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ing Beethoven>
- Pale Spring

- 2023년 9월 5일
- 12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Pale Spring
<Copying Beethoven>
by Agnieszka Holland
Drama / USA / 2006 / 104min / 12+
1 『꿈의 서장』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비엔나에 없을 것이다. 하늘이 내린 음악의 거장, 스스로 뮤즈가 된 음악의 여신, 신이 내린 음악을 듣다가 사람의 세상의 소리는 잘 듣지 못하게 된 마에스트라. 완벽한 행운의 길을 걷지 못했음에도 그녀를 목표로 삼는 이는 허다했다. 음악을 꿈꾸었다면, 예술에 손을 대었다면, 세상에 없는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것에 동경해보았다면, 한번쯤은 그 경지를 만나고 싶은 욕망을 어쩔 수가 없는 존재. 존경과 환상과 동경. 자신은 곧잘 멋대로 그런 것을 품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없는 형편을 쥐어 짜내 음악의 도시로 온다는 무모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용기는 마침내 행운을 안겨주었다.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의 새 교향곡 악보를 정리할 카피스트로 추천한다는 소개장을 손에 쥐었을 때는 날아갈 것만 같았다.
낡은 아파트 거리를 지나, 기존의 카피스트였던 슐레머에게 소개장을 내밀자 그는 한껏 우려스럽다는 듯이 눈을 치떴다.
"뛰어난 카피스트를 부탁했을 텐데, 너무 젊은 것 아닌가…? 학생이지? 누구의 곡을 하는 줄이나 알아?"
"그럼요,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당대 최고의 작곡가잖아요. …저는 아직 학생이지만, 작곡과의 수석이어서 추천을 해주셨어요."
슐레머는 성난 사자 우리에 잘 구워지지도 않은 스테이크를 굳이 넣어야겠냐는 듯한 표정으로 파이프 담배를 뻑뻑 피웠다.
"합창! 상상이 되나? 교향곡에 합창이라고. 솔로가 넷, 합창이 하나. 그것도 심지어 마지막 악장이야. 수백명을 세워놓고 한 시간이나 기다리게 하는 교향곡. 완전히 미친 소리라고. 감당할 수 있겠나?
…그런 점까지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괴작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최초의 대작일지도 모른다는 두근거림이 앞섰다.
"초연이 언제죠?"
"나흘 후!"
…하려면 할 수 있을 기간이었다. 매달린다면. 그 위대한 마에스트라와 의견만 맞는다면. 아, 그 대가와 의견이 맞다니…건방진 소리를, 생각하면서도 심장의 고동은 빨랐다. 그때—
"슐레머, 여기 있겠지. 내가 말 했을텐데? B플랫! B플랫이라고!"
신문기사로만 존재하던 거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낡은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휘날리는 은빛 머리카락 때문인지, 서늘한 비엔나의 바람이 형상화되어 눈 앞에 나부끼는 것 같았다. 단풍이라기에는 연하고, 맑은 날의 석양같은, 봄날의 꽃 같은, 분홍색 눈과 살짝 마주친 것 같았지만 이내 거장은 악보더미를 거칠게 내려놓으며 슐레머에게 대화도 아닌 그저 통보를 하고선 사라져버렸다.
"분명히 B플랫이라고 했어. 다시 해와, 안 그러면 신문의 부고란에 나게 될 거야!"
쾅 닫기는 문과, 갑작스러운 고요함. 슐레머는 나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고, 그건 문장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장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담아서.
이른바 카피스트로서 그녀의 앞에 서기까지의 숙제였다. 나는 방금 벼락처럼 떨어진 마에스트라의 지시를 새겨 담아, 떨리는 마음을 눌러가며 동경하던 사람이 그린 음악의 지도를 펼쳤다.
안경을 쓰고 휘갈겨진 악보를 들여다보며, 깃펜을 깎고 또 깎아서, 잉크를 찍고 또 찍어서…
그녀가 상상한 천국의 선율을 따라갔다.
