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란에 대한 검색 결과
Azuraste by Aleksei German SF / Russia / 2013 / 177min / 18+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었다. 물방울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일정하게 양동이 위로 떨어졌다. 썩은 나무의 퀴퀴한 악취가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바닥에는 비를 피하려 기어 들어온 발 여러 개의 불청객들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 지구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들이 형장에 고인 핏물과 시체, 눅눅한 빵 부스러기, 시든 야채, 무얼 넣고 끓였는지 흔적도 채 남지 않은 국물 찌꺼기 따위를 먹고 자란다는 점이었다. 쥐들은 진흙 묻은 발로 식탁 위를 쏘다니면서 그릇을 엎어 놓았다. 버터는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더럽혔다. 어쩌면 버터가 아니라 회색돌격대가 군홧발로 진흙을 헤치는 소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새처럼 끔찍하게 우짖고, 새는 단말마와 함께 화살에 맞아 추락한다. 멀리 창밖으로 목 매달린 시체가 빗물에 절어 썩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천 파섹 너머의 지옥이다. 지옥은 아르카나르Arkana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스테리다는 짧은 신음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르카나르 왕국에 도착한 뒤로 한시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 일이 없었다. 시험역사연구소에서 파견되었을 때 ‘돈 스바보다’ 라는 거창한 이름을 받았지만, 지구에서는 그가 ‘돈’인지 ‘도나’인지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이 행성에서 ‘도나’ 보다는 ‘돈’이 운신의 자유가 있기에 부여받은 것에 가까웠다. 이발사라는 직종도 이름의 주인이 가진 직종에 불과했다. 이루칸 사람. 몰락한 귀족. 살고자 천직으로 떨어진 사내. 본래의 스바보다가 누구인지는 지구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스테리다가 왕국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지구로 보내는 일이었다. 왼쪽 눈에 박힌 목재 의안 형태의 카메라는 그가 깨어 있는 동안 항상 머나먼 행성에서 지구로 봉건 사회의 발전상을 전송하고 있으며, 종종 이루칸의 지인들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지구의 정보원들과 만나 서로 아는 바를 공유하기도 했다. 데이터가 쌓이고, 과학의 선구자가 늘어날수록 이 야만적인 수백 년 전 지구의 형태를 한 국가도 결국은 르네상스와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이다. 과학적 공산주의가 실현된 지구와 같이…. 요컨대 아스테리다 피오닐은 천 파섹 너머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자 아르카나르의 무수한 ‘신’들 중 하나다. 물론 그가 자신의 권능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고 있느냐는 미지수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시험과학연구소의 학자이자 동시에 난폭하고 망나니 같은 수백 년 전의 다른 행성 주민의 입을 다물게 하고, 머리털을 밀어서 내보내야 하는 직무도 주어져 있다. 말인즉슨,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침부터 뭔 개소리를….” 이런 헛소리를 상대할 의무도 있다는 뜻이다. 돌격대원은 이발소에 들어서서 투구를 내리고, 얼굴을 덮는 사슬 복면을 벗었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무리 몇은 남아 있던 손을 진흙발로 걷어찼다. 나무 의자가 기우뚱거리며 넘어졌다. 이 시간이면 학자나 문인들을 붙잡아서 교수대에 걸거나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못할 때까지 진흙탕이나 늪에 처박고 있을 참이었다. 챙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튀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얻어맞은 남자는 마구잡이로 자라난 머리칼을 휘날리며 코를 감싸 쥐고 달아났다. 아스테리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격대원을 쏘아보았다. 탁한 은색 머리카락이 가죽 모자를 비집고 쏟아져 내렸다. 단정하고 선이 가느다란 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돈이랑 볼 일 없으니 나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 저는 당신을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용무는 없습니다.” “들어오자마자 깽판을 쳐 놓고 무슨 소리야?” 돌격대원은 주위를 한 번 둘러 보고는, 뒤늦게 갑주 차림의 무뢰배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리한 칼날이 천을 자르듯 주위는 빠르게 침묵했다. 대원 몇이 바깥으로 나가 피범벅이 된 낯짝의 남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겁에 질린 남자의 얼굴 위로 천이 덮어씌워졌다. 건틀릿이 우악스럽게 천을 쥐고 걸레질하듯 마구 닦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코가 깨졌으면 저기 이발사에게 잘라 달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이봐, 그러다 얼굴도 곪아서 터지겠네. 하하!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대원들은 곧 바깥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아스테리다에게 인사했다. “돈을 놀라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지금 사람을 패 놓고 그게 문제야?” “예.” 돌격대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이프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스테리다는 눈앞의 돌격대원을 후려치는 대신, 제 손아귀에 남아 있는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에 집중했다. 그딴 식으로 굴면 내쫒을 거예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돈. 불경한 이단자들 때문에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서 벌인 작태일 뿐입니다. 아스테리다는 코가 깨진 남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포에 질린 낯으로 사과받는 꼴을 보고서는 불쾌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실랑이를 벌여 봐야 제 턱 밑에 앉은 여인만 불편하게 될 일이다. 무혈관여 원칙은 건재하다. 먼 과거의 제국주의자들과 달리 그들은 이 세계의 혼란에 개입할 수 없다. 이미 사라진 종교의 유일신조차도 물로 인류를 벌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니, 이 행성의 신보다도 신다워야 하는 정보원들은 그에 걸맞는 신격을 보여야 할 것이리라.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인의 머리칼을 손보는 동안 그의 가게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빗방울은 세차게 천장과 문을 때렸다. 박자를 맞추듯 고기와 지방 덩어리를 마구 두들기는 듯한 잡음도 섞여 있었다. 문틈 사이로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렸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발사는 지금 바빠서 말이야. 대신 우리가 그 멍청한 다리 좀 봐주지. 식자 양반! 실상 그들은 장관이 기르는 회색 돼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돼지우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가축은 가장 먼저 도살되기 마련이다. 아스테리다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돌격대는 막 사냥을 끝낸 고대 수렵민족들처럼 크게 웃었다. 빗방울은 투구 위를 거세게 때리다가 느닷없이 그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돌격대장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스테리다를 응시했다. 탁한 녹색 눈동자는 서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구경한다기보다는, 감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른쪽 눈알에 박힌 카메라로 행성의 모든 것을 읽는 연구원들처럼. 사박, 하고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 나갔다. 아스테리다는 손에 그러모은 머리털을 바닥에 대강 쏟아 버렸다. 결국 못 참겠다는 양 한마디 내뱉는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좀 쳐다봐요. 이 사람도 난감해하고.” “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나가서 기다릴까요.”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스테리다는 화를 삭히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가 깨진 남자가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들었다. 당신 때문에 자꾸 움직이니까 빨리 안 끝나잖아요. 나가 있어요. 좀. 불편하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마치 아스테리다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듯한 무감정한 어조는 아스테리다의 화를 돋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남자만이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지켜 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돌격대장은 나가긴 커녕 울타리를 거니는 짐승처럼 느리게 가게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적어도 이쪽을 바라보지는 않아서인지 면도칼을 놀리는 손이 조금 더 바빠졌다. 한참 만에 정돈된 두발을 짧게 훑고는, 아스테리다는 그 불행한 남자를 바깥에 놓아 주었다. 죄송해요. 이번엔 뭐 따로 안 받을 테니 얼른 들어가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깽값이라도 대신 받은 셈 치던가요. 남자는 찜찜한 낯으로 돌격대장과 아스테리다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돈!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금 짧은 소나기가 흙탕물에 꽂히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문제의 그 회색 마귀떼와 수괴였다. “용건만 말해요.” “말씀드렸듯이 돈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전 돈과 약속 잡은 적 없는데요.” 돈 아주라.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출신 불명. 베스파시아누스의 17대손으로 입양. 남성. 그러나 아들이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불명확한 출생 때문이라고 지껄인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아주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서 온 것뿐입니다.” “영업 끝났어요.” 아스테리다는 싸늘한 얼굴로 돌아섰다. 이 야만스러운 세계에서 폭력과 살인은 흔한 일이지만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백여 년 전 한 시대를 광증으로 몰아넣은 파시즘의 산물에 가깝다. 