음을 터트렸다. 첨언하건대 F-word로 모욕한 게 아니다.)을 들먹이자 어찌저찌 성공적인 결과가 나왔다.
어쨌거나 제이콥은 새로운 청혼 반지를 골라야 했기 때문에 이런 지하에 처박혀 지낼 수는 없었다. 물론 비단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겠으나… 굳이 하나를 꼽자면 이걸로 치자. 로맨틱하잖아. 그리고 대충 수미상관 같은 걸로 퉁치면 있어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결국 그는, 다시 한번, 준비된 방공호를 뒤로 하고, 그녀가 있어야 할 밖으로 뛰쳐나가겠다는 결심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정답: FOR _ A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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