마에스트라가 사는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적막했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울리는 불협화음같은 선율이 없었다면 무음의 지옥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노크를 하려는 자신에게 마치 문지기처럼 기대어 서있던 이웃집 노파가 말했다.
"안 들릴 거야. 그냥 들어가."
남의 집에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가기는 처음이었다. 어색한 기분을 누르려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가자, 신경질적인지 열정적인지 모를 속도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좀처럼 들리지 않는 귀를 보완하기 위해 목 둘레에 끼우고 있는 은색 판은 마치 일그러진 진주가 가득한 동화책에 나오는 왕비님의 목장식 같았다. 그녀의 권위를 보여주고, 위엄을 보여주는.
가까이에서 발소리가 울리고서야 거장은 이방인을 돌아보았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초리였다.
오기로 했던 슐레머가 아파 오지 못한다는 말을 전했음에도 이 귀부인은 이 이방인이 왜 와있는지 모르겠다는 눈초리였다.
"제가 슐레머씨 대신 온 거예요. 마에스트라의 악보를 도울 사람으로서요."
뭐라고? 잘 들리지 않은 것인지 고귀한 음악의 여인은 얼굴을 가까이 홱 돌렸다. 곧게 뻗은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잉크와 종이 냄새 너머로 어딘가 무겁고 날카로우면서도—마치 두터운 베일을 스친 듯한 향기가 났다.
"제가 당신의 카피스트예요."
다시 배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하자, 가장 아름다운 봄날의 석양을 가득 담은듯한 색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북풍의 마녀같은 냉랭한 목소리가 밀어닥쳤다.
"돌아가! 슐레머에게 전해. 길가던 어디 따님을 잡아다 날 놀릴 생각일랑 말고 저녁까지 사람 보내라고."
"제가 와 있는 게 바로 그래서예요. 사람이 필요하다시면서요."
일라이자는 마치 자신이 골리앗도 쓰러뜨릴 수 있다고 말하는 민들레를 본 마냥 피식 웃고 잡다한 정리를 시작했다.
"난 좋은 사람이 아냐. 귀는 물론이고 폐도 안 좋고 무릎도 나쁘지. 뭐라고?"
"…제가 적합한 카피스트인지 아닌지는, 제 악보라도 보시고 평가해주세요."
자신은 우등생이었고, 자신의 스승은 그 실력을 믿고 거장에게 소개장을 들려 보냈다. 당대의 거장에게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로 거절받는 것이 내킬 리가 없었다.
하! 귀부인의, 아니 마녀의 웃음이 들렸다.
"여기. B장조로 해놨는데 왜 B단조가 되어있는거야? 왜 멋대로 바꿨지?"
"…바꾼게 아니라, 교정한 거예요."
"뭐라고?"
"교정? 맞게 했다고? 네가? 내 악보를?"
"…네, …선생님이라면 B단조를 말하셨을 것 같아서요."
"이탈리아 놈들이라면 장조로 갔을거야."
"…선생님은 아니시잖아요."
"내가?"
"네, 마치 폭발 전에 긴장이 고조되는…부분을 만드시려고요."
용기를 내어 피아노에 앉아 해당하는 부분을 연주하자, 음악을 사랑하는 고귀한 북풍의 마녀는 피아노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며 연주를 들었다. 멋대로 피아노에 손댔다며 혼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동시에 어떤 확신이 들었다.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지고, 일라이자가 입을 뗐다.
"그러니까 내가 실수를 한 거라고?"
실수라니, 가당치 않다.
"…아뇨, 마에스트라.. 제 생각에는, 선생님이 일부러 함정을 파신 것 같은데요."
"…내가?"
"네,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려고요."
"뭘 이해해?"
"선생님의…영혼이요."
"내 영혼, 이라고?"
분홍빛의 눈동자는 건방진 소리를 힐책하는 것인지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조금 흥미롭게 보는 것인지 모를 오묘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래, 단조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단 말이지?"