아주라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스테리다를 다시금 불렀다. “돈 스바보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제게 진노하시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이 제게 알려 주십시오. 제가 시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시정하겠습니다.” “말했잖아요. 사람을 패 놓고 지금 그게….” “돈은 대주교, 아니, 장관께서 얼마나 비통한 심정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불한당을 솎아내는지 모르실 겁니다.” 회색 무리의 대부분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 형제, 심지어 부모조차도 기꺼이 고문할 수 있는 악랄하고 끔찍한 인간들이었다. 아주라에게는 소위 혈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는 거리낌 없이 지식인을 뒷간에 처박고 목을 매달았다. 챠우셰스쿠의 아이들, 혹은 돈 레바의 아이들…. 한순간이지만 아스테리다의 얼굴에 역겹다는 표정이 스쳤다. 길게 기른 앞머리 사이로 색칠한 의안이 번뜩였다. “지금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문간에서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말하려는 거야?” “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가 아니라….” 사람들은 염색한 나무 구슬에 박힌 밝은 회색 덩어리를 ‘신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것의 정체를 아는 자는 같은 정보원 외에는 없으나, 회색빛을 띄는 보석은 도무지 이 시대의 세공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신이 내린 물건이 아닐까. “…… 그런 자들이 신을 모독하고, 역겨운 선전물과 기이한 마술로 혹세무민하는 작태를 두고 볼 수 없기에….” “입 다물어!” 아스테리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 냈다. 돌격대장은 장관을 제외한 모든 이의 머리 위에 군림하듯, 무감한 낯으로 쇠망치를 휘둘렀으나 ‘돈 스바보다’를 상대로는 순한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꼭 아르카나르 장관이 아스테리다라도 된다는 양 가증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한테 뭔가 빚진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들한테나 그렇게 대하라고. 그런데 너는….” “그 사특하고 천박한 자들이야말로 돈이 저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모릅니다.” “입 다물라고 했잖아!” 아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낮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돈. 아스테리다는 염증을 느낀 듯 손님을 앉혀 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중세인을 상대로 22세기 지구의 상식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정도가 지나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물에 빠진 부랑자를 주워 보살펴서 내보냈더니 몇 년 만에 감투를 쓰고 폭력을 휘두르질 않나, 그 와중에 자신에게는 꼭 어미 오리를 쫒아다니는 아기새처럼 퍽 공손하게 부르는 짓거리야말로 아스테리다를 미치게 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새 단검이며 우유, 라드 따위를 갖다 바치는 것은 덤이었다. 대개는 며칠 전에 매달아 태워 죽인 시체가 남긴 유산이었다. 아스테리다는 스스로 신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떠벌인 바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스테리다가 신이라도 되는 양 공물을 바치고, 만나길 청하며, 그의 호의와 애정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돈.” “나가라고.” 아주라는 변명하는 대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었다. 짐승 무리의 우두머리는 서글픈 눈으로 신을 바라본다. 아스테리다는 역겹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털은 깔끔하게 정리하려 해도 피와 체액에 엉겨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제발 사람 좀 살려 주시오, 돈! 예에. 잠시만 기다리시죠. 아스테리다는 어제 부숴서 뽑은 잇조각을 주우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주라는 여전히 무장을 한 채 자리에 서 있었다. “안 나갈 거야?” “…….” “할 말 있으면 해. 뭐 마려운 개처럼 쳐다보지 말고.” 아주라는 대답 대신 아스테리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스테리다는 경계하는 낯으로 뒤로 물러났다. 키 차이 때문인지 아주라의 보폭이 훨씬 더 넓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아스테리다의 뒤로 핏자국만 간신히 닦아 낸 지저분한 나무 벽이 보였다. 아주라는 아스테리다의 손을 잡았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잇조각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이거 안 놔? 미친 놈아! 아스테리다는 억지로 빼내려는 듯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아주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몸을 숙여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오래도록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딴에는 애정 표현이랍시고 한 짓거리처럼 보이지만, 진득하게 가라앉는 늪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이 유달리 섬뜩했다. 아스테리다가 빈손으로 아주라를 밀치듯 손을 뻗자 비로소 아주라는 잡은 손을 놓았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오지 마. 미친 개자식아! 아스테리다는 비에 젖은 투구 뒤편으로 소리쳤다. 문 너머에서 흠칫거리며 회색돌격대에게 길을 내주는 사람 몇이 보였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추레한 몰골이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려 맨땅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The Other Side by Yorgos Lanthimos Fantasy, Romance / USA / 2023 / 161min / 18+ 1 호텔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였다. 계절이 가을이었으므로 해가 지고 있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종류는 다양하지 않았다. 주로 세 가지로 나뉘었다.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짝을 찾아 다시 도시로 돌아가리라 생각하는 사람들. 둘째, 짝을 찾고는 싶지만 자신은 없는 사람들. 셋째,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들. 사무엘은 자신이 둘째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셋째일지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아내가 이혼을 선고한 시점에 뭔가를 포기한 사람이 되었다. 누구도 당신을 사랑해주지 않을 거야. 당신은 끔찍한 사람이야. 사무엘은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십 년간의 결혼생활 동안 섹스를 열 번도 안 했고 키스는 더욱이 하지 않았으니 세간에서 말하는 ‘좆같은 결혼생활’의 조건에 그보다 더 해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아내와 자신은 애초에 열렬히 사랑한 적도 없었으며 단지 동물이 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관계였다는 게 그 변명이었다. 그런 관계에 걸맞을 정도로는 헌신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잘 안 됐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되잖아. 그 정도가 좋잖아. 정말로 마음을 둔다는 건 언젠가 버려지고 상처받는 것까지 각오한다는 거니까. 그런 용기를 어떻게 가져. 그에게 제일 중요했던 건 그냥, 정상인으로 보이느냐 아니냐였다. 동물의 세계에서 벗어나 인간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그 조건을 달성하고 잘 살아가고 있는가…어디 잘못되지 않은 사람처럼. 그런데 이제 다 틀렸지. 사무엘은 그 정상성의 세계에서 쫓겨난 참이었다. 멀쩡한 세계는 그를 걷어차듯 쫓아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짐승의 땅 위에 있었다. 호텔 지배인이 말했다. 어떤 동물이 되고 싶으세요? 사무엘은 지배인의 코를 쳐다보며 말했다. 타인의 눈을 제대로 보는 것은 아직도 어려웠다. 민달팽이요. 오, 보통은 다들…개를 고르시던데. 개는 너무 친절한 생물입니다. 민달팽이가 어울리잖아요, 저한테는…. 사무엘은 호텔 안에서 친구 두 명을 만들었는데(그의 인생에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극단적인 환경은 사람들 사이의 친밀감을 극대화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한 명은 사귀어주지 않는 여자들에 대해 욕을 하는 사람이었고 한 명은 동물이 되기 싫다고 매일 우는 사람이었다. 사무엘은 우는 사람과 조금 더 친해졌다. 우는 사람은 어느 날 속삭였다. 호텔 뒤에 숲이 있대. 거기에는 외톨이들이 산대. 거기서는 사랑을 하지 않아도 좋다잖아. 사무엘은 생각했다. 그거 낭만적이군. 2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그 ‘외톨이’라는 사람들은 곧 사냥감이었다. 호텔에서는 주기적으로 단체 사냥을 나갔다, 그들을 잡으러 가는 것이었다. 애정의 의무에서 도피한 사람들을 잡아다 바치면 동물이 되는 날짜를 미룰 수 있는 구조였다. 한 사람당 하루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이해하지 못할 바도 아니었다. 정부 입장에서는 반란군이니까. 잡혀 온 외톨이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취총을 쏴서 잡아오는 것이었으므로 이후의 처우가 정해져 있을 텐데, 누구도 자세히는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 동물이 되지 않았을까, 다들 그렇게 짐작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곳은 혼자인 사람들을 전부 짐승으로 바꾸어 버리고 외톨이들은 혼자가 되기 위해 도망쳤던 사람들이니까. 사냥을 갈 때는 다같이 버스를 타고 갔다. 꼭 셔틀버스에 탄 애새끼들 같은 모양으로, 성인들이 짐짝처럼 꾸역꾸역 쑤셔넣어져 덜컹거리며 숲까지 이동했다. 사무엘은 그 사냥이라는 것에 참가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건 의무였다.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만큼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무였다. 때문에 나가기는 하되 아무도 잡아오지 않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동정심이나 인륜을 이유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꺼림칙함,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메스꺼움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어쨌든, 무슨 이유로든, 잡아오지 않은 것은 않은 것이었으므로, 사무엘은 단 하루도 유예받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의 시계가 늦춰지는 동안 그의 시간은 계속해서 갔다. 21일, 18일, 14일.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사무엘이 민달팽이가 되기까지 12일이 남았을 때에 시작된다. 3 12일이 남은 날도 사냥의 날이었다. 마취총을 쏘는 소리와 짧게 내지르는 비명소리 가운데에서 사무엘은 또 멍청하게 서 있기만 했다. 이런 사냥의 시간이 되면, 그는 주로 큰 나무 옆에 서 있었다. 그러면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았다. 