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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d to Be a God>

  • 작성자 사진: Azuraste
    Azuraste
  • 2023년 8월 13일
  • 6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3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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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zuraste


<Hard to be a God>

by Aleksei German

SF / Russia / 2013 / 177min / 18+



 천장에서 비가 새고 있었다. 물방울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일정하게 양동이 위로 떨어졌다. 썩은 나무의 퀴퀴한 악취가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바닥에는 비를 피하려 기어 들어온 발 여러 개의 불청객들이 드문드문 고개를 내밀었다. 지구에서 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그것들이 형장에 고인 핏물과 시체, 눅눅한 빵 부스러기, 시든 야채, 무얼 넣고 끓였는지 흔적도 채 남지 않은 국물 찌꺼기 따위를 먹고 자란다는 점이었다. 쥐들은 진흙 묻은 발로 식탁 위를 쏘다니면서 그릇을 엎어 놓았다. 버터는 질퍽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더럽혔다. 어쩌면 버터가 아니라 회색돌격대가 군홧발로 진흙을 헤치는 소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새처럼 끔찍하게 우짖고, 새는 단말마와 함께 화살에 맞아 추락한다. 멀리 창밖으로 목 매달린 시체가 빗물에 절어 썩어가고 있었다.


 이곳은 천 파섹 너머의 지옥이다. 지옥은 아르카나르Arkana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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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테리다는 짧은 신음과 함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르카나르 왕국에 도착한 뒤로 한시도 편안하게 잠자리에 든 일이 없었다. 시험역사연구소에서 파견되었을 때 ‘돈 스바보다’ 라는 거창한 이름을 받았지만, 지구에서는 그가 ‘돈’인지 ‘도나’인지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이 행성에서 ‘도나’ 보다는 ‘돈’이 운신의 자유가 있기에 부여받은 것에 가까웠다. 이발사라는 직종도 이름의 주인이 가진 직종에 불과했다. 이루칸 사람. 몰락한 귀족. 살고자 천직으로 떨어진 사내. 본래의 스바보다가 누구인지는 지구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아스테리다가 왕국을 관찰하고, 정보를 수집해서 지구로 보내는 일이었다. 왼쪽 눈에 박힌 목재 의안 형태의 카메라는 그가 깨어 있는 동안 항상 머나먼 행성에서 지구로 봉건 사회의 발전상을 전송하고 있으며, 종종 이루칸의 지인들을 만나러 간다는 핑계로 지구의 정보원들과 만나 서로 아는 바를 공유하기도 했다.

 데이터가 쌓이고, 과학의 선구자가 늘어날수록 이 야만적인 수백 년 전 지구의 형태를 한 국가도 결국은 르네상스와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할 것이다. 과학적 공산주의가 실현된 지구와 같이….


 요컨대 아스테리다 피오닐은 천 파섹 너머의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자 아르카나르의 무수한 ‘신’들 중 하나다.


 물론 그가 자신의 권능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고 있느냐는 미지수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시험과학연구소의 학자이자 동시에 난폭하고 망나니 같은 수백 년 전의 다른 행성 주민의 입을 다물게 하고, 머리털을 밀어서 내보내야 하는 직무도 주어져 있다. 말인즉슨,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침부터 뭔 개소리를….”


 이런 헛소리를 상대할 의무도 있다는 뜻이다.


 돌격대원은 이발소에 들어서서 투구를 내리고, 얼굴을 덮는 사슬 복면을 벗었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무리 몇은 남아 있던 손을 진흙발로 걷어찼다. 나무 의자가 기우뚱거리며 넘어졌다. 이 시간이면 학자나 문인들을 붙잡아서 교수대에 걸거나 더 이상 발버둥 치지 못할 때까지 진흙탕이나 늪에 처박고 있을 참이었다. 챙에 맺힌 물방울이 바닥에 튀어 새빨갛게 물들었다. 얻어맞은 남자는 마구잡이로 자라난 머리칼을 휘날리며 코를 감싸 쥐고 달아났다. 아스테리다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돌격대원을 쏘아보았다. 탁한 은색 머리카락이 가죽 모자를 비집고 쏟아져 내렸다. 단정하고 선이 가느다란 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돈이랑 볼 일 없으니 나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돈. 저는 당신을 만나러 왔을 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용무는 없습니다.”

 “들어오자마자 깽판을 쳐 놓고 무슨 소리야?”


 돌격대원은 주위를 한 번 둘러 보고는, 뒤늦게 갑주 차림의 무뢰배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예리한 칼날이 천을 자르듯 주위는 빠르게 침묵했다. 대원 몇이 바깥으로 나가 피범벅이 된 낯짝의 남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혔다. 겁에 질린 남자의 얼굴 위로 천이 덮어씌워졌다. 건틀릿이 우악스럽게 천을 쥐고 걸레질하듯 마구 닦았다. 그걸로 끝이었다. 코가 깨졌으면 저기 이발사에게 잘라 달라고 하면 그만 아닌가? 이봐, 그러다 얼굴도 곪아서 터지겠네. 하하! 비아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대원들은 곧 바깥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우두머리처럼 보이는 사람 하나뿐이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아스테리다에게 인사했다.