"네, 그게… 저도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러자 마치 일부러 숨어있던 차가운 폭풍이 이쪽을 보고 웃는 것 같았다.
"하하! 그러니까 너는, 창조주에게 가서, 이 대륙은 이렇게 생겨서 마음에 들고, 이 섬은 조금 묘하고, 저 호수는 워낙 넓어서, 이 무인도들은 너무 잘게 쪼개져 있어서! 뭐 그런 이유들을 붙여서, 네 마음에 좋은지 안 좋은지를 자랑스럽게 말하겠구나. 세상 만물이 네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 그러니 다시 하시는 게 좋겠다고, 그 모든 걸 창조한 이에게 가서 말이야!"
폭풍은 나지막하고 비웃음 어린듯한 목소리로 선고를 내렸다.
"잘 모르겠네. 네 동의란 것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지 말야."
......아무래도 오답을 말한 것일까. 심기를 거스른 것 같았다. 성격이 대단하다는 소문이야 익히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존경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을 마음의 준비 따위는 했을 리가 없었다. 당혹감에 고개를 숙이자, 턱 밑으로 손가락이 불쑥 들어왔다.
"나한테 말할 땐 나를 봐."
들어올려져 눈이 마주쳤지만, 이쪽을 음표 하나하나로 분해하는듯한 그 시선에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거장에게 비웃음을 사고 혼쭐이 났다는 생각이 주는 민망함도 더해 자신의 눈빛은 떨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내려가고 피해버리는 시선을, 마에스트라는 집요하게 자신에게로 돌려 계속해서 무엇인지도 모를 무언가를 읽어냈다. 입술을 깨물지 않는 것이 최선이어서 꾹 다물고 있으려니 턱 밑의 손가락이 떨어졌다.
"이름이 뭐지?"
"…힐텟페. 힐텟페 윈느예요."
"힐텟페 윈느… 그래, 윈느 양."
거장에게 미운 털이 박혀 음악계에 소문이 나려나, 생각하던 찰나 마에스트라는 아까보다 나름 부드러워진 표정과 아무렇지도 않은 몸짓으로 목 뒤의 은빛 판을 풀고 코트를 걸치고 보닛을 썼다.
"난 크랜스키 가게에 가서 식사를 하고 올 거야. 돌아오면 같이 작업을 할 거고. 집안꼴은 이렇지만 이해하도록 해. 저녁 먹었어?"
화가 난 게 아닌걸까? 아니, 그보다 분명 방금, 같이 작업을 할 거라고 했다. 즉, 어찌되었든 거장의 테스트는 통과한 셈이었다! 어깨가 순식간에 가벼워진 기분에 자신도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저녁은…아직이에요."
"그러면 송어를 사다 줄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김에 집안을 차근히 둘러보았다. 캐비닛 안에 아무렇게나 붙어있는 종이의 고딕체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
죽을 운명의 인간이 나를 어찌 알겠는가
송어를 사다준다던 그녀는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더니, 기다리다 못해 집을 나서자 그제야 길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마차를 잡아다 줄게. 집이 어디지?"
"세이크리드 하트 수녀원이요."
마에스트라는 학예회를 하는 꼬마아이가 종이 왕관까지 썼다는 말을 들은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라구? 수녀원에 살아?"
"원장수녀님이 제 대고모님이세요. 음악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고요…"
"너도 알 만하구나. 요조숙녀인거네."
익숙하게 듣는 평가에 반론을 펼치려고 입을 연 찰나, 일라이자가 마차를 두드렸다. 순식간에 은빛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늦었구나, 힐."
"죄송해요, 고모님. 일을 구했어요."
"일?"
"네, 저,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과 일해요!"
이게 얼마나 무게를 갖고, 울림이 있는 말인지는 손톱만큼도 전해지지 않은 듯 했다.
"일라이자 랜싱? 거의 파문당한 사람 아니니? 배우긴 뭘 배워. 얼마나 오래 할 참이냐?"