위장술 같은 거였다. 나무 옆에선 안정감마저 들었다. 발밑의 진흙은 축축했고 빗물이 남아있는 잎들은 썩 괜찮은 냄새를 풍겼다.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사무엘은 이런 식으로 멍하니 숲 냄새를 맡으며 서 있다가 시간이 다 되면 돌아가는 사람들의 무리에 휘적휘적 섞이고는 했다. 아무도 그를 지적하지 않았다. 지적할 만큼 그에게 관심을 둔 사람이 없었는지도 모르고. 그걸로 괜찮았다. 그러니 그는 정말이지 평소처럼 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지만 사람이 늘 똑같이 행동한다고 세상도 똑같이 돌아가주지는 않는 것이라서, 이 날 사무엘은 갑작스럽게 머리채가 잡히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누군가가 그렇게 머리카락을 틀어잡고는, 대가리를 나무에다 곧바로 처박았다.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났다. 피. 비린내. 쓰라림. 사무엘은 잘 벌려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고 외쳤다. 아니, 저 호텔 사람입니다. 호텔에서 왔어요. 옷 보면 알잖아요. 손의 주인은 그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손은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자신이 잡은 얼굴을 바위 앞까지 끌고 갔다. 손질되지 않은 암석은 날카롭고 더러웠다. 바위가 가진 특성들이 이상할 만치 시야 안에 선명하게 잡혔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이 들었고, 사고는 그 반대로 빠르게 흘러갔다. 이 위에 대고 얼굴을 몇 번 내리친다면 분명 코가 부러질 거야,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코가 부러지고 얼굴이 부은 채로, 옷이 벗겨져서 돌아간다면? 외톨이들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인간과 구분되는 외형적 특징을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얼굴만 잘 훼손한다면 호텔의 고객을 그들로 위장시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그렇게 되면(진실이 어떤지와는 상관없이) 한 명 분의 성과를 올리는 거고, 그 대가로 하루를 더 유예받겠지. 나는 동물이 되고…. 손의 주인은 그걸 노리는 것 같았다. 물론, 필사적으로 인간의 삶을 유지하려 한 적은 없었다. 필사적이었다면 사냥에 적극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사무엘은 따지자면 포기한 축에 조금 더 가까웠다, 남은 시간동안 마음이나 잘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갑작스레 찾아온 끝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운명을 받아들인 것과 지금 당장 동물이 되는 건 좀 다른 문제였다. 남은 시간을 이런 식으로 몽땅 빼앗기는 것은 억울했다. 고작 12일인데 그걸 뺏들어 가다니, 그 동안 편지도 쓰고 책도 읽으려고 했었단 말이야. 나도 내 인생에 작별 인사 정도는 해도 되는 거잖아. 그럴 시간을 뺏어가면 안 되는 거잖아. 억울함이 성대 끝까지 가득 차자, 호텔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거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말이 튀어나왔다. “살려 줘.” 그러자 머리채를 잡았던 손이 풀렸다. 잠시 동안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자비를 베푼 건가? 하지만 자비를 베풀 만한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식으로 굴지도 않았을 거였다. 그러면 변덕? 다른 목적? 혹은 더 좋은 방법을 찾았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무엘의 의문은 곧이어 들려온, 몸뚱이가 쓰러지는 소리로 해결되었다. 방금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게 굴던 사람이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꼴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눈을 치뜬 채로 마취된 얼굴은 호텔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지, 콜린, 재스퍼…잘 기억이 안 나. 고개를 푹 숙인 채 숨을 몰아쉬는 사무엘의 팔을 누군가가 잡아당겼다. “일어나요.” 그 말과 함께 강제로 일으켜진 다리가 땅을 딛었다. 계속해서 숙인 채였던 고개를 들자. 거기에 레프가 있었다. 4 훤칠한 키, 눈에 띄게 잘생긴 얼굴, 가짜 같을 정도로 정돈된 목소리, 관리하지 않으면 헝클어지기 일쑤인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송곳니,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에서 언제나 발을 뗄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구는 태도. 레프는 외톨이들의 일원이었는데, 왜 도시에 있지 않고 이곳까지 온 건지 누구도 모를 정도로 잘난 남자였다. 당신 정도 얼굴이면 말야, 골라잡아서 사랑에 빠질 수도 있을 텐데 왜 굳이. 다들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맞춰 줄 걸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레프는 그냥 웃었다. 글쎄, 난 사랑 같은 거 안 할 거야. 정말이에요. 그리고 그는 입이 꿰매어진 여자를 가리켰다. 핏빛 키스라는 거예요. 입을 짼 뒤에 그 상처를 서로 비비고 문지르게 하지. ‘놀아나면’ 저렇게들 되더군요. 물론 난 저게 무서워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여자에게도 충분히 들릴 만큼의 성량으로 말했기 때문에, 가리켜진 여자는 고개를 숙였다. 수치에 대해서 반성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여기에서는 사랑이 수치였다. 속죄의 광경을 보던 사무엘은 문득 물었다. “그럼 뭐가 무서운데요?” “의존하게 되는 거.” “과연, 일리가 있네. 기피할 만한 일입니다.” “당신은?” “저요?” “당신은 무섭지 않나요?” “무섭지.” “그럴 줄 알았어. 무섭지 않은 사람들은 호텔에 잘 적응하거든…그래서.” “응?” “그래서, 당신은 뭐가 싫냐고요. 사랑의 다양한 속성들 중에 말이지.” “시적으로 말하시는군요.” “알아요. 그리고 당신은 대답을 피하고 있지.” “이런, 그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나는…….” “나는?” “버려지는 게 무서워요. 마음을 둔다는 건 그 이후에 버려질 것도 각오한다는 거잖아.” “하하, 그런가? 걱정이 많네.” “예전부터 그런 편이었습니다, 난.” “인생 힘들게 살았겠군.” “당신만 할까요.” “내 인생이 어땠는 줄 알고?” “미인은 힘들게들 산다니까.” “세상에. 말했잖아요. 여기서는 플러팅 금지예요….” “그런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숲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꼭 맞았다. 도시는 사랑할 상대를 찾아야 하니 사람들 간의 교류가 잦아야만 했고 인간들은 그 교류 속에서 자연스럽게 계급을 정했다. 상대를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나 돈이 썩어넘치게 많은 사람들이 계급 상위에 있었고 사무엘같은 사람들은 바닥보다 더 낮은 곳으로 밀려났다. 그 위치에 불만을 제기하면 이상한 새끼가 됐다. 숲은 달랐다. 고요하고 자유로웠다. 동물(한때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이 있었고 나무가 있었고 가랑비가 있었다. 누구를 배우자로 삼을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숲 생활을 하면서 제일 자주 말을 섞게 되는 것은 레프였다. 사무엘을 제일 처음 숲으로 데려와준 게 그였으므로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덕에 사무엘은 그에 대해서 제법 다양한 것들을 알게 됐다. 부모님이 어릴 적 돌아가셨다는 것, 어머니가 먼저 죽고 개가 된 아버지가 따라 죽었다는 것, 어머니는 기차 사고로 죽었다는 것, 자신이 그 기차에 올라 있는 꿈을 자주 꾼다는 것. (꿈 얘기를 할 때에는 농담조로 덧붙였다. “이런 얘기 잘 안 하는데, 특별하게 생각하도록 해요.”) 호텔에 있었을 때에는 나중에 변할 동물로 새를 골랐었다는 것까지. “종류가 뭐였나요?” “극락조.” “극락조도 그 안에서 많이 나뉘는데. 아스트라피아속, 파로티아속, 로포리나속…그리고 속들 아래에서 또 종으로 분류되고요.” “거기까진 듣고 싶지 않았어.” “뭐, 일단, 극락조.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새였습니까?” “자유로워 보이잖아.” “진부하네요.” “난 진부한 인간이에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 애쓴 적조차 없지.” 그걸 들으면서 사무엘은 생각했다. 제일 진부한 이야기가 되려면 우리는 여기서 사랑에 빠져야 할 텐데요……. 5 가끔씩은 도시에 나갔다. 아멜리아(이것은 외톨이 무리를 이끄는 사람의 이름이었다.)의 부모에게 그녀가 도시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거짓말을 할 겸, 생필품을 살 겸 나가는 것이었다. 아멜리아의 부모는 까다로워서, 딸이 도시로 나가 사귄 친구나 동료들을 집까지 데리고 오길 원했다. 그러니까 증거를 내놓으라는 거였다. 외동딸을 둔 부모들은 으레 집착적이다. 흔한 일이었다. 그런, ‘정상인‘ 연기를 하는 데에 차출되는 것을 누구라고 달가워하겠냐마는, 외톨이들은 모두가 아멜리아에게 어느 정도의 빚을 지고 있었으므로, 도시에 들를 인원 명단이 확정되었을 때 명단 중 누구도 거절의 말을 뱉지 않았다. 그 인원 안에 포함되면 생필품 이외의 개인 물품을 몇 가지 사 올 수 있다는 특혜도 순응의 이유가 되긴 했다. 그리고 특혜의 목록에는 사무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프도. 사실 레프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 누구라도 레프를 데리고 가고 싶었을 것이다. 도시로 갈 때면 레프는 사무엘이 이때까지 본 것들 중 제일로 아름다운 것이 됐다. 방수포도 없고 사람을 너절히 보이게 만드는 진흙도 없으니까 꼭 신이 편애해서 6박 7일간 온 정성을 다해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보였다. 아멜리아의 부모 앞에서 사무엘은 그 인형 같은 레프와 짝이 되어 연인 연기를 해야 했는데,(다들 역할이라는 것이 하나씩 있었다. 저쪽은 내년에 결혼을 앞두고 있는 예비 신랑, 이쪽은 일 년 전에 결혼한 신혼부부, 뭐 그런 식이었다.) 대부분의 대사들은 레프가 맡았다. 그는 분명 연기에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준비된, 때로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대사들은 전부가 진짜 같았다. 아멜리아의 부모는 매번 기꺼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진심을 다해 속아 주었고 자신들은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싫어하지 않아요, 저희는, 정말로요. 주변에 하나쯤 있으면 좋죠. 다양한 인생을 볼 수 있잖아요. 지금처럼요. 그리고 게이들 취향은 세련된 편이니까 인테리어라든가, 뭐 그런 얘기를 물을 수도 있고. 레프가 그런 말에 사람 좋게 웃으면서 물론이죠, 다음엔 카탈로그라도 가지고 올까요? 라고 대답하는 동안 사무엘은 그냥 아가리를 닥치곤 했다. 6 도시에 갔다 돌아온 어느 날엔가 아멜리아는 말했다. 자기가 여길 세운 건 다름 아닌 영원을 위해서라고. 여기야말로 이상향이라고. 그 날 낮에, 도시에서, 아멜리아의 부모는 평소 같은 온화한 목소리로 외톨이들에 대한 얘기를 했다.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잖아요.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졌어요. 역사 내내 다른 사람과 함께 지내왔는데 이제 와서 혼자들 지내겠다니, 끔찍한 인간들. 체계를 붕괴시키고 있어요. 출산율은 감소하고 도시는 멸망을 바라보게 되겠죠. 그런데도 자기들 좋자고 그러고 사는 거예요. 피도 눈물도 없는 게 분명해. 사무엘과 레프에게는 그 말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렸지만(너무 그렇게 들려서 돌아오는 길에 농담도 했다. “저 피도 눈물도 없어 보이나요?’ ”조금은.“) 아멜리아에겐 좀 달랐던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타인에게 듣는 말과 부모에게 듣는 말은 좀 다른 구석이 있을 수밖엔 없는 것이었다. 