 “돈을 놀라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지금 사람을 패 놓고 그게 문제야?”

 “예.”


 돌격대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이프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아스테리다는 눈앞의 돌격대원을 후려치는 대신, 제 손아귀에 남아 있는 정돈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에 집중했다. 그딴 식으로 굴면 내쫒을 거예요.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돈. 불경한 이단자들 때문에 다소 신경이 날카로워서 벌인 작태일 뿐입니다. 아스테리다는 코가 깨진 남자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공포에 질린 낯으로 사과받는 꼴을 보고서는 불쾌한 낯으로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더 실랑이를 벌여 봐야 제 턱 밑에 앉은 여인만 불편하게 될 일이다. 무혈관여 원칙은 건재하다. 먼 과거의 제국주의자들과 달리 그들은 이 세계의 혼란에 개입할 수 없다. 이미 사라진 종교의 유일신조차도 물로 인류를 벌하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니, 이 행성의 신보다도 신다워야 하는 정보원들은 그에 걸맞는 신격을 보여야 할 것이리라.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인의 머리칼을 손보는 동안 그의 가게에는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다. 빗방울은 세차게 천장과 문을 때렸다. 박자를 맞추듯 고기와 지방 덩어리를 마구 두들기는 듯한 잡음도 섞여 있었다. 문틈 사이로 돼지 멱 따는 듯한 비명 소리가 길게 울렸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이발사는 지금 바빠서 말이야. 대신 우리가 그 멍청한 다리 좀 봐주지. 식자 양반! 실상 그들은 장관이 기르는 회색 돼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돼지우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가축은 가장 먼저 도살되기 마련이다. 아스테리다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남자에게 다가갔다. 돌격대는 막 사냥을 끝낸 고대 수렵민족들처럼 크게 웃었다.

 빗방울은 투구 위를 거세게 때리다가 느닷없이 그쳤다. 그러는 와중에도 돌격대장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스테리다를 응시했다. 탁한 녹색 눈동자는 서늘한 빛을 품고 있었다. 단순히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을 구경한다기보다는, 감시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오른쪽 눈알에 박힌 카메라로 행성의 모든 것을 읽는 연구원들처럼.

 사박, 하고 머리카락이 짧게 잘려 나갔다. 아스테리다는 손에 그러모은 머리털을 바닥에 대강 쏟아 버렸다. 결국 못 참겠다는 양 한마디 내뱉는다.


 “부담스러우니까 그만 좀 쳐다봐요. 이 사람도 난감해하고.”

 “돈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담스러우시다면 나가서 기다릴까요.”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해야 하지. 아스테리다는 화를 삭히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가 깨진 남자가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들었다. 당신 때문에 자꾸 움직이니까 빨리 안 끝나잖아요. 나가 있어요. 좀. 불편하시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마치 아스테리다가 억지로 시켜서 하는 듯한 무감정한 어조는 아스테리다의 화를 돋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영문도 모르고 얻어맞은 남자만이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을 지켜 주고 있었다. 빌어먹을 돌격대장은 나가긴 커녕 울타리를 거니는 짐승처럼 느리게 가게 주위를 거닐고 있었다. 적어도 이쪽을 바라보지는 않아서인지 면도칼을 놀리는 손이 조금 더 바빠졌다.

 한참 만에 정돈된 두발을 짧게 훑고는, 아스테리다는 그 불행한 남자를 바깥에 놓아 주었다. 죄송해요. 이번엔 뭐 따로 안 받을 테니 얼른 들어가요. 그래도 되는 겁니까? 아니면 깽값이라도 대신 받은 셈 치던가요. 남자는 찜찜한 낯으로 돌격대장과 아스테리다를 번갈아 보다가,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감사합니다, 돈! 인사를 마치기가 무섭게 다시금 짧은 소나기가 흙탕물에 꽂히기 시작했다. 남은 것은 문제의 그 회색 마귀떼와 수괴였다.


 “용건만 말해요.”

 “말씀드렸듯이 돈을 만나러 온 것입니다.”

 “전 돈과 약속 잡은 적 없는데요.”


 돈 아주라. 그런 이름이었을 것이다. 출신 불명. 베스파시아누스의 17대손으로 입양. 남성. 그러나 아들이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보이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불명확한 출생 때문이라고 지껄인다. 긍정도 부정도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아주라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냥 머리카락을 자르고 싶어서 온 것뿐입니다.”

 “영업 끝났어요.”


 아스테리다는 싸늘한 얼굴로 돌아섰다. 이 야만스러운 세계에서 폭력과 살인은 흔한 일이지만 공권력에 의한 폭력은 그 시대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백여 년 전 한 시대를 광증으로 몰아넣은 파시즘의 산물에 가깝다. 아주라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아스테리다를 다시금 불렀다.


 “돈 스바보다. 당신이 무엇 때문에 제게 진노하시는지 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돈이 제게 알려 주십시오. 제가 시정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시정하겠습니다.”