"…새 교향곡 초연을 할 때까진요."
가차없는 평가절하 앞에, 적어도 그때까진 누구도 자신과 그녀가 함께 있는 것을 방해할 수 없으리라고 선언하듯이 대꾸하고야 말았다. 고모님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자신을 빤히 보았지만, 애써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힐텟페는 악보를 쓰다듬어보았다. 파문이라니, 이단이라니, 신성모독이라니! 수녀원의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이 악보 위에서 음표들이 천국을 향해 우레와 같이 나아가고 있었다.
2 『늪지대의 사람들』
작업의 중간보고를 위해 슐레머를 만났다. 일라이자가 자신의 악보를 만질 사람으로 힐텟페 윈느를 받아들였다는 것도 놀라워했지만, 작업이 어떻게든, 일단은 원활한 편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도 놀랐다. 그는 파이프 담배를 뻐끔이며 어딘가 쓸쓸한 눈으로 말했다.
"그녀는 낭만적인 예술가였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어."
"아마 청각때문이겠죠…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 이상이야. 영혼까지 이상해져버린 것 같아. 더이상 대중들은 신경쓰지도 않지. 마지막 소나타를 들어본 적 있나?"
슐레머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요즘은 누굴 위해 곡을 쓰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
곡이, 음악이 누굴 위해서여야 할까. 마음 속의 음악이 속삭이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닐까, 그녀의 영혼이 춤추는 대로 악보가 쓰여나가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반론하기 위해 말을 다듬기도 전에 좀더 거침없는 다른 질문이 들어왔다.
"용케도 아직 그녀의 곁에 붙어있군. 뭐, 학생의 동경인가 했는데… 다른 목적이라도 있나?"
"…목적이라기엔 불순한지도 모르지만요. 혹시 한 번이라도 제 작품을 마에스트라께 선보여드릴 기회가 있다면…"
"얼씨구, 절대 그러지 마. 로시니에게 뭐라고 했는 줄이나 알아? 혹평에 혹평을 들을 게 뻔해. 절대 보여주지 마. 적어도 초연 때까지는 너나 그 여자의 심기에 일말의 조약돌도 던지지 말라고. 일에만 집중해… 약속해."
그렇게 오래 같이 일했음에도 슐레머에게 일라이자는 마치 당첨 상품을 가끔 내놓는 것 외에는 모두 지독한 꽝이 들어있는 경품기계같은 취급인 듯했다. 그리고 자신의 추첨권은 가망성이 없다는 말을 들은 것만 같았다. 감히 당첨 같은 건 꿈을 꿀 수도 없는.
일라이자가 자리를 비운 채로 작업을 하던 어느 날, 두 사람이 자신을 찾아왔다.
한 명은 슐레머였다. 그는 거의 울상이었다.
"오, 있었군, 윈느. 그래, 랜싱은 자넬 좋아하니까 설득 좀 해봐. 3악장까지 리허설을 하는데 자기가 지휘를 하겠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이야,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술이라도 읽겠다고?"
그녀가 자신을 기꺼워한다는 외부 평가는 처음 들었기에 그쪽에 신경을 집중해버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 뒤의 문장에 의식을 가져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이 생각하게 되는 바는 슐레머와 전혀 달랐다. 그녀의 지휘를 직접 볼 수 있다고?
"전엔 직접 지휘를 한 적이 있다면서요? 어떻게 했나요?"
"완전히 망치는 바람에 두 번이나 다시 시작했어! 하지 말라고 설득 좀 해줘."
그렇게 슐레머는 신신당부하고 떠나갔지만, 솔직히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어떻게한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또 다른 불청객이 당도했다.
일라이자의 친척, 칼이라는 이름의 청년은 단단히 불만이 있었는지 항의표시를 하러 왔다가 그녀의 험담을 늘어놓는 바람에 자신의 항변을 마주해야 했다. 어째서 다들 그녀를 골칫덩이 취급하는걸까? 그야 오만할지도 모르고, 성격도 강하고, 주변을 그렇게까지 배려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데.