위스키 세 잔을 연달아 들이킨 그녀는 드물게 감상적인 태도로 어린 시절 얘기를 늘어놓았다. 함께 있어서 싸운 부모. 함께 있어서 불행했던 날들. 차라리 따로 살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였다면 겪지 않아도 됐을 일들. 그건 꽤 슬픈 축에 드는 이야기여서 사람을 축축한 기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다들 건배를 했다. 우울한 기분에 빠진 여자를 위로하기 위해서 연신 잔을 부딪혔다. 그게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 없단 건 알았지만 그런 일이라도 해야 했다. 체계를 뒤엎을 수 없어서 도망치고, 체계를 뒤엎을 수 없어서 숲에서 살아가듯이.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그날 밤 잠들기 전에, 레프는 말했다. ”부모가 너무 사랑을 해도요. 나처럼 될 뿐인데.“ ”그게 또 그러네.“ ”하지만 아까 그 자리에서 얘기하긴 좀 그랬죠.“ ”했다간 한 소리 들었을 거야.“ ”의외로 눈치란 게 있군요…….“ ”이 정도도 없어서야 어떻게 살아갑니까.“ ”아버지가 개가 됐단 얘기도 했었지, 내가?“ ”했었지.“ ”그 개가 왜 죽었는지도?“ ”거기까진 아니.“ ”굶어 죽었어요.“ ”당신이 안 돌봤어?“ ”묘하게 비난조가 되는군요. 아뇨. 어머니 무덤 앞에 가더니, 비석 앞에 드러누워서는, 아무것도 입에 안 댔지. 그게 이틀이 되고, 나흘이 되고, 일주일이 되니 몸이 배기나.“ ”…….“ ”표정 왜 그렇지. 이것도 동물 죽는 얘기다 이건가요.“ ”어느 정도는.“ ”어쨌든, 의존하는 거 무섭다고 말했잖아. 난 그 꼴이 되기 싫은 거예요. 너무 의존하면 없어졌을 때 제대로 못 살게 되니까.“ ”그건…….“ ”그건?“ ”그건 결국 남겨지는 게 무섭다는 말이군요.“ ”맞지.“ ”버려지는 게 무섭다는 말하고도 같고.“ ”음.“ ”우리 닮았을까요?“ ”아닐 걸? 그런 끔찍한 얘기 하지 말죠.“ ”끔찍한 얘기라니, 공감대잖아.“ ”난 동물 안 좋아해요. 당신이 잘 한다는 독일어도 모르죠. 내 미래의 후보에 민달팽이는 끄트머리도 넣은 적 없고.“ 말들이 흐르는 동안 사무엘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귀 안으로 들어오는 말소리는 무언가로부터 도망치는 투였다. 그는 모포 아래로 기어들어갔다.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자신의 입도 열었다. ”옛날 얘기 해 줄까요.“ ”아내랑 이혼한 건 아는데.“ ”그것보다 더 예전.“ ”나한테 아직 얘기 안 한 게 있어?“ ”이런, 저 이때까지 말을 너무 많이 했군요?“ ”그렇지. 하지만 조금 더 해 봐요.“ ”당신은 모르는 부분을 못 견디는 구석이 있네.“ ”어서.“ ”고등학생 때 일인데.“ ”응.“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뒤로 사무엘은 오랫동안 뭉쳐서 저 멀리 굴려 두었던 이야기를 했다. 자세한 상황들은 생략되고 거대한 가지만 남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가지만으로도 세세한 것들을 전부 짐작할 수 있는 종류의 얘기기도 했다. 18살 시절. 으레 만들어지는 사람 사이의 계급. 한번 밉보였다는 이유로 받아야 하는 긴 시간의 폭력. 어디에나 있는 것들. 이제는 너무 흔한 일이 되어버린 것들. 그래서 말하기 더 창피한 것들. ”이름이 뭐였는데?“ ”윌리엄이었어요.“ ”흔한 이름이군.“ ”아내도 이걸 다 들었어요. 그리고 자기는 그런 식으로 날 버리진 않겠다고 했어. 그래서 이 사람하고는 오래 갈 수 있겠다 싶었지.“ ”그런데 가 버렸군요?“ ”그런데 가 버렸지.“ ”이런 거 나한테 알려줘도 돼요? 이런 것들은 약점이 되잖아….“ ”괜찮아요. 왜냐면….“ ”잠깐, 말하지 마.“ ”응.“ 그리고 나뭇잎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모포 아래에 있던 것들이 움직이는 몸에 깔린 것이었다. 사무엘은 그렇게 몸을 움직여서 레프의 옆에 붙었다. 레프는 도망가지 않았다. 안색이 좋지도 않았지만. 7 사무엘 고든은 사랑이라는 걸 몰랐다. 그야 해본 적이 없으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사랑일까? 입을 맞추고 싶어야 사랑이야? 아니면,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8 언제부턴가는 핏빛 키스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건 무서운 일이었다. 피해가고 싶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사랑 같은 건 할 일이 없지. 2월의 겨울 낮에, 아멜리아는 여느 때처럼 사냥에 대해 공지했다. 내일 시작될 거야. 자기 몸 간수할 준비는 알아서들 해 놔. 덫에 걸리면 놔두고 갈 테니까. 사무엘은 일전 아멜리아와 같이 가서 파놓은 자신의 무덤을 떠올렸다. 몸만 누이면 바로 흙을 덮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구덩이. 죽은 자들만 갈 수 있는 제일 안락한 침대. 입이 길게 찢어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구덩이에 눕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사무엘은 아픈 게 싫었다. 멀리서 개가 길게 울었다. 어쩌면 한때는 사람이었을 개……. 사냥은 늘 하던 그 시간에 시작됐다. 사무엘이 호텔에 있었던 때와 5분도 차이나지 않았다. 누구는 함정을 파고 누구는 공격을 했지만 사무엘은 이때까지의 인생에서 늘 그랬듯이, 도망치는 쪽이었다. 사실 싸웠대도 별 도움 안 됐을 거였다. 그는 싸우는 것에 전혀 재주가 없었고 타인의 도움 없이 자기 목숨이나 잘 부지해 놓는다면 잘 한 축에 들었다. 그는 처음 숲에 오게 되었던 날을 반복하는 것처럼 뛰고, 다시 뛰었다. 동물들이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이곳에 당연히 서식할 만한 동물들도, 절대 이곳을 서식지로 삼을 리가 없어서 인간이 변한 모습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동물들도. 사슴, 토끼, 개, 공작, 원숭이, 매, 청설모, 그리고…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새, 화려한 새, 특이한 색깔의 새라고 말했을 것이었지만, 사무엘은 알 수 있었다. 호텔에 오기 전에는 수의사 일을 했으니까. 그건 극락조였다. 나무에서부터 나무로, 그리고 저 위쪽으로 날아가는, 다리가 잘려 와서 다리가 없다고 오해받았던 새. 평생을 땅에 내려앉지 않는다고 생각되어 붙여졌던 이름…그는 무언가 덜컥 두려워졌다. 뭘 두려워하고 있지? 뭐가 무서운 거야? 그렇게 생각했을 때, 다리가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쥐어짜이는 것 같은 소리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목구멍에서 새어나왔다.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이유는 명백했다. 덫이었다. 거대한 톱날이 다리를 뜯어낼 것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이름을 불렀다. ”사무엘.“ 하고. 그건 레프의 목소리는 확실히 아니었다. 숲 속에 있는 그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가빠지는 숨을 내리누르고서야 사무엘은 소리가 들린 쪽을 제대로 쳐다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친구가 있었다. 호텔에서 잠시 같이 지냈던, 잘 우는 사람. 호텔 뒤에 숲이 있대. 거기에는 외톨이들이 산대. 거기서는 사랑을 하지 않아도 좋다잖아. 그렇게 말했던 또래의 남자. 그는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가왔다. 그건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모습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머리가 차가워졌다. 사무엘은 구덩이에 눕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인간이 인간으로 죽을 수 있는 장소였다. 거기 가면 입이 찢길 일은 전혀 없을 거야. 그리고 더 이상 사랑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지. 응? 왜 이런 생각이 들었지. 나는 그런 고민을 했었나.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의식이 꺼지지 않았다. 마취총을 맞으면 금방 몸이 까라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너무도 멀쩡했다. 계속해서 숙인 채였던 고개를 들자, 거기에 (또다시) 레프가 있었다. 예전 그 어느 날에 그랬던 것처럼. 레프는 하얗게 질린 낯을 한 채였다.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가 속에서 뒤끓을 때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것 정도는, 사무엘도 알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알게 된 것이었다. 사무엘 고든은 사랑이라는 걸 몰랐다. 그야 해본 적이 없으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사랑일까? 입을 맞추고 싶어야 사랑이야? 아니면,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항상 같이 있고 싶어지는 것만으로도. 새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것만으로도. 옆에 있으면 따뜻하니까 항상 이러고 있고 싶다고 원하게 되는 걸로도, 그런 걸로도. 길게 뻗은 손가락이 다리에 닿았다. 긴 시간 끝에 톱날이 벌어지자 상처에 바람이 들이쳤다. 어딘가에서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는데 그게 상처 때문에 느껴진 것인지 정신 때문에 느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왜 나한테 왔어? 두고 멀리 갈 수 있었잖아. 그래도 상관 없잖아…상관 없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게 묻고 싶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피가 흘렀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대로 생각을 잇는 것이 힘들어지자 남은 것은 본능이었다. 비린내와 흙 냄새, 나무의 냄새가 뒤섞였다. ”괜찮아?“ 라고 묻는 누군가의 말만이 정신을 붙잡았다. 하지만 괜찮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괜찮지 못했다. 해서 사무엘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하는 대신에 레프의 손을 잡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이 다른 손바닥에 닿았다. 사람의 온도였다. 그건 남자가 어쩌면 사실은 평생 원해 오던 것이었고 때문에 그 찰나의 순간에도 의존하게 됐다. 그런데 레프가 말한 바에 따르면 의존한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말과도 같아서……. 그래서 기절하기 직전에 사무엘은 레프에게 입을 맞췄다. 세상에서 제일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은 했는데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았다. 레프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L로 시작하는 끔찍한 네 글자만큼은 저 구석으로 숨겼다. 그런 소리를 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지니까. 어떤 길로 가든지 다들 돌아갈 길을 예비해놓고 싶어 하는 법이다. 그래야 불안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사랑에 대한 문제에서마저 그렇다. 하지만 돌아가고 싶어하면서도 걷는 걸 멈추지 못한다. 그게 인생을 망가뜨린다. 9 얘기 끝에 나온 것은 도시로 가자는 결론이었다. 레프는 이번에도 거절하지 않았다. 입맞춤을 피하지 않았던 것처럼. 평생 누구도 옆에 둘 생각 없다고 말하던 사람치고는 생각보다 너무 순순했다. 그래서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두 명 모두가 정확한 단어는 입에 담지 않았던 것도 의심의 원인이 됐다. 하지만 그럴 때면 레프는 말했다. 있잖아, 내 미들네임 말이야. 알렉이에요. 그렇게 불러도 돼. 그런 게 빈약한 증거가 됐다. 모호하고 붕 떠 있는 것이었으나 그 안을 뒤지면 어떻게든 애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왜 구해줬냐고 물었을 때 레프는 ”나는 할 수 있으면 해요.“ 라는 답을 내놓았다. "난 ‘하고 싶었으니까.’ 를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하하, 그건 좀 과도한 기대지.“ ”후회해요?“ ”조금.“ ”내가 싫어서?“ ”아니.“ ”그럼?