 “말했잖아요. 사람을 패 놓고 지금 그게….”

 “돈은 대주교, 아니, 장관께서 얼마나 비통한 심정으로 백성들 사이에서 불한당을 솎아내는지 모르실 겁니다.”


 회색 무리의 대부분은 지식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친구, 형제, 심지어 부모조차도 기꺼이 고문할 수 있는 악랄하고 끔찍한 인간들이었다. 아주라에게는 소위 혈육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그는 거리낌 없이 지식인을 뒷간에 처박고 목을 매달았다. 챠우셰스쿠의 아이들, 혹은 돈 레바의 아이들…. 한순간이지만 아스테리다의 얼굴에 역겹다는 표정이 스쳤다. 길게 기른 앞머리 사이로 색칠한 의안이 번뜩였다.


 “지금 그래서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문간에서 사람을 때려죽였다고 말하려는 거야?”

“돈.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가 아니라….”

 사람들은 염색한 나무 구슬에 박힌 밝은 회색 덩어리를 ‘신의 눈’이라고 불렀다. 그것의 정체를 아는 자는 같은 정보원 외에는 없으나, 회색빛을 띄는 보석은 도무지 이 시대의 세공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니 어찌 신이 내린 물건이 아닐까.


 “…… 그런 자들이 신을 모독하고, 역겨운 선전물과 기이한 마술로 혹세무민하는 작태를 두고 볼 수 없기에….”

“입 다물어!”


 아스테리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 냈다. 돌격대장은 장관을 제외한 모든 이의 머리 위에 군림하듯, 무감한 낯으로 쇠망치를 휘둘렀으나 ‘돈 스바보다’를 상대로는 순한 양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꼭 아르카나르 장관이 아스테리다라도 된다는 양 가증스러운 얼굴이었다.


 “내가 말했지. 나한테 뭔가 빚진 것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들한테나 그렇게 대하라고. 그런데 너는….”

 “그 사특하고 천박한 자들이야말로 돈이 저를 통해 베푸신 은혜를 모릅니다.”

 “입 다물라고 했잖아!”


 아주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낮게 중얼거렸다. 죄송합니다. 돈. 아스테리다는 염증을 느낀 듯 손님을 앉혀 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중세인을 상대로 22세기 지구의 상식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정도가 지나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물에 빠진 부랑자를 주워 보살펴서 내보냈더니 몇 년 만에 감투를 쓰고 폭력을 휘두르질 않나, 그 와중에 자신에게는 꼭 어미 오리를 쫒아다니는 아기새처럼 퍽 공손하게 부르는 짓거리야말로 아스테리다를 미치게 했다.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새 단검이며 우유, 라드 따위를 갖다 바치는 것은 덤이었다. 대개는 며칠 전에 매달아 태워 죽인 시체가 남긴 유산이었다. 아스테리다는 스스로 신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떠벌인 바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스테리다가 신이라도 되는 양 공물을 바치고, 만나길 청하며, 그의 호의와 애정을 구걸하는 것이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

 “돈.”

 “나가라고.”


 아주라는 변명하는 대신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었다. 짐승 무리의 우두머리는 서글픈 눈으로 신을 바라본다. 아스테리다는 역겹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닥에 흩어진 머리털은 깔끔하게 정리하려 해도 피와 체액에 엉겨서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문밖에서 누군가가 또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제발 사람 좀 살려 주시오, 돈! 예에. 잠시만 기다리시죠. 아스테리다는 어제 부숴서 뽑은 잇조각을 주우면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주라는 여전히 무장을 한 채 자리에 서 있었다.


 “안 나갈 거야?”

 “…….”

 “할 말 있으면 해. 뭐 마려운 개처럼 쳐다보지 말고.”


 아주라는 대답 대신 아스테리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스테리다는 경계하는 낯으로 뒤로 물러났다. 키 차이 때문인지 아주라의 보폭이 훨씬 더 넓었다. 두 사람이 마주 섰다. 아스테리다의 뒤로 핏자국만 간신히 닦아 낸 지저분한 나무 벽이 보였다. 아주라는 아스테리다의 손을 잡았다. 피와 먼지로 더러워진 잇조각이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이거 안 놔? 미친 놈아! 아스테리다는 억지로 빼내려는 듯 잡힌 손에 힘을 주었다. 아주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몸을 숙여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오래도록 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 딴에는 애정 표현이랍시고 한 짓거리처럼 보이지만, 진득하게 가라앉는 늪처럼 내려다보는 시선이 유달리 섬뜩했다. 아스테리다가 빈손으로 아주라를 밀치듯 손을 뻗자 비로소 아주라는 잡은 손을 놓았다.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오지 마. 미친 개자식아! 아스테리다는 비에 젖은 투구 뒤편으로 소리쳤다.

 문 너머에서 흠칫거리며 회색돌격대에게 길을 내주는 사람 몇이 보였다. 하나같이 가난하고 추레한 몰골이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려 맨땅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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