칼은 그야말로 세상물정 모르는 운 좋게 살아온 아가씨에게 선심써 가르쳐주듯이 내뱉었다.
"자길 거스르면 다 망가뜨려 버릴거라고요! 난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이다. 넌 아무것도 아냐! …당신한텐 아직 안 그랬나 보죠."
"그야 아직 그렇진 않았지만……"
칼은 그거 보라는 듯한 비웃음이 어린 입꼬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집의 주인이 돌아왔다.
"들어봐, 힐텟페. 곡을 끝냈어! 수녀원에서 내게 천사를 보낸거였나봐. 뮤즈인가?"
앞선 두 손님은, 그 즐거워 보이는 미소를 본 적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무심코 실례일지도 모르는 질문을 해버렸다.
"…마에스트라, 행복하신가요?"
일라이자는 별 소릴 다 듣는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뭐라고? 지금은 기분이 좋았긴 해. 하지만 네가 내 행복을 판단할 권리가 있나? 아니, 없지."
"…그건…그렇죠. 괜한 말을 했어요. 사과드려요."
"안 들려. 얼굴이 안 보이잖아. 입술을 보여줘야 알지."
턱을 잡아 올리며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재차 물었다.
"방금 사과를 한 거야?"
"…네, 마에스트라."
"훌쩍대고 사과하고 그런 건 소용없어. 차라리 맞서 싸워. 사과하지 마."
"…네, 마에스트라."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어쩐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몰라서가 아니라, 아니, 아마 몰라서, 말로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아서…
"마에스트라의 음악이 좋아요."
"그런가."
3 『운명의 날』
위대한 음악가의 새 교향곡이 초연되는 날. 전례가 없는 규모에 비엔나 전체가 숨죽이고 기대에 들떠있는 것만 같았다. 아껴둔 돈으로 드레스에 새 장식도 달았다. 조금이라도 낫게 보이기를 바라며, 의자에 앉아도 앉아있지 않은 듯한, 둥둥 떠다니는 듯한 고양감에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데—
"윈느! 미스 윈느! 어서 이리로 와. 랜싱때문이야! 네가 필요해."
슐레머의 다급한 목소리가 진정은 커녕 긴장을 가져다 주었다. 무슨 일일까. 설마 몸이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품위없다는 말을 듣지는 않을 정도의 잰걸음으로 구두소리를 울리며 대기실로 가보니, 위대한 여인은 의자에 앉아 팔걸이에 양 손을 올린 채 코트도 입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픈 것이 아니라, 늪을 걷기에 지친 사람 같다는 인상이 떠올랐다.
"…마에스트라, 저 왔어요. 어떻게 된 거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살며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올려다보자, 불꽃이 일렁임에도 피로감이 가득한 분홍빛의 눈이 자신을 향했다. 일라이자는 나흘 간 함께 지낸 연녹색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적막 속에서 산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아. 많은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어. 내가 만들지만 나는 들을 수 없지. 어쩌면 내가 미쳐가는지도 몰라. 누구나가 그렇게 생각하고. ……네 생각은 어때?"
슐레머니, 칼이니, 대공이니, 늪 속에 사는 작자들이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말을 던진 것이다. 그런 생각부터 울컥 치밀어올라 자기 자신에게 놀라면서도 애써 말을 골랐다. 이 위대한 음악가가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찬찬히 생각해보면서.
"…당신은, 선택받은 분이죠."
"……난 더는 못하겠어. 힐텟페 윈느."
"하실 수 있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무슨 자신감으로, 무슨 근거로, 무슨 용기로 아직 풋내기인 자신이 세상을 호령하는 마에스트라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당신이 당신의 음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당신의 눈이 닿는 곳에서. 당신의 귀가 닿지 않는 소리들을 제가 알려드릴게요."