“ ”이제 무서운 걸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잖아…….“ ”마찬가지예요.“ 그런 대화, 그런 말들, 그런 말들을 할 때 레프가 짓는 표정. 불안하게 떨리는 목소리와 내면이 새어나오는 얼굴. 불러도 된다고 허락한 미들네임과 다를 바 없는 것들. 증거가 되는 것들.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야. 도시에서 하던 것과 달라. 사무엘은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믿고 생각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내일 버림받을 일이 무서워지고, 그건 너무 고통스런 인생이었다. 그는 고통스럽고 싶지 않았다. 아픈 건 싫었다. 둘만 있을 때는 종종 빈에 대한 얘기를 했다. 오스트리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 레프는 다녀온 적이 있다는 모양이었다. 도시에 가서 살게 되면, 나중에는 거길 가 보자고 했다. 빈에 가면 말린 오렌지가 올라간 커피를 마시고 칠이 벗겨진 마차를 탈 수 있다고, 아무도 없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에 서서 향수를 새로 뿌리거나, 말도 안 되게 비싼 보석을 파는 빈티지 가게에 들어가서 아무도 착용하지 않을 목걸이 하나를 사 볼 수도 있다고. 그 얘기가 나올 때면 사무엘은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모호한 믿음이 확신이 될지도 모른다.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식으로, 당연하게, 같이 살아갈 수 있을지도…그건 부질없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위안이 됐다. 언젠가 완전히 아프지 않을 수도 있다는 소리니까. 고유한 고통 같은 건 모두 사라진 삶. 10 그래, 고유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람 두 명은 결국 어느 달이 안 뜬 밤을 골라 숲을 떠났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그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기도 했지만, 기대와 믿음을 배신하고 애정을 선택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그런 도피를 비난하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쨌든 좋았다. 그게 발을 계속 움직이게 만들었다. 희망만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불행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서로를 껴안듯이 자라난 메타세쿼이아 사이를 지나면서 사무엘은 이 나무가 퍼지게 된 과정을 떠올렸다. 화석으로만 있는 나무인 줄 알았는데 어떤 사람이 숨어 자라고 있던 나무를 발견했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도 메타세쿼이아는 화석이었을 텐데. 우연과 만남이라는 게 죽은 식물을 화석에서부터 끄집어냈다. 이제는 다들 메타세쿼이아를 살아있는 나무라고 정의한다. 돌 속의 나무가 아니라. 사람도 그런 식으로 살아날 수 있는 걸까. 이때까지 죽은 것과 다름없이 살던 사람이라도. 그러면 그렇게 만난 사람이, 인생을 가져다줬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확실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으나 아니라는 답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밤의 숲은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구석이 존재했다. 달리던 다리를 잠깐 멈추고, 사무엘은 레프를 당겨서 속삭였다. 있잖아요, 나 당신이랑 만나서 좋아. 내 인생에서 가진 것 중에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레프는 웃었다. 그 소리를 꼭 지금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도망치고 있잖아요…. 그렇게 말했지만 그래도 계속 웃고 있었다. 사무엘은 생각했다. 말하지 않던 단어 하나를 말하려면 지금이라고. 그리고 덫에 걸리던 날처럼, 총소리가 들렸다. 마취총의 소음은 아니었다. 끝이 좋은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다. 사람들이 끝이 좋은 이야기를 보고 만족하고 싶어하니까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롯한 사실은 늘 쓰레기가 뒤섞인 시궁창 속에 있다. 사실, 도시로 가는 데에 성공했다고 해도 잘 살았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거기에 도착했다고 해도 싸우고 서로를 미워하고 의심한 끝에 누구 하나가 죽었을 수도 있다. 나머지 하나는 호텔로 돌아가고. 그 뒤에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어서 짐승이 되고.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까? 모를 일이다. 모든 게 좆되고 나서는 다들 그렇게 말한다지만. 11 피 냄새가 났다. 누가 쏜 거지? 사방을 둘러봤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총소리만이 또 한번 났다. 떠나온 장소의 방향에서부터 난 소리였으니 제대로 생각을 했다면 추격이 붙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을 할 정신이 없어서 사무엘은 그냥 몸을 웅크렸다. 기다시피 해서 레프의 옆으로 갔다. 경련하는 손으로 얼굴을 만지자 아직은 따뜻했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레프가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살인자에게 들리든 말든 사무엘은 레프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말했지만 그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말하면 안 될 상황에 말을 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하는 간단한 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소리와 침묵뿐이었다. 총에 맞은 건 자신이 아니었는데도 숨이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레프의 얼굴 위쪽을 더듬자 밤이슬에 젖은 정도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축축했다. 피가 거기서부터 나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를 관통한 총알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모든 게 갑작스러워서 눈물도 안 났다. 진짜 죽은 거야? 거짓말. 씨발, 거짓말이지? 장난하지 마. 그렇게 생각할 때 눈앞에서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일어섰다. 쫓아오던 사람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주변을 지나가던 짐승이었는지, 사무엘은 아직도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그 순간에 그가 파악할 수 있는 건 뒤로 굴러떨어지는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 뿐이었다. 절벽 앞이었다. 머리가 어딘가에 세게 부딪혔고, 다리가 부러졌고, 몇 번 더 구르자 무언가가 눈을 찌르고 후비는 느낌이 났다.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이 있었는데 그게 상처 때문에 느껴진 것인지 정신 때문에 느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이 뜨지 않아 보이지 않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손상된 각막이 초래하는 어둠은 멀쩡한 눈으로 인식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성격을 가진다. 얼굴에 말라붙은 알 수 없는 액체에서(아마 피였을 것이다.) 풍기는 비린내와 찝찝함을 잠시 감내하던 남자는 자신이 제일 원하는 이름 하나를 중얼거렸다.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위에서 그랬듯이 아래에서도. 사무엘은 고개를 몇 번 주억거렸다. 그리고 살아있기 위한 합리화를 했다. 자살하는 건 너무 무서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버려졌을 걸. 도시로 갔으면. 도착했다고 해도 싸우고 미워하고 의심했을 걸. 우린 둘 중 누구도 사랑한다고 말을 안 했었잖아. 나만 좋아했던 거면 어떡해. 사실 레프는 그냥 같이 도망쳐 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라면…도착하자마자 나는 내다버리고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거라면…그런데……. 어떡하지. 벌써 당신이 보고 싶어……. 12 ”있잖아.“ ”내가 민달팽이 골랐던 이유, 한 번도 자세히 말한 적 없죠.“ ”그건…….“ ”…….“ ”최대한 빨리 죽으니까 그런 거였어요…….“ 그리고 남자는 걷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호텔으로 데려다 달라고 말할 참이었다. 1 마지막 날의 밤에는 달이 뜨지 않았다. 어둠의 힘을 빌려 안개처럼 사라져버리자는 생각에서였다. 말하자면 사냥꾼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사냥감도 사냥꾼을 볼 수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국 위협은 여전히, 어디에나, 도처에 산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밤의 숲은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구석이 있으니까. 막막한 어둠을 온몸에 두르고 있노라면 왠지 당장이라도 어딘가에서 빛이 비칠 것 같은 불안이 있었고, 그게 아침일지 손전등일지 알 수 없어서 연약한 정신이 기대와 공포를 완전히 뒤섞어 생각해버리고 말았다. 함께 완전히 다른 날을 맞을 수도 있어. 혹은 같이 제대로 죽어 나자빠질 수도 있지. 레프에겐, 최소한,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2 바야흐로 인생을 함께 할 동반자 없이는 도시의 문명을 누리고 살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레프는 완전히 혼자였다. 길고 지난한 과정이 있었다. 제일 먼저 뜨거운 여름과 휘어진 철로가 있었다. 어머니가 죽고 다음으로 아버지가 죽었다. 각기 다른 방식이었고 어느 하나 무던하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자마자 호텔에서 만들어져 나온 젊은 연인에게 부부생활의 윤활유 역할로 맡겨질 뻔한 레프를 한 키가 크고 어깨가 둥글게 굽은 남자가 데리고 가 주었다. 이름은 르로이였고 직업은 사진작가라고 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남자의 집에는 그와 서로를 무시하고 살아가는 아내와, 언제나 바닥으로 뒤집혀 놓여 있는 익숙한 여성의 사진 하나가 있었다. 레프는 금방 모든 걸 이해했고 곧 끝나지 않는 슬픔 속에서 자랐다. 슬픔 속에서…… 점차 그는 숨을 쉬고 잠에서 깨어나는 모든 인간들이 이런 슬픔의 굴절 아래서 살아간다고까지 믿게 되었다. 행복이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였고 사랑은 철골을 구부려 만든 장식이었다. 때 이른 죽음 두 번이 이 생각을 잉태했고 르로이의 다정하고 텅 빈 시선이 이 생각을 증명했다. 자연스레 도시가 이 연약한 관념의 유지에 이렇게나 절박한 것도 이해가 됐다. 진짜로 존재하고 무너질 수 없는 건물의 붕괴를 두려워하여 총과 칼로 막아서는 얼간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는가? 마침내 레프가 혼자 살 수 있는-또는, 관점에 따라, 혼자서는 살 수 없는-나이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때 르로이는 레프와 아내를 동시에 떠나보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도. 마지막 말은 이랬다: “최소한 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구나. 다행스러운 일이야.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그 뒤에 생략된 말을 레프는 굳이 완성시키려 하지 않았다. 잠시간 언제부터인지 똑바로 서 있게 된 낡은 액자를 들여다봤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어깨 위에서 노을처럼 빛나는 금빛 물결. 오후 5시 42분, 또는 44분. 