나는 나를 쓰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다. 당신의 위대함이 완성되는 곳에 나도 함께 있고 싶었던 거다. 동경도 환상도 전부 다 녹아버리는 처음의 감정에, 당신의 음악을 듣고 내가 느꼈던 감정에.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난 곳에.
"…비평가들이 왔지. 그 하이에나들. 그렇지?"
"네, 대공도, 작곡가들도요. 비엔나 전체가 왔어요."
"…내 코트를 줘."
나는 그녀에게 코트를 건넸고, 그녀는 나에게 지휘용 총보를 건넸다.
"힐텟페 귀네비어 윈느."
"네?"
"오늘 아름답다."
그녀는 웃으면서 단상으로 올라갔다. 세상에, 정말 직접 오고야 말았어. 신께서 도우시기를. 그렇게 말하는 단원들의 목소리를 가르고서.
여전히 마에스트라의 귀는 세상에게 조금 닫혀 있는 것 같았다. 분명 천국의 소리를 너무 많이 들은 탓이다. 머뭇거리는 듯한 손끝과 망설임을 담은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누구도 당신을 듣지 못하는 작곡가라 말할 수 없으며, 누구도 당신을 그 위대한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다. 보라지. 이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의 기수가 되어 위대한 마에스트라에게 받아 마땅한 찬사를 전하게 만들 것이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가장 찬란한 기수가 손을 들었다.
마치 춤을 추듯 서로 같은 손짓을 반복하며…
그리고 이윽고, 마침내,
소리를 모으는 반사판따위 없이도 마에스트라의 귀에 닿을 듯한 진동이,
천사들의 노래가, 환희의 송가가,
가장 적확한 순간에, 그녀와 자신이 바라던 순간에,
터져나왔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같은 동작을 하고 있을 뿐, 어느새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있었다.
같은 선율을 그리고 있었고, 같은 곳에 있었기에,
그리고 문득 그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알았다.
촛불이 일렁이는 금빛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미소지었다.
위대한 교향곡은 절정을 향해 치달아,
그녀를 의심했던 모두가 의심할 바 없는 거장의 천국에 기립박수를 보냈다.
"브라바, 마에스트라. 브라바!"
"마에스트라! 천국의 소리였어요!"
4 『네 번째 계절의 다음』
새 교향곡의 초연이 끝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일라이자의 집에 드나들고 있었다. 깨끗하지는 않은 건반소리가 이제는 친숙했다.
"어서 와. 방금 들었어? 대 푸가야. 콰르텟을 위한! 몇 주 째 머릿속에 떠다니는 것을 겨우 적었어."
"보여주세요!"
"어때? 솔직히 말해줘."
"…이건 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아름다운 선율이라기보다는…"
"아름다움? 이미 알고 있는 미에 대해 도전하고, 본능으로 음악을 인도해야지."
그녀는 즐거운 듯이 나의 손을 잡고 도무지 알기 어려운 박자로 춤을 추었다.
"어때? 어땠어."
"…미안해요, 마에스트라. 뭐라고 해야할까, 아직 좀...이해가…"
"이해가 아냐. 경험이 중요하지. 이건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언어니까. 힐텟페 네가 온 것도 이걸 쓰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라. 넌 마치 신의 시종같으니까."
그녀는 이따금 이렇게 쑥스럽기 그지없는, 셰익스피어의 시같은 칭찬을 건넸다. 이해할 수 없는 천국의 음악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으려니 일라이자가 맞아, 하며 무언가를 찾았다.
"네게 줄 게 있어."
그렇게 말하며 꺼내온 것은, 우리가 함께 작업한 그 교향곡의 악보였다.
"내가, 아니 우리가 지휘한 악보야. 네게 헌정할게."
"마에스트라…"
휘갈긴 악보가 아닌, 정갈한 글씨체로 멋들어지게 적혀있는 문구는 다음과 같았다.
—힐텟페, 내 영혼의 천사.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손.—
"어때?"
믿어지지가 않아, 그 글씨를 쓰다듬어보면서도, 행여 번질까 제대로 닿지는 못했다.
"…영광이에요."
"넌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일까. 일평생의 보물이 될 것이다.
그러다 문득, 마에스트라를 만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떠올랐다. 마치 이제 자신의 차례라고 하는 듯이.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말았다.
"마에스트라, 이것 좀 봐주실래요?"
"네가 쓴 거야?"
"…네."
일라이자는 흥미로운 눈으로 악보 뭉치를 훑어보더니, 피아노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몇 부분을 연주해보다 이내 비뚤어진 미소를 지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방금까지 그녀의 가장 따스한 부분을 만난 것이고, 이제 가장 위대한 부분을 마주할 것이며, 그 곳의 냉기는 물방울을 빛나는 수정으로 만들지만 사람에게는 북풍보다 매서우리라고.
"흠…본 적이 없어, 이런건. 무척 지적이야. 재능이 좀 보여. 하지만 여기 이건……지적인 허세 아닌가? 아니, 관용의 허세라고 해야하나…위선적이라고 할까…"
마에스트라는 즐거운 듯이 피아노를 치며, 그 총명하고 빛나는 눈으로, 사람이 겨우 마련해온 제물을 신이 가련하게 보듯이, …우스꽝스럽게 보듯이. 그렇게 냉랭한 평가를 내렸다.
"악보는 깨끗한데. 하하! 새로운 장르를 만든 거 아니야?! 정말 재미있다."
칼의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자길 거스르면 다 망가뜨려버 릴거라고요! 난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이다. 넌 아무것도 아냐! …당신한텐 아직 안 그랬나보죠.—
"아 참, 우린 우리 일을 해야지. 푸가. ..응?"
고개를 든 일라이자는 눈물어린 녹색 눈을 발견했다. 모욕감 이전의, 스스로에 대한 수치와 실망감으로 가득찬 눈은 시선둘 곳을 찾지 못하다 결국 서둘러 몸을 돌려 문 밖으로 향했다.
"잠깐만, 힐텟페, 잠깐! 다시 볼 테니까, 내가 어떤 식으로 말하는 사람인지 알고있잖아! 잠시만—"
존경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거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지금은 도저히 마주할 수 없었다.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갈 수 없는 부분마저 포함해 모든 것이 비참했다. 자신에게는 재능도 열정도 있었지만, 위대한 마에스트라를 돕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름다운 작곡의 세상에 함께 서있기는커녕, 영원히 그저 귀를 돕는 카피스트. 그리고 또한 마에스트라에게 역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테지. 자신도, 자신의 음악도.
그리고, 청량한 고요감만이 가득한 수녀원에 위대한 북풍이 몰아닥쳤다.
"힐텟페! 힐텟페 귀네비어 윈느!"
수녀원장은 그 북풍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한껏 못마땅한 눈으로 이 도시의 위대한 작곡가를 쏘아보며 대응했다. 이런 곳까지 온 이유라곤 하나뿐일테다.
"무슨일로 오신거죠.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스스로가 뭐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 힐텟페를 내놔. 볼 일이 있어."
"안됩니다. 돌아—"
"…마에스트라?"
소란통에 의아해져 내려온 모양이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나무문 틈으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나타내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무나."
"…괜찮아요."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다시 나의 미욱함을 깨우쳐주러 온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천천히 일라이자에게 다가갔다. 일라이자 역시 다가왔다. 그리고 종이뭉치를 내밀었다.
"…이걸 가져왔어."
"…?…제…작품이네요. …뭘 하신거죠?"
"조금 손을 봤어. 좋은 부분은 표시도 해뒀고…"
"…엉망이네요."
작게 웃었다. 솔직한 평가는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아서 말했던 내용 쪽이겠지. 그런 그녀가 내 마음을 풀어주려고 애써 다시 읽어보았다니. …그 점마저, 스스로에게는 비참했다. 그래도 아까와 같은 괴로움은 아니었다.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고 늪에 발조차 담그지 않는 마음. 그리고 다소간의 안도감.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도 그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는 어리광같은 기분.