고작 한 사람이 풍경이고 시간이고 세상일 수 있다니……. 머잖아 세 사람은 제각기 다른 시기에 각자 다른 곳에 있는 호텔로 향했고 그중 둘은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르로이는 체류 기간 내내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고 호텔 직원들의 천박한 방문마저 거절하다가 동물이 되었으며, 그의 아내는 사냥에 나섰다가 숲속의 외톨이들에 공격받아 죽었다고 했다. 어떤 동물이 되었나요.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에게 묻자 싱거운 대답이 돌아왔다. 새가 되었다네요. 자세한 종은 모르지만요. 그런 걸 정말 선택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런 걸 정말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 하지만 새라니,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래서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두 번째로 호텔에 가게 되었을 때 레프는 대기 줄에 앉아 온갖 종류의 새가 나오는 책을 펼쳤다. 그리고 직원이 그가 되고 싶은-그런데, 그런 걸 정말 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나?- 동물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새가 되고 싶어요. 극락조요. 처음 유럽 대륙에 도착했을 때 그 새는 영원히 나는 천국의 새라고 불렸다죠. 어울리네요, 당신한테…… 꿈이나 꾸는 것처럼 직원이 대답했다. 3 호텔에서 레프는 말 그대로 사냥감이었다. 주기적으로 호텔에서 내보내는 외톨이 사냥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그를 둘러싸고 펼쳐졌다. 어차피 사랑이 장식이라면 보기에 좋은 편이 나으니까. 행복이 가짜라면 반짝반짝 빛이라도 나는 편이 좋으니까. 그래서 수많은 공통점들이 그의 발치에 내던져졌다. 이거 봐요, 나도 당신 같은 옅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어요. 영화를 정말 좋아해요, 나는. 그게 없으면 영혼이 텅 비어버린 듯 한 기분이 들 거예요. 어릴 적에 배우나 감독 같은 게 되고 싶었죠. 나도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하지 않은 것만 같아요. 케이크 앞에선 왠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게 되죠. 나도 슬픔을 알아요. 나는 고독을 알아요. 나도 가끔 사랑이란 것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져요. 때로 이 모든 것들이 부질없게만 보여요. 우리는 결국 동물이 되고 싶지 않은 것뿐이잖아요. 그들의 눈에 레프는 언제라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래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것이 다른 절박하고 비참한 사람들의 사랑을 불러왔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 당신이 구할 수 없는 사람이란 없어요, 그건 너무나 쉬운 일이죠. 레프는 호텔에 총 네 번 들어왔고 그중 세 번을 누군가와 함께 나갔다. 매번 입소자에게 주어지는 자유의 시간이 꼭 사흘 남았을 때였다. 계산이나 한 듯이. 처음은 여자였고 두 번째, 세 번째는 남자였다. 호텔에 들어올 때 변덕스럽게 대답한 선호 때문이었다. 이성애자인가요 동성애자인가요. 둘 다 괜찮은데요. 행정적 문제 때문에 둘 중 하나를 고르셔야 해요. 아, 그러면……. 그러니까, 고작 행정적 문제인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레프는 호텔 안에서 친구를 만드는 법이 없었는데, 동시에 그가 있는 동안 그와 말을 섞은 사람들은 모두가 그를 자신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당신 어머니가 쓴 소설을 읽은 적 있어요, 예전에 오래된 뉴스를 보고 안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여기서 다 보다니. 여기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이것도 인연인데……. 그런 방식으로 인연이라는 단어는 날이 갈수록 얄팍하고 하찮은 것이 됐다. 우정, 걱정, 동경과 경외, 공감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시시껄렁한 마음을 거창하게 포장하기 위해 동원되는 콘크리트와 시멘트 같은 말들. 마지막으로 말끔한 얼굴로 레프가 호텔로 돌아왔을 때-이때쯤 호텔 직원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내에조차 불성실했고 호텔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 호텔을 일종의 합법적인 피서지 정도로 여기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으나-레프는 세 번째의 의도된 실패를 떠나오던 참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이 뼈가 완전히 다 빠진 물렁한 것이 되었을 때였다. 그런 표정과 그런 말투라니. 그건 정말 나를……. 네 번째 방문에서 그의 호텔 방문을 두드린 직원 한 명은 호텔에서 지시한 행위를 하는 대신 그의 발치에 쪼그려 앉아 영화 얘기를 했다. 남편은 무식하고 끔찍한 남성이며 자신은 어릴 때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오디션에서 열 번쯤 낙방하고 그 꿈을 접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말했다. 가끔은 숲속의 외톨이들이 부러워요. 물론 거기서도 배우는 하지 못하겠지만, 최소한 쳐다보기에도 역겨운 남자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지는 않아도 되잖아요. 그리고 이야기를 듣던 레프는 생각했다. 그거 낭만적인걸. 4 사냥에서 레프는 외톨이들을 만나더라도 총을 들지 않고 손을 흔들어 보내주곤 했는데, 그게 결국 도움이 됐다. 마침내 한 외톨이를 마주쳤을 때 총구를 내리고 두 손을 들어 보이자 상대가 그를 알아본 것이었다. 그는 외톨이들 사이에서, 숲에서 마주쳐도 도망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호텔 사람이었다. 반듯한 자세와 일부러 윤을 내 빚은 것 같은 도자기 같은 얼굴, 안심이나 시켜주듯 “저쪽으로 가요”, 일러주는 정돈된 목소리. 도시에서도 쉽사리 볼 수 없었고 숲에서는 더욱 그랬다.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게 아닐까? 외톨이들은 추측했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 숲에서 연명하는 삶에도 호텔에서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는 삶만큼이나 별반 가치가 없어 보였던 것이다. 그런 인생에 마취총과 타박상으로 이루어진 빠른 죽음이 비극일 수나 있나? 축사에 갇힌 동물들이 도축장으로 끌려가기 싫어 절벽으로 내달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번에는 외톨이가 말했다. “이쪽으로 가요.” 그래서 레프는 마취총의 장전을 풀고 뒤따라 걸었다. 그대로 숲으로 사라졌다. 호텔에서는 그가 실종되었다고 안내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었으리라고 생각했다. 5 숲의 삶은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했지만 견딜 만은 했다…… 사람들은 살고 싶어서 호텔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숲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켰으므로 생각만큼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따금 가짜 자유의 장막 아래서 진짜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혹독하게 처벌을 받는 일이 생기곤 했던 것이다. 처벌은 우스꽝스러운 것에서부터 잔인하기 짝이 없는 것까지 다채로웠고 즉각적이었다. 발로 정강이를 있는 힘껏 차는 형벌은 시시해 보였지만 호텔의 사냥이 시작되면 가장 치명적인 벌이 됐다. 숲에서 이루어지는 핏빛 키스는 알몸으로 말을 타고 성을 한 바퀴 도는 종류의 형별과 거의 동일하게 취급됐다. 사람들은 돌을 던지는 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단죄했다. 감히 사랑 같은 걸 하다니. 그건 방금 잡은 토끼의 미지근한 피와 막 캐낸 버섯의 독을 잘라내는 진실된 삶의 업무들에 비하면 허황하고 수치스러운 일탈에 불과한데. 그래서 레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CD 플레이어에 익숙한 그 노래를 틀고, 혼자 속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사랑뿐, 오직 사랑, 사랑, 사랑뿐. 그러는 동안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함께 도망가요. 당신을 사랑해요. 누군가는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외면하려고 했는데 되질 않아요. 당신을 사랑해요. 누군가는 공들여 잡은 토끼를 조용히 끈으로 묶어 건넸고 누군가는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당신 생각이 아닌 무엇도 하지 못하겠어요.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그들 전부를 레프는 아멜리아-외톨이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었다. 레프는 아멜리아 이전의 지도자를 알고 있었다. 아멜리아가 그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는 것도 보았다.-에게 가서 보고했다. 애석하다는 듯한 투였다. 숲이 잘 맞지 않는가 봐요. 호텔로 돌려 보내주는 편이 좋겠어요. 자비를 가장한 말이었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리라는 것을 레프도 모르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항상 냉정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런 식으로 레프는 순조롭게 주기적으로 도시로 나가 필요한 것들을 구해오는 인원에 합류했고, 자신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는 갈구의 말들 앞에 공포의 댐을 쌓는 데 성공했다. 당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어요, 당신은 곧 진짜 당신의 모습을 찾게 되겠죠, 그건 쉬운 일이니까…… 폴 매카트니 혹은 존 레논이 노래했다. 그러면 레프가 맨해튼 억양으로 따라 불렀다. 그건 쉬운 일이죠……. 사무엘 고든이 나타난 것은 그런 시간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 지난 후였다. 피투성이 상태로, 볼품없이 어그러진 얼굴로, 초라하게 웅크린 자세로, 거의 언제나 ‘인간으로’라는 말이 생략된 형태로 튀어나오곤 하는 “살고 싶어.”하는 말과 함께. (혹은, “살려 줘.”) 그런데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건 결국……. 6 사무엘은 곧 적응했다. 숲에서 마주치는 동물들을 직접 잡고 죽여서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매번 괴로워했지만, 그 외의 궁색한 생활에는 크게 불만이 없는 듯 보였다. 다행히 기후가 혹독하지 않은 곳이었으므로 아마포와 방수 천, 면으로 만든 옷과 담요들로 어떻게든 계절을 넘어가며 살아갈 수 있었다. 낡은 엔진을 단 지프차를 타고 끝나지 않는 여행을 떠난 것과도 비슷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도시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타인의 미지근한 체온을 갈망하지만 않는다면 살만한 곳이었다. 사무엘이 정확히 저것들로부터 완전히 밀려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에 레프는 자주 자신이 그를 구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위험한 종류의 우월감이었으나 바깥으로 발을 내딛기가 쉽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숲에서 살아온 날짜를 헤아리던 날에 레프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숲에 혼자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무대 위에서 이슬을 맞고 진흙을 파헤쳤다. 도시를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인간을 동물처럼 내다 버렸고 동물을 인간처럼 여겼다. 그러다가 사무엘 고든을 구했다. 그것이 그가 저지른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무언가를 구한다는 건 일종의 책임을 나눠지는 일이지 않나. 레프는 누구의 삶도 나눠지고 싶지 않았다. 그건 너무 슬픈 일처럼 들렸다. 7 이따금 외톨이들은 도시에 나갔다. 대부분의 경우에 레프는 마트에서 장을 보거나 병원을 들러야 할 사람들의 동행인 역할을 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자주 바뀌어도 이해가 될 만한 얼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아멜리아의 부모님에게까지 인사해야 하는 날이면 다른 사람들이 그와 동행하고 레프는 숲에 남아 있곤 했다. 마침내 사무엘이 도시에 가야 하는 날이 오기 전까진 그랬다. 외출을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늘 조금은 흐트러져 있는 머리를 정돈한 뒤 흙을 깨끗하게 털어내고 나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도시의 사람처럼 보였다. (레프는 특히 그랬다.) 레프는 같은 절차를 거치자 사무엘도 그렇게 보인다는 사실에 조금 감탄까지 했다. 사무엘이 바깥을 오래 돌아다니는 걸 불안해했으므로 레프가 사무엘의 곁을 지키며 아멜리아와 함께 그의 부모님을 보러 가는 역할에 배정되었다. 떠나기 전 그가 사무엘의 눈을 보고 말했다.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사무엘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그것으로 자신이 가진 어떤 의무가 조금은 덜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아멜리아의 부모는 외톨이들에게 냉정한 편이었는데, 도시에서 짝짓기에 열중 중인 사람들에게 아멜리아가 보이는 냉담함을 나란히 두고 보면 온도가 거의 비슷했다. 부모는 자식을 닮고 자식은 부모를 닮는 법이지. 그리고 서로를 영원히 모르고 살아가고. 외톨이들은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그들은 자연의 섭리를 어기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신성한 특성인 풍부하고 아름다운 감정을 내다 버린 냉혈한들이라고 그들은 열변을 토했다. 숲에 사는 그들은 분명 시체를 묻고 그 위에 자라난 풀을 뜯어 먹고 살 거라고도 주장했다. (이것도 따지자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천명했으니 누구도 그들을 사랑할 수 없고, 그건 그들이 헌신짝처럼 버려 버린 사랑이라는 세계의 법칙이 내린 단죄의 벌이라고 했다. 레프는 그 모든 이야기를 반쯤은 공감하고 반쯤은 흘려들으면서 다정하게 사무엘의 손을 잡고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무엘의 긴장한 호흡이 붕 뜬 앞머리에 와 닿으면 왠지 그들의 북받친 악담들이 음악 소리처럼 들렸다. 레프는 다정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동의하고, 또 사랑의 아름다움에 공감하면서 사무엘에게 속삭였다. “정말이지 숲의 사람들이 두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할 텐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무서워서라도 사랑에 빠지고 말 테니까요…….” 웃음 섞인 농담조로 그렇게. 그 말을 할 때 레프는 사무엘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을 봤다. 넓은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온화하게 나이 든 노부부의 얼굴, 차게 식은 증오와 미지근하게 끓인 애정 사이에서 땀이 배기 시작한 두 손바닥 사이의 얇은 공간. 그 이미지들은 곧 하나로 합쳐져 더는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곧 꿈으로도 이어졌다. 하루하루 눈을 뜨기 위해 모든 쓰레기 같은 감정과 고통들을 카펫 아래의 먼지처럼 밀어 넣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레프는 눈을 아프게 하는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기차 칸에 앉아 맞은편에 흐리멍텅한 형상 하나가 나타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형상은 곧 그림자에서 실체를 갖추었고 푸석한 금색 머리와 가라앉은 바다 같은 푸른색 눈을 차례대로 그려 보여 주었다. 형상이 온전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 레프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안녕, 사무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군요. 끔찍하고 진부한 인간 같으니.” 8 사무엘 고든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건 아멜리아가 시키는 연기나 호텔이 요구하는 탐색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다. 종종 곁을 지나치는 경찰에게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입을 맞출 때와는 조금 비슷했다. 도시의 모습을 하고 도시의 향을 둘렀는데도 잇새에서는 풀과 물 냄새가 나서 레프는 그들이 함께 숨긴 거짓말의 정체를 잊을 수 없었다. 같은 비밀을 지닌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지. 혹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걸까. 하지만 이런 서늘한 냄새에는 분명 무언가 남아 있는데……. 어느 날 아멜리아가 누군가와 함께 병원에 가 있는 동안, 레프와 사무엘은 마트에서 산 것들을 발치에 놓고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의 그늘 아래서 햇빛을 피하는 동안 레프가 말했다. “아멜리아의 부모님 말이죠.” “예.”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게 분명해요.” (나중에 아멜리아가 직접 털어놓은 이야기를 듣기 전의 일이었다. 레프는 자신의 통찰력이 잘 발휘되었다는 사실에 기쁘기보다는 조금 슬픈 기분을 느꼈다.) “왜요? 외톨이들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함께인데도 언제나 혼자라는 기분으로 살아가니까 외톨이가 싫은 거지. 불행이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고, 그나마 자기들이 누리는 게 덜한 불행이길 바라서 반대편을 저주하는 거야. 게다가 이야기를 할 때 거의 서로를 쳐다보지 않잖아요. 나나 당신을 더 많이 쳐다보지. 알았어요?” “나는, 되도록 눈을 안 마주치려고 했어서…….” “내가 당신을 맞는 눈으로 바라보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맞는 눈?” “사랑하는 사람의 눈.” “하지만 자기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면서.” “그러니까 아직까지 누구도 들키지 않은 거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으니까요…….” “당신은 압니까?” “응.” “어떻게?” “본 적 있으니까요.” 인간에게서도 개에게서도, 가능했다면 아마 새에게서도. 벌겋게 드러난 피부와 잿빛의 털, 새까만 깃털과 흰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 둥근 눈에서도 사랑은 모닥불 위의 비닐이나 상처 속의 피처럼 줄줄 새어 나왔다. 레프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사무엘의 표정을 살폈는데, 사무엘도 그게 정말 무엇인지는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게 왠지 안심이 됐다. “그러면, 혹시…….” 당신도 그렇게 연기를 하나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들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내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볼 때. 그렇게 물어올 것 같았으므로 레프가 저 멀리의 경찰을 가리키고 사무엘의 옷깃을 잡아당겨 입을 맞췄다. 키스는 사실 대부분이 물리적인 과정에 불과해서 무언가를 들킬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됐다. 말하자면 행정적인 것. 또 어느 날 레프는 죽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는 그가 거친 죽음에 과정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무엘은 그 안에서 외면할 수 없는 공포를 읽은 것 같았다. 겁이 많은 사람이었으므로 그게 공감대 비슷한 것을 불러일으켰다. 레프는 소스라치게 놀라 거부했다. 도망친 자리로 사무엘이 따라붙었다. 때마침 그곳에 묻혀 있던 시체를 파헤쳐 드러내고 말했다. 내게도 고유한 고통이 있어요. 여기에도 당신이 아는 그런 이름이 붙어 있어요. 슬픔과 상실의 세상 사이에는 얼마나 긴 거리가 있나요. 레프는 알았다. 두 단어를 쓰기 위해 필요한 알파벳 두 개 사이의 알파벳들이 놓인 거리만큼.* 정확히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고 누울 수 있을 만큼. 다행히 사무엘 고든이 듣지 못한 사실도 있다. 개가 된 아버지가 다시는 입을 벌리지 않기로 결심한 다음, 어느 시점엔가부터 레프는 어머니의 묘비 앞으로 찾아가 꽃과 음식을 놓아두는 일을 그만두었다. 그가 마침내 발길을 끊기 전, 개는 비석 위에 음각으로 새겨진 문장 하나를 새까만 눈으로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충분히 사랑하였으므로 혼자될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탓에 미리 준비된 비문이 없어 어머니의 마지막 책에서 문장 하나를 뽑아 온 것이었다. 아버지-개는 그 말을 믿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는 의무처럼 발길을 멈추고 다른 이들에게 자기 대신 음식을 챙겨 줄 것을 당부하지도 않았다. 그건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개가 힘겹게 고개를 들고 그래도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려 했단들 그럴 수 없을 것이었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개가 진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의지로 죽음으로 기어들어간 것인지, 아니면 그 결심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에도 달리 어찌할 수 없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굶겨 죽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 죄의식이 원망을 억눌러 주었고, 그것이 결국 도움이 됐다. 아버지-개-살인자. 참으로 복합적으로 끔찍한 인간이다. 그런 그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남아 있었겠는가? 신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평생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뭇잎 구겨지는 소리가 난다.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살아 있던 것들이 죽어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몸을 움직여 레프의 옆에 붙느라 으깨진 나뭇잎 때문에 까끌까끌한 숲의 냄새가 더 짙어졌다. 그는 도망치는 대신 사무엘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창백한 안색과 울렁거리는 속으로. 그리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 그의 위로 문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여기에 있고 싶지. 동시에 호텔로 도망쳐 들어가고만 싶어. 살아 있고 싶고 죽어버리고 싶어. 아주 뜨거웠다가 무섭게 차가워지고 싶어. 경찰이 나타나 증명을 요구하면 그게 모멸감이었다가 반가운 핑계가 되는 세상에 나를 버려뒀잖아. 행복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고 사랑은 철골을 구부려 만든 장식품에 불과한데 그러면 철을 구부려 만든 기차 안 플라스틱으로 마감한 창문 곁에 앉은 꿈을 꾸는 나는 악몽을 꾸는 걸까 바라던 세상에 도착한 걸까. 당신은 왜 거기에 있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Sorrow, Loss 9 레프 카트라이트는 사랑이 뭔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야 바로 눈앞에서 지켜봤으니까. 