"네겐 가능성이 있어. 같이 고쳐보자. 함께 해보자."
"…………"
"…힐텟페, 내게 돌아와."
……하지만, 거기서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일라이자의 집으로 돌아와 문제의 푸가와 대면했지만, 이 독특한 음악의 문제는 여전했다.
"…악장이 대체 어디서 끝나는거죠?"
"끝나지 않아. 계속 흐르는거지."
"음악적 효과는요?"
"그런건 없어."
곤란한 표정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닌 것인지, 일라이자는 설명을 덧붙여나갔지만 그 또한 설명이라기에는 이미 어떤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각 악장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거야."
"넌 올바른 형식이란 거에 얽매여 있어. 내면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어봐."
"내면의 목소리요…"
이 복잡한 음악이 당신의 내면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넌 바깥의 소리를 너무 많이 들어. 내면의 침묵을 들어봐. 음과 음 사이의 침묵…"
"그렇게 빈 소리가 있어야 네 영혼도 거기서 노래할 수 있게 될 거야."
분명 그녀의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내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결국 큰 진척은 하지 못한 채로 둘 다 토론, 혹은 일방적인 강의에 지쳐 데이베드에 기대어 있으려니, 일라이자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바닥에는 푸가의 악보가 널려있었다.
"…힐텟페. 네가 내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
"난 공포 속에서 살았어. 혼자였으니까. 죄수처럼… 그리고 네가 왔어. 난 음악을 통해 널 만났고… 넌 날 해방시킨 열쇠지."
…좌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음악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도, 존경하는 마에스트라도 버릴 수 없는 한,
결국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악보와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새로운 음악을 알 수가 없었다.
연주하고, 적고, 고치고…
그래도, 그래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위대한 마에스트라는 지휘를 도와주는 이 없이도 그 사중주 푸가의 지휘를 해냈지만, 대만족했지만—
청중도, 대공도 반응은 싸늘했고, 힐텟페도... 일라이자의 방식으로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일라이자는 비교적 평온한 얼굴로 괜찮아, 라는 말과 함께 쓰러졌다.
그 뒤로는 그녀를 간호하는 것이 내 음악이었다.
그리고 어느날 잠든 일라이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기묘하게도 전과 같은 거리감도, 질투도, 환상도, 동경도, 나를 불태우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녹아 한데 뭉쳐 단단해진 것만 같았다. 오랜 간호에 지친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감각과는 달랐다.
마에스트라의 가장 위대한 영광의 순간을 보았고 홀대받는 순간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내 자신은 그녀의 빛을 놓친 적이 없었고, 잊은 적도 없었고, 홀대한 적도 없었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었다. 세상의 소리 같은 건 그녀를 듣는 자리에 끼워놓지 않았다. 그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상에서 나를 찾는 다른 모든 소음을 잠재웠다. 이것이 그녀가 말했던 내면의 침묵일까. 음과 음 사이의 침묵일까. 한번 찾아온 침묵은 마치 덧셈을 배운 어린아이처럼, 그녀가 건강해진다 해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나는 이 순간 그저 하나의 생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마찬가지로 하나의 생이자 음악인 일라이자 캐서린 랜싱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실은 아마 계속 그래왔다. 내가 소음들로 나를 불태우는 동안 일라이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듣지 못하고 있던 것은 사실 나였다. 그리고 이제 일라이자가 어떤 푸가를 들었던 것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마의 물수건을 갈아주자, 잠에서 깬 듯한 일라이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언젠가 물었던 질문을 다시 던졌다.
"너는 왜 내 곁에 있는 거지?"
이제는 대답할 수 있다.
"당신을 들었어요."
분홍색의 봄꽃이 천천히 꽃망울을 깜빡였다. 은빛 대지에서 피어나는 듯 빛나고 있었다.
"…아직도 겨울인가?"
"…아니요."
"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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