의자에 묶인 채로 누군가 눈꺼풀을 강제로 들어 올리고 피눈물이 흐를 때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도록 강제당하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혼자로는 불완전한 존재가 되는 게 사랑이지. 그런데 어차피 나는 너와 하나일 수 없어서, 결국 영구한 슬픔의 세상에 내던져지는 게 사랑이지. 입을 맞추거나 뼈가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아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착각에 흠뻑 젖고 싶어지는 게 사랑이지. 결국,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 버려지는 것만으로도……. 10 1월의 어느 무렵, 레프는 사무엘이 곁에 없는 틈을 타서 다가온 한 외톨이가 진부하게 그의 팔을 붙잡고 쏟아내는 말들을 들었다. 그가 나름대로 세워 둔 절차에 따르면 여기서 그를 적당히 달래 돌려보낸 다음 아멜리아에게 가서 그가 한 말들을 고하고 응당한 처분이 내려지도록 하는 것이 맞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대신 그는 상대의 말이 끝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고, 그가 애걸복걸한 대로 잠시간 안고 입을 맞춰 주었으며, 짧은 순간이나마 간절한 마음이 보상을 받는 세계에 살게 해 주었다. 10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마음속의 모래시계가 전부 떨어졌을 때 그가 물었다. 행복한가요. 상대가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총을 들었다. 호텔에서 나올 때 가지고 온 것이었고 오로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이 숲을 떠나거나 죽어서 묻힐 때 외톨이들 모두의 것이 될. 나중에 아멜리아는 레프에게 그가 해야만 했던, ‘가능했던 유일한 적절한 조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짧게 혀 차는 소리를 냈다. 남아 있는 총알이 몇 개인지를 묻고 노골적으로 아까워했다. 레프는 자신이 조금 더 끔찍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은밀한 희열의 탈을 쓰고 안도감이 밀려왔다. 사무엘이 돌아와 한참이나 그의 안전을 걱정하기 전까진 그랬다. 레프는 일부러 모든 것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일부는 과장하기까지 했다. 물론 처벌을 피해야 했으므로 당연히 자신의 의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묘사가 이어졌다. 말솜씨가 좋았던 탓인지 사무엘은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전부 믿는 것처럼 보였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레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에서 녹색 질투를 읽어보려고 했다. 그러면 언제고 그 불쌍한 외톨이에게 한 일을 사무엘에게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멍청한 인간 같으니, 여기서는 그런 걸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런데 들여다본 눈이 푸르기만 했다…… 우울하고 슬퍼 보였고 그건 꼭 자신의 얼굴 같기도 했다. 레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사무엘이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조금도 모르는 건 물론이고 꽤나 보편적인 마음들을 읽는 데에도 서투르다는 사실이 무척 다행으로 느껴졌다. 11 사무엘이 다리를 다치던 날 레프는 그 고통을 한참이나 가늠하고 상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울고 싶었다. 아프거나 슬프면 우는 게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이잖아. 하지만 레프는 일반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슬플 때마다 울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었다. 숲의 외톨이가 되고 싶었고 그러다 어느 날 더는 꿈속으로도 햇살이 침투하지 못하는 어두운 날이 되면 절벽 너머로 사라지고 싶었다. 밤의 어둠으로 혼자. 그래서 눈물이 나지 않았고 곧 울고 싶다는 마음도 금세 어딘가로 쏙 들어가 버렸다. 차례대로 무덤 속에 창백하게 누운 사무엘을, 자신을, 그다음에 총을 맞거나 도끼를 맞아 함께 쓰러진 두 사람을 상상한 다음 레프는 사무엘에게 다가가 덫을 해체하고 지니고 있던 아마포를 길게 찢어 상처 위를 동여맸다. 쏟아지는 피는 뜨거운데 사무엘의 안색은 시시각각 창백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잡아 오는 손이 있었다. 미지근했고 금세 따뜻해졌다. 36도쯤 될 성싶었다. 사람의 온도. 민달팽이에겐 너무 뜨겁고 새에겐 너무 차가울, 미적지근한 의존의 지표. 그래서 바라는 바와 달리 알게 됐다.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입을 맞추고 싶은 게 분명해. 온통 내 생각으로만 가득하지? 어딜 봐도 내가 있잖아. 거짓말쟁이. 비겁자. 끔찍하고 진부하고 역겨운 인간. 당신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때도 지금도. 그런데도 레프는 거절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하는 편이 맞았다. 어차피 아주 오래전부터 비틀리고 전복된 인생이었다. 혼자 절벽 너머로 떨어져 죽는 것과 함께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은 따지고 보면 별반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사무엘이 출혈로 정신을 잃으려 할 때 레프가 말했다. 누구라도 이런 상황에 놓인 사람을 앞에 두면 할 법한 진부한 대사였는데 어딘지 상처를 칼로 쑤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랑 같이 있어. 정신 차려. 눈 떠요. 나랑 같이 있어. 깨어 있어. 같이. 12 사실 둘이라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을 외면하는 게 사랑이지. 어차피 너는 나와 하나일 수 없어서, 결국 짧게만 이어지는 행복감이나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L로 시작하는 네 글자를 미끼처럼 매달아 바닷속으로 길고 얇은 줄을 늘어뜨리는 일이 사랑이지. 입을 맞출 때는 핏빛 키스를, 서로를 끌어안을 때는 핏빛 관계를, 이마를 맞대거나 남들에겐 해 주지 않은 이야기를 해 줄 때면 피부가 다 벗겨지고 장기를 빼앗겨 동물이 되는 상상을 하며 두려움에 떠는 일이 사랑이지. 그런데도 결국, 온통 그 사람 생각으로만 가득 찬 세상에서 나가지 못하는 일도……. 13 그러나 그 말만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잡다한 문장들이 애정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그에게로 쏟아졌다. 내 미들 네임 말이야, 알렉이에요. 그렇게 불러도 돼. 참,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되지 않길 잘했던 것 같지. 그러면 도시로 가는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었을 것 아냐. 얼굴이 너무 알려져 있으니까. 우리 어머니가 쓴 책, 사실 나는 한 번도 끝까지 다 읽어본 적 없어요. 그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이런, 이런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나. 슬픔은 약점이잖아……. 보물찾기처럼 대화가 이어졌다. 사무엘은 곧잘 불안해했고 초조하게 그 안에서 레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아니, 조금은 자신과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증거를 찾으려고 했다. 레프는 그에게 방향은 일러 주었지만 어디서 멈추거나 나아가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았다. 그랬다가 평생 자신과 함께한 이 고유한 고통이 멈출까 두려웠다. 슬픔이 없는 삶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리 없잖아. 모든 걸 단념하고 묘비 앞에서 굶어 죽거나 새가 되어 나무 아래서 객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아야만 다가올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14 그런데도 숲을 떠나기로 한 날 밤, 레프는 서로를 껴안으며 자라난 메타세쿼이아 사이를 지나 고개를 숙이면서 사무엘의 손을 잡았다. 이 어설픈 대탈주가 끝나고 나면 누가 누구를 구한 꼴이 될지 알고 싶었다. 사무엘이 나를 구한 걸까, 내가 사무엘을 구한 걸까. 후회하는 쪽이 누가 될지도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누구도 후회하지 않고, 찬란한 빛의 세상 같은 것이 정말로 펼쳐질 수도 있지. 그건 전혀 다른 삶일 테고 레프는 거기에서 더는 무엇도 연기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었다. 사무엘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달갑지 않은 공통점을 더 찾아 버렸군. “있잖아요, 나 당신이랑 만나서 좋아. 내 인생에서 가진 것 중에 제일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 레프는 웃었다. “그 소리를 꼭 지금 해야 하는 거예요? 우리 도망치고 있잖아요…….” 면박 줄 말이 조금 더 떠올랐는데도 하지 않고 계속 웃었다. 이 장면과 사랑 사이에 딱 두 사람이 손을 잡고 나아갈 만큼의 공간이 있었다.* 레프는 생각했다. 패배를 선언하려면 이 순간뿐이라고. “있잖아.” “완전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들릴 말이라는 거 아는데,”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그냥…….” *Scene, Love 15 그리고 총소리가 들렸다. 레프의 무의식은 빠르게 그것의 출처를 알아냈지만, 그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본래 영혼과 의식은 뇌라는 물질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뇌가 멈추면 영혼도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온당한 결말이므로. 16 만약 둘 다 동물이 되어서 다시 만났다면 어땠을까. 새와 민달팽이가 친구가 된 사례를 들어본 적은 없는 데다 어쩐지 천적처럼 느껴졌으므로 레프는 종종 자신이 동물처럼 단순해진 상태에서 민달팽이가 된 사무엘을 잡아먹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런데 사무엘은 왜 민달팽이가 되고 싶었을까. 끈적끈적하고 귀엽지도 않은데. 하긴, 귀엽지 못하니까 사냥당할 일도 적긴 하겠지. 민달팽이의 수명은 보통 얼마나 될까. 길었으면 좋겠는데. 레프는 한동안 사무엘과 함께 도시로 나가 진흙이 묻은 옷을 입고, 우리는 함께이고 싶었는데 외톨이들에게 잡혀가 고초를 겪었다고 뻔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두 사람은 접착제라도 붙여 놓은 듯 두 손을 단단히 쥐고 이 도시에서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는 똑같이 슬퍼하고 똑같이 고독을 두려워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당신들이 원하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냐고도 항변한다. 그들은 레프의 부모님이 남겨둔 넉넉한 재산을 되찾고 집을 구하며 넉넉한 셔츠와 짙은 색의 바지를 입은 채로 테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맞는다. 오스트리아로 향할 여행의 계획을 짜고 커피를 내렸으며 흙냄새도 피 냄새도 나지 않는 키스를 한다……. 그러니까, 그 세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직……. 17 산기슭에 버려진 CD 플레이어에서 툭툭 끊어진 노래가 들려왔다. 존 레논 혹은 폴 매카트니, 링고 스타의 드럼과 조지 해리슨의 어물거리는 코러스와 느슨한 기타 소리.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사랑, 사랑, 사랑뿐. 사랑만이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